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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저는 56세의 여성입니다

저는 56세의 여성입니다.

너무 분한 일이 있어서 제 사연을 적어서 올립니다.

보잘 것 없는 늙은 여자의 얘기지만 관심 갖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5년 전부터 저는 조금 규모가 있는 병원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월급이 80만 원 정도여서 그전에 일하던 식당 보다는 작았지만, 쉰이 넘은 나이에 식당에서 계속 일하는 것보다는 낮겠다 싶어서 다니게 됐습니다.

들어가서 했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지 않겠습니다.

쉰 넘은 여자가 하는 일이 힘들다면 힘든 일이고, 쉽다면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장이든, 간호사든, 환자든, 환자 가족이든 상관없이 시키는 일이라면 다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지내야했습니다. 그것이 조금 힘들다면 힘든 점이었습니다.

그래도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좋았습니다.

솔직히 지금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일자리를 구하겠습니까?



사는 것이 그러려니 하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서 같이 일하는 분들과 무난하게 잘 지냈습니다. 그저 육십 넘어서도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다녔을 즈음에 병원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장이 어디 투자한 것이 잘못됐다느니, 이사가 사표를 냈다느니 하는 얘기가 돌더니 조금 후에 구조조정 얘기가 돌았습니다. 모두가 불안했죠. 우리는 별일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자꾸 들려오던 중 청소 아줌마를 줄인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몇몇이 모여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분의 소개로 노무사를 만났고, 그 노무사분이 얘기를 듣고 다시 소개해 준 사람이 지역일반노조 조직부장이었습니다.

나이든 여자들에게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좋게 보일 리 없겠지만,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이어서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곰곰이 얘기를 듣던 조직부장은 이런저런 사례들을 얘기하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교섭도 하고 법적보호도 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혼자 결정할 수 없어서 같이 일하는 분들과 얘기를 나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병원에서 그 소식을 알게 됐고, 면담이 시작되면서 같이 일하던 분들이 조금씩 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직부장이 얘기하는 데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몰래 노조가입원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 12명 중에 7명이 노조에 가입했고, 일을 추진했던 제가 지부장으로 뽑혔습니다.



노조에서 병원으로 교섭하자고 공문을 보내니까 병원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병원은 이런저런 이유로 교섭에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에 청소 아줌마들에게 여러 가지 면담과 모임이 이어졌습니다.

협박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앓는 소리도 하고, 집에도 찾아오고...

지부장을 빼고는 조합원을 숨기고 있어서 저에게 악착같이 달라붙는 바람에 처음에 간이 콩알만 해졌습니다.

하지만 위원장과 조직부장이 걱정 말라고 하면서 도와주어서 조금씩 용기가 생기고 나중에는 병원과 업체에서 하는 짓들이 웃겨보였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습니다.

구조조정 얘기는 가라앉고, 노동조합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도 조금 잠잠해지더니, 저에게 해고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과장이 징계위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를 하더니 바로 다음날 해고됐다는 얘기를 전해주더군요.

아주 약간은 해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황당하게 해고를 당해보니까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당장 조직부장을 만나서 해고 얘기를 했고, 조직부장은 “너무 심하네!”라고 하더니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경우는 이유도 없는 막가파 해고이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안심도 시켜줬습니다.

그날 저녁에 위원장, 조직부장, 조합원들이 모두 병원 밖에서 만나서 상황에 대한 얘기를 하고, 저는 다음날부터 출근투쟁이라는 것을 하기로 했습니다.



위원장과 조직부장과 함께 노조조끼를 처음으로 입고 병원으로 출근하러 나가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조에 가입해서 뭔가를 해보지도 않았는데 해고됐다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일자리 지키려고 노조에 가입했다가 해고된 것도 황당하고,

노조 가입해서 처음 하는 노조 활동이 이런 것이라는 사실에 화가 나고,

그렇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내 인생에 이게 웬 날벼락이냐 싶기도 하고,

이게 잘하는 짓일까 걱정되기도 하고...

