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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15회)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15회)

 

 

 

1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1일 DJ로 이 방송을 진행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이 방송을 진행하시는 성민씨가 “방송에 출연해서 얼마 전까지 했던 일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조금 하다가 실패한 얘기를 들으려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했더니 “어차피 이 방송은 허접한 사람들이 허접한 얘기를 하는 방송이니까 상관없다”고 하면서 펌프질을 하는데 “그래도 쪽팔리다”라고 하니까 “이 방송은 보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그냥 혼자 떠든다고 생각해서 하면 된다”고 하는데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방송에 가서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약간 따졌더니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그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냐!”라면서 약간 화를 내길래 깨갱하면서 승낙해버렸습니다.

제가 이런 방송이 처음이라서 말이 좀 어눌한데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그렇게 해서 방송을 하기로 했는데 성민씨가 “재미없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하면서 하지 말고 혼자서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라”고 하길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혼자서 하냐?”고 했더니 “이건 생방송도 아니고 검열도 하지 않으니까 하고 싶은 얘기 마음대로 정리해오면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런 거 해본 사람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엄살을 피우니까 “원고 가져오면 손봐준다”면서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는 듯이 말을 잘라버려서 이런 황당한 진행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분들이 이 방송을 읽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해해주시겠지요?

 

저는 얼마 전까지 도시 외곽에서 조그만 휴양소를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1년 반 정도 하다가 문을 닫은 곳이어서 그곳이 어느 곳인지 얘기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이런 얘기 하는 게 좀 쪽팔려서 제 이름도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어서 문을 연 휴양소이기는 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배고프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 와서 편하게 쉬고 갈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작은 폐가 두 곳을 빌려서 문을 연 곳이었거든요. 크게 일을 벌인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2년쯤 준비해서 나름대로 야심차게 했던 일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오래하지도 못하고 문을 닫아버려서 좀 쪽팔립니다. 히히

그곳에서 1년 반 정도 생활했던 얘기를 이곳에서 해보려고 합니다. 뭔가 특별한 내용을 기대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내용은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시점에서 노래 하나 듣고 진행하는 게 좋겠다는 성민씨 의견이 있어서 예전에 장재남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빈의자’라는 노래를 듣고 제 얘기 시작하겠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2

 

처음에 방송을 시작할 때는 약간 긴장했는데, 말머리를 잡고 난데다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도 하나 듣고 나니까 조금 긴장이 풀리기는 합니다.

아까도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거창한 내용은 없으니까 그냥 제 실패담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방송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자꾸 이렇게 별거 아니라고 강조하는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실제로 별거 아닌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휴양소가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분의 소개로 한 분이 오셨습니다. 사회단체에서 오랫동안 상근을 하셨던 분이었는데,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해서 오셨던 분이었어요. 저도 휴양소를 열고 처음으로 맡이 하는 분이어서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죠.

말이 휴양소였지 별다른 프로그램은 없어서, 그냥 편하게 와서 쉬다 가시라고 깔끔하게 집을 손보고, 주위에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 분도 처음에 와서 뭘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는데, 저도 딱히 뭘 제안하기가 어려워서 서로 어색하게 며칠을 보냈는데, 그렇게 며칠 지나고 나니까 그 분이 알아서 시간을 잘 보내시더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저는 그냥 제 일을 보고, 그 분은 알아서 그 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 술 한 잔 하고 그렇게 보냈죠. 오히려 그게 편했어요.

 

그렇게 열흘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그 분이 조금 심시해지셨는지 자주 저를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셨는데, “혼자서 심심한데 말벗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으로 물어보는 것에 자세하게 대답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랑 얘기를 하다보면 그 분 머릿속에서 막 계산을 하는 소리가 들려요. 대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 얘기를 분석하면서 저를 재단하려고 하는 그런 태도였거든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는데, 매번 그런 식으로 얘기가 이어지니까 좀 짜증나더라고요. 휴양소에 온 손님을 매정하게 대할 수도 없어서 물어보면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제 대답이 점점 짧아지고 성의 없어지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그 분이 그걸 느꼈는지, 잘 찾아오지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한 번은 둘이서 술을 먹게 됐는데, 분위기가 좋아지니까 다시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에 두런두런 답변을 했더니 또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소리가 들려서 “사람이 얘기를 할 때 계산하면서 듣는 게 습관이 됐나 본데, 그렇게 하면 앞에 앉아서 얘기하는 사람이 취조 받는 기분이 든다”라고 한마디 해버렸더니 분위기가 썰렁해져버렸죠. 제 성질을 참지 못해서...

