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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국 쑥버무리 강좌 놀이

어디선가 주절거렸던 거 정리

청년. 얼마전에 생태경제학자라고 불려지는 우석훈 박사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라는 책을 냈어요.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갈 수 있는 몇가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젊은 청년들이 아주 작은 면단위, 리단위에서부터 정치적 활동을 시작해 나가는 것들이 한국 사회가 지금 뿌리깊게 나갈 수 있는 대안중의 하나가 아닐 것인가 이야기 하더라구요. 마사키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젊은이들의 지방선거 출마에 대해 이야기 하시는데, 청년들의 지역 정치 운동을 비교하기 전에 한국과 일본의 전제된 상황들이 짚어야 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은 패배의식과 굉장히 침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지요.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우석훈의 이야기에 의하면 적어도 일본의 비정규직 취업자들은 비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선택이라는 측면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입이 월등히 높다는 점을 이야기 하지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일본의 비정규직 환경은 한국의 비정규직에 비해 자기 의사표현을 하기 쉬운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에 비해 한국의 비정규직 청년들은 임금도 낮고 조건도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는 상황이이에요. 더구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와 권력을 쟁취한 386세대들의 영역은 새롭게 사회로 진출하는 청년들을 억압하고 있는 근본적인 사회 시스템상의 문제로 불거지고 있지요. 그나마 우리가 희망이라는 여지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항하고 새로운 계기를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거에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청년들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취업전선에서 일탈한 소수의 청년들이 조그만 움직임들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올해 여름에 함양에서 랄랄라 캠프라는 걸 열었는데요. 귀농운동이 10년차를 넘어서고 지역의 대안적인 활동들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데요. 늘상 젊은사람이 없다 없다 하면서도 ‘지역 운동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청년들이 배제되는 현상들을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제를 선정하는 문제에서부터 모임을 진행하는 방식, 기획 주체등을 완전히 열어놓고 진행했던 모임이에요.(랄랄라 이야기는 등불지 전전호에 실려 있어요)

 

굉장히 신선한 실험이었지요. 그리고 그 실험의 끝에 들었던 생각은 ‘이러한 신선한 날 것들이 실험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이고 생명 평화적인 힘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쉼과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아니 쉼과 즐거움 자체가 기성세대와의 차별이자 새로운 운동의 방법이자 전환의 과정이에요. 한국사회의 청년들은 지금 피곤에 찌들어있어요. 변화의 계기는 기존 사회에서 일탈한 청년들이 여기 저기에서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것이 힘을 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에요. 대학의 동아리들이 예전에 있었던 건전한 동아리는 거의 없어지고 비판이 아닌 생존을 위한, mb시대의 녹색성장의 비전에 걸맞는 주제를 가진 동아리들만 북적대고 있어요. 쉼과 자기성찰의 장이었던 대학의 동아리들이 취업준비 집단학습 모임으로 변질되어 버린거에요.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이제 조금 쉬어야 해요. 그리고 그 ’쉼‘을 극적인 변화의 힘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가진 문화적 다양성들이 즐거움으로 표현될 때에요. 재미. 지금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기성세대들이 젊었을 때, 신념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데올로기적 행동 양식을 취했다면 이제는 쉼과 즐거움 속에서 생명평화적 가치와 행동 양식들을 발견해 나가는거죠. 청년들의 정치 참여도 그렇게 생각해요. 거기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서 지역에 대한 고민들이 늘어나고 그런 와중에 아 내가 여기서 무엇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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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타 옥탄 강제 출국

 

 최소한의 대화도 통용되지 않는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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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02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살짝 어깨를 기대어 있고 싶다

 

그렇게

 

깊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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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동이 결혼식 시나리오

  - 도법스님과 동이-

 

- 선희와 동이

 

- 감자 동이 결혼식 시나리오

시간

내용

준비물

12:50~01:00 (10분)

식장 정돈 대웅전 입장 및 예식 관람 설명

 

01:00~01:20 (20분)