하여간 오만 잡생각에 밤새 잠을 자지 못하다가 새벽에 집을 나섰던 날이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기 위한 실랑이와 피켓 시위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때가 찬바람이 불어오던 3월초였습니다.



아침 출근투쟁 하고, 노무사 만나고, 노동부에 진정 넣고, 병원에 공문 보내고, 몰래 조합원들 만나고 하다보니까 보름이 후딱 지나가버렸습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저는 갑갑해졌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낮에도 병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기로 했습니다.

아침에는 3명이 같이 있는데, 낮에 혼자서 서 있으려니까 조금 서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억울한데 세상 사람들은 너무도 태평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시간을 혼자서 서 있다가 화가 나서 집으로 와버리기도 했습니다.

만만한 사람이 조직부장이라서 하소연도 하고 투정도 하면 “이 나이에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해요?”하면서 놀리면서도 이곳저곳에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그날 낮에는 조직부장이나 위원장이나 이런저런 노동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 와서 같이 있어줍니다.

그럴 때면 그 한두 명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해고 돼서 두 달이 지나니까 아침과 낮에 병원 앞에서 이뤄지는 피켓 시위에 조금씩 함께 해주는 사람들도 생겼고, 1주일에 한 번 하는 병원 앞 집회에도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50명씩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제 얘기를 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 집회 하는 곳에도 다니면서 연대투쟁이라는 것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는 것과 나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부르는 노동가요가 익숙지 않고, 구호 외치는 것도 서툴지만, 이 세상에 믿을 사람들은 그 사람들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병원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다가 조끼에 넣어두었던 안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찾는데도 보이지 않자 같이 피켓을 들고 있던 분이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안경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움직였던 곳을 물어보면서 일일이 다 찾아다녔던 그 분(남자분이었거든요)은 30분 만에 여자화장실 세면대에서 안경을 찾아들고 왔습니다.

안경을 찾아주는 작은 일이었지만, 자기 일처럼 그렇게 마음을 써서 함께 해주는 경험은  처음이었거든요.

내가 50년 동안 살아왔던 세상과 지금 만나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보였습니다.



해고되고 석 달이 지나도 병원이 계속 배짱을 튕기니까 위원장이 “한 번 박자”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죠.

조직부장이 다른 집회 때보다 더 열심히 사람들 조직하면서 준비했던 보람이 있어서 지금까지 집회에서 제일 많은 8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위원장을 앞세우고 병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경찰이 막으면서 몸싸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조직부장과 나를 비롯해서 몇 명이 병원 옆으로 돌아서 한쪽 벽을 타 넘고는 병원 로비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경비와 관리자들이 달려와서 끌어내려고 하면서 로비 안에서도 몸싸움이 벌여졌고, 그러는 사이에 또 명이 더 로비로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습니다. 경찰과 싸우던 사람들 중에서 다쳤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로비에서는 소화기가 뿌려지기도 하고 아수라장이 돼 버렸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석 달 만에 처음으로 교섭이 이뤄졌습니다.

병원은 총무부장이 교섭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교섭이 열렸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총무부장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드리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대화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만큼 노조도 성의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인사말 한마디만을 하고 2시간 동안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완전 또라이가 아니라면 정말 대단한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교섭이 있었던 날 저녁에 퇴근한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교섭과 이후 계획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한 언니가 “니가 밖에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하자 다른 조합원들도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조합원들한테 뭐라고 말해야할 지 몰라서 나도 같이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노동조합 가입하고 나서 처음으로 울어봤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모임을 마치고 위원장이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모두들 노래방으로 향했습니다.

1~2시간 쯤 놀면 끝나려니 했던 노래방 회식은 좀처럼 끝날 줄 몰랐습니다. 서로가 알고 있는 노래를 다 불러야 성이 차기라도 한 듯 시간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간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 언니는 남편 전화도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렇게 4시간을 노래 불렀더니 자정이 넘었습니다. 시간만 상관없으면 더 부를 수 있다는 분위기였지만 다음날 출근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쯤에서 끝냈습니다.

