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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를 봣다

 

개봉한지 1년이 지난 ‘시’를 무료상영 한다는 소식에 달려가서 봤다.

이창동의 영화가 이런 저런 얘깃거리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시’만큼 논란거리를 많이 만들어낸 영화는 없었다.

이창동 영화의 색깔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기는 했지만, 1년이 지나서까지 뉴스거리를 생산하는 영화여서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역시 이창동 영화였다.

숨 막히게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이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창동의 내공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들에게 이창동이 강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웃기지 마라! 세상은 고통을 가리기 위해서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것이야!”

 

이창동의 영화는 남자들에 대한 영화다.

남자 주인공을 내세웠던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하시스’는 물론이고, 여자 주인공을 내세웠던 ‘밀양’과 ‘시’에서도 결국 남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밀양’에서는 세상살이에 닳고 닳은 속물인 송강호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전도연 주위에서 맴돌게 하면서 ‘현실 속에 살며시 숨겨진 채 드러나는 빛’을 보여줬다.

‘시’에서는 할머니와 살아가는 철없는 손자, 도우미의 손길에 의지하는 부자 늙은이, 시와 음담패설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형사, 자식문제를 돈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아버지들이 윤정희 주위에서 어정거린다.

가부장적인 이 사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 세 사람을 통해서 다 보여준다.

하지만 이 가부장적인 인물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고작 늙고 가난하고 없는 할머니를 짓밟는 것일 뿐이다.

홍상수였다는 직설적으로 얘기했겠지만, 이창동은 관객들이 느끼게만 한다.

홍상수는 ‘생활의 발견’에서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지만, 괴물이 되지는 말자”고 얘기했고, ‘극장전’에서는 “생각하면서 살자”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이창동의 ‘시’를 보고 나서 내 머리 속에 맴도는 말은 “좆도 아닌 것들아, 가오 잡지 마라!”였다.

 

그런데 ‘시’는 좀 지루했다.

이창동의 영화를 보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영화시간이 길어서도 아니고, 아주 극적인 반전이 없어서도 아니고, 빠른 호흡의 영화들에 익숙해져서도 아니다.

기존의 이창동 영화화는 조금 다른 호흡이 있었다.

 

영화가 지루하게 다가왔던 첫 번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여주인공 윤정희의 연기력 때문이다.

이창동 영화는 전형적인 리얼리즘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힘이다.

‘시’에서는 할머니 양미자의 힘겨움과 아픔을 같이 느껴야만 영화에 좀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윤정희의 연기는 온통 ‘척’하는 연기뿐이었다.

예쁜 척, 힘든 척, 외로운 척, 고통스러운 척...

대사로서가 아니라 상황과 연기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이창동 영화에서 ‘척’하는 연기는 심한 결함이었다.

단역으로 나온 연기자들은 한숨소리까지 리얼해서 원래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는데...

관객에게 그 고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영화에 빠져들겠는가?

 

또 하나의 이유는 감독에게 있었다.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시’에서는 할머니를 둘러싼 상황에 집중하기 보다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강하게 집착한다.

현실과 상황을 솔직하게 까발려 놓는 그 자체로 역사와 사회와 종교와 예술에 대한 질문들을 관객들이 하게 만들었던 기존의 방식하고 달랐다.

숨 막히는 할머니의 상황을 한 축으로 하고, 시에 대한 질문을 하는 상황을 한 축으로 하면서 두 축을 왔다 갔다 했다.

물론 둘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는 했지만, 관념과의 싸움을 강하게 드러냈다.

‘밀양’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신과의 싸웠다면, ‘시’에서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시라는 개념’과 싸웠다.

물론, 관념과의 싸움이 관념의 세계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된 시라는 것은 관념적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힘겨움을 잊기 위한 도피처도 아니다. 우리가 힘겹게 살아가는 그 현실 속에서 살며시 스며나오는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감독의 주제의식이 조금은 헛도는 이유였다.

자신의 영화관을 너무 강하게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감독은 치열했을지 모르지만, 관객들은 조금 힘들고 지루했다.

 

이창동 영화에서 깊이는 여전하지만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초록물고기’는 인간을 껌 씹듯이 씹다가 단물 빠지면 그냥 뱉어버리는 냉정한 세상에 정면으로 달라붙어서 싸웠다. 그래서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박하사탕’에서는 용서하기 어려운 가해자의 비극적 최후를 보여주면서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꾸로 돌려버려서 순수했던 시절의 눈물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역사와 화해를 해버렸다.

‘오아시스’에서는 장애인과 양아치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생생하게 드러냈지만, 그들의 사랑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냉정한 현실을 애써 해피엔드로 포장하면서 사회적 편견과 화해를 했다.

그 이후 역대 정권 중에서 가장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의 초대 문화부장관이 되면서 개혁적 문화정책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스크린쿼터 축소를 받아들이는 영화인 출신 장관으로서 기록을 남겼다. 그렇게 신자유주의 정책과 화해를 했다.

그 이후 나온 ‘밀양’와 ‘시’에서 이창동은 더 이상 역사와 편견과 차별 등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현실의 고통의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주인공들은 외롭게 고립돼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혼자서 모든 것들을 참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아닌 신과 시를 찾는 것이었다.

‘밀양’에서부터 영화의 호흡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시’에서는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렇게 이창동의 영화는 현실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면서도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상과 한 판 제대로 붙어볼 것처럼 폼을 잡다가 개인적 복수에 집착하더니, 결국 관념의 세계로 빠져버린 박찬욱이 더욱 안쓰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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