 

그날 술자리 이후에 둘 사이가 좀 어색해졌는데, 그렇게 며칠 더 어색한 채로 머물다가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 가봐야 되겠다”면서 인사를 하고 떠나더라고요.

그렇게 그 분을 보내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불편했어요. 휴양소를 열고 처음으로 찾아온 분이었는데...

그 분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는 거였거든요. 오랜 세월 사회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병들어 있던 건데...

그 분이 떠난 날 혼자서 술을 먹으면서 생각했죠. 휴양소에는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성질을 좀 죽여야겠다고...

 

 

3

 

그 후로 몇 분이 더 휴양소에 머무르다 가셨는데,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정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가끔 민박집처럼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 수 있느냐”고 물어 오시는 분도 있었는데, 그런 분들에게는 정중하게 휴양소의 취지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몸이 많이 좋지 않은 분이 오랜 기간 머물다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 오신 분이었는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아오시다가 30대 후반의 나이에 몸에 이상이 생겨서 요양을 겸해서 오시게 된 거였습니다.

 

노동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셔서 그런지 활달한 성격에 붙임성도 좋아서 쉽게 친해졌습니다. 휴양소 주변에 손 봐야 할 곳이 많았는데 그런 곳들을 찾아서 일일이 손도 봐주시고, 텃밭 일도 많이 도와주시고 그래서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가끔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면서 얘기를 나눌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몸이 좋지 않으셔서 힘든 일은 하지 못하시고, 이런저런 약들을 많이 드셔야 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 분이 있는 동안에는 저도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쯤 지나서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기 시작하니까 “텃밭에 약초들을 재배해 봤으면 한다”고 하길래 “좋다”고 했더니 인터넷으로 자료들도 많이 찾아보고 책들도 몇 권 구해서 공부를 하더니 몇 가지를 종자를 주문해서 심기 시작했습니다. 약초를 심기 전에 어디서 거름을 구해 와서 밭을 윤지게 만들고는 1주일 간격으로 5~6가지 약초를 심기 시작하더니 정말 정성스럽게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게 있었으면 도와드렸을 텐데, 저도 농사를 시작한 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초보라서 오히려 제가 그 분에게 배워야 하겠더라고요.

하지만 농사라는 게 이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아서 약간 애를 먹기는 했지만, 워낙 정성스럽게 재배를 하셔서, 심은 지 한 달이 지나니까 약초들이 조금씩 자라는 걸 신기하게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약초도 키우면서 석 달 쯤 지나니까 그 분이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서 마실도 다니고 하면서 마을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하더니 땅값도 알아보고 빈집도 알아보고 그러더라고요. “이곳에서 살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습니다. 이곳이 지방도시이기는 하지만 땅값이 그렇게 만만한 동네도 아닌데다가 외지인들이 많지도 않아서 막상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저에게 물어오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얘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저한테는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 혼자서만 이래저래 살피고 다니셔서, 제가 뭐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더라고요.

 

그 분이 그렇게 5개월 정도 계시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몸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좋아지셨고, 너무 오래 이곳에 무료로 계셨던 것도 미안했나보더라고요. 땅을 사고 싶어서 아는 분에게 연락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잘 안됐나 봅니다. 아쉬움만 남기고 가셨던 거지요.