50~60년을 살면서 쌓여있는 것들이 4시간 동안에 풀리지야 않았겠지만, 몇 달 동안의 가슴 속 응어리는 조금 풀렸던 날이었습니다.



그 후에 달라진 것은 교섭이 횟수만 쌓으면서 진행되기만 했다는 점, 병원 앞 피켓시위에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준다는 점, 경찰에게서 폭력과 업무방해로 조사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위원장과 조직부장도 함께 조사를 받으러 가는 것이라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경찰에 조사를 받으러 갈 때는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 나이에 경철서 신세란 말인가...

그래도 경찰이 물어볼 때는 “나는 억울하게 당한 사람인데, 왜 나를 조사 하냐?”면서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경찰 조사 받기 전에는 며칠 전부터 엄청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막상 받고 나니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찬바람이 불던 3월에 시작한 것이 7월로 들어서 버렸습니다.

교섭이 열린 것을 빼고는 변한 것이 없는 어느 날 병원 집회로는 가장 많은 300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습니다. 지역에 있는 큰 공장노조를 비롯해서 파업하는 노동조합들이 모두 병원 앞으로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동안 집회에서 마이크를 여러 번 잡아봐서 떨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던 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또 떨렸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고맙다는 소리가 절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계속 인사를 했습니다.

해고자 혼자서 싸우는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준 것도 고맙고, 노동조합이 200명 정도는 돼야 힘이 생긴다는 것에 부럽기도 하고, 다시 또 이렇게 많이 와주면 고맙기도 하겠고...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사람들을 보냈더니 조직부장이 “술이나 한 잔 하실래요?”고 하더군요.

위원장과 조직부장이랑 함께 못 먹는 술을 먹으면서 부러웠던 얘기를 어린애처럼 조잘댔습니다..



지역에서 투쟁하는 노동조합이 많을 때 그 힘을 빌려서 병원을 밀어붙여야 한다면서 병원과 노동부 앞에서 집회도 하고, 유인물로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돌리고, 다른 병원노조들과 같이 기자회견도 했지만 병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8월이 되고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그래서 몸보신도 하고 기운도 모을 겸 해서 노동조합 전체 야유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일반노조는 지역에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노조인데 쓰레기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간병인으로 있는 사람들, 대학 경비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우리 같은 청소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나이들이 모두 많고 조합원들이 많지 않아서 모두 다 모아도 80명이 안 됩니다. 그 사람들도 근무하는 조가 달라서 모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위원장과 조직부장이 열심히 해서 20명 정도가 모여서 야유회를 했습니다.

가까운 계곡에 천막을 치고 준비해온 고기와 과일, 떡들을 함께 먹으면서 술도 한 잔 하고, 공놀이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렇게 즐겁게 놀아봤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나이지만 젊을 때 기분도 나서 술기운에 노래를 하나 부르기도 했지요.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서 위원장이 한 잔 더 하자면서 조직부장과 나를 데리고 호프집으로 가더군요.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위원장도 그날은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쓰레기처리 업체에서 일하다가 노동조합 만들면서 해고 되서 5년째 위원장으로 장기집권하고 있고,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부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조직부장은 38살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조에서 30만원 주는 상근비를 받고 이일저일 거의 혼자서 처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가냐고 물었더니 조직부장이 “지부장님은 해고 돼서 돈 버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사세요?” 하더군요.

그래도 나는 실업급여가 나와서 버티고 있다고 했더니 위원장이 술이 많이 취한 목소리로 “사람이 살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잖아요. 제 아들 학원은 고사하고 용돈도 제대로 못주는 아빠지만, 지부장님처럼 열심히 하시는 분들 보면서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가슴이 뭉클해져서 위원장을 안아주고 싶더라고요.

