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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가 우스워 보이냐?

 

2008년 1월 3일 목요일


지난 1주일 동안 술로만 살았다.

이제는 술도 들어가지 않는다.

2007년 연말과 2008년 연초는 이렇게 술 속에 빠져 끝났고 시작했다.

새해가 시작됐다.

내 나이도 마흔 넷이 됐다.

그뿐이다.

더 이상 술도 들어가지 않는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2008년 1월 7일 월요일


새해 첫 월요일이라고 난리다.

멍하게 뉴스를 보다가 짜증나서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동안 나쁜 일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이게 뭐야!

베니어로 칸막이만 쳐진 집에서 시작해 월세와 전세를 전전했다.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집다운 집에서 사는 꿈을 이룬 것이 35살 때 일이다. 차마 내 집을 갖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다. 조그만 아파트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해 왔다.

하지만 지금 다시 반지하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도박을 하지도 않았고, 사기를 치지도 않았고, 도둑질을 하지도 않았고, 투자니 투기니 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별 볼일 없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특별한 재능도 없었던 것이 잘못일까?

한 번쯤 사나이답게 큰 도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 잘못일까?

적당히 살려고만 했던 것이 잘못일까?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자우림 노래를 하루 종일 들었다.


그래 제길 나 이렇게 살았어

보다시피 볼 것 없이 살았어

해놓은 것 없이

가진 것 하나 없이

그럭저럭 되는대로 그런 하루하루


나도 간절하게 바랬던 게 있어

나도 맘을 다해 했던 일이 있어

내 뜻대로 돼준 일은 없어

결국 아무것도 나에게는 쉽지 않아


그래 제길 나 이렇게 살았어

보다시피 볼 것 없이 살았어

믿는 사람 없이

진짜 사랑 한 번 없이

그럭저럭 되는대로 그런 하루하루


나도 간절하게 바랬던 게 있어

나도 맘을 다해 했던 일이 있어

내 뜻대로 돼준 일은 없어

결국 아무것도 나에게는 쉽지 않아


그래 제길 나 이렇게 살았어

보다시피 볼 것 없이 살았어


나도 간절하게 바랬던 게 있어

나도 맘을 다해 했던 일이 있어

내 뜻대로 돼준 일은 없어

결국 아무것도 나에게는 쉽지 않아

 

 

2008년 1월 23일 수요일


 

고등학교 때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노래한다’는 글을 읽고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쯤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었고, 돈 벌러 몰래 일본을 다녀왔다.

다섯 달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공항으로 나간 나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ET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저씨가 나와 엄마를 향해서 환한 웃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그 아저씨가 가까이 와서야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 ET같은 아저씨는 나를 꽉 껴안았고,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온 선물을 풀어놓았다.

일본 커피와 초콜릿, 아놀드 파머 상표가 있는 옷, 코끼리상표가 있는 밥통과 보온병, 마일드 세븐 담배, 그리고 면세점에서 싸게 샀다는 양주 한 병

나는 아버지에게 양주를 따라드렸다.

아버지는 갈빗집에서 일했다는 얘기만 할 뿐 왜 ET가 돼서 돌아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차를 운전하는 기술 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아보러 돌아다녔다.

일본에서 벌어온 돈이 있어서 몇 달은 거뜬하다고 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일자리가 나타나지 않자 아버지는 다시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나도 일자리가 나타나지 않자 거의 매일 술을 먹었고, 엄마를 패기 시작했다.

세 달이 지나도 일자리가 나타나지 않자 밤낮 없이 술을 먹기 시작했다.


학교 행사 때문에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들어오던 날 아버지와 엄마의 고함소리가 집밖으로 들려왔다.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돌아서는 순간 엄마는 맨발로 뛰쳐나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손에 칼을 들고 그 뒤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나는 파출소로 달려가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를 했고, 경찰은 우리 집으로 왔다.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는 자신을 잡아가라고 두 손을 내밀었다.

경찰은 아버지에게 그러지 말라고만 하고 돌아갔고, 나는 밤늦게까지 친구 집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집에 들어왔다.

무섭도록 조용한 집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술을 먹었고, 엄마는 계속 매를 맞았고, 나는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경찰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때 아버지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거다.

사십대 중반에 맞이한 실직은 술을 벗 삼게 하고, 술과 함께 밤낮을 보내게 되면 짐승이 된다.

30년 전 아버지도 그랬고, 지금의 나도 그렇다.

가난과 술은 이렇게 대를 이어 충성하고 있다.

천만다행으로 내 뒤를 이어 가난과 술을 물려받을 자식이 없다.

 

 

2008년 1월 25일 금요일


밤에 술을 먹지 않고는 잠을 자지 못한지가 벌써 1년이다.

나는 분명 일찍 죽을 거다.

오래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요즘 들어 자살에 대한 생각을 자주한다.

내가 이렇게 죽어도 아쉬울 것은 없다.

쌓아놓은 것도 없고 꿈도 없는 내가 앞으로 또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죽어서 슬퍼할 사람도 별로 없다.


단지 내 스스로 목을 조를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엄마가 많이 슬퍼할 거 같아서...

 

 

2008년 2월 7일 목요일


설날이다.

일이 바빠서 고향에 가지 못한다고 전화를 했다.

쌓여있는 술병을 보면서 술을 먹는다.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저녁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시장에서 한 아저씨가 “고등어, 두 마리에 오천 원!”이라고 외친다. 순간 눈이 고등어로 향한다. 푸른 등의 고등어가 나란히 놓여있다. 군침이 돌면서 지갑 속에 얼마가 있나 생각했다. 칠천 원이 있다. 고등어 두 마리를 사고, 무와 대파와 고추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그러면 지갑은 비워진다. 매정하게 눈을 돌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고등어를 생각하면서 지긋지긋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면 참 먹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눈요기만 할 뿐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빚 때문에 자주 싸우는 부모님과 때가 되면 돈 벌러 일본으로 가야 하는 엄마를 알기 때문이었다.


20살이 되면서 집을 나와 서울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간에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지나야했다. 싸구려 자취방은 종종 시장 안쪽에 있기 마련이다. 배는 고픈데 늦은 시간 시장에는 아직 철시를 하지 않은 상인들이 늦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튀김과 오뎅들... 역시 침을 삼키며 자취방으로 돌아와 지긋지긋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너무도 익숙한 삶이 지긋지긋한 삶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면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이 삶을 벋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다시 몇 년이 지나서 내 나이 오십이 됐을 때에도 이 지긋지긋함은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2008년 2월 19일 화요일


왠지 제목이 끌려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이라는 영화를 봤다.

남자들에게 무수히 학대당하고 버림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낙서를 남기고 죽는 마츠코.

무수히 버림받고 상처받은 마츠코에게 또 남자가 찾아오고, 마츠코는 “여기 있어도 지옥, 나가도 지옥”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밖으로 나가 그 남자의 품에 안긴다.

사랑을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츠코는 그 남자에게 맞으면서도 “혼자 있는 것보다 나아”라고 얘기한다.

마츠코는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오면서도 항상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느낌

누군가를 만나서 내 하소연을 할 수 없다는 것

외롭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수시로 메일을 체크하지만 온통 스팸메일뿐이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도 수시로 확인한다.

 

 

2008년 2월 27일 수요일


오래간만에 사람을 만났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얘기를 하면서 술을 먹었다.

사는 게 힘들다고 찡얼대는 소리가 좀 거슬렸지만...

기분은 좋았다.


핸드폰도 오래간만에 울렸다.

어떻게 지내냐는 혜정씨의 안부전화였다.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2008년 3월 10일 월요일


봄도 되고 그래서 기분 전환하려고 머리를 자르러 동네 미용실을 찾았다.

손님이 별로 없는 오후 시간에 미용실에 들어섰더니 손톱 손질을 하던 종업원은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약간 당황해서 “머리 자르려고 그러는데요” 그랬더니 “여기 앉으세요”하면서 자기가 손톱 손질하던 자리를 비워줬다.

“뭐, 이런 놈이 있어”하는 마음이 충분히 느껴질 정도로 성의 없게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자르고 거울을 보니 내가 정말 없어 보이기는 없어 보였다.

옷은 꿰제제 하고, 생긴 것도 별 볼일 없는 중년의 남자였으니까.

내가 내 돈 주고 머리를 깎는데도 없어 보이는 사람은 이렇게 천대받는 것이었다.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2008년 3월 27일 목요일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

돈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어떻게든 늦게 일어나려고 이불 속에서 뒤척여보지만 12시를 넘기지 못한다.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인터넷을 하고...

그래도 2~3시간을 넘기기 힘들다.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하철이다.

신문을 하나 사들고 지하철을 타고 종점여행을 하면 3~4시간은 보낼 수 있다.


신문을 읽는 것이 집중해야 되는 일이 아니지만 떠드는 사람들은 정말 싫다.

내 옆에 앉아서 조는 사람도 싫다.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서 폼 잡는 사람들도 싫다.

다정한 연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온통 싫은 사람들뿐이지만 지하철은 큰 돈 들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지하철에서 괜히 사람에 시달리다가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잘나고 잘생긴 사람들만 나오는 뻔한 내용들이 싫다.

못나고 못생긴 사람들도 서로 아껴주며 살아가는 내용들은 더 싫다.

모두 거짓말이다.


밤이 되면 제일 힘들다.

할 것이 없다.

잠도 오지 않은 밤에 인터넷을 갖고 시간을 때우는 것도 힘들다.

결국 술 밖에 없다.

그렇게 1년을 넘기면서 술만 늘어간다.

이러다가 나는 위암에 걸려서 죽을 지도 모른다.

자살할 용기도 없는데 그렇게라도 죽으면 어때!

새벽이 되어서 술기운에 겨우 잠든다.

 

 

2008년 4월 8일 화요일


집주인이 찾아왔다.

“건물 배관에 문제가 생겨서 공사를 하기로 했어요. 공사비가 아무리 작게 잡아도 200만원이 넘을 거 같은데... 건물주와 세입자들이 반반씩 분담하기로 했으니까 아저씨도 20만원을 분담하셔야 되요.”

20만원이면 내 한 달 생활비의 반에 가까운 돈이다.

“집에 문제가 있으면 집주인이 처리하는 거 아닌가요?”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주의해서 생긴 거는 사용하는 사람들도 일부 책임이 있어요. 법적으로 알아본 거니까 길게 얘기하지 말죠. 세입자 분들 부담을 줄여 드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어요.”

호락호락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렇다 쳐도 가구당 똑 같이 부담하는 것은 불공평하죠. 반지하에 혼자 사는 사람이랑 1층과 2층에 가족들이 같이 사는 사람들이랑 같을 수 있나요?”

집주인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건물 배관에 문제가 있으면 지하가 제일 문제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몇 달 전에 화장실에 물을 틀어놓고 나가서 난리가 난 거 잊었어요?”

“그때 그 일이랑 이번 일이랑은 다른 거잖아요. 그때 사과도 드렸고, 뒤처리도 제가 다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집을 부주의하게 사용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저씨는 주로 집에 계시기 때문에 물 사용도 많지 않아요? 이래저래 따지면 혼자 산다고 봐달라고 할 처지가 아닐 텐데요?”

자존심까지 팍팍 밟아가면서 쏟아내는 집주인에게 더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조만간 돈을 마련해서 주기로 했다.


겨우 이런 집 한 채 갖고 있는 주제에 생색은 다 낸다.

그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짓밟을 때는 확실히 짓밟는다.

 

 

2008년 4월 14일 월요일


집주인에게 20만원을 주고 나니 이번 달 생활이 막막하다.

다음 달 생활비에서 10만원을 당겨쓰게 되면 다음 달까지 힘들어진다.

더 큰 문제는 통장에 200만원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1년 동안 정말 안 쓰면서 버텼는데도 천만 원 가까이 날아갔다.

6월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만,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한다.

두 달 안에 무슨 수를 세울 수 있을까?

전세금을 줄여서 더 이상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나 같은 놈에게 돈을 빌려줄 놈은 세상에 없다.

은행도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사채는 빌려주겠지...

일자리가 한두 달 안에 나올 거 같지도 않다.

어떻게든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 없다.

아, 숨 막힌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2008년 4월 19일 토요일


컴퓨터가 고장 나서 고쳤더니 4만원이 들었다.

돈 들어가는 일은 이렇게 연달아서 생긴다.

다음 달 생활비에서 10만원을 당겼는데도 20만원이 채 안 남았다.

세금들이랑 핸드폰 요금도 내야하는데...

그래도 술 살 돈은 있으니 다행이다.

 

 

2008년 5월 3일 토요일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고야 말았다.


설에도 내려가지 못한 고향집을 찾았다.

모처럼 토요일에 시간이 나서 한 번 찾아왔다고 했다.

사들고 간 고기와 술로 금세 술상이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아들이랑 술 한 잔 해보는구나”라면서 웃음을 지었다.

엄마는 “어디 아픈 데는 없고?”라면서 내 걱정을 하지만 기분은 좋아보였다.

집안일이며 농사짓는 얘기 등을 하면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아버지는 잠자리에 드셨다.

술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서 얼마 드시지 않고 취하셨다.

얘기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많이 늙으셨나보다.


설거지를 도와준다고 부엌에 따라가서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나 조그만 사업 하나 알아보고 있어.”

“회사 잘 다닌다면서... 무슨 사업하려고?”

“아니... 그 동안 돈도 좀 모았고 그래서... 큰 건 아니고 아는 사람이랑 같이 해보려고.”

“요즘 경기도 안 좋다는데 그냥 회사 다니지...”

“위험부담은 없어. 조그만 거니까 회사 다닐 때만큼은 벌 수 있을 거야.”

“우리야 늙어서 뭐 알겠냐.”

“그런데 돈이 좀 모자라거든...”

“얼마나?”

“많지는 않고... 500만 원 정도 더 있으면 될 거 같은데... 물론 이자와 원금은 내가 갚을게. 3년 정도로 해서 대출 받을 수 있을까?”

“아버지한테 한 번 얘기해보자.”

“미안해. 내가 집에 보태주지는 못하고 이런 부탁해서...”

“우리야 살만하니까 너나 걱정해라.”

“나야 뭐... 큰돈은 못 벌어도 혼자 먹고 살만은 해.”

“혼자 사는 게...”


엄마는 말을 잊지 못하고 눈을 닦았고, 나는 담배 피우겠다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2008년 5월 9일 금요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빈둥거리다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날씨도 좋고 그래서 동네공원을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가고 있었다.

유치원 학생들이 단체로 봄나들이를 나왔는지 20명 정도 되는 친구들이 조잘대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의 손을 잡고 조잘대며 걸어가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조금 뒤에서 또 다른 친구들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잖아요.

기쁨의 그 날 위해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나의 친구랍니다.

우리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때로는 모진 바람에 좌절도 하겠지요.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사랑 넘칠 그 날 까지 전진 전진하자.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잖아요.

기쁨의 그 날 위해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나의 친구랍니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 친구들의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마음이 환해져서 잠시 벤치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파랗고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아, 봄이었구나!”