그 분이 가시고 나니까 제가 많이 적적해지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란 약초들은 제가 신경 쓴다고 썼는데도 잘 키우질 못해서 다 죽고 말았고, 마을 분 중에 땅을 팔 생각이 있었던 분이 넌지시 그 분 얘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이곳을 떠나고는 연락이 없어서 제가 뭐라고 대답하기가 난감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또 아프시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4

 

조그맣게 운영되는 곳이어서 대부분 아는 분을 통해서 찾아오는 편이었는데, 1년쯤 됐을 때 어떤 분이 “인터넷에서 알게 돼서 연락을 하는데, 사회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도 갈 수 있냐?”고 묻는 전화가 와서 “휴양소의 취지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어떤 분도 환영한다”고 대답했더니 “휴양소의 취지가 뭐냐?”고 하길래 “배고프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라고 대답했더니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더라고요. “내가 너무 성의 없이 대답했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며칠 후에 그 분이 이곳을 찾아오셨습니다. 20대 후반의 여성분이었는데 “회사 다니다가 너무 힘들어서 쉬고 있다가 이곳을 알게 돼서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분은 참 조용조용하게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때 또 한 분이 휴양소에 계셨는데 잘 어울리지도 않고, 저랑도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별로 많은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식사를 할 때는 같이 밥을 먹기는 했는데 말을 많이 하시지 않는 편이라서 많은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고, 나머지 시간은 산책을 하거나 혼자서 보내시는 편이었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분들은 심심하면 텃밭에서 소일거리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는 편인데도 그 분은 가끔 텃밭에 나와서 “이게 뭐냐? 저게 뭐냐?”하면서 묻기만 하다가 들어가시곤 했습니다. 첫 눈에 보기에도 마음의 상처가 깊은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저도 억지로 말을 붙이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거든요.

 

그 분이 오시고 1주일쯤 지나서 먼저 와계셨던 분이 휴양소를 떠나시고, 그 분 혼자서 생활을 하셨는데, 어느 날 저녁에 “술 한 잔 하겠냐?”고 하길래 “그러자”고 해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얘기는 주로 휴양소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운영되고, 어떤 분들이 오고 갔는지 하는 얘기였습니다. 그 분이 질문을 하면 제가 답변을 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지요. 중간에 제가 그 분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면 아주 짧게 대답을 하셔서 더 물어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렇게 맹숭맹숭한 술자리가 이어지다가 술기운이 약간 오른 제가 “무슨 힘든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냈으면 좋겠다. 여기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만치 않게 힘든 사람들이다”라는 식의 얘기를 좀 장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긴 침묵이 흘렀고, 그 분이 작은 목소리로 “예”라고만 대답을 하고는 더 어색해진 술자리가 잠시 이어지다가 “같이 술자리 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분이 조용히 이곳을 떠나버렸습니다.

 

그 분이 혼자 방에 있을 때마다 조용한 노래가 자주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가사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까 김윤아가 부른 ‘가만히 두세요’라는 노래였습니다. 그 분이 떠나고 난 후에 가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가만히 두세요

만지지 말아요

나의 무엇을 당신이 아시나요

그냥 지나가 줘요

 

아무도 몰라요

침묵해 주세요

단어는 마음을 에는 비수

날 내버려 둬요

 

아무 것도 아무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누구라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상냥한 침묵과

따스한 외면만이

오로지 나를 위로해 주어요

날 내버려 둬요

 

아무 것도 아무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누구라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상냥한 침묵과

따스한 외면이

오로지 나를 위로해 주어요

날 내버려 둬요

 

 

5

 