행복하다는 기분을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본 날이었습니다.



8월부터 가라앉았던 구조조정 얘기가 다시 슬금슬금 나오더니 9월이 시작되자마자 식당에서 해고가 시작되고, 청소 아줌마들에게도 다시 면담이 시작됐습니다. 청소 일을 하청업체로 넘기는데 노조를 탈퇴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조합원들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해고에 대한 판결이 나올 때 까지는 기다려보기로 했던 우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이곳저곳에 연락을 해서 50명 정도가 모여서 집회를 했지만, 병원 안에는 경찰과 병원직원 수 백 명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막이 들어오니까 병원직원들이 달려와서 천막을 뺏으려고 몸싸움이 벌어지고 소화기가 뿌려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다쳐서 피를 흘리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는 가운데 천막을 찢어진 채 병원 직원들에게 뺏겨 버렸습니다. 그때야 뒤에서 지켜보던 경찰들이 앞으로 나와서 우리들을 밀어내더군요.

천막을 뺏기고 밀려난 우리는 전쟁터 같이 변해버린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고 허탈하더군요.

소화기를 뒤집어써서 머리가 하얗게 되고 윗옷이 뜯어진 위원장은 천막 없이 농성을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스티로폼 3장과 침낭 몇 개가 전부인 농성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농성장 아닌 농성장이 만들어지면서 집회는 끝났고, 병원직원과 경찰들도 물러났습니다.

날이 저물고 민주노총 간부가 사온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부러진 안경을 테이프로 붙여서 쓰고 나서야 다친 사람들 걱정이 되었습니다.

위원장과 민주노총 간부와 같이 앉아서 다친 사람들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조직부장이 팔걸이를 두른 손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손가락을 조금 다친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참아왔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물망을 쳐서 낮의 햇볕을 피하는 스티로폼 농성장에서의 생활도 곧 적응이 되어갈 만 하니까 조합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뭔가 심각하다는 생각에 조합원들에게 연락을 해서 퇴근 후에 보자고 했지만 3명만이 모였습니다. 회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조합원 명단을 보여주면서 탈퇴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원장과 조직부장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조합원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조합원들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런 조합원들한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뭐라고 해야 될 것 같아서 “많이 힘들겠지만 조그만 참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힘이 못 되서 정말 미안해요”라고 했더니 힘없이 알았다고 하더군요.

조합원들 손을 꼭 잡고 보내고 나서 멍한 눈으로 병원을 바라봤습니다.



며칠 후에 다시 집회가 열렸지만 모인 사람들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은 50명 정도였습니다. 병원 안에는 경찰이 100명 정도 있었고요.

뭔가 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나는 마이크를 잡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지역에서 온 몇 사람이 얘기를 하고 마지막에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인생 후반기에 먹고 살아보려고 병원에서 온갖 쓰레기를 치우던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의 인생은 쓰레기입니까? 우리가 도대체 무슨 대단한 잘못을 했기에 여기 이렇게 쓰레기처럼 버려져야 합니까? 원장님, 똑똑히 보세요! 이 사람들은 쓰레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위원장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경비실 쪽으로 다가가서 돌을 하나 집어 던졌습니다.

경비실 유리창이 깨지고, 곧 경찰들이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위원장은 다시 우리들 앞으로 왔습니다.

“저는 이 싸움을 책임지는 위원장입니다. 그런 제가 바로 지금 경찰이 보는 앞에서 병원 시설을 훼손했습니다. 위원장으로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유리창 하나로 끝나지만, 병원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날 집회는 그렇게 끝났고, 위원장은 며칠 후에 체포되어 구속됐습니다.



조직부장과 함께 밤에는 농성장에서 자고 낮에는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런 가운데 청소 아주머니 4명이 해고되고, 일부 청소 일이 하청업체에 넘겨졌습니다.

해고된 사람 중에 조합원이 있어서 만났더니 하루라도 빨리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형편이라서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더 이상 붙잡을 자신이 없어서 그냥 보냈습니다.