어릴 적 어린이날이라고 부모님 손을 잡고 나들이 가서 김밥을 같이 먹었던 일, 며칠 후 어버이날이라고 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자장면 먹으로 갔던 일, 친구들과 들판에서 숨바꼭질하면서 뛰어놀았던 일들이 생각났다.

순간 마음이 울컥해졌다.

동네 슈퍼에서 소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방 창틈으로 내려오는 햇볕을 바라보면 낮술을 먹었다.

술기운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리더니 멈추질 않았다.


“엄마, 오늘 마음껏 울어도 괜찮지?”

 

 

2008년 5월 18일 일요일


어제 동철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주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렇게 만나서 기분 좋게 술 한 잔 먹으면 됐지 뭘 그렇게 미안해 하냐?”

“일자리는?”

“그저 그래. 거기는 아직 괜찮아?”

“나도 요즘 회사 옮기려고 알아보고 있어요. 형이 나가고 나서부터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지다가 요즘에는 월급도 가끔 늦고...”

“나야 혼자니까 어떻게 버티지만, 너는 애들도 있고 그런데 고민스럽겠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아요? 나도 30대 중반이 되니까 점점 세상 사는 게 힘들다는 걸 실감하네.”

“세상 사는 게 쉬우면 그것도 재미없지 않냐? 어려웠다가 좋아지고 하는 게 사는 거라고 생각해야지...”

“실업자 생활 1년 넘으니까 도가 통했어요?”

“그렇게라도 생각하면서 버티는 거다. 그게 도 통한건가?”


누군가랑 같이 술을 먹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었고, 편하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러는 중에 동철이 연락으로 윤경이까지 합세하면서 분위기는 완전 업됐다.

회사 얘기, 재수 없었던 상사 씹는 얘기, 젊었을 때 얘기, 펀드로 돈 좀 만지겠다는 얘기, 애 키우는 얘기들...

그렇게 많은 얘기들을 하고 완전히 취하도록 술을 먹어본 것이 2년만의 일인 것 같았다.

2차로 노래방에 가서 땀이 뻘뻘 날 정도로 광란의 시간도 보냈다.


서로가 술과 분위기에 취해서 노는 중에 나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갑자기 내가 왜 그랬을까?

동철이가 화장실을 간 사이 술을 먹던 나는 갑자기 윤경이를 껴안아버렸다.

당황한 윤경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나는 윤경의 몸을 더듬었다.

놀란 윤경이는 나를 밀치고 가방과 옷을 들고 뛰쳐나가 버렸고, 잠시 후 동철이가 들어왔다.

나는 동철이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노래방을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소수 한 병을 마시고 완전히 필름이 끊긴 채 잠이 들었고, 오늘 낮이 돼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나쁜 놈이다.

 

 

2008년 5월 20일 화요일


지난 며칠 동안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을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윤경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도 윤경이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동철에게 얘기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나를 믿어줬던 사람들에게 정말 큰 상처를 안겨줬다.

미치겠다.

 

 

2008년 6월 3일 화요일


광우병 소고기 때문에 난리여서 데모 구경을 하기 위해서 시청에 나갔다.

시청 지하철역 출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시청 앞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초와 종이컵을 나눠주는 사람, 피켓을 나눠주는 사람, 유인물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지하철역 입구 주변에 많이 있었고, 나도 그것을 다 받았다.

경찰들 하고 싸우는 것을 구경하려고 왔는데, 무슨 행사장 같았다.

광장에서는 누가 연설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앉거나 서서 그 연설을 듣고 있었다.

초에 불을 붙이지 않고 서 있으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자기가 들고 있던 것을 기울어주면서 불을 붙여줬다.

어떤 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미친 소 먹고 머리에 구멍이 펑펑 뚫려서 죽고 싶지 않아서 나왔습니다. 명박아! 미친 소 너나 먹어!”라고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박수를 쳤다.

어떤 아저씨는 “명박이가 국민을 우습게보면 국민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라고 얘기해서 박수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님, 경제 살릴 생각보다 국민 먼저 살리십시오”라고 얘기해서 또 엄청나게 박수를 받았다.

사회자가 ‘수입고시 철회하라’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같이 외치기도 했다.

중간에 가수가 나와서 노래도 부르기도 하고 정말 재미있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노래하고, 구호도 외치고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서 광장이 가 득 찼다.

집회가 끝나니까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깃발을 들고 조끼를 입고 나온 사람들, 양복 입고 나온 사람들, 애를 목마 태우고 나온 사람들, 교복 입고 나온 학생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나온 사람들, 나 같이 후줄그레한 사람들까지 같이 섞여서 거리로 나갔다.

경찰은 보이지 않고 넓은 도로를 사람들이 가득 매우고 ‘고시철회 전면재협상’ ‘이명박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면서 걸어가니까 정말 신났다.

나도 신이 나서 구호를 같이 외쳤다.

걸어가다가 바람에 촛불이 꺼지니까 옆에 있던 학생이 나에게 불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행진을 해서 광화문으로 가니까 드디어 전경들이 보였다.

닭장차로 길을 완전히 막고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은 계속 구호를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있었고, 앞에 있는 사람들은 닭장차에 낙서도 하고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닭장차 뒤로 전경들이 보이니까 나는 약간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는데, 사람들은 전경들에게 “미친 소 니네들이 먹을 거냐?” “국민을 패는 게 대한민국 경찰의 일이냐?”하면서 막 욕을 했다.

광화문 주변에 사람들이 앉아서 집회를 이어가니까 경찰이 불법집회니까 해산하라고 방송을 했지만, 사람들은 “우~” 소리를 내면서 집회를 계속 했다.

이러다가 경찰들이 나오면 위험하겠다 싶어서 약간 뒤로 가서 앉아 있었는데 경찰들은 닭장차 뒤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끔 방송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다.

12시가 다 돼서 지하철이 끊길 시간이 되니까 사람들이 조금 빠져나가 길래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긴장되기는 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2008년 6월 7일 토요일


어제 또 촛불집회를 나갔는데 정말 대단했다.


어제 저녁 6시에 집을 나와서 시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휴일 저녁이라 막힘없이 달리던 버스는 연세대 근처로 접근하더니 버스기사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해서 버스를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시청으로 갔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시청에 도착해보니 시청 앞 광장은 지난 번 보다 더 사람들로 빽빽했다. “와, 사람들 많다”하고 생각을 하고 무대를 찾고 있었는데, 광장에는 무대가 보이지 않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무대는 시청 앞 대로에 설치돼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서 앉아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줄 몰랐기 때문에 엄청 놀랐다.


깃발을 들고 단체로 집회를 참석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가족들이 함께 나들이 나온 것처럼 참석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무대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서 집회에 집중하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광화문 주변과 경복궁 주변 등에서 “청와대로 가자”며 싸우고 있다고 했다.

이날 집회는 자유발언보다는 잘 나가는 사람들의 얘기가 많아서 지난 번 집회보다 재미없었지만 분위기는 정말 즐거웠다. 한 여자가 구수한 입담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이런 저런 점들을 얘기하고 “더 할 얘기가 많지만 이명박 대통령 용량이 2mb밖에 안됩니다. 다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은 엄청난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주변은 완전 축제였다. 여학생들이 ‘배후세력이 누구냐고? 내가 허 배후다’라고 쓴 피켓을 만들어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악기들을 들고 나와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온 사람 중에는 뒤에 앉아서 싸온 음식을 먹으면서 집회를 지켜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유인물들도 나눠주기에 그것을 받아서 열심히 읽기도 했다.


8시 30분쯤 집회를 마치자 행진이 시작됐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행진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르지만, 나는 남대문방향으로 사람들과 함께 걸어갔다. 집회를 마치고 시작된 행진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께 했고, 여기저기서 구호들을 외치면서 재미있게 행진을 했다. 누구 하나가 ‘이병박은 물러나라’라고 외치면 그 주변부터 따라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외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구호 중에 ‘쥐박이’ ‘쥐새끼’라는 표현이 유독 많았다. 남대문을 지날 때는 ‘이명박이 불때웠다’라고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구호를 외치는 것이 재미있어서 나도 ‘명박아 정신차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내 구호를 따라서 외쳐줬다. 조금 쪽팔리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같이 외쳐주니까 기분이 좋았다.


1시간 넘게 행진해서 사람들은 안국동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향했고, 경복궁 근처에 가니까 닭장차가 막아서서 더 가길 못했다. 사람들은 길에 그대로 앉았고, 여러 사람들이 재미있는 구호를 만들어서 여기저기에서 외쳤다. 그러다가 누군가 일어나서 ‘함성을 지릅시다’라고 하면 같이 큰 소리로 함성을 질렀고,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함께 ‘아침이슬’ ‘님을 위한 행진곡’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1시간 정도 지나서 11시가 넘어가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우리가 여기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됩니다. 저는 지난 31일 밤부터 1일 새벽까지 싸웠습니다. 그날 맞은 게 억울해서라도 싸워야 합니다”라며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폭력”을 외치거나 “자제합시다”하고 말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계속 이러고만 있을 겁니까? 경찰차를 끌어냅시다”라고 하니까 또 다른 사람이 “우리가 여기서 폭력을 쓰면 역공을 당합니다”면서 반대를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우리가 지금 폭력을 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청와대로 가기 위해서 저 차를 끌어내려는 것 뿐입니다”며 서로 다른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닭장차를 끌어내기 위한 밧줄이 나왔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앞으로가서 “하지말라”고 하면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차를 끌어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6월 10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폭력을 써서는 안 됩니다”고 얘기하고, 차를 끌어내자는 사람들은 “여기서 그냥 돌아가면 이명박에게 우리 뜻을 어떻게 전합니까? 평화시위 할 거면 혼자 청와대 앞에 가서 1인 시위하세요”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논쟁이 길어지면서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막차 시간이 다가오니까 가족끼리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 하던 중에 ‘아고라’라는 깃발을 앞세운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 나오면서 분위기는 닭장차를 끌어내는 쪽으로 바뀌었다. 결국 반대하던 사람들이 물러나면서 버스를 끌기 위한 준비가 됐다.

그러다가 ‘아고라’ 깃발 주변에서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어디서 뒤쪽 사람들을 광화문쪽으로 빼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뒤를 보니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고, 천 명 정도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해서 버스를 끌어내는 것은 포기했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광화문쪽으로 걸어갔다.


광화문 쪽으로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각 지역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미국에서 왔다는 한 사람은 미국의 현실을 얘기하면서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대구교대에서 올라온 학생은 “쥐새끼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줬던 한나라당의 아성인 대구에서 동맹휴업을 결의하고 올라왔습니다”고 해 아주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성을 받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는 ‘대전지역 시민참가단’이라는 깃발도 보였다.


자정이 넘어서 서대문 방향으로 향해보니 청와대로 향하려는 참가자들이 경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새벽 2시가 넘어서 다시 광화문쪽으로 가는데 새문안교회 쯤에서 사람들이 닭장차 하나를 밧줄로 끌어내고 있었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오랜 시간 동안 밧줄을 잡아당겨서 두 대의 버스를 끌어내자 위쪽에 있던 전경들이 버스 앞쪽으로 나오면서 몸싸움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전혀 밀리지 않으면서 또 한 대의 버스를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 밀고가기 힘들어서 경찰들 하고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 새벽 4시가 넘어가니까 피곤한 사람들은 뒤쪽 인도나 문이 열려 있는 빌딩 로비에 들어가서 잠시 앉거나 누워있기도 했다.


그때 뒤쪽에서 사람들이 몰려가기 시작했고, 그를 따라가 보니 골목으로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안에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분들만 들어가세요”라고 다급하게 얘기를 했고,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을 돌아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은 좁은 주차장 뒤쪽이라 3~4백이 들어가서 전경과 대치하니까 꽉 찼고, 바로 옆 골목에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좁은 통로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었다. 머리가 쭈삣쭈삣 할 정도로 진강감이 돌았다. 사람들은 전경들을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고, 이 상황을 여러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었다.

좁은 주차장 뒤편에서 경찰과의 대치는 계속됐다가 5시쯤에 지휘관이 강제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앞쪽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사람들이 주저 없이 몸으로 경찰들을 막고 “막을 수 있어요. 뒤로 붙어주세요”라며 뒤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이에 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세 방향으로 들어오려는 전경들을 막아서면서 몸싸움이 진행됐다.

그때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람들의 열기가 워낙 뜨거워서 중간에 같이 끼어있던 나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그 좁은 곳에서 시커먼 전경들과 싸운다는 것이 무섭기는 했지만,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몸으로 엉켜있으니까 두려움이 없어졌다.

몇 십 분간 그렇게 몸싸움을 하다가 결국 강제해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경찰이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부터는 완전 축제였다.

경찰만 보면 갖고 놀려고 했던 사람들은 몸싸움을 하면서도 “기자분들, 저 책임자 얼굴 좀 제대로 찍어주세요. 제가 내일 인터넷에 올릴께요”라며 농담을 쉼 없이 해댔고, 뒤에서 껌을 씹으면서 지휘하던 전경에게는 “껌 뱄어!”를 계속 외쳐서 결국 껌을 뱄게 만들었다. 그리고 경찰 책임자가 핸드마이크로 얘기를 하려고 하자 “노래해!”라고 외치기도 하고, 뒤에서 누가 “전국~노래자랑!”이라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일제히 “빰빠바바밤”하면서 전국노래자랑 시그널 송을 부르고, 이어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하나 둘 셋 넷”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책임자를 무안하게 만들어버렸다. 또 전경들이 교체 되면서 자기들 특유의 기합소리를 내지르자 참가자들도 “얍! 얍! 얍!”하면서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고, 이에 전경들이 다시 기합소리를 내지르자 한 사람이 영화에서처럼 ‘스파~르타!’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워~, 워~, 워~”라고 응답을 해 전경들의 기합을 완전히 눌러버렸다.


그리고 주변에는 예비군복을 입을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싸움에 함께 했고, ‘촛불 진료단’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다친 사람들을 치료 해줬다. 몸싸움 끝에 전경들이 물러나자 뒤에서 오이와 생수와 초코파이가 수없이 넘겨졌고, 사람들은 제일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넘겼다. 심지어 전경들이 뒤로 물러나자 전경들에게도 아낌없이 생수를 넘겨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몸싸움을 하다가 6시가 넘어서 “뒤에서부터 빠집시다”라고 해서 나와 보니 날은 훤하게 밝았다. 광화문 사거리에는 아직도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서 쉬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일이어서 몸은 피곤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도 또 가봐야겠다.

 

 

2008년 6월 8일 일요일


어제 밤을 세고 아침에 늦게 잠을 잤는데 3시간 만에 잠을 깼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피곤해서 조금 더 잠을 자다가 늦게 집에서 출발했다.

시청에 도착했더니 집회는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어제보다 모인 사람은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그래도 워낙 많아서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가족끼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뒤쪽에서는 역시 여러 가지 공연과 행사들이 열리고 있어서 집회보다는 그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더 있었다.


