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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옥희의 영화’에서부터 새로운 패턴의 영화를 하기 시작한 홍상수 감독이 ‘북촌방향’에서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더니 ‘다른 나라에서’ 좀 더 자유로운 철학자의 내공을 보여줬다.

 

한국 배우들은 권해효를 제외하고는 모두 홍상수의 영화에서 한 번 씩은 나왔던 배우들이고, 모두가 기존 홍상수 영화에서 보여줬던 인물들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달랐다면 이자벨 위페르라는 프랑스 배우를 주인공으로 썼다는 점인데... 연기 잘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배우였지만, 한국에서는 낮선 배우를 데려다 놓고는 어설픈 영어 연기를 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 과정도 어설펐고, 극중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했던 세 명의 안느의 연기 역시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많았다. 일상 속의 감정의 변화를 생생하고 날카로운 대화를 통해 풀어가는 홍상수식의 영화에서 이렇게 어색한 대화들이 오간다는 것 자체가 의외였고, 칸느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여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연기에서는 세계적 인정을 받은 배우가 낯선 2류 배우처럼 어설픈 연기를 보여준다는 것도 의외였다. 물론, 한국 배우들의 연기는 어설픈 영어 대화를 제외하고는 홍상수 영화답게 생생하고 자유롭고 날카로웠다. 그만큼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배우 또한 그런 감독의 요구에 맞춰서 어설픈 연기를 정말로 어설프게 해내는 것도 자신감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그 어설픔이 자신감과 자유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 홍상수의 내공이었다.

 

‘옥희의 영화’ 이후 시간을 비틀기도 하고, 역할을 마구잡이로 바꿔버리기도 하고, 비슷한 인물이나 상황을 반복하면서도 조금씩 작위적인 변화를 주면서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는 등 자유로운 철학적 시도가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동일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안느를 등장시키면서 등장인물들이 역할을 바꿔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세 개의 에피소드는 서로 간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효과를 내고 있는 아주 독특한 홍상수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용상 분명히 밤 장면인데도 촬영은 훤한 대낮에 한다거나, 대중에게 공자와 맹자의 철학을 얘기하던 이미지가 강한 김용옥을 스님으로 등장시켜서 불교인지 도교인지 모를 애매한 얘기를 주고받게 하는 등의 파격도 과감하게 시도한다.

정말 자유롭게 넘나들며 놀고 있었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다가 꿈을 깼는데 자신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인간이 된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철학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이렇게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면서도 홍상수의 영화가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은 이유는 일상에 깊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면서 철학적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면 되는 철학적 영화였던 것이다. 그것이 소시민적 삶의 일상성과 10년을 넘게 싸워왔던 그의 영화가 질적인 변화를 보이면서 내뿜고 있는 내공이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봤던 홍상수 영화 중에서 가장 무미건조한 영화였다.

일부러 어설픈 영어와 연기를 주문하기는 했지만 그 어설프고 작위적인 상황이 일상 속으로 날카롭게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오히려 일상을 낯설게 하고 있었다. 그런 낯섦을 통해 삶을 거리두면서 바라보게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 거리두기가 철학적 자유로움을 주기는 했지만 삶 속의 치열함을 없애버렸다.

‘하하하’까지 보여줬던 방식의 날카로움과 치열함이 홍상수 영화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에서는 그 날카로움과 치열함이 철학적 깊이를 더하면서 더 치명적이었는데, ‘북촌방향’과 ‘다른 나라에서’는 삶과 싸우기보다는 삶 속에서 자유롭게 노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온통 캐릭터들로만 승부를 하는 한국영화에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삶을 얘기하는 감독은 이창동과 홍상수가 유일했다.

이창동 감독이 사회적 주제에서 점점 추상적 주제로 넘어가면서 철학적 깊이가 깊어지는 대신 현실의 삶 속의 날카로움이 무디어가는 것처럼, 홍상수 감독도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상 속의 작은 주제에서 삶 속의 큰 주제로 시야를 넓히면서 철학적 자유로움이 커지는 것에 비례해 일상의 치열함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것도 치열하게 영화를 만들어왔던 감독이 나이가 들고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과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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