위원장 면회를 가서 그 얘기를 덤덤하게 했고, 위원장은 “지부장님이 많이 힘드실 텐데 힘이 돼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더군요.

이를 꽉 물었습니다.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추석에도 농성장을 지켰습니다.

조직부장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같이 농성장을 지켰습니다.

오후가 되니까 명정을 일찍 마친 위원장 가족들이 먹을 것들을 들고 농성장으로 오더군요.

위원장 부인 손을 잡고 나 때문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 사람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아니에요. 지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라고 하고는 내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저녁이 되니까 열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누가 윷놀이나 하자면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칼로 깎아서 윷을 만들었습니다. 세 팀으로 나누어서 신나는 길거리 윷판이 벌어졌습니다. 환자 몇 사람도 밖으로 나와서 구경을 하더군요.

밤늦은 시간까지 술도 마시면서 울고 떠들면서 조용한 거리를 독차지해서 놀았습니다.



위원장 변호사 비용이나 앞으로 나올 벌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일호프를 하기로 해서 또 열심히 준비하던 어느 날 조직부장이 환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부장님, 제가 전해드릴 소식이 있는데 바쁘시면 나중에 말씀드릴까요?”라고 하기에 감이 왔습니다.

침착해지기 위해서 심호흡을 하고 “결과 나왔어?”하고 물었습니다.

조직부장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고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읽었습니다.

지방노동위원장에서 보내온 몇 장의 서류에서 “부당해고”라는 네 글자 외에 다른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을 읽고 나서야 나는 조직부장을 껴안고 말을 했습니다.

“나 지금 울고 싶은데 이 싸움 끝날 때까지 울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위원장 나오면 참아왔던 거 다 울 거야. 정말 고마워.”

일일호프는 복직판결을 환영하는 축하자리가 됐고, 나는 일일이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못 마시는 술도 꽤 먹었습니다.

면회실 창살 뒤에서 축하한다며 입이 찢어져있던 위원장 얼굴이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조직부장이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승소를 하더라고 병원이 불복하면 중앙노동위원회로 가고, 거기서 끝나지 않으면 법원으로까지 가서 해고싸움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미리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복직판결을 받아들이겠다며 양보하는 척하더니 복직을 며칠 앞두고 인원이 다 차 있기 때문에 당분간 집에서 대기발령하라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또 얼마나 험난한 길이 남아있을까 막막하더군요.

자택 대기발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 출근을 시도했지만 젊어진 경비와 병원직원들이 막아서더군요.

그렇게 다시 출근투쟁이 시작됐습니다.



다시 찬바람을 맞으며 출근투쟁을 한지 얼마 지난 10월말 위원장은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두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위원장이 나온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씩 줄어드는 속에 나는 해고자 아닌 해고자 신세가 됐고, 조합원은 다 떨어져나갔고, 병원의 구조조정은 계속 진행됐고, 교섭은 다시 열리지 않는 상태가 계속 됐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지 논의하기 회의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이날 회의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대학 경비 일을 하고 있어서 근무 때문에 자주 나오지 못한다던 사무장이 유난히 말이 많았는데,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습니다. 조직부장의 사소한 일실수를 거론하기도 하고, 노동조합이 한 지부 일에는 너무 올인 한다고 하더니, 위원장이 무모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투쟁도 꼬이고 노동조합도 정체되는 거 아니냐고 몰아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조직부장이 투쟁할 때 어디에 있다가 지금 그런 소리를 하냐고 화를 냈고, 이에 질세라 사무장도 투쟁은 혼자만 했냐면서 서로 고함이 오갔습니다.

위원장이 상황을 진정시키고 지부장들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24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도 열심히 해줬던 간병인지부장도 서로 힘을 합쳐서 잘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말만했습니다.

