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오월애, 아이들, 헤어드레서

 

며칠 사이에 세 편의 영화를 봤다.

아주 감동적인 영화들은 아니었지만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오월애’는 영상자료원에서 하는 무료상영이 아니었다면 애써 보고 싶었던 영화는 아니었다.

이미 권력화되고 상품화된 광주항쟁에 대한 영화를 보고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점을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잊혀지고 있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다시 살려내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는 있었다.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평범한 주체들을 다시 불러내서 그날의 얘기와 30년이 지난 요즘의 얘기들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여타 독립 다큐멘터리와 달리 화질도 좋았고, 구성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TV용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터뷰 중심의 진행과 연출된 장면들의 연속은 많이 거북했다.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말주변이 있어야 하고, 생각들을 정리해서 자기 정리를 한 후에 나오는 얘기들이어야 하고, 이미 권력화된 문제에서는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말을 더듬거나,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현재 자신의 삶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제외되는 형식이었다.

영화에 등장한 사람들은 이미 수없이 말해왔을 당시 상황을 긴장감이나 열정 없이 다시 얘기했고, 권력화된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버렸다.

민중적 시각을 복원한다는 의도와 달리 일너 식의 인터뷰는 이미 인텔리적 형식을 강하게 갖게 된다.

 

영화 중반에 마지막 저항거점이었던 전남도청 건물 철거문제를 놓고 5.18단체들끼리 이전투구를 하는 모습이 나왔다.

권력화된 집단들의 썩어버린 악취가 이미 진동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스쳐지나가 버린 후 자살로 생을 마친 생존자에 대한 얘기로 거칠게 이어갔지만, 그 역시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 문제를 다루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을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이명박에 대한 거친 목소리는 있었지만, 김대중과 민주당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결국 광주항쟁의 주체는 민중이었다는 사실만을 다시 확인 한 채 그 주체들이 30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소외되고 있다는 점은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몇 년 전 광주시청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광주시청을 갔었던 적이 있다.

정말 으리으리한 광주시청 주변은 5.18과 민주와 김대중의 이름으로 멋들어지게 포장되어 있었지만, 나이 많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알몸으로 쓰레기처럼 내팽개쳐지고 있는 곳이 민주화의 성지 광주였다.

광주항쟁의 정신이 불의에 맞서서 총을 들고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비타협성이라면, 그 정신을 다시 담아내고자 했다면 썩어서 코와 입과 눈을 가려야 하는 그 현실을 정면으로 담아내면서 싸워야 했다.

그렇지 않은 광주항쟁 다큐멘터리는 권력화된 집단을 합리화해주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류미례 감독의 ‘아이들’은 ‘오월애’와 너무 비교가 되는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후진 카메라로 찍어서 화질도 좋지 않았고, 화면도 작았다.

삼각대에 올려놓고 감독과 아이들의 모습을 찍기도 하고, 아마추어인 남편이 찍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 딸이 카메라를 들기도 하는 등 화면구도도 엉망이었다.

셋 이나 되는 애들을 낳고 자라는 과정을 10년이나 찍었으면 분량도 많았을텐데, 영화는 70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광주항쟁처럼 큰 역사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 보육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도 아니고, 감독 개인과 가족들의 일상사를 얘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 속에서 많은 문제들을 무리 없이 담아냈다.

자기 일을 갖고 있는 엄마가 출산과 보육 과정에서 어떤 힘겨움들을 감당해야 하는지,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엄마라는 위치는 어떤 의미를 갖게 하는지, 감독의 엄마와 감독 자신과 감독의 아이들은 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떤 것들 알게 모르게 주고받는지, 보육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열악하지,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가족들과는 어떤 갈등이 생기고 서로 헤쳐 가는지, 아이들이 자라는 속에서 엄마 자신은 어떻게 변해 가는지 하는 것들이 다 담겨져 있었다.

이 많은 주제의식들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분명 류미례 감독의 내공이었다.

