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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감독의 영화 두 편

더위를 피하기에 가장 좋은 곳 중에 하나가 영화관이어서 일주일 사이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캐빈에 대하여'와 '씨스터'를 봤는데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여성감독의 영화였다.
여성감독들이 즐겨서 다루는 가족 간의 관계라는 주제를 다루는 두 영화는 비슷한듯 하면서도 다른 색깔을 보여줬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캐빈에 대하여'는 과거와 현재가 왔다 갔다 하면서 매우 불편하게 진행됐다.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정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엄마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들이 자라면서 엄마와의 관계는 더욱 불편하고 불쾌하게 악화되지만, 엄마는 끝임 없이 아들을 이해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노력을 비웃으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됐고, 마지막에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영화가 반쯤 지나고 나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가지 아들이 엄마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런 속에 엄마는 얼마나 힘들어했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임 없이 엄마를 괴롭히는 캐빈은 엄마의 자의식이었다.
결국 이 영화는 가족의 관계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자식인의 자의식에 대한 영화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떠오르는 영화가 '블랙스완'과 '멜랑콜리아'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끝임 없는 강박관념에 대해 얘기했던 세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자의식에 대응했다.
'멜랑콜리아'는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불안심리를 들여다보고 나서 심오하게 철학적 성찰을 하면서 얘기를 이끌어갔지만, 결론은 감독이 잘난 척 폼 잡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에 반해 '블랙스완'은 강박관념과 싸우는 여배우를 통해서 그 대립을 극한으로 밀어붙여서 예술적 완성으로 이끌어간 감독 자신의 싸움을 다룬 영화였다.
'캐빈에 대하여'는 '멜랑콜리아'처럼 제3자가 되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받아 안고 계속 대결하지만, '블랙스완'처럼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감싸 안으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그 차이가 여성감독으로서의 정체성과 섬세한 접근방식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멜랑콜리아'처럼 잘난 척 하는 거야 남성 지식인의 재수 없는 매너리즘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되지만, '블랙스완'처럼 아주 치열하게 자신의 문제와 싸우는 방식과 '캐빈에 대해여'처럼 철저하게 이해하고 감싸 안으려는 방식은 삶과 예술에 대한 두 감독의 대비되는 방식인 것이다.
예술로서만 본다면 '블랙스완'과 같은 남성적 치열함이 압도적인 힘과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어떨까?

그 유명한 화가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위해 고립을 마다하지 않았고, 자기 귀를 자르고 마지막에는 자살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런 고흐의 열정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해서 고흐의 그림을 명작이라고 칭송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위에 고흐 같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성격은 괴팍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하고, 생활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란하고, 조절되지 않는 감정은 극도로 불안한 사람을 과연 누가 이해하고 감싸 안을 수 있을까?
그 역할을 한 사람이 동생 테오였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테오만큼은 끝가지 형을 이해하려고 했고, 만만치 않은 성격을 받아줄려고 노력했고, 자신도 아주 풍족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형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블랙스완'이 고흐와 같은 방식을 보여준다면, '캐빈에 대하여'는 테오와 같은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씨스터'는 누나와 동생의 관계에 대한 얘기다.
정확히 얘기하면 친누나가 아닌 다른 관계이기는 하지만, 이 얘기를 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참겠다.
20대 누나와 단 둘이 살아가는 어린 동생은 알프스 스키장에서 도둑질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철없는 누나는 직장을 다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 치고 동생이 도둑질해서 벌어온 돈으로 남자와 즐기는데 써버리곤 한다.
그래도 동생은 누나만 옆에 있어주면 된다면서 계속 도둑질을 한다.
조금 진부한 얘기의 영화였다.
중간에 나오는 크고 작은 사건들도 작위적인 방식으로 이어졌고,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 얘기들도 이었다.
감독은 둘의 밀고 당기는 애증의 관계를 긴장감 있고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줬다.
서로 의지하면서도 상처를 주고, 떨쳐버리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그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씨스터'를 보고나서 '아무도 모른다'가 생각났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철없고 이기적인 엄마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느 날 잡자기 네 명의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버린다. 엄마는 철없고 이기적인 상태로 사라져버리고 남아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버려진 채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씨스터'에서는 철없고 이기적인 누나를 그렇게 단선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왜 누나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동생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지를 얘기하고 있고, 동생은 왜 그런 누나를 원망하지 않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사람들의 관계를 아주 단선적으로 그리면서 고립을 얘기했던 '아무도 모른다'가 관계에 대한 남성적인 접근방식이라면, 서로 얽혀서 주고받는 가운데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관계를 얘기했던 '씨스터'는 관계에 대한 여성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관계를 좀 더 밀도 있게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많기는 하지만...


'캐빈에 대하여'와 '씨스터'를 보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이 영상과 음악이었다.
'캐빈에 대하여'에서는 영상과 음악에 아주 공을 들였다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지는 장면들이 아주 인상적으로 곳곳에 나타나고, 그 색깔들이 심리와 주제를 암시하는 효과도 잘 보여줬다.
특히 음악은 단순히 배경음악이 아니라 얘기를 이어가는 또 하나의 대사로서 아주 적절하게 사용됐다.
너무 깔끔하게 멋을 부린 여성스러움이 오히려 아쉽기는 했지만...
'씨스터'에서는 인위적인 영상이 아니라 알프스의 자연스러운 영상이 적절하게 잘 드러나서 무거운 얘기를 밝은 배경 속에 풀어가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아주 압권인데, 거의 음향효과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짧은 음악이 곳곳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사용됐다. 얘기를 뒷받쳐 주는 음악이 아니라 얘기가 조금 쳐진다 싶어지면 쑥 나와서 얘기를 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부하고 작위적인 얘기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영상과 음악의 효과였다.
싸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연주를 불편하지 않게 들은 기분이라고 할까...

'캐빈에 대하여'는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영화는 아니었다.
'씨스터'는 잘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묘한 여운을 주는 영화였다.
둘 다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여성감독의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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