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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영화 '혜화, 동'

 

오래간만에 사우나를 하러갔다가 신문을 봤는데 ‘혜화, 동’이 제주에서 상영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한 독립영화단체에서 영화관을 빌려서 심야시간대에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망설였다.

워낙 소문이 좋아서 보고 싶기는 했지만

영화가 끝나면 택시를 타고 와야 하는데...

영화 한 편 보는데 2만 원 이상 들여야 하는 게 부담이기는 했지만

제주도에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기 때문에 보기로 했다.

 

상영관이 80여 석 규모의 작은 곳이어서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까 화면이 약간 작아서 사람들이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낮술’을 봤을 때도 화면이 선명하지 않아서 조금 불편했는데

이 영화는 화면이 작아서 조금 불편했다.

독립영화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영화는 정말 깔끔했다.

시종일관 클로즈 샷으로 촬영했는데도 어색하거나 어지럽지 않았고

다른 독립영화에서 보이던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도 없었고

편집과 음악도 세련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버려진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유기견들을 지저분하고 고통스러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젊은 감독다운 발랄함이 중간 중간 드러나면서 분위기를 살짝 가볍게 해주는 것도 좋았다.

복잡한 사건 구조나 현란한 테크닉이 없는 영화였지만

두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다르덴 형제와 이와이 순지의 냄새가 많이 났다.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이들’처럼 숨 막힐 것 같은 사회의 무거운 현실은 없었고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처럼 잘 짜여진 탄탄한 이야기 구조는 아니었다.

현실의 무게가 없었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슬픔이 가슴 깊이 다가오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이야기 구조가 약간은 어설펐기 때문에 감정을 빨아들이는 힘도 약했다.

하지만 젊은 독립영화 감독의 장편 첫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한 영화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하다가 실수로 아기를 낳았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버려진 아이를 나중에 찾는다는 얘기는 사실 진부하다.

그런 진부한 얘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감동하게 만드는 힘은 연출력이었다.

진부한 얘기도 세련되게 연출하면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돌아오는데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7명의 가수들이 기존 노래를 편곡에서 공연을 하고 관객들의 평가로 등수를 매겨서 한 명을 탈락시키는 연애오락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서바이벌이라는 경쟁방식과 실력 있는 가수들의 멋있는 공연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립스틱 짖게 바르고’를 김건모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면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노래가 되고

‘무시로’를 백지영이 부르면 가슴 절절해지는 발라드가 된다.

진부한 노래들도 실력도 있고 외모도 되는 가수들이 멋을 내서 부르면 박수가 나온다.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은 떨어뜨려야 하는 살벌한 경쟁은 칼날이 되어 뒤를 노리고 있다.

이런 살벌한 경쟁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고

카이스트 학생들은 연이서 자살을 하고 있다.

이 프로는 실력과 외모를 바탕으로 멋을 부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을 미화한다.

 

‘혜화, 동’을 보고나서 야간 불편했던 것이 그런 점이다.

실력 있는 젊은 감독이 잔득 멋을 부린 영화였기 때문이다.

다른 독립영화였던 ‘낮술’은 젊은 감독의 솔직하고 발랄함이 잘 살려서 호응을 얻었다.

‘낮술’은 멋 부리는 걸 포기하고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승부했다면

‘혜화, 동’은 젊은 세대의 고민과 아픔을 포기하고 세련된 멋으로 승부했다.

여 주인공의 예쁜 얼굴이 처음부터 끝까지 클로즈업 되면서 불편했던 것이 그런 점이다.

예쁜 애들은 제대로 공감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울면 내 감정도 울컥해지지만

못생긴 애들이 우는 장면을 클로즈업 하면 궁상맞아 보인다.

그래서 예쁜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클로즈업 장면이 많지만

예쁘지 않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사건과 현실에 비중을 둔다.

배우 얼굴 보면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인지

배우들이 연기하는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인지

민용근 감독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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