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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괜찮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제목 그대로 늦가을의 스산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기에 충분했다.

세상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외로움과 상처를 보듬어 안는 따뜻한 시선도 좋았다.

감독의 연출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두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지나갔다.

꽤 오래전 작품을 리메이크한 만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가하면, 세련된 현대적 감각도 균형감 있게 잘 어우러졌다.

 

그런데 전형적인 가을 영화가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 개봉한 것은 좀...

가을 분위기에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겠고...

개봉하지 못할 뻔 했던 영화가 현빈 효과로 개봉하게 된 것도 한계라면 한계일 텐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씁쓸했던 것은 현빈 효과라는 점이었다.

감독이 아주 유명한 감독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작 영화에서 이래저래 반응도 괜찮았고

남녀 주인공도 이름값을 하는 배우였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그런대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는데

다른 흥행성 영화들에 밀려 개봉을 하지 못하다가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현빈이 뜨니까 그 덕에 뒤늦게 개봉했다는 것은

한국영화산업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젊고 유능한 시나리오 작가가 배고픔과 병 때문에 죽는 거다.

 

그런데 막상 영화 속에서의 현빈은 빈약했다.

탕웨이와 현빈을 남녀 주인공으로 한 전형적인 멜로영화였는데

탕웨이는 망설이는 눈빛, 오만감정이 다 들어가 있는 표정, 키스씬에서의 숨소리까지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현빈은 멋있는 몸매와 특이한 헤어스탈일 밖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탕웨이의 전작인 ‘색계’와 비교하면 현빈의 연기는 더욱 초라해보인다.

‘색계’에서도 탕웨이는 ‘만추’를 능가하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연기력도 상대배우로 나왔던 양조위의 연기력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했다.

양조위와 현빈을 비교해보면...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이 영화가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했다가 상을 타지 못했다고 했다.

딱 그 정도 수준의 영화였다.

남녀 배우의 캐스팅과 촬영지 등 처음부터 글로벌한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영문자막을 사용한 점도 영화제를 강하게 의식했음을 보여줬다.

당연히 영화제용 영화에서 보이는 법칙들도 심심치 않게 쓰였다.

그렇게 잔득 힘이 들어가다 보니까 곳곳에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강했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상관없는 상황과 대사의 작위성은 관객이 영화에 빠져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멜로영화는 감정이입이 가장 중요한데 작위성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감독의 강한 자의식이었다.

영화 ‘파주’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자의식에 짓눌려서 시종일관 영화를 칙칙하고 무겁게 만들었는데

‘만추’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자의식을 감추듯 보여주려고 하다보니까 애써 감추는데 급급해버렸다.

배우들의 눈동자와 표정, 안개에 싸인 시애틀의 거리에서 보일듯 말듯 하던 주제의식과 자의식은 결국 늦가을의 정취에 묻혀서 사라져 버렸다.

배우들의 연기가 2% 아쉬웠던 것도 있지만, 감독의 연출에서도 2% 아쉬웠던 점이 그 점이다.

여운은 남기지만 곱씹을만한 거리는 전혀 없었다.

 

또 감독의 자의식이 강한 영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조연들의 엉성함이다.

감독의 자의식이 주연에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니 조연들의 비중은 거의 악세사리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주연들의 내면의 상처와 고민을 드러내기 위해서 조연들은 지나치게 속물이 되거나, 허풍쟁이가 되거나, 속없는 사람이 되거나, 욕심쟁이가 돼야 한다.

‘파주’도 그랬고 ‘만추’도 그랬다.

‘아저씨’에서는 조연들의 악랄한 연기가 뛰어났기 때문에 정의감에 불타는 원빈이 더 돋보일 수 있었는데

‘만추’에서는 조연들이 너무 어색했기 때문에 현빈의 연기 내공이 더 빈약해 보였고

그것을 메우느라고 탕웨이 혼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만추’가 이런 저런 아쉬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표현해낸 좋은 영화인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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