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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열사 유서 / 김진숙 동지 추도사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열사 유서1.

"노동자들은 다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오랜만에 맑고 구름 없는 밤이구나.
내일 모레가 추석이라고 달은 벌써 만월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85호기 크레인 위로 올라온 지 벌써 90여일, 조합원 동지들의 전면파업이 50일이 되었건만 회사는 교섭 한번 하지 않고 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천5백억 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십 몇 만원 근속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경영진들은 지금 자신들이 빼어든 칼에 묻힐 피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

하지만 이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나를 믿고 함께 해준 모든 동지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 40년의 인생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가는 것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준엽아. 혜민아. 준하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불러보고 적어보는 이름이구나.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 바란다.

그리고 여보.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어서야 불러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칭이 되었네. 그동안 시킨 고생이 모자라서 더 큰 고생을 남기고 가게 되어서 미안해.
하지만 당신은 강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잘 해주리라 믿어. 그래서 조금은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애.
이제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먼저 가신 부모님과 막내 누나를 만날 수 있을 꺼야. 그럼 모두 안녕.

2003년 9월 9일
김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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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열사 유서2

"이 투쟁은 계속되어야 하고 반드시 승리해야만 합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회사의 경영진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최소한의 인간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대의원 이상 간부동지들. 그리고 조합원 동지 여러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투쟁은 계속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노동조합을 사수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생존권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동지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10. 4.
김주익




김진숙 동지 추도사


작년 한진중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30년 일해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박창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다.
50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아프고 무겁다.
두번째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명의 위원장 중 두 명은 구속 이후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하고 쫓겨나고, 두 명은 죽었다.
지난번 위원장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랬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가고 죽어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가. 뭘 그렇게 죽을죄를 저질렀는가. 조양호 회장, 조남호 부회장은 얼마나 더 할건가. 노동자 목에 빨대를 꽂고 더운피를 마시는 이 소름끼치는 흡혈게임이 얼마나 더 남았는가.
LNG선상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변호사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꿀맛인가. 조중동 그 '찌라시'들의 '꼬붕'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던가. 대기업노조가 나라를 망친다했는가. 21년차 노동자 기본급 105만원, 손에 쥐는 건 80만원, 그마저 가압류 12만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해도 청와대·노동부·국회의원 누구하나 코빼기도 내미는 놈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말아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우글거리던 생활관에서 그냥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살걸 그랬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걸 그랬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 동지가, 김주익 동지가 그 천금같은, 그 억만금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그 억센 어깨를, 그 순박하던 웃음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인가. 애비 잘 만난 조양호·조남호·조수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원을 써도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저들.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를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나.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명이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의 화물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도시 대구, 전자도시 구미, 자동차도시 울산, 화학도시 여수온산. 그 허황한 이름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들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쉰을 넘긴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세계화된 나라. 나는 자본주의가 정말 싫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친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 나라.

이젠 자본주의에 소름이 끼친다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는가. 우리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한가.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아 깨지는 것이다. 맨날 우리만 죽고 맨날 우리만 패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김진숙(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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