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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거래' 봤다

 

류승완 영화는 별다른 기대를 갖지 않고 편하게 보면 생각보다 좋고, 기대를 갖고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부당거래’ 역시 그랬다.

 

류승완 영화의 변화와 진전이라고 떠들어서 살짝 기대를 갖고 영화를 봤다.

캐릭터들의 자신만의 색깔을 진하게 뿜어내면서 살아 움직이는 류승완 영화의 힘은 여전했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력도 뒷받침이 됐다.

멋있는 액션장면을 극도로 자제하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 중심으로 영화를 끌어가는 것이 기존 류승완 영화와는 분명히 달랐다.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이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류승완이라는 이름을 몰랐을 때 봤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는 폭력적인 세상을 향해 가장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영화였다. 정말 리얼했고, 그만큼 치열했다.

그 다음은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부터 뜬금없이 장품을 쏘기도 하고, 잘 나오지 않는 눈물을 짜가면서 주먹을 날리기도 하고, 짝을 이뤄서 폼만 잡다가 끝나기도 했다. 재미도 있고, 멋도 있었는데, 치열함은 사라져버렸다.

 

이런 점을 고민했는지 ‘부당거래’에서는 류승완의 초기 영화가 보여줬던 리얼함과 치열함이 변화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폭력적인 세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리얼한 액션 대신에 리얼한 권력관계를 알몸 그대로드러냈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의 이면에는 폭력을 조종하는 권력이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진전이다.

‘폭력’ 그 자체보다는 ‘폭력적인 권력’을 시종일관 강조하면서 그런 권력에 맞서는 치열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리얼함과 치열함은 거기까지!

현실을 반영하는 캐릭터들은 캐릭터 자신이 힘을 갖다보니 너무 강해져버려서 현실과 달라보였다. 과장이든 비약이든 현실과 유리되기 시작한 캐릭터들은 현실과 점점 멀어지면서 그들만의 판타지 세상을 만들어갔다.

캐릭터들이 자립해서 움직이는 판타지 세상에서 ‘폭력적인 권력관계’는 ‘단순한 게임’이 돼 버렸고, 게임이 진행되면 될수록 리얼함과 치열함은 단순한 게임의 법칙 속에서 사라져갔다.

결국, 후반부에 가면서 감독은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캐릭터들도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지루해져버렸다.

힘이 빠진 감독은 타협을 해버렸다.

권선징악!

폭력적인 현실은 결코 선하지 않고 악을 제대로 심판하지 않지만, 힘 빠진 리얼함과 치열함은 어정쩡하게 악을 심판한다.

그래도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짝패’의 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결말로 마무리를 한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다’

이미 힘을 잃은 주제의식은 맹맹해져버렸다.

류승완의 변화는 그랬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에서 속물적인 소시민의 이중성을 까발리고 조롱하는데서 나아가 삶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성찰이 관조적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홍상수는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삶을 성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처음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홍상수는 진전이었지만, 류승완은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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