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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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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자기 일에 완벽하고자 하는 동시에 자기 사생활도 적절히 관리하려는 제니는 병원 업무시간이 끝나서 찾아온 이를 들이지 않는다. 영화 속 상황을 보면 그렇게 매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음날 경찰이 와서 한 여성이 죽었는데 병원으로 다가오는 것이 목격되서 병원 cctv를 보자고 한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제니는 흔쾌히 경찰에 협조했는데, 병원 cctv에서 다급하게 병원문을 두드리는 흑인 여성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기가 문을 열어주었으면 그 여성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제니는 그 여성이 어떻게 죽게됐는지를 알아보려고 나서게 된다. cctv에 찍힌 얼굴 사진 하나만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지루하게 그 여성의 행적을 수소문하면서 그 사회의 단면이 살짝 드러난다.


제3세계에서 온 가난하고 어린 흑인 여성이 프랑스라는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되다가 버려지고, 적당한 이기심과 추잡한 시스템 속에서 그 죽음마저도 묻혀버리길 강요당하는 현실이 보여진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의 삶’ 그 자치에 집중하던 다르덴 형제의 기존 영화에서
‘사회의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을 짖누르는 사회의 시스템’을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
다르덴형제의 영화는 분명히 한 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냉혹한 현실 그 자체를 아주 차갑게 도려내서 보여주던 방식에서
냉혹한 현실을 들춰내고 그에 맞서려는 개인의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르덴형제의 영화는 한층 희망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 점은 전작인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조금씩 지루함을 안겨주고 현실을 각색하고 있었다.


너무나 빨리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흑인 소녀의 죽음에 대한 행방을 찾아나선 제니를 보며 조금 당황했다.
제니의 급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와 단호한 행동을 따라가지 못한 관객은 감정을 싣지못한 채 멀리서 그의 행동만 지켜봐야했고
그러다보니 사진 한 장 들고 지루하게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는 장면이 지루하게 다가올 수 밖에...
다르덴형제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하품을 하고 눈꺼풀이 내려오는 걸 느꼈다.


제니는 죄책감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지루한 탐문과정을 거쳐 진실에 하나씩 다가가면서 혼란과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도 제니는 흔들림없이 진실을 향해 나아갔고 결국 그의 노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며 흑인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소소하면서도 더러운 사회의 모습이 드러났다.
헐리우드 영화처럼 개인의 영웅적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제니의 행동은 현실에 대한 각색이었다.


평범한 노동자가 노동운동가로 성장하거나 평범한 소시민이 시민활동가처럼 전면에 나서는 과정은 엄청난 갈등과 여러 번의 각성을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그들이 현실과 맞서는 과정도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회유와 협박, 적당한 이기심과 이타심의 대립 속에서 끝임없이 흔들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일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나 ‘언노운 걸’의 제니는
갑자기 닥쳐온 현실의 문제 앞에서 너무도 갑자기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보여주고
그들 앞에 드러나는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림없이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호하고 흔들림없는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흔들리고 상처받으며 힘겹게 버텨가는 현실의 삶을 왜곡하고 각색하는 것이다.
이런 각색이 ‘현실의 변화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되고 절제된 각색’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왜곡인 것은 사실이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상처받는 현실에서는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를 바로잡아는 대중의 힘과
자기의 이기심과 실수를 돌아볼줄 아는 자기 성찰을 통해
버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신뢰와 성찰이 자리잡지 못한 진보운동이
현실 속에서 타락하고 좌절하는 것을 무수히 봐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다르덴형제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최근 다르덴형제 영화의 변화는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칼 맑스의 경구 하나가 더 간절하게 떠오른다.


“현실적 억압에다가 억압의 의식을 부가함으로써 현실적 억압을 더욱 억압적이게 만들어야 하며, 치욕을 공개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치욕적이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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