이곳에 오셨던 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고정원 선생님이라는 분입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계시다가 지역사회교육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책을 통해서 심리치료를 하시는 분인데, 선생님이 주로 만나는 아이들이 소위 문제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왕따 당하는 아이, 문제아로 찍혀서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겉도는 아이, 뭐 이런 아이들을 주로 만나서 그들이 다시 학교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 너무 마음 아픈 일을 겪어서 잠시 휴식을 취하러 왔다”고 하시면서 그 얘기를 해주셨는데,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6년쯤 전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창훈이라는 아이를 알게 됐는데, 창훈이는 집과 학교에서 완전히 포기한 아이였다고 했습니다. 학교도 잘 안 나오고, 학교에 와서는 수업 중에 그냥 나가버리기도 하고, 아이들한테 돈을 뺏기도 하는 아이였는데, 웃는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도 치고 그랬더니 금방 친해졌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집안 얘기를 들었더니 아버지와 형이랑 셋이서 사는데, 공사판을 돌아다니는 아버지는 툭하면 창훈이를 때리고 그래서 가출도 자주 했다고 했습니다. 아동학대예방센터도 소개시켜 주고 하면서 노력을 많이 했지만, 중학교 가면서부터는 소년원도 들락날락 거리면서 계속 방황을 이어갔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서로 편지를 자주 주고받고, 가끔 만나게 되면 맛있는 것도 사주기도 하면서 친분을 이어갔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열아홉 살이 된 창훈이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네 살 많은데, 이제는 막 살지 않고 제대로 살아보겠다”라고 고백하기도 해서 “축하한다”고 격려도 해줬답니다.

 

그러던 창훈이가 여자친구가 사는 아파트에서 “은희야 사랑한다”라고 외치면서 떨어져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 창훈이 아버지는 지방에서 여자랑 동거하며 가끔 올라와 용돈이나 조금 주고, 재혼한 엄마는 가끔 찾아와 술주정이나 하고, 형이 보증금을 빼서 오토바이를 사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월세 집에서 쫓겨나 잘 곳이 없었고, 후배네 집 창문을 모두 부숴 버려서 갚을 돈 80만 원이 필요했고, 교통사고 났는데 재활 치료도 안 하고 있었고, 여자친구 아버지는 창훈이와 사귀는 걸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했습니다.

반짝이 스타킹을 신은 아이, 소매 없고 배꼽이 보이는 망사로 된 윗도리를 입은 아이, 검은색 체육복을 입은 아이, 마스카를 칠했는데 너무 울어서 검은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 스무 명 정도가 모여서 장례를 치렀다고 했습니다. 덤덤하게 얘기를 하시다가 “지금까지 만난 아이 중에 유일하게 책 한 권 권해보지 못한 아이였다”고 하시면서 많이 우시더라고요.

 

그날 창훈이 얘기를 하시고는 휴대폰 문자메시지 하나랑 편지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문자메시지는 창훈이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날 한 아이가 보내왔던 것이고, 편지는 예전에 창훈이가 보내왔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와 편지를 보여주시면서 선생님이 “이제 기운을 차려야 한다. 아직 만나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다”고 하시는데, 뭐라고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랑 둘이서 노래도 막 부르면서 오래간만에 즐겁게 술을 먹었습니다.

 

 

“누구보다 속상하고 힘드실 텐데 싹 보내고 오세요. 오늘까지만 힘들어하시구용. ♥ 선생님이 제일 걱정된다. 진짜 쌤이 어떻게 했는데...... 그 미운 오빠 보내고 선생님 조금만 우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

 

 

 

to. 존경하는 고정원 선생님께!

 

안녕? 그 동아 잘지내고 있었어?

한동안 내 소식 못 들었지? 갑자기 편지와서 놀랬지? ㅋㅋ

나 지금 천안 교도소야.. 또 사고쳤지 모..

그냥 여기서 생활하는데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러라구~

그래서 이렇게 편지한다~ㅋㅋ

우리 고정원 쌤 잘지내고 있나? 안 본지 꽤 됐는데 말야?

나 안 보고싶어? ㅋㅋ 나 같은 개구쟁이는 흔치 않아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텐데? ㅋㅋㅋ

나는 쌤이 왜 이렇게 안 잊혀지는지 모르겠다? ㅋㅋ

샘이 나 한테 잘해줘서 그런가? ㅋㅋ

내가 쌤 집 주소도 모르고 해서 실례되는거 알면서도 학교로 보낸다~ ㅋㅋ 아직도 중원에서 근무하는거야? 오래하네~ ㅋㅋ

그리고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쌤 귀여운 딸은 잘지내? 싸이가서 사진 보니까 완전 귀엽더만!! ㅋㅋ

