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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

1. 진실이라 말할 때의 효과.

고 노무현 씨에 대한 추모분위기가 어느정도 정리되며 정치권은 숨가쁘게 정치적 파이 나누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고 노무현 씨에 대한 추모의 마음은 곳곳에서, 때론 신문광고로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노무현과 함께만든 대한민국>이란 대제목으로 6월 18일자 한겨레신문에 나온 광고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진실은 이것이다’를 강변하는 사람들을 보며 세상에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느껴진다.

그것이 진실이다 아니다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진실이나 아니다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한다. 주거권을 위해 살기 위해 망루를 쌓고 올라갔던 철거민이 함께 목숨을 걸었던 철거민을 죽였다는 이유로 철창 안에 갇혀 있다. 성폭력․부정부패를 저지른 교사와 교장들은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만 일제고사를 거부했던 교사들은 교단에서 내쫓겨져있다. 바다의 아마존인 새만금 갯벌을 메워 동북아 아마존을 만들겠다고 한다. 갯벌을 죽이고 그곳에 쏟을 바위와 흙을 만들기 위해 산과 땅을 파괴하는 녹색성장을 하겠다고 한다.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것이 총체적인 비극의 연속이고 당장 이 피 흘리는 비극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고 경쟁교육이 유지되는 것에 행복해하며 ‘이대로!’를 외칠 테니 그 누군가는 막이 내리지 않는 희극이길 바란다 바라고있다. 연극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끝나지 않아야 하는 희극이 진실이라고 외칠 때의 효과와 당장 막을 내려야할 비극이라고 규정할 때의 효과가 중요하다. 이것이 진실이다? 무엇이 진실이다라고 규정할 때의 효과야 말로 ‘진실’이다. 나는 그 진실이라 규정하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그가 말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다-노무현과 함께만든 대한민국>광고에서 ‘이것이 진실’이라 말하는 그 순간에 나오는 효과는 신자유주의를 유지하는 효과이다. 지난 군사 독재 정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는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한 순간에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처럼 올라오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87년 항쟁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의 폭발, 한계를 수렴하면서 나온 것이 87년 체제, 87년 민주주의였다. 이후 87년 체제, 87년 ‘민주주의’를 꽤 잘 관리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재편을 거의 완벽하게 했다. 그 안에서 일일이 일거할 수 없을 만큼 숱한 노동자 민중이 절대적 궁핍은 벗어나며 일해도 가난한 노동빈곤층이 되어야 했다. 또 다른 사회에 대한 꿈꿀 사이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강요당했다.

고 노무현씨가 이야기했던 혹은 그가 추구하던 ‘사람 사는 세상’의 ‘사람’은 누굴까. 잠시 얼마전의 풍경을 보자. 시민들은 외쳤다. 6.10 대회에서 시민들의 후두부를 향해 휘둘러진 방패와 곤봉으로 사람을 잡는게 공권력이냐고. 그런데 바로 그 뒤통수를 향하던 방패와 곤봉이 몇 년 전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의해 노동자민중들에게 똑같이 휘둘러졌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김대중․노무현 정권퇴진을 염원하고 거리로 나왓던 사람들은 사림일 수 없다. 그가 말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방패와 곤봉을 맞았던 사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나 역시도 사람이 아니다. 아니 사람이길 거부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권까지 그래 대한민국은 발전했다. 그러나 그 대한민국에 나는 우리는 없었다.  고 노무현씨에 대한 추모는 결국 지금의 노골적인 폭력통치 구조를 세련된 하지만 더 악랄한 신자유주의 관리체계로 돌아가는 효과로 나오게될 ‘이것이 진실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동조할 수 없다.

 

3. 힘의 싸움.

예전 개봉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이노센스(영어명 Ghost in the Shell 2: Innocence)에 다음 같은 장면이 있다. 사이보그 경찰인 주인공 바트가 동료와 함께 살인 사건을 해결하던 중 난관에 부딪히자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회사와 정면 승부를 벌이기로 한다. 중무장을 하여 회사에 잠입해 강제로 증거를 잡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했지. ‘옳고 그름이 없을 때는 북을 울리고 두드린들 어떠하리.’라고.”

바트는 결국 자신의 무지막지한 사이보그 능력과 또 다른 동료의 힘으로 회사를 뒤집고 사건을 해결한다.

영화의 맥락과 전체 내용과는 약간 다르지만 결국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할 것은 그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바트와 같은 힘이 없다는 점이다. 87년 체제로 돌아가자고 할 수 없다. 2008 촛불에서 요구하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표상되던 87년 체제로의 귀환, 87년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염원을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건설로 바꿀 수 없었다. 우리에겐 계급적 단결과 힘이 없었으니까.

때문에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요구하기보다 민주노총이 말하는 ‘힘내라 민주주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비로서 단결된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촛불이 요구했던 민주주의, ‘사람 사는 세상’의 내용을 넘어서고 바꿔야한다. 진실이 가려진 세상, 적대적 계급간의 싸움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87년 민주주의 회복이 아니라 넘어서자고 말해야 한다. 지금 촛불로 들어가는 것은 또다시 2008 촛불에서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의 반복일 뿐이다.

영화속 대사를 비슷하게 인용하며 글을 줄여본다. ‘진실을 가릴 수 없을 때 대놓고 싸워본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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