8시 30분쯤 되니까 행진이 시작됐다. 전체가 남대문을 돌아서 종각 쪽으로 움직였다. 끝이 보이지 않은 긴 행렬이 한 시간 넘게 진행됐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1시간 넘게 계속 ‘이명박은 퇴진하라’만을 외치면서 걸었다. 그렇게 1시간 넘게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걸어가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정한 이웃처럼 느껴졌다.


종각에서부터는 광화문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안국동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가고 있어서 나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광화문에 오자 대부분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집회를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서대문 방향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서대문을 지나서 독립문까지 이르자 깃발을 들고 온 많은 사람들이 닭장차 앞으로 몰려갔다. 경찰들이 오르막 위쪽에서 버스로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까 사람들이 물러나서 도로로 나온 다음 급히 좁은 골목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면서 가보니 점점 좁은 주택가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거의 달동네 수준의 오르막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그 동네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위를 넘어 가려고 시도를 했나보다. 하지만 오르막을 거의 다 오른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경찰차가 막고 있어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너무 의외였다. 명박이가 쫄기는 단단히 쫄았나보다.


광화문으로 다시 왔을 때는 자정이 됐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매우고 집회와 다양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 시간까지 가족단위로 나온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무대 오른편으로 사람들이 악기를 두드리고 핸드마이크로 랩을 부르면서 즉석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이명박과 언론 등을 비꼬는 내용이 재미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반응도 아주 폭발적이었다.

그 와중에 청와대 방향으로 가로막혀 있는 닭장차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흔들기도 하면서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앞에서 한 사람이 안국동 방향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서 안국동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길을 막고 있는 닭장차 한 대의 철망이 뜯겨져 있고, 유리창이 부서진 상태에서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청와대 가게 해줘라. 쥐 한 마리만 잡고 올께”라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하면서 경찰과 맞서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안티 이명박’이라는 깃발을 든 사람들을 따라 200명 정도가 더 모였다. 이 사람들이 도착하자 앞으로 다가가서 “경찰에게 경고한다. 시민의 출입권과 저항권을 계속 방해할 경우 분사기를 발사하겠다”며 경찰의 경고방송 멘트를 흉내 내서 3번을 경고하더니 그대로 분사기를 발사해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닭장차의 철망을 뜯어내고 손망치로 유리창을 부수기도 하고 조금 살벌했다.

그러니까 경찰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고,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비폭력”을 외치면서 그들을 말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폭력이라고 그래요? 전경들한테 맞은 거에 비하면 폭력이 아니에요. 비폭력을 외칠 거면 광화문에 가세요”라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은 “우리끼리 싸우지 말아요”라고 하면서 말리려고도 하는 등 아주 어수선해졌다. 그렇게 어수선한 상황이 계속되니까 사람들은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고, 나도 다시 광화문으로 향했다.


새벽 1시 30분 쯤 광화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많이 격렬해져 있었다. 몇 대의 버스는 감싸고 있던 철 구조물이 뜯겨져 있었고, 창문이 부서져 있는 버스도 있었다. 전경들은 소화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무수히 소화기가 뿌려졌지만 사람들은 꼼짝하지 않고 있었고, 전경들을 향해 물병 등을 던지기도 했다. 전경들도 버스 위에서 아래로 물병을 다시 집어던지는 등 분위기는 험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뒤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거나 길 위에 드러누워 잠을 자기도 했고, 한쪽에서는 대형 멀티비전으로 앞쪽에서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분이 좀 야릇했다.


그런다가 버스를 끌어내기 위해서 버스에 줄을 묶기 시작했고, 전경들은 소화기를 마구 뿌려대면서 앞쪽에서 수시로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버스에 줄을 묶고 사람들이 달라붙어 끌어당겼지만 버스 위와 안쪽에 전경들이 타고 있고, 버스 뒤쪽으로 와이어로 지탱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좀처럼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간에 달라붙어서 밧줄을 당기고 있으니까 누가 장갑을 주기도 하고, 쉴 때는 여기저기서 물도 나눠줬다. 구경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고, “나도 이렇게 싸운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깨에 약간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소화기를 뒤집어쓰면서 시도를 하다가 버스 위쪽에 전경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가림막이 제거되자 전경들은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쇠파이프를 들고 전경 버스 위로 올라가 전경과 싸움을 하다가 전경 여러 명에게 맞으면서 끌려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병 등을 집어던지면서 마구 욕을 하고 난리가 났다.


일단 전경들이 내려간 버스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4시간 만에 끌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고, 경찰들도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뒤 이어 다른 버스에도 줄을 연결됐고 다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소화기를 마구 뿌려대던 경찰들도 체포조를 앞으로 내보내면서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줄다리기를 계속했고, 1시간 정도 더 그렇게 밧줄을 당기고 있다가 새벽 5시쯤 서대문 방향으로부터 진압을 위해 전경들이 다가온다고 했다. 분위기는 심하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시청 쪽으로 향하려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서대문 방향으로 향해 전경들과 맞서고, 청와대 방면 전경버스 쪽에서도 전경들이 앞으로 나오는 등 잠시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졌다. 서대문 방향으로 달려오는 전경들을 막기 위해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 손을 맞잡고 저지선을 치기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대문 방향과 청와대 방향으로 다가오는 전경들을 주시하면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서있었다.

얼마 후 전경들이 무섭게 달려오면서 사람들을 시청방향으로 몰아붙였고, 광화문 사거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전경들과 계속 맞서면서 조금씩 시청 쪽으로 밀려났다.


시청까지 오자 전경들은 도로 양쪽으로 늘어서서 사람들을 인도로 밀어붙였다. 시청 광장까지 몰린 5백 명 정도의 사람들은 그 뒤쪽 도로로 다시 모여 전경과 맞섰다. 그러다가 전경들이 광화문 쪽으로 빠지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다시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 입구에서 전경과 다시 마주쳤고, 전경들은 또 다시 사람들을 시청 쪽으로 몰아붙였다.

시청으로 몰린 사람들은 다시 시청 앞에서 전경들과 맞섰다. 밀리면 물러나서 다시 모이는 것을 반복하자 자신을 얻은 사람들은 아예 거리에 앉아버렸다. 그리고 즉석에서 몇몇 사람이 나와서 여러 가지 구호를 외치기도 하면서 아주 흥겨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조금 지나서 전경들이 뒤로 물러나니까 사람들은 “가지 마” “놀아줘”를 외치면서 일어서서 전경들을 따라갔고, 얼마 가지 앉아서 다시 전경들과 마주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버렸다. 이러던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트럼펫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트럼펫 연주에 맞춰서 ‘개똥벌레’와 ‘아리랑’을 합장하기도 했다.

조금 더 있으니까 여기저기에서 음료수와 초코파이가 나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약봉지가 나눠지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고, 나눠주는 사람들도 바쁘게 한약봉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한쪽에서 “전경들도 나눠줘라”라고 외치니까 한 사람이 일어나서 한약봉지를 들오나가 직접 전경에게 먹여주자 엄청난 박수와 환호성이 일어났다. 뒤를 이어 “먹을 사람 손 들어라” “먹었으면 노래해라”라고 외치기도 하면서 또 흥겨운 잔치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전경들이 완전히 물러가려고 하니까 사람들은 또 “가지 마” “놀아줘”를 외치며 따라 일어났다. 진압하는 것을 포기한 전경들은 완전히 뒤로 물러났고, 시위대들은 도로 위에 계속 앉아 있다가 아침 8시가 되면서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벌써 11시가 다 됐다. 이제 자야겠다.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오늘 촛불집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많이들 얘기해서 잔득 기대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시청 지하철역 출구에서부터 엄청난 사람들이 밀려 있었는데, 밖으로 나와 보니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청 광장은 물론이고 대로에도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얼마나 많을까 알아보려고 시청에서 조금씩 움직여서 광화문까지 가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저녁 8시가 돼 가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다!


오늘은 몇몇 사람들에게 촛불집회 가자고 얘기도 하고, 집에서 피켓을 만들어서 들고 갔다. 나름대로 종이를 붙여서 ‘쥐박아, 내가 우스워 보이냐?’라고 만들어서 들고 나갔더니 사람들이 내 피켓을 봐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가와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도 인터넷에 나올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어깨가 조금 으쓱해졌다.


하지만 집회는 재미가 없었다.

오늘은 운동권 대표들만 마이크를 잡아서 얘기들도 재미없었고,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공연이나 행사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집회를 끝내고 거리행진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남대문을 돌아 종각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행진을 했지만 다른 때처럼 신나지도 않았다. 민주노총 간부들은 전부 옷을 맞춰 입고 줄을 맞춰 건고 있었는데, 앞에 사람들만 구호를 외치고 뒤에는 잡담을 하고 있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그곳에 만들어진 무대를 향해 앉기 시작했고, 무대에서는 여러 가지 공연과 얘기들이 이어졌다. 청와대 방향으로는 오늘은 콘테이너가 쌓여져 있고, 경찰들은 그 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콘테이너에 사람들이 스티커도 붙이고, 낙서도 하고 그랬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너무 재미없이 집회가 되고 있어서 조금 짜증났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한 번 제대로 해야 명박이가 잘못했다고 사과할 텐데... 그렇게 광화문에서 두리번거리다가 11시가 넘어서 그냥 와버렸다.


동네에 와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섭섭해서 혼자 노래방에 갔다.

신나게 1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시원했다.

마지막에는 ‘오늘도 참는다’를 세 번 부르고 나왔다.


세월의 풍파 속에 길들여진 나의 인생

화나도 참는다. 슬퍼도 참는다. 인생은 그런 거야

비겁하다 비웃지마. 비정하다 욕하지마

내게도 한때는 용감했던 세월이 있었다

거칠은 들판 길을 달리는 한 마리 표범처럼 거리를 내달리던 겁 없던 나의 청춘


아무리 애타게 붙잡아도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새 현실에 묻혀버린 청춘에 기억

화나도 참아야해. 슬퍼도 참아야해.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잖아

오늘도 내가 참는다


불속에 뛰어드는 겁 없는 한 마리 나방처럼 젊음을 불사르던 겁 없던 나의 청춘

아무리 애타게 붙잡아도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새 현실에 묻혀버린 청춘에 기억


화나도 참아야해. 슬퍼도 참아야해.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잖아

하지만 화나도 참아야해. 슬퍼도 참아야해

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잖아

오늘도 내가 참는다

 

 

2008년 6월 18일 수요일


6월 10일 엄청난 사람들이 모인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확 줄었다. 시청에서 집회를 하면 KBS나 MBC로 가기도 하고, 문화관광부가 있는 계동으로 가기도 하고 그런다. 대책위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촛불집회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짜증난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은 얼마나 잘하는지...


촛불집회 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업자라고 누가 얘기했다고 한다.

완전 열 받는다.

실업자들은 촛불집회 나가면 안 되나?

자기들이 정치를 똑바로 했으면 내가 이런 빌어먹을 실업자로 1년 넘게 보냈겠어?

경제를 살리겠다고 말만 하면서 실업자들을 범죄자 취급해도 되는 거야?

그 얘기 듣고 더 열심히 촛불집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촛불집회 나가자고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같이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혼자 나와도 어색하거나 외톨이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초에 불을 붙여주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여준다.

깔고 앉을 것은 나눠주기도 하고, 내 옆에 있는 쓰레기를 치워주기도 한다.

담배가 없으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빌려 필 수 있다.

촛불집회 소식을 몇몇 사람들에게 메일로 알려줬더니 혜정씨가 ‘파이팅’이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2008년 6월 22일 화요일


어제는 오래간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줄어서 얼마나 모일까 걱정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이니까 신이 났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민주노총 위원장도 나와서 “민주노총은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했고, ‘촛불소녀’들은 “낮부터 여기저기 다니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촛불소녀들도 여러분들과 같이 싸우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얘기해서 많은 박수와 환호성이 질러졌다.


집회를 하다가 사회자가 “전경버스를 넘을 토성을 쌓기 위해 모래를 싣고 오던 차가 서울역 방향에서 경찰에 의해 막혀 있다고 합니다. 남자분 천 명만 나와 주십시오”라고 얘기를 했다. 그리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서울역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많았다.

남대문에 이르렀을 때 서울역 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울역 방향에서 경찰을 뚫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상황을 알아보려했지만 대책위 사람이 없어서 잠시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전화를 하면서 여기저기 상황을 확인해보니 트럭이 한 대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역으로 다시 달려갔다.

가는 도중에 YTN 건물 앞을 지나는데 YTN노조가 이명박 측근이 사장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농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YTN 힘내세요”를 힘차게 외치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YTN이 취재하고 있으면 취재를 방해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이명박에 맞서서 같이 싸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 편이 된 것이다.

서울역을 지나 남영동 근처에 다다르니까 모래를 실은 트럭이 경찰차에 막혀 있었다. 순식간에 경찰차를 둘러싼 사람들은 트럭 열쇠를 요구했지만 열쇠는 다른 곳으로 빼돌려진 상태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각종 박스와 비닐봉투, 심지어는 쓰레기봉투까지 사와서 일일이 모래를 퍼 담기 시작했다. 나도 뭔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손으로 비닐봉투에 모래를 담았다. 그렇게 각자가 모래를 담은 봉투를 들고 다시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모래를 들고 온 우리가 오자 사람들은 가운데로 길을 열어줬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우리는 두 줄로 서서 앞으로 모래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쭈삣쭈삣해졌다. 중간에 비가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토성 쌓는 일을 계속했고, 얼마 있으니까 사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토성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각종 깃발들이 토성을 통해 전경 버스 위로 올라가면서 난리가 났다.


닭장차 위로 올라가서 깃발을 휘날리다가 조금 지나서 밧줄들이 나타나서 버스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경찰이 버스 안에서 소화기를 뿌리고, 워낙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좀처럼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열심히 밧줄을 당겼다. 그러다가 몇 번 밧줄이 끊어지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끊어진 밧줄이 튕기면서 손을 다쳤다. 손이 얼얼해서 옆에 나가 있으니까 ‘촛불 진료단’이 와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줬다. 그리고는 “만약에 파상풍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나중에 집에 가서 소독약으로 다시 한 번 소독하세요”라고 상냥하게 설명도 해줬다. 너무 고마웠다.

새벽을 넘기면서 몇 시간 동안 줄다리기를 하다가 버스 한 대가 끌려나오니까 사람들은 엄청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광화문 사거리 한복판으로 끌려나온 버스에는 전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버스를 에워싸고 전경들을 설득해서 무장해제를 한 채 내리게 한 후 돌려보냈다.


밤새도록 버스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한 대를 끌어냈을 뿐 좀처럼 버스를 끌어내지 못했다. 경찰이 소화기를 마구 뿌려대기도 해서 크고 작은 부상자들이 나타났다. 이날은 그 전처럼 뒤에서 술을 먹는 사람들이 없이 모두가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중간에 대책위 방송차에서 “밧줄을 회수합니다”는 말이 나와서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싸움은 날이 밝을 때까지 그치질 않았다.