1부행사 삼귀의 - 반야심경 - 주지스님 인사말 - 부처님께 삼배 - 혼인서약문 올리기 - 양가부모님께 큰절 - 사홍서원

 

01:20~01:30 (10분)

신랑신부 행진, 길놀이

영준, 은하, 현우, 유감,

장구, 북, 징, 꽹가리,

01:30~01:35 (5분)

2부 행사장 정돈, 착석(사회자 안내멘트) 사회자 소개

 

01:35~01:40 (5분)

박두규시인 시낭송 “넉넉한 장도가지와 색깔 좋은 조선간장이 되어”

시낭송 bgm,

01:40~01:45 (5분)

제갈은하 축가 “왁스의 아침식사”

노래 mr

01:45~01:55 (10분)

(송)한내 덕답, 도법 스님 덕담

 

01:55~02:02 (7분)

혼인서약문 낭독

 

02:02~02:07 (5분)

워크나인 축가 : 낭독에 이어 사회자 멘트 없이 바로

감빼

02:07~02:12 (5분)

이벤트

 

02:12~02:22 (10분)

부모님 깜짝 덕담

무선 마이크

02:22~02:30 (5분)

신랑,신부 퇴장 행진 / 행진 후 사진찍는 멘트(가족친지/지인), 피로연 안내멘트

풍물 준비, 꽃바구니 준비

이벤트

덕담 쪽지

신랑,신부 퇴장 행진시 하객들이 미리 써놓은 덕담 쪽지를 신부가 든 꽃바구니에 담아준다.

꽃바구니(유감), 볼펜, 쪽지

 

사회자 멘트

 

1. 잠시 뒤 1시부터 신랑 도형군과 신부 선희양의 불교식 혼례를 진행 할 예정입니다. 가족, 친지, 하객 분들은 대웅전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 대웅전 안이 비좁아 모든 인원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가족, 친지 순으로 들어가시고 못 들어가신 분들은 대웅전 바깥에서 축하의 마음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성하신 덕담 쪽지는 잘 챙겨두었다가 2부 예식이 끝난 후 .....)

-길놀이

 

2. 신랑, 신부, 양가 부모님께서 앉으신 후 앞쪽부터 순서대로 앉아주세요.

(덕담 하실 분들 자리 배정, 마이크 배달 도우미 필요)

 

 

3. 개식사

- 모두 자리에 앉으셨나요? 네 모두 자리에 앉으셨군요. 아, 뒤에 젊은분들은 굳이 앉지 않으셔도 됩니다.

- (날이 흐릴 경우 날씨 멘트)

- 그럼 지금부터 양가 어르신과, 일가친척, 하객 여러분을 모신가운데 2부 예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징~)

 

 

4. 사회자 소개

-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신랑 김도형군과 신부 백선희양의 결혼식 사회를 맡게 된 김단입니다. 보통 박수를 쳐 주시는게 정상인데 참 서운하네요. (오늘 예식 내내 끊이지 않는 박수를 위하여 ) 다시한번 인사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게 된 (앉으나~ 서나~ 짧은다리~ ) 김 단 입니다.

이렇게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시간을 내주시어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신랑 신부 양가 부모님을 대신하여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자 그럼, 결혼식 2부 예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5. 박두규 시인 축시 (시인 모시고 마이크 배치)

- 첫 순서는 시낭송입니다. 정열의 시인이시죠. 구례 섬진강변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입니다. 박두규 시인님의 축시가 있겠습니다. 제목은! 조금 기네요. “넉넉한 장도가지와 색깔 좋은 조선간장이 되어..” (BGM 플레이)

 

- 네, 감사합니다. 신랑 신부의 삶이 시같은 삶, 노래같은 삶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네요.

 

 

6. 제갈은하 축가

- 다음은, 함양에서 왔습니다. 마을 잔칫날이면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신부 백선희의 후배 제갈은하가 노래합니다.