평소 집회는 물론이고 회의에도 잘 나오지 않던 쓰레기업체 지부장은 지부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얘기하면서 노동조합이 지부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뒤를 바로 이어 사무장이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을 살피면서 가야한다고 다시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어갔습니다.

결국 이날 회의는 앞으로 어떻게 투쟁할 거냐 하는 문제는 제대로 얘기도 못하고, 위원장이 각 지부별로 돌아가면서 간담회를 하는 것만을 결정했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위원장과 밥을 먹으면서 화풀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위원장이 내 얘기를 듣다가 “지부장님, 여기도 깨끗한 학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지부장님도 앞으로 이런 일들 많이 겪으실 텐데 어떻게 하죠?”라고 하더군요.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러려니 해왔지만, 뭔가 다를 줄 알았던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니까 한숨만 나오더군요.



병원을 압박하기 위해 이런저런 내용을 알아보고 있는데 병원에서 갑자기 교섭을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약간 의외다 싶은 마음으로 교섭에 나갔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교섭장에 나온 총무부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동안 병원에서는 복직판결도 수용하는 등 원만한 교섭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사권을 침범하는 노조의 행위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병원으로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마지막으로 노조측에 병원의 입장을 알립니다”라고 하더니, 지부장인 저는 계약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자동으로 계약해지가 됐고, 그에 따라 병원에는 조합원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노조와 협의를 가질 대상이 아니라고 발표하고는 자리를 나가버렸습니다.

너무 어의가 없었지만 병원의 태도는 아주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질긴 놈이 이긴다는 생각으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법적으로 불리하기는 하지만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고 해서 여기저기 서류를 작성해서 보내고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가운데 출근투쟁만 이어갔습니다.

지역에서는 있는 어느 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한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해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갔습니다.



다시 새해가 시작됐지만 하루하루가 점점 힘들어져 갔습니다.

아침에 출근투쟁을 하고 노조 사무실에 가서 같이 있는 것이 전부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위원장은 아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병원에서 살고 있었고,

조직부장은 대학 경비지부와 식당지부 수당삭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라붙어 있었고,

지역사람들의 한쪽은 산재사망문제에 매달리고 있었고,

또 한쪽은 민주노총 선거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이곳저곳을 다니기는 하지만 마음은 심란해져만 갔습니다.

이렇게 시간만 보낸다고 뭔가 해결책이 생기는 건 아닌데 하면서도 답은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 몇 달은 또 어떻게 버텨본다고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됐고,

점점 늙어 가는데 어떻게 살아가야지 하는 것도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밤에 잠은 오지 않고, 몸과 마음만 지쳐갔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있었지만 노동조합은 계속 겉돌고 있었습니다.

사무장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위원장은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성과 없는 논쟁과 잡다한 일에 조직부장은 점점 지쳐갔고, 그런 조직부장에게 내 고민을 하소연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예민해져갔고, 말 하나 하나 신경을 써서 해야 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불면증이 깊어져서 병원을 다니면서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해고된 지 1년이 지나서 다시 봄이 찾아온 4월 초순 조직부장이 노동조합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동안 위원장과 많은 얘기를 해왔지만 결국 그만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직부장은 20대 후반에 노동운동을 시작해서 1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켰다고 했습니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쉬고 싶다고 얘기하는 조직부장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한참은 어렸지만 항상 내 얘기를 들어줬고, 내 투정도 받아줬고, 이것저것 많은 것도 가르쳐주고, 나를 위해 울어주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위원장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조직부장이 노동조합을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막막했습니다.

다시 세상에 외톨이로 서야하는 기분이었지만,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약해지는 부당하다고 제기했던 소송은 점점 불리하게 진행됐고,

병원은 입구에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하면서 더욱 기고만장해갔고,

노동조합은 위원장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고,

저는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위원장이 결단을 내리자고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서 싸워보자고 했습니다.