새벽 5시가 넘어서 사람들이 좀 지치기 시작할 때 전경들이 버스 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좁은 차 사이로 나오려는 전경들을 몸으로 막아서면서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그 순간 빗발이 굵어지더니 장대비가 내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전경들을 막고 있었다. 밤새도록 지친 상태에서 비를 계속 맞아 춥기까지 했는데, 수십 명이 서로의 몸을 붙이면서 전경을 막아서고 있으니까 서로 체온이 느껴져서 오히려 후끈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같이 몸을 맞대고 있는 그 순간은 정말 감동이었다.


갑자기 뒤쪽 방송차에서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흥겹게 변했다. 밤새 힘겹게 싸우며 경찰의 진압시도를 막아냈다는 승리감 속에 사람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더니 대책위 상황실장이라는 사람이 “방송차를 돌려줘야 합니다. 이 분위기를 이어서 남대문으로 해서 다시 시청으로 대동놀이를 하면서 행진합시다”라고 얘기했다. 순간 얼떨떨했는데, 상황실장이 “동의하십니까?”라고 물어보니까 방송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하고 대답을 했고, 막바로 “다수의 시민들의 동의하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하고는 차를 돌려 시청 쪽으로 행진을 해버렸다.

방송차를 주변으로 광화문 사거리 일대에 있던 사람들은 노랫소리에 맞춰 흥겹게 행진을 시작했고, 광화문 사거리 안쪽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람들은 반으로 나뉘어져 버렸다.

여기저기에서 대책위를 욕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책위와 상관없이 두 시간을 더 경찰과 대치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경찰들이 나타나서 남아있는 사람들을 밀어냈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밀리기도 하고, 또 일부는 광화문 앞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는 등 어수선해졌다.

그렇게 다시 1시간 정도 어수선하게 있다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버려서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시청으로 향했다. 엄청 화가 난 사람들은 “대책위 천막으로 갑시다” “대책위 놈들한테 시민의 뜻을 제대로 알려줍시다”라고 하면서 대책위 천막으로 갔다. 사람들은 대책위 천막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현수막을 뜯어내고, 탁자를 걷어차면서 아주 강하게 항의했다. 대책위 천막에 실무자 몇 명과 자원봉사자들만 있었기 때문에 항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음 주가 되면 정부가 고시를 할 테고 그러면 싸움이 끝난다. 지금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때 막아내야 한다” “비속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다. 그런데 대책위가 하는 짓이 뭐냐?” “촛불 민심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명박만이 아니라 대책위 사람들도 싹 갈아 벌어야 돼!”라는 말들을 쏟아냈다. 나도 “앞에서 이렇게 다치면서 싸우는데, 사람들을 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면서 붕대 감은 손을 보여주면서 한마디 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항의를 계속 하다가 11시가 다 되니까 너무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2008년 7월 3일 목요일


어제 명박이가 결국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대한 장관고시를 강행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인터넷을 보니까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오늘은 제대로 한 판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단단히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시청 앞으로 가니까 사람들이 벌써 거리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사회자도 “오늘은 제대로 투쟁하는 날입니다. 집회는 짧게 하고 투쟁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몇몇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회를 끝내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에는 역시 닭장차가 막아서고 있었고,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방송차에서는 연설만을 계속하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방송차 주변으로 가서 “지금 뭐하는 거냐? 싸울 거냐 말거냐?”라고 하면서 거세게 항의하니까 대책위 사람이 “지금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얘기했지만, 사람들은 “방송 집어 치워라. 싸울 생각 없으면 그냥 물러나라. 우리가 싸우겠다”라면서 더 강하게 항의했다.


그렇게 항의가 계속되다가 서대문 쪽으로 사람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흥국생명 근처에 이른 사람들은 닭장차가 있는 곳을 향해서 마구 달려갔다. 골목 안이 닭장차로 막혀있자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 옆 공사장으로 뛰어 들기도 하고, 닭장차 옆에 있는 허름한 벽을 허물기 위해 달려들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이 힘을 보아서 조그만 벽이 허물어지니까 그 뒤로 시커먼 전경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겨우 2명 정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니까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워낙 좁은 공간이라서 전경들도 위협만하고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잠시 주춤거렸다. 그때 제일 앞에 있던 사람 몇몇이 주위에 있던 각목을 들고 전경과 맞서기 시작했고, 몇 명이 더 그 뒤로 따라갔다. 나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뒤를 따라갔고, 이어서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면서 전경과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니까 제일 앞에 있던 전경과 시위대가 넘어졌고, 나도 같이 넘어져서 깔리기 시작했다. 앞에는 전경들이 시커멓게 있고, 뒤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넘어오고,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카메라가 수 없이 터져서 눈은 부시고... 정말 무서웠다. 이렇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전경이 조금 물러나면서 넘어졌던 사람들이 일어났고, 뒤로 계속 밀려드는 사람들의 힘으로 전경들을 조금씩 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뒤엉켜 있는데 내 바로 앞에 있던 전경이 나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 놈이 어디다 욕을 해!”라고 하니까 그 뒤에 있던 놈이 내 멱살을 잡아끌었고, 나는 잡혀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옷이 찢어졌고 안경이 떨어졌다. 워낙 빽빽한 상태여서 잡혀가지는 않았지만 안경이 없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계속 밀려드니까 한쪽 구석으로 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곳을 통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함께 그 틈으로 빠져 나오니까 한쪽 골목 쪽으로 약간 여유가 있어서 뒤로 가서 잠시 쉬었다.

여기저기에서 전경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워낙 좁은 골목이라서 사람들이 나뉘어져 있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하다보니까 점점 사람들은 줄어들었고, 전경들은 더 구석 쪽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건너편에서는 계속 싸움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경들 뒤편을 한참 돌아서 다시 광화문으로 와보니 그곳에서도 닭장차를 끌어내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싸우는 사람들에게 나줘 줄 물이 필요합니다.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모자를 들고 다니고 있었다. 주머니에 있던 지폐와 동전을 다 털어서 모자에 넣었다.

다시 흥국생명 근처로 와보니 사람들이 밧줄로 닭장차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앞으로 가지는 못한 채 뒤쪽에서 줄다리기를 같이 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하다가 드디어 버스 한 대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신나서 환호성을 마구 질렀다. 몇 번 더 줄을 잡아당겼더니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도로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 전경이 타고 있어서 나오라고 해서 돌려보내고, 한 사람이 버스로 들어가서 버스를 도로 한쪽으로 몰고 갔다.

경찰은 소화기와 물대포를 계속 쏘아대고 있었고, 사람들은 비옷을 입은 채 물을 그대로 맞으면서 또 다른 버스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때 한쪽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봤더니 어떤 양복 입은 사람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버스를 몰고 나올 때 그 사람이 어디엔가 “시위대가 경찰버스를 탈취했다”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분을 확인하자고 했지만 그 사람은 대답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잠시 후 변호사라는 사람이 와서 사람들에게 앉아달라고 얘기를 하고, 그 사람과 얘기를 했다. 몇 번 얘기를 하더니 그 변호사가 “이 분은 조선일보 기자라고 합니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신분증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조선일보에서 얘기하는 빨갱이인지도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신분증을 보여주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신분증은 보여줄 수 없다면서 팔짱을 낀 채 그대로 버텼다. 뒤에서 누가 “야, 씨발, 팔짱 풀어!”라고 얘기를 했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니까 변호사가 그 사람을 말리면서 “여러분 진정해주십시오. 우리는 강제로 이 분의 신분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얘기하고는 다시 그 사람에게 “저에게라도 신분증을 보여줄 수 없겠습니까?”라고 얘기했다.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팔짱을 낀 채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다가 사람들이 계속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변호사에게 신분증을 보여줬다.

신분증을 확인한 변호사가 “이 분은 조선일보 기자가 맞습니다. 이제 신분을 확인했으니까 이 분을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잠시 만요. 내일 인터넷에 올리게 사진 찍어서 돌려보내요”라고 얘기를 했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고 나서야 조선일보 기자는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줄다리기를 해서 버스 한 대가 더 끌려 내려왔다. 그러니까 뒤쪽에서 경찰이 물대포를 앞세워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사람들은 도로에 모이기 시작했고, 경찰은 물대포를 계속 쏘면서 사람들을 밀어붙였다. 경찰들이 정말 무섭게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시꺼멓게 달려들었고, 앞에서 잡히는 사람이 있으면 인정사정없이 잡아끌면서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재빨리 도망쳤다.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광화문 쪽으로 밀려났고,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다치기도 했다. 그렇게 광화문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인 경찰은 다시 시청 쪽으로 사람들을 더 밀어붙였다.

그때 “주위에 손가락이 있는지 찾아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경찰에게 손가락이 잘렸다는 것이었다. 경찰들도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서 있는 주변을 살피면서 손가락을 찾았다. 안경이 없어서 잘 보이지 않는 나는 혹시나 실수로 손가락을 밟지 않으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손가락을 찾았지만 손가락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경찰은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대로 거리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몇 시간 동안 거칠게 싸웠던 사람들은 지쳐서 그대로 누워있기도 하고, 군데군데에서는 물을 맞아서 추운 몸을 녹이기 위해서 종이나 박스로 불을 피우기도 했다. 여러 가지 먹을거리와 음료수가 중간 중간에서 나눠져서 그것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날이 밝아왔다.


많이 지치고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래서 첫 지하철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몸이 결리고 무거워서 공원 쪽으로 조금 돌아서 오고 있었다. 아침 7식쯤 된 시간에 공원에는 아침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체조를 하고 있었다.

순간 기분이 좀 나빴다. 누구는 국민 전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밤새도록 싸우고 왔는데, 저 사람들은 자기들 건강만 지키려고 저러고 있다니... 그때 체조를 하는 사람 중에 주인 아주머지가 보였다. 툭 튀어나온 뱃살로 열심히 허리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정말 우스웠다. 괜히 길가에 침을 뱉고는 공원을 내려왔다.

 

 

2008년 7월 5일 토요일


낮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비가 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밀어붙였고, 사람들이 경찰들에게 맞아서 많이 다쳤기 때문에 오늘은 제대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청으로 갔다. 다시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저녁 7시가 넘으니까 끝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제일 많이 모였던 6월 10일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였다. 두 시간 동안 집회가 하고, 짧게 행진을 하고는 다시 시청 앞에서 문화제를 했다. 그것이 다였다.

경찰은 평소와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까지 내려와서 닭장차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비폭력” “평화”를 외치면서 사람들을 훈계했다. 어느 단체에서 나눠준 유인물을 봤더니 “폭력으로 시민들이 참여가 떨어집니다”라면서 거짓말을 주장하기도 했다. 종교계와 YMCA 같은 단체는 평화감시단을 만들고 나와서 우리를 감시했다.

정말 너무한다 싶었다. 운동권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

 

 

2008년 7월 8일 화요일


이번 주부터 대책위 집회는 주말에만 한다고 한다. 화가 났지만 그래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인터넷을 살펴보니까 집회가 여의도 MBC 앞에서 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을 했다.

시청으로 갈까? 여의도로 갈까?

시청은 경찰이 막고 있고, 대책위도 포기했는데 집회가 가능할까?

이런 상황에서 시청으로 간들 사람이 제대로 모일까?

시청 주변에서 그냥 두리번거리다가 오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청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시청에서 촛불이 꺼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사람들이 시청으로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저녁 7시가 넘으면 시청광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고 해서 좀 일찍 출발했다.

저녁 6시 40분쯤 시청에 도착해보니까 시청 주변은 닭장차로 둘러싸여있었다.

다행히 사람들의 출입은 막지 않았지만,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서성거리거나 바닥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촛불교회’라는 현수막과 함께 몇 사람이 있었다.

“촛불집회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을 하고 시간을 기다렸다.

저녁 7시가 되자 교회 관계자 한 분이 마이크를 잡더니 “오늘 집회는 여의도 MBC 앞에서 합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현수막을 걷어버렸다.

너무 황당해서 그 사람에게 “시청에 촛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단, 5분만이라도 촛불을 들다가 여의도로 갔으면 합니다”하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시청에서 촛불을 들자는 제안이 있습니다. 촛불은 여러분의 자발적 의지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촛불을 드실 분들은 드셔도 됩니다”라고 얘기하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황당한 것을 넘어서 화가 났다.

주위에 사람들은 듬성듬성 앉아 있었고, 10분쯤 지나니까 경찰마저 철수해버렸다.

너무 화가 나서 “나 혼자라도 촛불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편의점에 가서 양초를 사고, 오는 길에 길가에 버려진 종이컵을 주워서 왔다.

그 사이에 대여섯 분이 촛불을 들고 작은 무리를 지어 앉아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촛불집회가 시작된 것이다.


나이 칠십은 넘어 보이는 분이 나와서 사회를 보기 시작했고, 듬성듬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사람들은 50명을 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 축에 속할 정도로 의외로 나이가 드신 분들이 많았고, 나처럼 꾀죄죄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를 보시는 분은 과거에 재야활동 경험이 있는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다. 나이가 많으셔서 목소리가 작았지만 사람들은 그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회 보시는 분이 너무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자유발언 시간을 갖겠다고 했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손을 들고 이번 촛불집회에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했다.


“그동안 촛불집회에 열심히 나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이 초를 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

“오늘 여의도에서 촛불집회를 한다고 해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시청에서 촛불이 꺼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여기에 왔습니다.”

사람들이 또 박수를 쳐줬다.

“아까 촛불교회에서 여의도로 가자고 하길래 시청 앞에서 5분이라도 촛불을 들다 가면 안 되냐고 부탁했는데 그냥 가버렸습니다. 정말 화가 납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촛불을 들고 다쳐가면서 싸웠는데 지금 이게 뭡니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 안 됩니다. 이번 주부터는 대책위 집회도 안 열리고 시청에서 집회도 제대로 안 합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 시청에 오려고 합니다. 시청에서 촛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그 분이 진행을 하시고 집회를 마치려고 하면서 빠졌지만, 사람들은 집회를 마치지 않고 계속 나와서 얘기를 이어갔다. 사회자가 없으니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얘기를 했다.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얘기를 했지만 서로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줬다.


“이명박이 이제 광우병 소고기만이 아니라 방송장악, 대운하, 민영보험 등등 막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이렇게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뜻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려면 폭력을 써서는 안 됩니다.”

“폭력은 누가 쓰는지 알잖아요? 왜 우리한테 폭력을 쓰지 말라고 합니까!”

“지금 종교단체들이 나서는 것은 우리 투쟁을 잠재우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명박 2중대 역할을 하는 종교단체에 이용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단체에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 싸우다보니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더 오래가기 전에 어떻게든 빨리 해결을 봐야 해요.”

“대책위가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래요. 사람들 모아놓기만 하고 그 다음에는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지금은 우리가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끼리 서로 욕하고 갈라지면 안 돼요.”


토론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니까 한 사람이 토론을 그만하고 시청 주변을 행진하자고 제안을 했고, 사람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초를 준비해온 사람이 적어서 촛불은 많지 않았지만, 두 시간 동안 집회와 토론을 한 사람들은 시청 광장을 돌면서 “이명박은 물라나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오늘 집회는 지금까지 참여한 촛불집회 중에서 제일 즐거웠다.