제목은! 왁스의 “아침식사” (mr 플레이)

- 결혼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런지 가사 마디 마디에 감정이 아주 풍부하게 실려있네요.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7. 한내 덕담

- 어느 날 선희가 그러더군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한내 한울이네’ 처럼 살고 싶다고,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요. 나중에 한내와 한울이를 만나보고 알았지요. ‘밝고 밝은 가족입니다. 너무 밝은 나머지 옆에만 가도 절로 밝아지는 가족입니다.’ 한내 한울이네 가족 모두가 멀리 보성에서 오셨습니다. 덕담은 한내가 대표로 한다는군요.

- 네, 감사합니다. (분위기 봐서 한내 한울 댄스나 노래)

 

 

8. 도법스님 덕담

- 신랑과 신부의 가장 큰 스승이자 두 사람 삶의 길, 그 길위의 도반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지난 5년간 전국 방방곡곡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함께 하신 도법 스님께서 덕담을 해 주시겠습니다.

- 오늘 주신 좋은 말씀 뿐만 아니라 지난 5년간 스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두 사람 가는 길, 인생내내 밑거름이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9. 혼인서약문 낭독

- 오늘 예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아니 두 사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신랑 신부가 오랫동안 사귀어 오며 평생을 함께 지켜 나갈 약속을 정해 왔다고 합니다.

- 혼인 서약문 낭독이 있겠습니다.

 

 

 

10. 워크나인 축가

- (서약문 낭독 바로 이어서) (서약문 낭독하는 동안 노래부를 사람들 옆에 대기)

- 지난 2년간 일본에서 생명과 평화를 기원하며 순례를 했고 지금은 한국에서 100일동안 순례를 하고 있는 워크나인 친구들의 축하 공연 이었습니다. 강원도 강릉을 순례중이던 친구들이 감자와 동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먼길 왔습니다. 일본을 넘어 한국을 넘어 북한, 중국 러시아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생명 평화를 기원하며 순례를 하는 친구들이기에 오늘 이 자리가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어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큰 박 수 부탁 드립니다.

 

 

 

11, (키스)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저는 사실 제가 참 미꾸라지 같다는 생각을 해요. 네? 아 물론 다리도 짧지요. 세상의 불편한 진실들과 마주하는게 늘 두려웠어요. 그래서 요리조리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살았죠. 그런데 어느날 이 친구들을 만난거에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새만금의 갯벌 진창에서, 마포의 법원 앞에서 만났던 이 두사람은 늘 삶의 가장 치열한 현장에 있었어요. 그리고 늘 낮은 자리에서 자신들의 할 일을 해 나갔지요. ) 저는 선희와 도형을 친구로 생각하기 보다는 제 삶의 큰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승님들에게 정말정말 아쉬운게 하나 있어요. 정말 오랫동안 이 둘을 만났어요. 그런데 단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뭘까요. 퀴즈입니다. 맞추시는 분에게 신혼여행 동승 티켓 딱 한장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쉽네요. 맞추시는 분이 없네요. 신혼여행은 제가 대신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둘이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신혼 생활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어때요 괜찮지요?

신랑 신부의 딥 키스 시간이 있겠습니다!

 

그냥 하면 재미없겠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혹시 조교)

 

하객 여러분들이 소리치면 ( 연습 시간 선희야! 도형아! 잘살아라~) (북을 치고 있는다 둥둥둥둥~ )

 

 

-(대단합니다. 모든 의심히 사라지는 찐한 키스였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차차 나아지리라 믿고 응원의 박수)

 

12. 부모님 깜짝 덕담

- 이것으로 모든 결혼식 순서를 마칠까 합니다~ 만 서운하시죠?

- (신랑은 신부 부모님, 신부는 신랑 부모님 손)

 

 

13. 생명 평화의 등불로 세상을 밝히며 함께 걸어 갈 것을 여기 오신 모든 도반, 스승님들에게 큰 절로서 다짐하며 오늘 결혼식을 마치겠습니다.