화창한 5월의 봄기운 속에 위원장과 저는 병원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단식농성을 시작하자 지역에서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병원도 긴장을 해서 젊은 경비들을 늘렸습니다. 그런 기운 속에 집회도 열고, 기자회견도 하고, 시민들에게 유인물도 돌리고 하면서 다시 모아봤습니다.

하지만 병원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고, 노동조합은 사무장을 중심으로 투쟁 방식에 시비를 걸면서 적극적이지 않았고, 지역 사람들도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식이 보름이 되면서 단식투쟁을 접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위원장이 몇 차례 병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도를 해봤지만, 병원 경비 숫자만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단식이 20일을 넘기면서 여성단체와 보건의료단체 등에서 문제해결을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노동조합 안에서는 단식투쟁을 접어야 한다는 얘기가 점점 강해졌습니다.

결국 24일 만에 단식투쟁은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단식투쟁을 끝내고 몸을 추스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도 돌아봤고, 노동조합 하면서 겪었던 무수한 일들도 생각했고,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려봤습니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많이 기대려고 해왔었지만, 그 사람들도 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욕심 없이 살아보려고 하면, 이 사람에게 치이고 저 사람에게 치일뿐이어서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뭔가 용기를 해서 싸워도 봤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힘들고, 저렇게 살아도 힘든 것이 인생이더군요.

어차피 힘든 인생이라면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병원과 싸워보고 싸움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위원장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식투쟁을 중단한지 5일 만에 저는 조용히 병원 앞으로 와서 단식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병원은 다시 입구에 경비들을 늘리기 시작했고,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위원장과 노조사람들은 단식을 말렸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그러니까 1주일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위원장도 같이 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끝까지 반대해서 위원장은 단식은 하지 않고 옆에서 농성만 하기로 했습니다.

역시나 노조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지역 사람들도 몇몇이 돌아가면서 농성장을 찾아올 뿐이었습니다.

나는 매일 같이 병원으로 들어가려고 경비들과 실랑이를 벌였지만 제대로 실랑이도 벌이지 못했고, 어느 순간 병원 경비들은 짧은 머리의 건강한 청년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5일이 지나서 어떻게든 병원 로비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병원 뒤쪽 담을 넘어서 로비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끌려나지 않기 위해서 끈으로 몸을 기둥에 묶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용역경비들이 달려왔고, 나의 비명과 몸부림은 젊은 용역깡패들의 힘에 금방 눌려버렸습니다.

끈은 금방 풀렸고, 앞에서 두 명이 팔을 잡고 뒤에서 한 명이 다리를 잡은 채 들려나오게 됐습니다.

병원 입구에서는 위원장이 경비들에게 막힌 채 혼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요.

그때 내 다리를 들고 있던 놈이 내 다리를 벌려서 그 놈의 아랫도리를 갖다 대고는 “씨발년아, 어때 기분 좋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이 노래졌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초가 지나서 눈이 보이고 귀가 들려왔습니다.

위원장은 괜찮냐고 그러고 있고, 나에게 그 짓을 했던 놈이 나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습니다.



단식과 농성은 그날로 정리가 됐고, 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 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가 떠올랐습니다.


30대 초반 때 한 남자와 같이 살림을 살았습니다. 물론 좋아했으니까 같이 살았겠지요.

그 남자와 살면서 시간이 지나니까 그 남자는 조금씩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고, 내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회식을 하고 사람들과 기분 좋게 어울리다보니 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 집이 있는 골목길에 접어들었는데 집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약간 무섭기는 했지만 집 앞이라고 그냥 다가갔더니 그 남자는 동거인이었고, 표정은 매우 차가워져 있었습니다.

“왜 이제야 들어와?”라는 그 남자의 말에 나는 지레 주눅이 들어서 회식을 하다보니까 늦었다고 대답을 했고, 그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남자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왔습니다.