 

 

2008년 7월 11일 금요일


이번 주에 계속 시청으로 갔다.

작으면 20명 정도, 많으면 200명 정도가 모여서 매일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경찰이 시청주변을 완전히 막아버려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약속이 있어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만 경찰은 안 된다고 했다.

화가 나서 “국민들 패고 길 가는 것도 막고 그러는 것이 경찰이 할 일이냐?”면서 막 따졌지만 경찰은 안 된다고만 했다.


시청에서 촛불을 들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민주노총이 집회를 하는 청계광장으로 갔다.

청계광장은 경찰이 빙 둘러쌌고, 2000명 정도가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1주일 동안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만 촛불을 들다가 오래간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까 기분이 좀 좋았다.

민주노총 사람들이 계속 나와서 두 시간 정도 집회를 하고 사회자가 “민주노총이 투쟁을 통해서 집회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내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시청을 탈환합시다”라고 얘기하고는 집회를 마쳤다.

그런데 행진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청에서 촛불을 들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행진도 하지 않고 집회를 끝내는 모습을 보니까 화가 났다.

민주노총 놈들도 폼만 잡을 줄 알았지 제대로 싸우는 놈들이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 있던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렸다.

“광우병 소고기 반대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오래하는 거 같다. 이제 그 정도 하면 됐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화가 나 있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더 화가 나서 뒤를 돌아보고 그 사람을 쏘아봤다.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딴 곳으로 눈을 돌려버렸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아고라’ 깃발을 앞세운 몇몇 사람들이 남대문 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투덜거리기만 하면서 그냥 집으로 와버리고 있는데, 얼마 안 되는 사람들끼리라도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쪽팔렸다.

 

 

2008년 7월 13일 일요일


어제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지만 오래간만에 대책위 집회를 하는 날이어서 우비를 챙겨들고 시청으로 갔다.

광화문에서부터 시청까지 길은 닭장차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저녁 7시가 되니까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고, 곧 전경이 달려들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강경하게 나왔고, 폭우 속에 비옷을 입은 사람들은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얼마 있으니까 뒤쪽에서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계속 모이고 있었는데 시청을 포기하고 조계사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전날 집회 끝낼 때는 “내일은 좀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시청을 탈환합시다”라고 해놓고 보여주는 것이 이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청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200명 정도의 사람들은 시청에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을 시청에 남아서 구호를 외치다가 “종각 쪽에 사람들이 있으니 종각으로 갑시다”는 얘기가 나왔고, 몇몇 사람들이 “시청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고 했지만 안 통했다.

그 나마의 사람들도 종각 쪽으로 빠져나가버렸고, 안타까움에 30분을 더 시청에 머물러있었지만 더 이상 사람들이 없어서 나도 종각으로 갔다.


밤 10시쯤 종각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어수선했다.

경복궁 근처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닭장차 앞에서 폭죽을 쏘고 있었고, 조계사 근처에서도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밤 11시쯤 종각에 있던 사람들이 동대문 방향으로 빠지면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종각에서 동대문을 돌아 을지로 방향으로 해서 다시 시청으로 기나긴 행진이 계속됐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오랫동안 행진을 하는데도 사람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렇게 긴 행진을 하고 다시 자정쯤 시청에 도착했을 때는 2000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시청에서도 어떻게 싸움을 해볼 수 없어서 그대로 있다가 사람들은 다시 YTN노조가 농성을 하고 있는 YTN 앞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다시 줄었지만 YTN 앞에서는 노조와 함께 집회가 열렸다.

그렇게 집회를 하는 중간에 YTN 건물 위에서 YTN 조합원들이 종이비행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수 십 개의 종이비행기가 비와 함께 사람들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YTN 힘내라”를 수없이 외쳤다.

정말 감동의 순간이었다.


새벽 1시 쯤 돼서 시청 쪽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연행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사람들은 다시 시청으로 달려갔다.

시청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YTN에서 달려온 사람들이 합쳐지면서 경찰들과 대치했다.

남대문경찰서장은 방송을 통해 시위대를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면서 인도로 올라가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대치를 하다가 경찰이 철수해버렸다.

시청 주변을 둘러싼 닭장차만을 남기고 경찰이 완전 철수해버리니까 사람들은 버스를 흔들며 시청으로 들어가려 했다.


새벽 2시까지 남은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시청 옆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나눠주고 있는 ‘촛불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폭우는 계속 내리고, 오랜 행진에 몸은 힘들고, 사람들도 많이 빠져나갔고, 경찰도 가버렸고 해서 집으로 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솔직히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남아 있는 그 사람들도 힘들면서도 버티고 있는데 혼자서 집에 갈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구석에서 쉬고 있으려니까 몇몇 사람들이 닭장차 근처에서 나팔을 불고 버스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에어컨을 켠 채 자지 말고 나와서 놀아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잠시 후 전경들이 다시 나타났고, 주위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이 길가로 모이면서 다시 대치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정말로 밀어붙일 태세였다.

경찰은 몇 번 경고방송을 하더니 서서히 사람들을 인도로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뒤로 조금씩 빠졌다.

그렇게 남대문 가까이 밀리면서도 계속 경찰을 놀리면서 빠졌다.

남대문 근처까지 사람들을 몰아낸 경찰이 다시 시청 쪽으로 물러나니까 그 뒤를 따라 다시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 앞에서 다시 남대문경찰서장이 더욱 강경하게 해산하라고 했고, 남대문 쪽에서 돌아서 연행 작전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로에 그대로 서 있었고, 곧이어 조금 전과 달리 매우 거칠게 경찰들이 밀려들었다.


경찰에 밀려 남대문까지 뛰면서 달아난 사람들은 남대문에서 다시 경찰과 대치했다.

남대문에서는 우리와 함께 승용차를 끌고 다니던 한 사람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아서 순식간에 축제분위기로 바뀌었다.

지나가던 차들도 수시로 경적을 울리면서 우리를 응원하기도 해서 정말 즐거웠다.


사람들이 다시 시청 쪽으로 향하려 하니까 경찰은 닭장차를 몰고 와서 더욱 공격적으로 몰아붙였다.

다시 YTN 앞까지 밀리자 더 이상 도로로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다.

경찰이 공격적으로 나와서 YTN 앞까지 밀리니까 사람들 속에서는 도로로 나가지 말자는 얘기도 나와서 잠시 논쟁을 하기도 했다.


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인도로 해서 다시 시청으로 갔다.

경찰은 버스와 전경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은 상태여서 더 이상 도로로 나갈 수 없었다.

시청 근처에 가보니까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인도 한쪽에 모여 있었다.

쉰 살은 돼 보이는 한 아저씨가 빈 생수통과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장단을 맞춰가면서 구수한 입담으로 이명박, 희망교회, 지식인, 이문열 등을 씹어대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이어진 만담은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날이 밝아왔고, 5시가 넘어서 그 분의 만담이 끝나니까 사람들은 서서히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광화문 쪽으로 올라오는데 길가에 쪼그려 앉아서 머리를 숙인 채 졸고 있는 전경들의 모습을 보니까 정말 불쌍했다.

우리는 그렇게 즐겁게 밤을 지새웠는데...

 

 

2003년 7월 18일 금요일


장마라서 비도 자주 오고 몸도 찌뿌듯하고 그래서 오래간만에 목욕탕을 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까 편안하고 좋았다.

땀을 빼기 위해서 사우나에 들어갔더니 약간 현기증이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게 땀을 빼고 있더니 콧물이 흘러내려서 쓱 문지르니까 피였다.

당황해서 얼른 얼굴을 대강 닦고는 휴게실로 나왔다.

휴지로 잠시 코를 막고 있으니까 피가 멎었다.

목욕을 더 할 수가 없어서 물기를 닦고 몸무게를 달았더니 8kg이나 빠졌다.


그동안 내가 무리를 좀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몸보신 좀 하고 촛불집회도 하루 쉬기로 했다.

시장에 가서 닭 한 마리를 사고 와서 닭도리탕을 하고, 술을 같이 한 잔 했더니 기분이 좋다.

 

 

2008년 7월 21일 월요일


요즘 촛불집회에 모이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고, 경찰도 거칠게 나오지만 그래도 매일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러 나온다.

어제도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나서 경찰이 막으니까 여기저기로 돌아서 종각 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거리로 내려와서 차를 막고 구호를 외치고 있으면 금방 전경들이 나타난다. 전경들이 나타나서 경고방송을 하고 곧 밀어붙이면 사람들은 뒤로 달아나거나 인도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다시 뒤에서 모여서 전경과 쫓고 쫓기는 놀이를 계속 한다.


그렇게 종로와 을지로 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숨바꼭질 같은 시위를 계속 하고 있다 보니까 어느새 자정이 넘었고, 사람들은 50명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밤새도록 하겠다면서 거리로 다시 모였다.

잠시 후 앞쪽에서 전경들이 모습을 나타냈고, 우리가 계속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까 곧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던 우리는 전경들이 가까워지니까 뒤로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있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리던 택시에 뛰어가던 나를 치일 뻔 했고, 나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핸들을 돌리더니 길가로 달려들어 사람을 치었다. 순간적인 상황에 몇몇 사람들이 거기로 달려가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쓰러져 있었다. 바로 뒤를 이어 달려온 전경들은 계속 도망가는 시위대를 쫓아갔고, 지휘자로 보이는 사람과 경찰 몇 명이 사고 현장으로 다가왔다.

나는 경찰에게 빨리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급차가 달려왔다. 할머니는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고, 나는 경찰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택시 기사가 “차가 다니는 길에 그렇게 무턱 데고 뛰어다니니까 피하려고 하다가 사고가 난 거예요”라면서 오히려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야, 씨발놈아! 사람 죽이려고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잖아. 이 개새끼야! 그것도 주둥아리라고 나불거려!”라면서 달려들었다. 금방 택시 기사와 내가 싸울 듯이 달라붙자 경찰이 말리면서 택시 기사에게 면허증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있다가 아무래도 할머니가 걱정이 돼서 경찰에게 병원을 확인하고 나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 응급실로 가서 할머니를 찾았더니 할머니는 의식이 없으셨고, 간호사에게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더니 “외상은 크게 없지만, 나이가 있으시기 때문에 며칠 동안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다. 보호자 하고는 연락이 됐냐고 물어보니까 경찰에서 연락을 한 거 같다고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돼서 할머니 옆을 떠나지 못하고 1시간 정도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할머니의 딸이라고 하시는 그분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나는 사고 당시 상황을 얘기해 드렸다. 내 얘기를 듣고 나서 담당 의사를 찾아간 그 분은 잠시 후 돌아와서 “고맙습니다. 일단 큰 부상은 없어 보이지만 며칠 동안 지켜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곳은 이제 제가 있을 테니까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라고 얘기를 했다. 할머니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따님이 옆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있을 필요가 없어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괜히 마음이 심란해서 소주 한 병을 마셨다.

 

 

2008년 7월 24일 목요일


할머니가 어떻게 됐는지 계속 마음이 쓰여서 병원을 찾았다.

할머니는 8인실 병실로 옮겨져 있었고, 따님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따님에게 인사를 하고 사들고 간 음료수를 건넸다.


“할머니가 나아지셨는지 걱정이 돼서 와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번에도 고생 많으셨는데...”

“할머니는 좀 괜찮으세요?”

따님은 잠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은 MRI나 CT로는 큰 이상은 발견되지 않아서 지금 상황에서는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좀 더 지켜 보자고만 해서...”


따님은 얘기를 더 하지 않았고, 나도 더 묻지 않았다.

할머니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따님에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다.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사고가 난지 1주일이다.

할머니가 걱정이 돼서 목요일부터는 매일 병원을 찾게 됐다.

따님과 그 분의 자녀인 듯한 남학생 한 명이 같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눈을 감고 계셨다.

따님이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신경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상태는 아직 그대로이신가요?”

“예.”

“특별히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계속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네요. 이유라도 알 수 있으면 속이라도 덜 상할 텐데...”

“저희도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어머니가 나이가 있으신 데다가 몸이 원래 좀 약하시거든요.”

“많이 놀라셔서 그런 거라면 정신이 돌아올 수는 있겠죠?”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병실은 계속 혼자 지키고 계세요?”

“예.”

“다른 형제분이나 돌봐주실 분이 안계신가요?”

“오빠가 한 분 있기는 한데 외국에 나가 계셔요. 저도 이 애랑 둘이서 살고 있고요. 어머니를 따로 부탁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제가 계속 나오기는 합니다.”

“혼자서 계속 간호하시려면 힘드실 텐데...”

“간호라고 할 거야 뭐 있나요? 그냥 옆에서 지켜보면서 의사선생님이나 간호사분들 오시면 얘기 듣고, 어머니 땀이나 닦아 드리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고 자리를 비우기는 불안하고...”


잠시 말없이 할머니 얼굴을 들여다보고 일어났다.

인사를 드리고 병실을 나가려니까 따님이 따라 나왔다.

들어가시라고 해도 입구까지 바래다 드리겠다면서 병원 입구까지 내려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하니까 따님이 “커피 한 잔 하실 시간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고 했더니 따님이 곧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이렇게 매일 찾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그냥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뿐인데요. 할머니 의식만 빨리 돌아왔으면 하고 바랄 뿐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따님은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당분간 이렇게 자주 오실 건가요?”

“제가 자주 오는 것이 불편하시지 않으시다면... 솔직히 집에 있으면 걱정이 돼서요. 이렇게라도 할머니 얼굴을 보고 돌아가면 조금 괜찮아 지거든요. 혹시 저한테 뭐 부탁할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따님은 잠시 말을 끊고 커피를 한 모금 하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 좀 드리려고요...”

“예. 그러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제가 공장에 다니고 있는데 이번 주 1주일 동안 휴가를 내서 어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머니 상태가 저래서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일부터는 다시 출근을 하려고 해요. 어머니 옆에 아무도 없을 수는 없어서 낮에는 숙모님한테 부탁을 드렸거든요. 그런데 제가 퇴근해서 여기까지 오려면 빨라도 밤 9시가 되고, 우리 애도 학원 마치고 오면 8시가 되는데, 숙모님이 저녁에는 집에 들어가 보셔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녁 6시부터 2~3시간 정도 어머니를 지켜봐드릴 사람이 필요해서요. 저희 형편이 간병인 구해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정말 죄송한 부탁인데요. 혹시 저녁에 2~3시간 정도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면 그 시간 동안만 어머니 옆에 계셔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 거라면 전혀 문제없습니다. 제가 더 있어줄 수도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제가 저녁 6시까지 오면 되나요?”

“예.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그냥 할머니 옆에 앉아만 있으면 되는 건데요.”


따님이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올 수 있었다.

 

 

2008년 7월 28일 월요일


따님과 약속한데로 저녁 6시에 병원에 갔더니 숙모님이라는 분이 계서서 인사를 드렸다.

숙모님은 얘기를 들었다면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시고 자리를 비우셨다.

말없이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가끔 할머니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들리기도 하고, 옆에 계신 분들과 가벼운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리면서 할머니 얼굴을 보니 작고 야윈 얼굴이었다.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이 안쓰러워 닦아드리니까 엄마 생각이 났다.