신랑, 신부가 절을 올리면 하객 분들께서도 이 부부의 삶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가능하신 분들은 맞절로서 예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절을 마치고 일어섬과 동시에 징~ , 풍물패가 놀기 시작하고 신랑, 신부 퇴장 행진, 바구니에 든 꽃을 하객 들에게 뿌리며 퇴장)

- 신랑, 신부가 행진하는 동안 적어 놓으셨던 덕담 쪽지를 꽃바구니에 넣어 주세요.

 

 

14. 폐식

- 이것으로 신랑 김도형군과 신부 백선희양의 결혼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새 가정을 이룬 이들을 위하여 많은 관심과 축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진 촬영이 있으니 한분 한분 빠지시지 마시고 참석하여 오늘 예식의 마지막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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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토담 집 풍경

한 춤 추시는 정희씨와 종수씨

 

쟌느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목련화 연주

담패를 안 피워서 그런지 나보다 호흡이 좋다.

 

찬송가 반주로 다져진 엄마의 오래된 피아노 연주

멍 때리는 록기군

복날 놀러온 경일

고딩 알바생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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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장작 주의

님의 [밤 조림을 만들테다.] 에 관련된 글.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리틀포레스트에 밤 나무 장작을 쪼개며 밤이 추위를 불러들인다는 멘트로 인하여

 

 밤나무 장작을 패고 때고 자고 싶어하다가 진짜로 해 보실 분들을 위해 주의 드립니다.

 

 밤 나무는 탈 때 일산화탄소를 강하게 내뿜어 구들방에서는 엥간하면 때지 않는게 좋습니다.

 

 간혹 절간의 스님들이나 시골 동네 어르신들께서 밤나무를 장작으로 사용하셨다가 돌아가시기도 합니다.

 

 작년 저희 마을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밤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신 후 다음 날 돌아가신채 발견되어서

 동네분들이 깜짝 놀랐었지요.

 

 밤나무 장작은 환기가 잘되는 곳에서 사용하거나, 리틀포레스트에서 말했던 것처럼 장작불이 고온인 상태에서 집어넣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부디 목숨 보전하시어 남은 날 좋은 일에 그 목숨 쓰여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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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울음의 발견

 

 으엥엥

 으아앙

 

 하나같은 울음이라면 울어도 우는 것이 아닐거야

 

 그 울음이 시가  되었더라면 시도 울음도 잊혀졌겠지

 

 테라의 기억장치에도 모두 담아내지 못할거야

 

 한사람의 역사

 

 위안과 두려움, 사이의 사람들

 

 첫울음을 울고 난 후 고집스레 잊어왔겠지

 

 그리고 모두가 함께 비열해 졌던거야

 

 공개되지 않을 역사

 

 갈등의 뿌리

 

 너의 울음 속에 있어 짧고 강렬한 높낮이의 소리 그 음성 파일안에 저장 되어진

 

 짜릿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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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조림을 만들테다.

 

 제목 : 밤 조림을 만들테다

 

 ♦ 목적  

  • 동네 할매들이 산에서 주워 온 밤을 구매하여 마을 경제 활성화에 기여
  • 동네 아이들에게 밤 까기 알바자리 제공 (개당 100원)
  • 밤 조림 행위를 통한 유감과의 관계 증진
  • 먹다 남은 밤조림을 헛되이 하지 않고 지인들에게 강매하여 수익 창출

