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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검문소가 관대해진 이유는?

이스라엘 검문소가 관대해진 이유는?

<기고> 이스라엘 점령 40주년 팔레스타인을 가다

팔레스타인 전문가인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프레시안 기획위원)가 팔레스타인 땅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돌아보며 글을 보내왔다. 지난 25일로 이슬람 정치군사조직인 하마스가 총선에서 승리한 지 1주년이 된 팔레스타인에서는 지난 해 하반기부터 구 집권세력(파타)과 하마스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두 세력은 연립정부 구성을 논의하는 와중에도 물리적인 충돌을 벌이고 있는데, 지난 25일 밤 서안지구의 한 파타 무장 단체는 팔레스타인 주재 캐나다 대표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파타의 공격으로 파손된 대표부 건물을 돌아 본 홍 교수는 팔레스타인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파타 출신인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파타와 하마스의 갈등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요인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홍 교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와 이동을 제한하고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이 팔레스타인 사태의 본질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 40주년이 된 2007년 겨울,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의 라말라ㆍ라블루스에서 본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인지 홍 교수의 시선을 따라가본다. <편집자>
  


  26일 금요일 이른 아침 예루살렘의 거리는 한산했다. 라말라를 거쳐 나블루스까지 가서 알 나자 공립대학 정치학 교수인 사타르 카셈을 만날 계획이었다. 18번 미니버스를 타고 동예루살렘 구 도시 근처에서 라말라 중심부까지 가는 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예루살렘과 라말라를 가르는 갈란디아 검문소는 양편으로 8미터 높이의 전자 감시탑이 보강된 분리장벽에 연결되어 있었고,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버스는 이스라엘군의 검색 없이 검문소를 통과했다. 도보로 검문소를 통과해서 라말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1990년대 검문소가 생긴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겨울까지만 해도 갈란디아 검문소에서는 예외 없이 모두 내려 걸어서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고, 이스라엘 군인들의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3개월 전 파타와 하마스 간의 분쟁이 격화되면서부터 검문소 상황이 많이 편리해졌다고 한다.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협력하고 있다"
  
  라말라의 중심 거리에는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사진들 대신 대형 광고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압바스의 대형 사진 현수막들은 지난 겨울까지만 해도 야세르 아라파트 전 수반의 사진과 함께 라말라 거리 곳곳에 걸려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이유를 물었더니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더 이상 압바스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압바스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협력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 파타 무장단체의 공격이 있었던 팔레스타인 주재 캐나다 대표부 건물을 경찰들이 지키고 있다. ⓒ프레시안

  무장한 팔레스타인 경찰들과 마주쳤다(1990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으로 팔레스타인에는 군인이 없고,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만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주재 캐나다 대표부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건물의 현관문과 창문, 감시 카메라, 주차된 자동차 등이 파손돼 있었다. 25일 밤 파타 무장 단체가 이 건물을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호주 대표부 건물도 공격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주 대표부로 가 확인한 결과 건물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경찰도 없었다. 무장단체의 공격 시도가 있었지만, 근처 팔레스타인 경찰들의 제지로 무산됐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루깝 커피숍에 도착했다. 칼리드 나집, 무함마드 자카리아(시인. <프레시안>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필자 중 한 사람-편집자)를 포함한 몇몇 팔레스타인 친구들을 만났다.
  
  지난 겨울까지 해마다 만났던, 항상 웃는 얼굴로 필자를 대해 주었던 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주 집에서 이스라엘군에 체포됐다고 한다. 지난해 1월 25일 의회 선거 당일 그의 초등학생 아들은 커피숍 앞에서 하마스 지지 전단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무사는 하마스 지지자였다. 현재 가족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인 그 누구도 무사가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공식적으로 첫 번째 재판이 시작되는 향후 20일 이후에나 그의 소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칼리드는 이러한 일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이라면서, 자신도 이유없이 검문소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9일 동안 감옥에 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 필자가 칼리드 나집, 무함마드 자카리아 등과 대화하는 장면 ⓒ프레시안

  "1990년대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공식 인정했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만 더욱 강화되었다. 또 지난 1990년대의 오슬로 협상안과 2003년의 '로드맵'이 의미하는 '팔레스타인의 최종 지위'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함마드 자카리아는 팔레스타인 정부가 힘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이렇게 잘라 말했다.
  