“할머니도 우리 엄마처럼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 늙으셨어요?

불쌍한 할머니, 그동안 고생해왔던 거 조금이라도 보상받으셔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누워만 계시면 어떻게 해요. 따님이 많이 걱정하고 있거든요. 내일은 눈을 뜨셔서 따님에게 걱정 말라고 한마디만 하세요.”


눈물이 날 거 같아서 고개를 들어서 창밖을 봤다.

 

 

2008년 7월 31일 목요일


할머니 병실이 너무 칙칙한 거 같아서 병원 앞 꽃집에서 꽃을 하나 샀다.

하연 꽃망울이 환하고 예뻐서 후레지아라는 꽃과 꽃병을 샀다.

병실에 와서 꽃병에 물을 넣고 할머니 머리맡에 놓아드렸더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할머니 얼굴도 환하게 피는 것 같았다.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오늘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다.

 

 

2008년 8월 3일 일요일


일요일은 따님이 쉬는 날이라서 오늘 모처럼 촛불집회에 나갔다. 오래간만에 청계광장에 갔더니 역시나 닭장차들이 주변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집회를 하던 장소에서 어디서 주최하는지 모르는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대책위는 빵빵한 문화행사 스피커가 미치지 않는 뒤편 인도 한 쪽에서 작은 스피커를 켜고 있었다.

촛불집회가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초와 종이컵을 받아들고 앉아 있으니까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그래도 150명 정도가 됐다. 우리가 촛불집회를 시작하니까 전경들이 주위를 둘러쌓다. 조금 지나니까 경찰방송차도 아닌 순찰차가 와서 “불법집회이니 해산해주십시오”라고 찍찍거렸다.

정말 열 받았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집회를 했다. 아스팔트 농활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은 마이크에 MP3를 데고 노래를 틀면서 춤을 줬다. 가족과 같이 나온 어떤 아주머니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촛불이 타는 동안은 이곳에 자주 나올께요”라고 얘기하고, 어떤 아저씨는 술이 취했는지 횡설수설 하다가 사회자가 말려서 들어오기도 했다. 그 분위기가 좋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래서 오래간만에 나도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며칠 전부터 촛불집회에 자주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1일 새벽에 시위 도중에 어떤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그분을 돌봐드리느라고 촛불집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

“제가 박수 받으려고 얘기한 건 아니고요. 아무튼, 그래서 이곳에 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제 마음은 항상 여기에 있는 분들하고 같이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나오지 못하겠지만 제 마음에서는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제발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해주십시오.”

사람들이 더 크게 박수를 쳐줬다.


그렇게 그날 촛불집회는 1시간 정도에 조촐하게 끝났지만, 기분은 좋았다.

 

 

2008년 8월 5일 화요일


따님이 평소보다 일찍 병원에 왔다.

잔업이 일찍 끝났다고 했다.

따님 얼굴이 할머니처럼 창백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으세요?”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빠지는 거는 아니니까 좋아지실 거예요.”

“이러다가 우리 엄마 못 일어나면 어떻하죠?”


따님이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1시간을 더 있다가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는데도 정신이 멀쩡하다.

 

 

2008년 8월 8일 금요일


할머니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누워계셨다.

2시간 동안 가만히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 우리 엄마 얘기 해줄까요?

우리 엄마는 22살 때 우리 아버지랑 중매로 결혼했데요. 우리 엄마는 이쁜 얼굴이어서, 나이는 할머니하고 비슷하지만, 할머니처럼 못생기지 않았다. 기분 나빠요?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얘기하세요. 그러면 얘기 그만 할게요.”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심호흡을 해보았다.


“할머니, 할머니도 할아버지하고 살 때 많이 맞았어요?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아빠한테 많이 맞았거든요. 아빠는 평소에는 자상한데 술만 먹고 들어오면 엄마를 때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아빠를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나 나쁜 아들이죠?

우리 집에 빚이 많아서 아빠가 버는 걸로 항상 모자랐어요. 그래서 엄마가 몰래 일본에 가서 몇 달씩 돈 벌고 오고 그랬어요. 그게 요즘 말로 하면 불법 외국인노동자예요. 그러다가 내 동생을 가졌는데 유산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동생을 못 낳았어요. 할머니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으니까 좋겠다. 손자까지 있잖아요.

우리 엄마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는데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들어와서는 또 집안일을 하다가 잔데요. 이제 늙으셨으니까 몸을 생각해서 좀 쉬시라고 그러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난데요. 할머니는 지금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말이죠.

할머니는 우리 엄마보다 고생도 덜 했으니까 더 살아서 조금만 더 고생해야 되요.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잖아요. 그렇죠?”


마음속으로 많은 얘기를 했지만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울지 않았다.

 

 

2008년 8월 12일 화요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지난번에 사왔던 꽃이 시들기 시작해서 꽃을 새로 사왔다.

시든 꽃을 할머니 근처에 두고 싶지 않아서 병원 밖으로 들고 나와서 화단에 버렸다.

병실 텔레비전에서는 소녀시대가 나와서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왜 그렇게 슬프게 들릴까?

의사들은 왜 다친 곳도 없는 할머니를 일어나게 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왜 이렇게 없을까?


밤이 되면서 비가 점점 굵어졌다.

 

 

2008년 8월 15일 금요일


광복절인데도 따님은 회사에서 특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출근을 한다고 했다.

숙모님도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나오시지 못한다고 해서 아침부터 할머니 옆을 지켰다.


오늘이 촛불집회 100일째라고 했다.

경찰 진압이 아주 거칠어졌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올 것이다.

100일은 그렇게 싸웠는데도 바뀌지 않는 것이 세상이었다.


할머니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것을 바라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의 삶도, 따님의 삶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의 삶과 내 삶이 나아지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할머니는 얼마나 더 이렇게 누워계셔야 할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다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려도, 매일 이렇게 나와서 손을 잡아드릴 수 있는데...

다시 건강하지 못해도 좋으니까 제발 눈만 뜨세요.

 

 

2008년 8월 18일 월요일


낮 12시가 거의 다 돼서 일어나서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밥을 먹는다.

그리고 또 멍하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하다가 4시가 되면 씻고 집을 나선다.

집에서 병원까지 가려면 두 시간이 걸린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지만 2시간 동안 사람들에 부대끼다보면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어진다.

그래도 병원에 도착해서 할머니 손을 잡고 2시간 동안 있다 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따님이 퇴근해서 오면 간단히 얘기를 하고 다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그 2시간은 더욱 힘들다.

오만 생각을 다한다.

할머니를 위해서 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이러다가 영영 못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럴 거라면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기라도 하든가...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할머니가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애써 위안을 한다.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거의 다 되어간다.

몸은 녹초가 됐는데 뒷목이 당겨서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한다.

잠을 자기 위해서 술을 먹기 시작하고 새벽 3~4시가 되어서 겨우 잠이 든다.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시고 누워 계신지 한 달이다.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따님이 더 걱정이다.

매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병원에서 주무시면서 다시 출근하고 있다.

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

가끔은 내가 밤에 지키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막무가내다.

할머니보다는 따님 때문에 더 피가 마른다.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숙모님에게서 따님에 대한 얘기를 조금 들었다.

할머니 병원비는 보험 처리가 되지만, 병원 생활을 하다보니까 일요일에는 특근을 하지 못해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다.

한 달 80만 원정도 겨우 벌어서 중학교 다니는 아들 뒷감당도 하기 힘들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조금은 도와주고 있지만 병원 생활에도 은근히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왜 이런 일들이 자주 생기는 걸까?

돈 있는 사람들은 그 돈을 전부 어디다가 쓰는 걸까?


정말 숨 막히는 세상이다.

 

 

2008년 9월 1일 월요일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할머니 얘기를 써서 메일을 보냈다.

우선 따님이 걱정이니까 조금이라도 도와줬으면 한다고 했더니 몇 명이 돈을 보내왔다.

혜정씨는 고생하는데 많이 도와주시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10만원을 보내왔다.

사는 형편이 좋지 않은 동철이도 10만원 보내왔다.

사람들이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모아진 돈이 33만원이었다.

50만원은 맞춰주고 싶어서 17만원을 내가 보탰다.


당장 17만원을 보태면 힘들어진다.

이것저것 줄일 수 있는 것을 생각해봤다.

거의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이니까 당분간 없어도 상관은 없겠다 싶어서 핸드폰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면 한 달에 2~3만 원 정도는 줄어든다.

지하철역에서 집에까지 오는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30분을 걸어오면 하루에 1400원을 아낄 수 있다.

걷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까 그 정도는 걸어 다니기로 했다.

그리고는 줄일 것이 별로 없었다.

의료보험은 밀린 지가 다섯 달이 되고 있고, 월세나 전기세를 밀릴 수는 없다.

먹는 것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데 더 줄일 것도 없다.

술을 줄일 수는 있지만 술마저 없으면 정말 버티기 힘들 것 같다.

연말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보자.

 

 

2008년 9월 4일 목요일


할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분 중에 두 분이 어제와 오늘 퇴원하셨다.

2개의 침대가 비어있으니까 왠지 병실이 허전해 보였다.

할머니가 쓸쓸해 하실까봐 손을 꼭 잡아드렸다.


“할머니도 옆에 있던 분들이 퇴원하셔서 좀 허전하세요? 하지만 그 분들은 아픈 것이 다 나아서 퇴원하신 거니까 축하해드려야지요.

할머니는 찾아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없어요? 할머니 동네에 친구도 없어요? 고향이 멀다고 해도 외국도 아닌데 고향에 있는 형제분들도 찾아오지 않잖아요? 지금 돌봐주시는 삼촌이라는 분도 이종사촌이라면서요? 할머니는 친척들 하고 사이가 안 좋으신가보다.

외국에 있다는 아드님도 소식을 들었을 텐데 언제 한 번 오시려나요? 얼마 후면 추석이니까 그때 오실까요? 손자 놈도 처음에는 병원에 좀 나오다가 요즘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죠? 젊은 애들이 원래 좀 그래요.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만나왔던 그 많은 사람들은 할머니가 지금 이렇게 누워계신 거 알고 있을까요? 아마 할머니를 잊은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쵸? 그러고 보니까 할머니 인생 헛 산 거 같다.

그렇게 나쁜 인상도 아니고 나쁜 일 하면서 살았을 거 같지 않은데 왜 그럴까요?

할머니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쵸?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했죠? 그리고 돈도 별로 없죠? 돈만 있으면 그 사람이 쓰레기라도 열심히 병문안 오거든요. 또 할머니 못생겼잖아요. 큭, 여자한테 못 생겼다고 해서 화났어요? 그래도 솔직히 잘 생긴 얼굴은 아니잖아요. 거기다가 늙기까지 했으니... 할머니는 그래서 이렇게 혼자이신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 할머니는 절대 외롭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이 할머니를 다 잊어도, 친척들이 다 등을 들려도, 멀리 있는 아들에게서 소식이 없어도, 할머니 옆에는 항상 착한 딸이 있잖아요. 저렇게 착한 딸을 위해서라도 할머니는 다시 눈을 뜨셔야 해요.

할머니 딸 불쌍하지 않으세요?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시잖아요. 그리고 저 나이에 아직도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매일 할머니 옆에서 같이 자고 있잖아요. 착한 딸 더 고생시키면 할머니 저 세상에 가서도 외롭게 살게 돼요. 이제, 착한 딸 그만 고생시키세요.”

 

 

2008년 9월 7일 일요일


할머니 병실에 모처럼 간호하던 사람들이 다 모였다. 따님과 손자, 삼촌과 숙모님, 그리고 나까지...

할머니 상태는 여전하고, 병원생활은 길어지고 있어서 어떻게 할 거냐는 논의가 잠시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답이 나올 리 없다. 우선 추석 지나고 상태가 계속 이러면 의사선생님과 논의를 해보기로만 했다. 추석 얘기도 나왔다. 삼촌과 숙모님은 금요일 오후에 고향에 내려간다고 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술을 먹는다.

 

 

2008년 9월 11일 목요일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 6시에 병원에 갔더니 숙모님과 따님이 함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따님 뒤로 누워계신 할머니가 눈을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따님이 할머니 손을 잡고 얘기를 했다.

“엄마, 이 분이 그동안 엄마 보살펴주셨어요.”

나는 할머니 눈을 보면서 가볍게 목 인사를 드렸다.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쇳소리를 내면서 그렇게 한 마디만을 했다.

할머니 눈이 참 고왔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살며시 병원을 나왔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2008년 9월 14일 일요일


추석이다.

집에는 이번에도 바빠서 내려가지 못한다고 연락했다.

모처럼 마음 편하게 낮술을 먹는다.

2008년 9월 17일 수요일


할머니 얼굴을 보고 싶어서 병원을 찾았다.

두 달 가까이 할머니가 누워있던 침대에 다른 분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할머니 옆자리에 들어와 있던 분이 얘기를 해줬다.


“어제 퇴원 하셨어요. 할머니와 보호자분이 아저씨한테 연락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그랬는데, 연락을 못 받으셨나 봐요. 간호사에게 연락처를 맡겨 놓고 가신다고 했으니까 가서 물어보세요.”


간호사에게 갔더니 쪽지 하나를 건네줬다.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엄마는 의식이 돌아왔고, 당장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퇴원하기로 했습니다.

나이가 있으셔서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니 당분간 집에서 돌봐드리려고 합니다.

몇 번이나 핸드폰으로 연락을 드렸는데 사용정지라고 해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한 번 꼭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그동안 신세진 것도 많고 그래서 저녁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합니다.

연락처를 남겨드립니다.

꼭 연락주세요.”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이 와서 밤바람이 쌀쌀했다.

오늘은 답답한 지하철이 싫어서 버스를 탔다.

서울의 밤거리가 아름다웠다.


“할머니, 그동안 주무시면서 꿈 많이 꾸셨어요?

나쁜 꿈이 아니라 좋은 꿈만 꾸셨으리라 믿어요.

그동안 할머니 야윈 손을 어루만지면서 처음으로 하느님한테 기도도 해봤어요.

할머니의 작은 숨소리 하나 하나 다 기억하고 있어요.

따님 눈가에 살며시 눈물이 맺혔다가 다시 눈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도 기억하고,

애써 조심하는 숙모님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도 기억하고,

어린 손자의 한숨 소리도 기억해요.

할머니, 제 심장 소리 들리세요?”

 

 

2008년 9월 22일 월요일


바다가 보고 싶었다.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동해바다가 보고 싶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어디로 갈까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동해로 가는 표를 끊었다.


버스가 서울을 벋어나기 시작하니까 야트막한 야산들과 들판이 나왔다.

벼가 누렇게 익어서 온통 황금색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가니까 차가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팔라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모습이 푸른 색과 약간의 붉은 색을 합쳐놓고 있었다.