이름 알아었는데 까먹었다.. 미안.. ㅋㅋ 내가 원래 머리가 안 좋잖아~ ㅋㅋ 이해해주길~ ㅋㅋ

나 언제 나가는지 모르지? 나 이번에도 11월 26일 날 나가~ ㅋㅋ

잘하면 그전에 나갈수도 있어~ ㅋㅋ

언제 한번 시간나면 편지나 한통 써주라~ ㅋㅋ

직접 쓰기 귀찮으면 인터넷 서신도 있으니까 인터넷 서신 쓰던가~ ㅋㅋ

너무 명령조 인가? ㅋㅋ 기분 나빳다면 미안~ ㅋㅋ

여하튼 몸 건강히 잘지내고 나가면 한번 연락할게~ ㅋㅋ

그때까지 잘지내~ 그럼 안~뇽~!

 

2007. 5. 21일

 

p.s. 내가 글 재주가 없어 이렇게 밖에 못 쓴 점 이해해주길 바래~☆ ㅋㅋ

 

 

6

 

고정원 선생님이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얘기를 많이 나누셨던 분이라서 그런지 저랑도 이런저런 얘기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 분이랑 얘기를 하고 있으면 너무 편하고 포근해서 아이처럼 투정도 부리고 고민상담도 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제가 휴양소에 와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휴양소를 운영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그렇게 많은 아이들과 만나다보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딸이 하나 있는데, 솔직히 아이들을 내 딸처럼 대하지는 못한다. 아이들이 워낙 정에 굶주려 있어서 더 가까이 다가와주길 원하지만, 그러다보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아이들을 대한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 문제에 대해서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딱 부러지는 답은 없더라고요.

 

어느 날에는 둘이서 술을 한 잔 하다가 “여기 오는 사람들은 이런 휴양소의 필요성을 많이들 얘기하는데, 막상 돌아가고 나면 연락도 한 번 하지 않는다”라고 투정을 부렸더니 “우리 아이들도 자기네가 힘들 때는 귀찮을 정도로 연락을 많이 하는데, 나중에 대학 가고 취직 하면 연락하지 않는다”라면서 살며시 웃어주시기도 했습니다.

 

휴양소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 아쉬움만 남기도 가버린 분도 있지만, 고정원 선생님처럼 제게 힘을 주시는 분들도 있는 걸 보면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이곳 휴양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7

 

휴양소를 오랫동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1년 반 정도 하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돈 문제였습니다.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하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무료로 이런 휴양소를 계속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이런 점 때문에 같이 운영을 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비싸지 않더라도 사용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로 이곳이 필요한 사람들은 오지 못한다”는 의견이 많아서 계속 무료로 운영했던 거였는데... 돈을 내고 휴양소를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곳이 아니라도 어디든 찾아갈 수 있겠지만, 정말로 배고프고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이 돈 걱정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계속 해보려고 했지만, 저를 비롯해서 이곳을 함께 운영하는 사람들도 사는 형편들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라서 오래 해보지도 못하고 아쉽게 문을 닫게 됐습니다.

 

빈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을 때는 먼지도 쌓이지 않고 그늘도 만들어지지만,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의자는 그냥 빈 의자로 남겨진 채 녹슬어가더라고요.

 

오늘 이 방송을 통해서 이곳을 거쳐 갔던 분들이 모두 잘 지내는지 안부를 전합니다. 또 이곳의 존재를 모른 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시는 무수한 분들에게도 잘 버티시라는 얘기를 하고 싶네요.

 

방송을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 별 내용 없는 제 얘기를 들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면서 방송을 마칠까 합니다. 제가 너무 말이 많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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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일 DJ로 방송을 진행하시 분은 가상의 인물입니다.

물론, 휴양소와 등장 했던 인물들도 만들어낸 것입니다.

다만, 고정원 선생님 얘기는 그 분이 쓰신 『교실 밖 아이들 책으로 만나다』라는 책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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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송에도 누군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도 좋고

전하고 싶은 얘기도 좋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됩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주절거려도 되고요. ㅋㅋㅋ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성민이 mk102938@hanmail.net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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