 

‘오월애’와 ‘아이들’이 가장 비교되는 것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들의 심리적 거리였다.

‘오월애’에서의 인터뷰는 정제되고 연출된 인텔리적 형식이었다면, ‘아이들’에서의 인터뷰는 일상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 그 자체였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어떤 눈높이에서 얼마나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속 깊은 얘기를 담아낼 수 있는 핵심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이 점에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기에 ‘오월애’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와 거리감을 갖고 웃지도 울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을 보는 관객들은 같이 웃고 울면서 영화와 호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감독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촬영을 했으면서도 정작 초점은 감독 자신이었다.

일상의 모습과 대화를 중심으로 촬영이 이뤄졌지만, 정작 영화는 감독의 나레이션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구성됐다.

감독은 결혼과 임신과 출산과 보육 과정에서 끝임 없이 자신과 아이들과 가족들을 충돌시키고 화해시키면서 얘기를 끌어갔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감독은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 했다.

서로간의 관계가 관건이 아니라 아이들과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영화였다.

한 여성학자가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들과 생활하면서 나눈 얘기를 정리한 책을 보면,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엄마들은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실현의 욕구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이들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학력 수준이 낮은 엄마들은 자기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오직 아이들에게만 정성을 쏟는다는 얘기를 했었다.

서로간의 관계를 만들고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남자이고 결혼을 하지 않은 나는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서 뭔가 허전하고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독일의 여성감독이 만든 극영화인 ‘헤어드레서’는 ‘아이들’과는 또 다른 페미니즘 영화였다.

뚱뚱하고 못생긴 중년 여성의 얘기를 다룬 영화는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편이다.

몇 년 전에 봤던 ‘어둠 속의 댄서’도 생각나고, 얼마 전에 봤던 ‘세상의 모든 계절’도 있었다.

‘헤어드레서’에 나오는 여자는 엽기적일 정도로 뚱뚱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위해 줄을 잡고 일어나야 할 정도였으니...

그 살덩이 자체를 그대로 보여줬다.

그 몸으로 옷을 벗는 장면, 목욕하는 장면, 섹스하는 장면까지 다 보여줬다.

그런 몸을 갖고 일자리를 구하지만 퇴자 맞는 모습, 자기만큼 뚱뚱한 남자가 접근하지만 거절하는 모습, 노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해주는 모습, 딸 친구의 놀리는 듯한 모습도 다 보여줬다.

이혼한 중년의 뚱뚱한 여자가 힘들게 딸을 키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엽기 포르노처럼 느껴지지도 않았고, 주인공이 불쌍하게 그려지지도 않았고, ‘미녀는 괴로워’나 ‘내겐 너무나 아찔한 그녀’처럼 환상 속의 반전이 있지도 않았고, 휴면드라마처럼 억지스러움도 없었다.

그런 몸과 환경 속에서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라면서 꿋꿋하게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아주 유쾌하게 보여줬다.

주인공을 둘러싼 현실은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눈물 나는 노력을 계속 외면하지만, 주인공은 계속 자신을 다독거리면서 헉헉거리면서도 살아간다.

배고픔과 외로움과 아픔을 참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은 웬만한 것은 참으면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뭔지 알기 때문에 자신만의 그 당당한 모습이 좋았다.

그 자체로 박수를 치게 되는 영화였다.

 

정말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영화였지만 감동을 별로 주지 못했다.

주인공이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리려다보니 그를 숨 막히게 짓누르는 삶 자체가 가벼워져 버렸다.

애써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서 만들어진 유쾌함은 처절한 몸부림마저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삶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중요한 방식은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돈을 모으는 딸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미용사로 있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동료가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불법체류 이주노동자가 어떤 고통 속에 살아가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힘들지만 함께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라고만 중얼거리면서 혼자서 버티기만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에서는 아이들과 가족들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려 했다면, ‘헤어드레서’에서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느 정도 선을 그으면서 자신만을 보듬으려고 했다.

그의 삶에 박수를 쳐 줄 수는 있지만 나와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