단풍이 조심스럽게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대관령을 힘들게 올라서니까 가파른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약간 아찔한 길을 내려오다 보니까 저 멀리 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강릉을 지나쳐서 얼마 가지 않으니까 드디어 시원한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맑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동해 버스터미널은 작은 시골터미널 같았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 내려서 무작정 바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작은 도시의 길은 차들도 많지 않아서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30분을 걸었더니 작은 해수욕장이 나왔다.


정말 깨끗하고 푸른 바다에 물결이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모래와 중간 중간 보이는 검은 바위가 편안하게 어울려 있었다.

작은 슈퍼와 철지난 파라솔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위로는 더 맑고 파란 하늘이 바다와 땅을 감싸고 있었다.

코로는 바다 냄새를 맡고, 귀로는 바다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저 하늘위에 떠 있는 구름에 걸터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그 작은 해수욕장을 수없이 왕복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까 벌써 4시였다.

강원도에서 바다를 보고 있는데 어디 가서 회라도 한 접시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터미널로 돌아왔다.

서울 가는 표를 끊고 나니까 그때야 배가 고팠다.

버스 시간이 30분 정도 남기는 했는데, 어디서 밥을 먹기는 애매할 것 같아서 슈퍼에 가서 우유와 초코바 3개를 샀다.


동해 바다를 뒤로 하면서 돌아올 때 아쉬움이 많았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다시 서울로 향하면서 점점 배가 고파졌지만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참을 만 했다.

집에 돌아왔더니 11시다.

너무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라면부터 끓여 먹었다.

 

 

2008년 9월 27일 토요일


1년 만에 혜정씨를 만났다.

신경 써준 것도 고맙고 해서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자주 보던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맛있는 것을 사겠다고 했더니 황태찜을 잘 하는 곳이 있다면서 안내했다.

음식 맛도 좋았지만,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어보는 것이 오래간만이어서 즐거웠다.

고생 많았는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기에 고맙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 술은 혜정씨가 사겠다고 해서 분위기 좋은 전통술집으로 갔다.

매일 먹던 소주와 맥주가 아닌 동동주를 먹었다.

술을 먹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혼자서 조잘댔다.

혜정씨는 애써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고, 나도 일부러 위로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을 마구 쏟아 냈을 뿐이다.

시청과 광화문에서의 즐거움과 병원에서 무거움을...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렀고 막차 시간이 돼서 헤어졌다.

혜정씨가 악수를 하면서 내게 한마디 했다.

“술 많이 먹지 마세요.”


혜정씨와 헤어지고 나서 일부러 두 정거장을 걸었다.

가슴이 부풀어 왔다.

부푼 가슴이 터지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안도록 손을 꼭 쥐었다.

감정이 부풀어 올라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눈물에 그 행복이 묻혀 내려갈 거 같아서 울지 않고 참았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큰마음 먹고 mp3플레이어를 하나 샀다.

컴퓨터로 다운 받은 음악을 들으면서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편안한 음악을 들으면서 공원을 걸었다.

나무들은 조금씩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색깔의 나무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작년 이맘때는 그렇게도 우울한 회색빛으로만 보였는데...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연락을 할까 말까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

할머니와 따님과 손자가 살아갈 삶이 힘들면 힘든 데로 즐거우면 즐거운 데로 그 분들의 몫일뿐이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그 간절했던 기억을 잃지 않으면 된다.


내년에는 다시 내 삶을 살아봐야겠다.

 

 

2008년 10월 13일 월요일


가을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멜로영화를 봤다.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요즘 혜정씨 생각이 자주 난다.

나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갑자기 삼계탕이 먹고 싶어서 닭을 샀다.

이왕이면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슈퍼에서 찹쌀도 한 봉지 사왔다.

그런데 찹쌀 봉지를 보니까 원산지가 중국산이라고 돼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맬라민이 어쩌고저쩌고 난리인데 좀 찝찝했지만 그대로 넣었다.

웰빙이니 뭐니 어쩌고 해도 나 같은 놈은 이런 것을 먹게 돼 있다.

삼계탕에 중국산이지만 찹쌀을 넣는 것도 마음먹고 하는 짓이다.

소고기 먹을 일이 많지는 않지만 먹게 되더라도 미국산 소고기를 먹게 될 거다.

어차피 돈 있는 놈들은 그런 거 먹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반대를 해도 관심이 없었던 거다.

주식이 어쩌고 환율이 어쩌고 하는 것이 그 놈들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겠지...

요즘 깡통 차는 놈들도 많을 거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어서 괜히 고소하다.

 

 

2008년 10월 29일 수요일


요즘 밤에 자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져서 새벽 1시면 잠을 잔다.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침에 일어난 다음이 문제다.

몇 달 동안 매일 시청이나 병원으로 가는 일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갈 곳이 없다.

그러다가 공원 옆에 있는 도서관을 가게 됐고 요즘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있으면 적당히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이번 달 잡지도 거의 다 보고 해서 3층에 올라가서 책들을 살펴봤다.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읽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만만한 소설들을 뒤져보다가 제목을 알고 있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골랐다.

오래간만에 소설책을 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하품도 나오고 그랬다.

읽다보니까 얘기가 재미있어서 책을 빌려 와서 마저 읽었다.

3일 만에 책을 다 봤다.


무서운 얼굴과 등이 굽은 노트르담 성당의 꼽추는 저주받은 운명으로 태어났다.

성당 신부를 아버지이자 주인으로 생각했던 꼽추는 그저 시키는 데로 뭐든 다 했다.

어느 날 마을에 아름다운 집시 여인이 나타났고, 그 여인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교도 사랑에 빠졌고, 신부도 사랑에 빠졌고, 불쌍한 꼽추도 사랑에 빠졌다.

그 무서운 사랑은 마을 전체를 폭동으로까지 몰고 갔다.

그 속에서 꼽추는 집시 여인을 구해주고 정성스럽게 보살피지만, 집시 여인은 꼽추가 무섭기만 했다.

아버지이자 주인인 신부를 버리면서까지 집시 여인을 사랑했지만, 못생긴 꼽추는 사랑을 얻지 못했다.

결국 집시 여인을 끝까지 지키려다가 같이 죽고 만다.

1년이 지나서 사람들은 여자 해골을 껴안고 있는 등이 구부러진 해골을 발견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 꼽추가 나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2008년 11월 6일 목요일


음악을 들으면서 공원을 산책하고 도서관을 갔다.

먼저 신문을 뒤적이고, 잡지를 읽는다.

시사 잡지를 읽다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조금 보인다.

하지만 기자들은 너무 잘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 보다.


그렇게 조용히 잡지를 읽고 있는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앞쪽에 앉아 있던 사람의 핸드폰이었다.

잡지를 보던 그 사람은 미안한 표정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서는 통화를 했다.

“응......여기 도서관”

뭐 이런 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진동으로 하지 않은 거야 실수로 그랬다 쳐도 뻔뻔하게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안하거나 그런 표정하나 없이, 자기 집에서 전화를 받는 것처럼 고개를 당당히 들고...

세련돼 보이는 양복을 입고 있는 그 놈은 레저 잡지를 읽고 있었다.

발을 꼬고 앉아서 곶곶하게 허리를 펴고 창밖을 보면서 도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다.

가슴 속에서 역겨운 느낌이 확 올라왔다.

저런 놈들은 자기만 잘난 줄 알고,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알고 보면 좆도 아닌 것들이 저런다.

재산 조금 있고, 학벌 조금 되고, 외모 조금 반반하다 싶으면 저렇게 지랄을 한다.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그놈을 쏘아봤다.

전화를 하던 그 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계속 쏘아보니까 그 놈은 슬며시 눈을 창 쪽으로 돌렸다.

자존심은 있어서 통화는 다 끝내고 나가버렸다.

잘 난 척 하기는...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도서관에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공원으로 나왔다.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공원을 걸어가고 있으니까 정말 편안했다.

맑고 푸른 하늘은 따뜻한 햇살을 보내고 있었고, 화려한 단풍들과 땅위에 쌓인 낙엽으로 공원길은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하늘과 나무와 땅을 번갈아 보고 있으려니까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혜정씨와 나란히 이어폰을 나눠서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다.

어색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그 정도의 틈이 벌어져 있지만

혜정씨의 화장품 냄새가 연하게 풍겨온다.

눈을 감고 그 냄새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바람이 약하게 불어와서 내가 그 냄새와 함께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살며시 혜정씨 손을 잡는다.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떨림이 내 손가락으로 전해진다.

내 심장도 그에 맞춰서 가볍게 뛴다.

잠시 후 혜정씨 손이 편안하게 내 손에 감싸인다.

맞잡은 두 손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내 심장이 다시 편안해진다.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도서관에서 집으로 오는데 우연치 않게 성호형을 만났다.

이 동네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평소에 중소기업 이사라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몇 안 되는 고향 사람이라서 모른척하기가 어려웠다.

자기가 잘 아는 일식집이 있다고 해서 차를 타고 나갔다.

역시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싫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적당히 둘러댔더니 고생이 많다며 술을 권하는 것이 또 싫었다.

고향 얘기, 어릴 적 얘기, 집 얘기 등을 혼자서 마구 쏟아내다가 회사 얘기가 이어졌다.


“요즘 같을 때 회사 운영하려면 정말 죽을 맛이다. 어려운 국면은 이제야 시작이라는데, 벌써 이러니...”

“형네 회사도 어려운가 봐요?”

“말도 마라. 우리 회사가 소비재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서 경기를 덜 타는 편인데도 지난  달에 한 번 구조조정을 했잖아.”

“구조조정이라면 사람을 잘랐어요?”

내 억양이 약간 높아지니 형은 잠시 목소리 톤을 누그러트렸다.

“사람 자르는 게 쉬운 건 아니야. 어떻게 하면 함께 갈 수 있을까 하고 고민도 많이 했어. 그런데 방법이 없잖아. 회사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회사가 어렵다면 사람을 잘라야죠.”

내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얘기를 하자 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자르는 게 쉬운 게 아니야. 사람은 자르지 않고 해 보려고 노력 많이 했어. 여러 가지 줄일 수 있는 거는 최대한 줄여보고, 직원들에게 회사 사정을 얘기하고 서로 힘을 합쳐보자고 했어. 그런데 사람들이 참 이기적이더라. 사람을 자르지 않고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으로 자발적 고통분담을 얘기했더니 냉담한 거야. 경영진이 먼저 모범을 보인다고 해서 임금을 10% 반납하고, 성과급도 반납했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거야. 회사 경영을 공개하라고 해서 공개도 했거든. 그런데도 자기네 임금은 손 댈 수 없다는 걸 어떻하냐? 요즘 젊은 애들은 손해 보지 않고 자기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들이 강해요.”

“어련 하겠어요. 회사 운영하다보면 냉정할 때는 냉정해야죠.”

형의 목소리가 커졌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도 사람 자르는 게 좋은 줄 알아? 한 사람이라도 살려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그리고 그 사람들 새로운 일자리라도 알아봐줄려고 지금도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고...”

내 목소리도 커졌다.

“자르는 사람은 안타까운 거겠지만, 잘린 사람은 미치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아요?”

“그걸 왜 모르냐?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 사람들 다 함께 데리고 가려고 하다가 회사가 문이라도 닫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거잖아.”

“형은 연봉도 높고 그런데, 왜 형이 나가지는 않죠? 형 한 명 연봉이면 다른 사람  네 명은 살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형은 그 회사 나와도 다른데 회사 알아보기도 쉽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나가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데...”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쓰다가 버려도 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씨발, 그 사람들이 쓰레기예요?”

“너, 형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뭐가 심한데요? 쓰레기 처리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떤 건지나 알아요? 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줄 모르는 거냐고! 없는 놈들은 그렇게 있는 놈들 시다바리만 하다가 단물 다 빠지면 언제든지 버려도 되는 인생이냐고! 잘리지 않으려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항상 해해거리니까 배알도 없는 놈들로 보이죠? 그렇게 살지 말아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싫어서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조금 진정이 되니까 내가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2년 전 내가 당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기분은 정말 더러웠다.

 

 

2008년 11월 22일 토요일


한 달 정도 지나면 2008년이 끝난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살을 더 먹어서 마흔 다섯이 된다. 끔찍하지만 쉰이 바라보이는 나이가 되는 것이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일까? 그동안 뭐 하나 제대로 해본 것도 없는데...


내년에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돈으로는 이번 겨울을 넘기면 끝이다. 그러면 빚도 갚아야 한다. 무엇이든 다시 해보자.

이 빌어먹을 서울에서 계속 살아야할 이유도 없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이 모양이라면 앞으로도 더 달라질 것은 없다. 서울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면 반지하를 벋어날 수도 있고, 약간 숨통을 트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난감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적응하는 것이 조금 두렵기는 하다. 그래도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이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거창하지는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처럼 끝을 알 수 없는 방황은 이제 없을 것이다. 점점 늙어가는 나이가 됐지만, 꿈을 다시 가질 수 있겠다. 10년 후에 그 꿈이 작게라도 영글었으면 좋겠다.

 

 

2008년 11월 26일 수요일


낮에 집을 가나다가 우편함을 뒤져보았더니 종로경찰서에서 온 우편물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에 봉투를 뜯어보았더니 출석요구서였다.

지난 촛불집회 때문에 집시법 위반으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나오라는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 들어와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보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저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구속된 사람도 많았고, 벌금도 수 백 만 원씩 내고 그랬다는 기사가 많았다.

한참을 뒤지다보니까 촛불집회 관련해서 법률 조언을 해준다는 곳이 나와서 전화를 해봤다.

변호사라는 분은 경찰에 전화해서 자세한 내용을 우선 알아보라고 했고, 경찰 조사를 받을 때 기본 요령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그리고 경찰과 얘기해서 조사받는 날을 조정할 수도 있다고 얘기해줬다.

변호사 얘기를 들으니까 조금 안심이 되기는 했다.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내용을 물어봤더니 촛불집회 하면서 사진이 찍힌 것이 있어서 조사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조사받는 날이 모레로 돼 있어서 연기할 수 없냐고 했더니, 12월 2일로 연기했다.

내가 과격하게 한 것은 없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걱정이 많이 된다.

하루 종일 이런 저런 걱정이 생겨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너무 불안해서 직접 변호사를 찾아가서 만나고 왔다.

변호사는 나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 대처하면 될 거라고 했다.

아마도 경찰차량에 매단 밧줄을 잡아당긴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지만, 법적으로 처벌하는 수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고 했다.

이런 저런 상황과 법 적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직접 변호사를 만나서 설명을 듣고 나니까 마음이 훨씬 안정이 됐다.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지만, 걱정되는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집에 들어왔다.

 

 

2008년 12월 1일 월요일


내일 조사를 받으러 가야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보지만 자꾸 걱정이 된다.

조사를 받다가 혹시 내가 실수해서 문제가 커지는 것은 아닐지...

촛불집회에 너무 자주 나가서 괘씸죄가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

내가 실업자라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지...

만약에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를 챙겨줄 수 있는지...

만약 전과자가 되면 일자리 알아보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지...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까 점점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경찰서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러는 걸까?


너무 걱정이 돼서 몇몇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혜정씨가 메일을 보내왔다.


“뭐 이런 일이!!