  검문소 통과가 쉬워진 이유는?
  
  사타르 카셈 교수와 나블루스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어 총총히 루깝 커피숍을 나왔다. 검문소 통과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필자가 타고 있던 택시를 나블루스 입구 검문소까지 그대로 통과시켰다. 라말라에서 나블루스에 이르는 도로에 블록을 쌓아 만들었던 임시 검문소들은 거의 제거되었다. 점령지 내부 도로에 설치했던 통행 장애물이 일부 사라진 것이다. 라말라에서 나블루스 입구까지는 30분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낮 12시경 필자는 나블루스 입구 검문소도 아무런 제지 없이 도보로 통과했고, 줄을 선 다른 사람들도 없었다. 휴일인 금요일 예배 시간인 탓에 이동하는 주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3년 전 필자는 이 검문소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쏜 총에 맞을 뻔했고, 2년 전에는 이스라엘군의 제지로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고 라말라로 돌아와야만 했다. 하마스 선거 승리 직후였던 지난해에는 라말라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모든 검문소가 닫혀 있어 나블루스행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 사타르 카셈 나자대학 정치학 교수와 필자 ⓒ프레시안

  나블루스에 있는 사타르 교수의 집에 도착했다. 검문소 상황이 완화된 이유를 묻자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싸우느라고 너무 바빠서 이스라엘에 저항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블루스에서 라말라로 나갈 때의 검문소 상황은 예전과 똑 같다"라고 답했다.
  
  파타가 라말라의 캐나다 대표부 건물을 왜 공격했는지도 물었다. 그는 "하마스는 단일 조직으로 잘 조직되어 있어 중앙에서 통제가 가능하지만, 파타는 서안에 6개 단체, 가자에 3개 단체 등 여러 무장 파벌로 나뉘어 있어 중앙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나블루스에서 활동하는 몇몇 갱단도 파타 소속이다. 파타 출신 압바스 수반조차 모든 무장 파벌을 통제할 수 없다. 중앙 통제에서 벗어난 파벌들이 주로 외국인들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하마스는 외국인들을 납치하고 공격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이동 방향에 따라 이중적인 검문소 정책
  
  그러나 라말라로 돌아오는 오후 나블루스 검문소에는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통과가 거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외국인인 탓에 다행히 쉽게 통과했다.
  
  라말라에 도착하자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서둘러 예루살렘행 미니버스에 다시 올랐고, 갈란디아 검문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검문소는 라말라로 들어갔던 아침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60세 이하의 외국인들과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전자 감시 장치 검색대가 설치된 검문소를 한 사람씩 통과해야만 했다. 심지어 서너 살로 보이는 어린이 두 명이 창문 안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자신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이라는 것을 창문에 매달려 10여 분 이상 설명해야만 했다.
  
▲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동을 통제하는 이스라엘 검문소의 모습 ⓒ프레시안


  미니버스에 탄 승객들은 16명 정도였다. 이들 중 60세 이상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검색대를 모두 통과하는 데 1시간 이상 걸렸다. 금요일 저녁 이동 인구가 별로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나마 시간이 덜 걸린 것이다. 결국 라말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데는 1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아침 보다 1시간 10분이 더 걸린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검문소 정책은 주민들의 이동 방향에 따라 완전히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예루살렘에서 서안 내부로 들어가는 것과, 서안 깊숙한 지역으로부터 밖으로, 특히 예루살렘으로 나오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통제는 전혀 달랐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검문소 정책은 점령지 내부, 특히 서안 깊숙한 지역으로의 이주를 유도하면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를 줄이려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책은 실은 1967년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 이후 계속됐고, 1990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 이후 더 강화되어 온 것이었다.

 

 홍미정/프레시안 기획위원,한국외대 연구교수

 

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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