다시 그 남자는 “왜 연락도 하지 않았어?”라고 물었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남자의 주먹이 다시 얼굴로 날아왔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남자는 “죽고 싶냐?”라고 물었고, 나는 그 남자의 주먹이 다시 날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무서웠습니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주먹이 다시 얼굴로 날아왔고, 생각했던 순간 주먹이 날아오니까 목에서 비명이 나오려고 했고, 소리가 나면 그 남자가 흥분해서 더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순간적으로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곧 돌려버리고는 가던 길을 그래도 가버렸습니다.

“들어가!”라는 그 남자의 명령에 나는 겁에 질린 상태로 집에 들어왔고, 남자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안에 멍하니 누워있던 나는 남자가 들어오는 소리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서 누워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발로 힘차게 내 배를 찼습니다. 또 비명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나는 급히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밤새도록 20년 전 그 남자와 병원에서 웃던 그 남자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졌던 일은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여성단체들이 난리가 나서 기자회견, 집회, 고소고발, 진정, 성명서 등등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자체 조사결과 그런 일이 없었다면서 발뺌을 했고, 용역업체 직원들도 다른 직원들로 바뀌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역시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지역에서도 점점 여성단체들의 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서 반짝했던 관심도 줄어들고, 여성단체들도 하나 둘 씩 참여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더 힘든 여름이 지나서 다시 가을로 계절이 바뀌더군요.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서 10월이 되자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가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위원장을 계속했던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사무장이 나가겠다는 뜻은 미리부터 보였습니다.

주위에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몇몇은 은근히 위원장이 한 번 더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습니다.

위원장도 고민을 많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위원장 선거가 다가오자 위원장은 출마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고, 사무장이 쓰레기차량지부장을 사무장 후보로 해서 등록을 했습니다.

별 탈 없으려니 했던 선거운동은 이상하게 과열됐습니다.

위원장 후보로 나온 사무장이 전직 위원장이 너무 독선적이고 무모했다고 하면서 조합원들에게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노동조합 재정운영이 불투명하다면서 이런저런 문제를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노동조합 재정은 조직부장이 맡아서 관리해오고 있었는데, 조직부장이 그만두면서 위원장이 임시로 내게 일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오는 노동조합도 아니라서 어려울 것 없었고, 위원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위원장과 내가 농성을 하기 시작하면서 돈은 들어오고 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꼼꼼하게 기록하고 영수증 처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그 점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일이 해명을 하기 시작하니까 그 해명에 대해 또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더 꼬여갔습니다. 그러면서 험한 말들이 서로 간에 오가기 시작했고, 선거는 난장판이 돼 갔습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위원장이 모든 책임은 위원장인 자신에게 있다면서 선거 이후 진상조사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서 정리가 됐습니다.



선거는 끝났고, 새로 뽑힌 위원장은 나름대로 노조활동에 대한 설계를 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재정문제는 조용히 넘어가버렸고, 신임 위원장이 각 지부별 간담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지부야 나 혼자 뿐이어서 형식적이지만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서로 너무 잘 아는 상황이어서 특별히 할 얘기는 없었지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신임 위원장이 “이번 집행부는 노동조합 전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지도하는 노동조합이 아니라 지부별로 움직이는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부장님도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건이기는 하지만 지금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지부계획을 내주시면 다른 지부들과 함께 조율하려고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기 때문에 알았다고만 했지요.

그러고 나서 전 위원장을 만났습니다.

상황을 얘기했더니 위원장은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보죠”라고 할뿐이었습니다.



다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초 성폭력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미 재판진행과정에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폭력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협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날 집으로 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곰곰이 했습니다.

다음날 신임 사무장에게 전화를 해서 노동조합을 탈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 위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탈퇴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제 저에게 복직이라는 목표는 지워졌습니다.

이 나이에 팔자 고칠 일도 없고, 기댈 자식도 없습니다.

나이 육십을 바라보고 있는 저에게 이제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생겼습니다.

법도, 노조도, 여성단체도 심판하지 못했던 그 놈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아니면 내가 살아있을 동안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놈을 무릎 꿇려 놓고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때 기분이 좋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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