별일 아닌 것이 늘 별일이 되는 세상입니다.

별일은 별일 아닌 것이 되는...

많이 당황스럽겠습니다.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일 없겠지요?

세상이 뭐 이렇습니까?

아무 일 없기를 속절없이 바랄 뿐입니다.”


한 통의 메일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해줘서 혜정씨에게 답장을 보냈다.


“마음이 불안해서 오늘 영화를 보러갔습니다.

'순정만화'라는 산뜻한 멜로영화를 봤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촛불집회에 참가해서 밤새도록 투쟁했던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봅니다.

제가 겁이 많아서 솔직히 많이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저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저는 외롭지 않습니다.


혜정씨,

고맙습니다.

가끔 생각이 날거 같습니다.”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일어났다.

아침밥을 먹는데도 신경이 쓰여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물에 말아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막상 집을 나서니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지만, 경찰서에 들어섰더니 또 무서워졌다.


담당자를 만나 조사가 시작됐다.

처음 그런 조사를 받는 것이어서 긴장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조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형사가 중간에 약간 겁을 주기는 했지만, 변호사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 정도에 쫄지는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조사를 하니까 끝이 났다.


조사를 마치고 나오니까 정말 홀가분했다.

“나중에 벌금이 나오면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곧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하늘이 맑고 날씨도 좋았다.

어디 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동네로 돌아와서 공원에도 가보고 도서관에도 가봤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집에서 낮술을 먹었다.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심한 몸살감기 때문에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가스비 아끼려고 제대로 켜지 않던 보일러도 하루 종일 켜 놓고 땀을 흠뻑 흘렸다.

오들오들 떨면서 그렇게 누워있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요즘 들어서 몸이 상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2년 동안 거의 매일 술을 먹다보니까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조금만 배가 고파도 헛구역질이 나아고, 밥을 많이 먹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위가 경력을 일으킨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런지 잔기침이 많아지고 있다.

술을 먹고 난 다음날 아침에는 꼭 설사를 한다.

여기저기 몸이 상하고 있다.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는 이렇게 살다가 일찍 죽을 것을 안다.

가난해서 건강하게 살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이 속 편하다.

단지, 앞으로의 삶이 비참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혜정씨 생각이 많이 난다.

 

 

2008년 12월 11일 목요일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혜정씨에게 내 마음을 적어서 메일로 보냈다.


“그동안 혼자서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것을 꺼내서 건네 봅니다.

많이 쑥스럽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2년 전 연말에 꺼내려고 했었는데...

그때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애써 용기를 내서 꺼내놓았다가 돌려받았던 경험도 있었고...

혜정씨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좀 더 간직하고 있어야지...’ 했던 것이 2년을 더 간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만지작거리기만 했습니다.


광화문 주변에서 밤새도록 투쟁을 즐기고 난 후

그 즐거움을 누군가와 함께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할머니가 누워있는 병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느끼면서

그 힘겨움도 역시 누군가와 함께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지독한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혼자서 만지작거리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연락 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고...

나만을 위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광화문과 병원에서의 100일의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나니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만났고

더없는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 후 수없이 만지작거리면서도

가끔 메일을 보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역시 내 자신과 혜정씨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서...


그러다가 갑자기 경찰에 나가야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겁이 많이 났습니다.

그때 혜정씨가 보내주신 메일을 받고 정말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내가 힘들 때 혼자가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혜정씨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것의 일부를 드러내보였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드러낼 수 없을 거 같아서...


아직도 내 자신과 혜정씨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돌려받는 한이 있더라도...

혜정씨를 불편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내 삶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혜정씨의 삶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불편하시면 부담 없이 돌려주셔도 됩니다.”

 

 

2008년 12월 13일 토요일


혜정씨에게서 아직 답장이 없다.

조금 초조하지만 왠지 좋은 소식이 올 것 같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혜정씨와의 첫 데이트를 생각했다.


마음을 고백하고 나서 첫 데이트를 바다에서 하고 싶었다.

멀리 갈 수는 없어서 가까운 인천으로 갔다.

손을 잡고 걷고 싶지만 혜정씨가 쑥스러워할 것 같아서 그냥 나란히 걸었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벤치에 앉았다.

겨울 바다가 조금 춥기는 했지만 마음은 너무 따뜻하기만 했다.

살며시 혜정씨 손을 잡았다.

혜정씨도 내 손은 살며시 잡아줬다.

“이제는 혼자 외로워하지도 말고 힘들어하지도 마세요.”

혜정씨가 바다를 바라보면 작은 소리로 얘기했다.

“혜정씨, 고맙습니다.”

겨우 한 마디를 했는데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울지 마세요. 우는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혜정씨는 그대로 바다를 보면서 역시 작은 소리로 얘기했다.

“혜정씨, 스킨십 좀 해도 돼요?”

내 목소리가 젖어들고 있었다.

“안돼요.”

혜정씨의 목소리도 젖어들고 있었다.

 

 

2008년 12월 13일 일요일


혜정씨에게 메일을 보내고 나서 수 없이 메일을 확인했다.

거의 한 시간마다 확인을 하면서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메일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봤다.

하지만...

 

 

2008년 12월 15일 화요일


지난 일요일 혜정씨 메일을 읽고 나서 술을 진탕으로 먹었다.

몸이 활처럼 휘어지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월요일에도 하루 종일 술을 먹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내게 너무 익숙한 일인데도 단련이 안 된다.

누구를 생각하며 속앓이하고, 용기내서 고백했다가, 그 고백을 돌려받았던 마지막 기억이 30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이런 감정을 느껴봤다.

결국 그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내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가난에서 벋어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라면 그런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2008년 12월 19일 금요일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

그동안 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올 해 나에게는 두 명의 여자가 스쳐갔다.

한 명은 병원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고,

또 한 명은 내 근처에서 나를 지켜봐줬다.

한 명의 여자는 나를 만나보고 싶어 했지만 내가 만나지 않았다.

또 한 명의 여자는 내 마음을 건넸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아픈 할머니 옆에서 나는 정말 아팠다.

할머니가 다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할머니가 눈을 뜨시고 나서 그 사랑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싶어서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혜정씨에 대한 내 고백에는 간절한 마음이 없었다.

혜정씨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나 이렇게 아픈데... 내 손 잡아주지 않을래요?”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혜정씨에게서 돌려받은 내 마음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죽음을 생각하곤 했던 그 문턱에서도 만지작거렸던 것이다.

정말 오래간만에 가슴이 설레는 행복함 감정을 느끼게도 해주었던 것이다.

얼마 동안 그렇게 만지작거리다 보면 닳아 없어지겠지.

그렇다고 다시 혜정씨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겠다.

내 삶을 존중하는 만큼, 혜정씨의 삶을 존중해야 하니까.

 

 

2008년 12월 24일 수요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연말을 혼자 보내기 싫어서 몇몇 사람에게 연락을 했었다.

연락이 안 되는 사람, 일정 보고 연락하겠다고 하고 다시 연락이 오지 않는 사람, 연말이라서 바쁘니까 연초에 보자는 사람...

외로움이라는 놈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다시 결심을 했다.

이놈과는 절대로 친해지지 않겠다고...

 

 

2008년 12월 28일 일요일


며칠 전에 동철이에게서 연말인데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고 연락이 왔다.

즐겁게 약속을 잡았고, 어제 시내로 나갔다.

동철이는 이런 나를 거의 유일하게 챙겨주는 놈이고 사람을 편하게 해서 만나면 항상 즐겁다.

역시 아주 기분 좋게 술을 먹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올해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 얘기를 쏟아냈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던 힘든 겨울, 광화문에서의 즐거웠던 봄, 간절했던 만큼 힘들었던 병원에서의 여름, 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던 가을...

동철이는 그 얘기들에 같이 힘들어해줬고 즐거워해줬다.

그러면서 점점 분위기는 좋아졌고, 나는 술이 취해가지 시작했다.

나도 외롭지 않고 즐거운 연말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다보니까 세상이 정말 달라 보여. 특히, 여자들한테 잘 해야 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힘들거든. 그런 사람들한테 함부로 대하는 놈들은 안 돼!”

“형, 많이 취했구나?”

“그래 기분 좋아서 좀 취했다. 동철이 너도 집사람한테 잘 해. 회사생활 하는 너도 힘들지만 집에서 애들 키우는 사람은 더 힘들어. 여자라고 집에서 애만 키우면서 그렇게 아등바등 살고 싶겠어? 여자들도 다 꿈이 있고 그런 거야. 여자도 남자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 이해할 수 있는 거야.”

“형.”

“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말이야...”

동철이 뜸을 들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데? 뭐든 다 얘기해봐. 내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성추행을 하고도 뻔뻔한 사람이 있어.”

순간 술이 확 깼다.

동철이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술잔을 보면서 술을 마셨다.

동철이도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새끼 나쁜 놈이네!”

그러고 나서 동철이와 술을 더 마신 것 같지만 무슨 얘기를 더 했는지 기억이 없다.


술을 많이 마셔서 머리가 아팠지만 오늘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그리고 아침부터 술을 사다 먹었지만 취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방에서 그렇게 뒹굴었다.

나의 2008년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2008년 12월 32일 0요일


오늘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지하철은 여유롭다.


몇 정거장을 지나니까 자리에 사람들이 다 찼다.

옆 차량 통로를 통해서 한 남자 아이가 들어서더니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 아이가 나에게도 종이를 나눠줬다.


“아저씨 아주머니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8살이고, 5살 된 여동생과 살고 있습니다.

아빠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자살하셨고, 엄마는 돈 벌러 여기저기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도 가지 않고 동생을 돌보고 있습니다.

어제 동네에서 동생과 놀다가 쓰레기통 옆에 곰돌이 인형이 버려진 것을 봤습니다.

동생이 얼른 달려가서는 예쁘다고 하면서 가져왔습니다.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하얀 색이 누렇게 변했지만 동생은 목욕을 시키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집에 와서 정성스럽게 인형을 목욕시켰습니다.

동생은 비누칠도 해주고, 샴푸로 머리도 정성스럽게 감겨줬습니다.

‘우리 착한 곰돌이도 엄마 아빠가 없어서 목욕도 제대로 못했구나? 누나가 깨끗이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도 예쁘게 빗겨줄게.’

동생은 1시간 동안 인형을 목욕시키고 나서 머리빗으로 털을 정리해주는데 털이 자꾸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젖었는데 빗질을 하니까 털이 빠지는 거야. 햇빛 있는 데서 잠시 말린 다음에 빗질을 하면 괜찮을 거야’라고 얘기를 하고는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곰돌이를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곰돌이에게 옷을 입혀줘야겠다면서 낡아서 버려둔 원피스를 가위질하면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저와 함께 서툰 바느질까지 하면서 곰돌이 원피스가 만들어지니까 동생이 예쁘다고 하면서 인형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창가에 두었던 곰돌이가 없어졌습니다.

‘창밖으로 떨어졌나?’ 해서 밖으로 나가서 살펴봤지만 밖에도 곰돌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울상이 된 동생 손을 잡고 집주변을 다 뒤져봤지만 곰돌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생은 불쌍한 곰돌이가 보고 싶다고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제가 창가에 두지만 않았어도 곰돌이를 잃어버리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동생한테 너무 미안했습니다.

오늘 동생에게 예쁜 곰돌이 인형을 사주려고 인형가게에 갔더니 곰돌이 인형이 2만원이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다 뒤져보아도 저희 집에는 5700원 밖에 없습니다.

아저씨 아주머니들,

제 동생에게 예쁜 곰돌이 인형을 사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조그만 도와주십시오.”


그 아이가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다 돌렸지만 종이를 읽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아이는 그 종이를 다시 받아서 조용히 옆 칸으로 갔다.


다음 역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또 사람들이 새로 탔다.

한 쌍의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내 앞 자리에 앉았다.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손짓만 하고 있었다.

손짓을 너무 부지런하게 하기에 뭘 하나 하고 봤더니 수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전에 보고 온 집 어때?”

“집이 좀 오래되기 했지만 약간 손만 보면 괜찮을 거 같기는 해. 집수리 잘 하는 사람 알아볼게.”

“빨리 이사 가서 편하게 살고 싶다. 사람들 눈치 보면서 사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

“그래. 나도 제대로 된 집에서 떳떳하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도 마음 편하게 하고...”

“우리 결혼하면 애 많이 낳자. 남부럽지 않게 우리 애들 키울 거야. 엄마 아빠가 장애인이라도 부끄럽지 않다는 걸 보여줄 거야.”

“그래 그러자.”

“너무 행복해.”

“나 같은 남자 사랑해줘서 고맙다. 나 정말 잘 해볼 거야.”

“내가 더 고마운데. 나처럼 못 생기고 나이 많은 농아를 구제해 줘서.”

“음...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아서 나한테 이런 보물이 왔나보다. 그치?”

여자는 손을 입에 대면서 소리 없는 웃음소리를 가렸다.


옆자리에 있던 중년 아주머니 두 사람이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머, 벙어리들인가 봐.”

“그러게. 자기들끼리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불쌍해라.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알고 보면 그렇게 불쌍하지도 않다고 하더라. 장애인들 혜택도 좋아서 수당이나 그런 것도 많다고 하더라. 얼마 전에 안마 일자리 빼앗긴다고 막 데모하고 난리치는 것도 못 봤냐? 다 먹고 살만 하니까 알짜배기 뺏기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거는 장님들이고... 제네는 벙어리들이잖아.”

“장님이든 벙어리든 다 살만하니까 저렇게 연애질도 하지.”


다음 역에서 아주머니 두 사람은 내렸고, 사랑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던 두 연인은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얼마 후 옆 차령 통로를 통해 중년 남자가 손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조용하게 여행하고 계신데 잠시만 실례 하겠습니다. 지난 80년대 풍비했던 유명한 가수들의 최신 노래 20곡을 한 장의 CD에 담아서 나왔습니다. 누구나 한 번씩은 다 추억을 갖고 있을 만한 그런 가수들만 모아놓은 좋은 음질의 CD입니다. 먼저,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담다디의 가수 이상은의 최신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플레이버튼이 눌러지자 잠시 후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의미를 모를 땐 하얀 태양 바라봐

얼었던 영혼이 녹으리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헤어지고 나 홀로 걷던 길은 인어의 걸음처럼 아렸지만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걸


용서해 용서해 그리고 감사해

시들었던 마음이 꽃 피리

드넓은 저 밤하늘 마음속에 품으면 투명한 별들 가득

어제는 날아가 버린 새를 그려 새장 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 걸 아쉬워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눈물 잉크로 쓴 시

길을 잃은 멜로디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이제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간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많은 저 불빛에 하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중년의 남자는 CD를 들고 앞뒤로 돌아다녔지만 사람들은 무심하게 책을 보거나, MP3로 음악을 듣거나, 옆 사람과 얘기를 하거나, 졸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그 남자는 조용히 옆 칸으로 옮겨갔다.


지하철에서 나가고 싶어서 다음 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뭐가 바쁜지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출구 계단 위로 찬바람과 함께 환한 햇살이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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