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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부당거래=범죄와의 전쟁

 

숨 돌릴 틈도 없이 추운 날씨가 이어지는데, 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드는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기가 힘들어서 영화를 보러갔다.

요즘 개봉하고 있는 영화 중에 ‘부러진 화살’은 봤기 때문에 딱히 끌리는 것은 없었지만, 최근에 ‘범죄와의 전쟁’이 잘나간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보기로 했다.

그저 시간 때우기에 적당한 영화이기를 바라면서...

 

영화가 시작하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조직폭력배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기사화했던 당시 사진이 다큐멘터리처럼 짧게 펼쳐졌다.

이외로 뭔가 진지한 사회적 메시지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느껴졌다.

그리고 영화는 80년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시작했다.

정말 공들여서 당시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연기 잘 하기로 소문난 최민식과 하정우를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연들의 연기마저도 장난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조폭을 중심으로 한 비리 공무원과 관료들의 모습들도 약간 과장된 듯 하면서도 현실적인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캐릭터들이 얽히고설켜서 재미가 있었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비정한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축약해 보여주는 이야기 구조도 좋았다.

2시간이 조금 넘는 런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였다.

일부 엑스트라들의 인형 같은 어색한 연기와 너무 어설픈 액션 연기들이 옥의 티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찾을만한 영화임에는 분명했다.

작품성 높은 영화도 아니면서도 너무 상업성에만 치우지지 않은 대중의 기호를 만족시키기에 적당한 영화였다.

 

익숙하지 않은 감독의 개봉영화였는데, 영화가 많이 익숙했다.

조폭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의리를 저버리는 비열한 모습을 복고적인 분위기 속에 보여주는 ‘친구’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 ‘짝패’ 같은 영화들이 무수하게 떠올랐다.

거기에 더해서 더러운 권력관계로 지배되는 세상을 살아있는 캐릭터들로 보여줬던 ‘부당거래’ ‘도가니’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도 떠올랐다.

좀 무리해서 생각해보면,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면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찾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독립영화인 ‘계몽영화’나 ‘파수꾼’도 떠올랐다.

이렇게 무수한 영화에서 보였던 익숙한 모습들을 하나씩 지워보니 남는 게 없었다.

어차피 상업영화인데, 상업영화의 공식들을 적당하게 잘 버무려서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해주면 되는 거다.

 

또 하나의 익숙함은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었다.

나 같은 40대 남자들에게는 그때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게 해줬다.

머리스타일에서부터 복장, 세트, 액세서리까지 정말 공을 들여서 재연했다.

촬영 방식도 마치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질 수 있게 신경 썼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노래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80년대를 살았던 찐한 남자들의 감성을 살려내려는 선곡이 역력했다.

프로의 세계에서 적당함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친구’처럼 감상적 분위기와 똥폼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가기에는 너무 식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당거래’처럼 현실의 부당한 모습을 캐릭터들의 힘만으로 풀어가는 것도 류승완의 아류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효자동이발사’나 ‘그때 그 사람들’처럼 역사적 권력의 문제를 진지하게만 다루는 것도 재미없다.

그렇다고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처럼 악한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을 까발리는 것도 줏대 없이 유행을 쫓아가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오를 잡으면서도 너무 진지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의 무게에 짓눌리지도 않아야 했다.

결국, 영화가 시작할 때 보여줬던 독재정권들의 조폭소탕이라는 빛바랜 사진들에서 한 발도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각하께서 대단한 결의로 진행한 범죄와의 전쟁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정권이 깡패소탕을 명분으로 사회기강을 잡고 공권력을 강화해서 저항세력들을 억압하려는 통치전략이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주제가 되서는 안 된다.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핵심에는 타락한 독재정권이 있고, 그를 재생산하는 정치권력과 재벌이 든든하게 뒤를 받치고 있고, 그에 기생하는 부패한 공무원과 깡패들이 말단에 있다는 점도 깡패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서 살짝만 보여줘야 한다.

세상을 주무르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자는 풍만한 가슴을 살짝 보여주면서 좆이나 꼴리게 하면 되는 존재라는 점을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제기 하지 않을 수준에서 눈요기로 처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빛바랜 사진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했다.

역시 프로의 세계에서는 적당함의 미학이 중요하다!

 

추운 날씨에도 나를 포함해서 10여 명의 관객이 영화를 봤다.

관객의 대부분은 20대에서 40대의 남성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벌써 백만 명이 넘게 봤다고 한다.

앞으로도 더 많은 남성들이 이 영화를 볼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을 본 남성들이여,

적당히 가오 잡고 다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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