♦ 배경

  • 유감과 단이 거주하는 물나들이 마을은 함양군 백전면 대평리의 윗마을이다. 백전면의 인구는 1400명 정도이며 물나들이 마을의 인구는 시루떡 6만원어치를 만들어 나누어 줄 수 있는 규모이다.
  • 백전면의 주산업은 농,임업이며 인구중 70%가 농,임업에 종사하고 있다. 백전면의 주요 생산물은 산에서는 밤, 송이버섯등이며 함양의 전략상품인 곶감(근데 함양엔 감이 많지 않아 다른 군에서 생감을 구매해 온다) 밭 작물로는 양파, 논에서는 당근 벼를 재배한다.
  • 2009년 현재 백전면사무소의 핵심 정책은 1억 농가 10가구 육성으로 2010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면에서 밀어붙이니 힘 없는 노인네들은 동네에 젊은 영농후계자에게 땅을 맡기고 남자들은 게이트볼장에서, 여자들은 정자 나무 아래서 논다. 
  • 아무튼 백전면은 지난 10년간 산에 밤 나무를 엄청 심어 놨고 6월이면 밤 꽃 향기로 정신이 몽롱 할 정도이다. 2008년까지는 7월 8월 중 끊임없는 항공방제로 그 기간에는 삶을 도모하기 위해 바닷가로 피신했을 정도이다.
  • 올해부터 함양군의 농업정책이 밤에서 곶감 산삼, 약초등으로 전환되면서 (밤나무가 늙어가면서 생산량이 줄기도 했다네요) 항공방제가 확 줄었다. 그리고 점차 줄 것이다. 
  • 이 말은 즉 앞으로 백전면에서 생산되는 밤은 적어도 저농약 혹은 무농약 밤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  세부 계획

  • 서울 지하철에서 파는 밤 가위 구입하기
  • 9월 20일에서 9월 말 사이 밤 40kg 구입
  • 추석이 낀 주에 죽어라 밤 깎기
  • 밤 조림 저장 유리병 구입
  • 유감, 단 밤 조림 스티커 제작
  • 밤 조리기 하루종일 (시간날 때)
  • 겨울내 먹을 만큼 짱 박어 놓기
  • 남은거 강매하기, (강매 계획은 비공개)

♦ 예산

   내 용  
물품 구입

 밤 kg 2000원* 40kg =80,000원

 밤 가위 3천원*2개=6000원

 유리병  500*20개=10,000원

 

 
기타 잡비

밤까기 알바비 (일단 미정)

가스비 시간당 1000원 * 5시간 =5,000원

간식비 =10,000원

칸 다시 만들기 귀찮아서 여기 예산

합계 111,000원

 

♦ 기대 효과

  • 백전면 유기농업 확장에 지대한 효과
  • 백전면과 마을 주민 화합에 놀라운 기여
  • 녹대의 가난뱅이들에게 자랑 100% 가능
  • 유감에게 신뢰 증진 (실패시 대폭 하락)
  • 겨울 간식 준비 끝 (이것만으로도 대만족)

 

 ♦ 참고 자료

  • 밤조림 레시피 _  이가라시 다이스케, 리틀포레스트,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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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그 좌절의 역사

"1968년의 위대한 꿈이 실현될 수 없게 되자, 급진적 학생들은 자기들의 혁명을 위하여 작은 테러조직들의 건설을 시도했다. 이것이 언론들에서는 많은 주목을 끌기는 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선진국에서 게릴라 방식을 통해 혁명을 관철하려는 시도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이 세계의 문제의 뿌리가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세기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제 3세계 정복에 있다라고 하는 세계체제 이론가들의 주장을 믿었던 사람들은 20세기에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역전이 1세계의 무기력한 혁명가들에게 자신의 무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방향의 가장 강력한 논거들이 미국에 뿌리박은 사회주의적 역량의 승리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좌파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주1) ― 에릭 홉스봄 ―

  "잘못된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일들을 우리는 충분히 오랫동안 해왔다. 바아더 구출작전은 지식 수다장이와, 겁쟁이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에게 설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민의 잠재적인 혁명적 부분을 위한 것이었다. '좌파'의 수다는 결과와 행동이 없기에 아무 것도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충돌을 최고의 정점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적군파를 건설한다."
― 바아더(A. Baader) 구출에 즈음한 적군파 건설선언 중에서(주2) ―


1.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앞둔 98년, 독일은 이 해에 많은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9월 27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이변 아닌 이변이 연출되었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로 유명한 독일 사람들이 최초로 의회내의 표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투표에 의해 현직 수상을 갈아치운 것이다. 사민당(SPD)의 승리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이들의 압도적 승리와 집권 여당의 엄청난 패배는 그야말로 '정치적 지진'이었다. 그만큼 안정을 원하는 독일 국민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컸던 것이다. 그러나 연정이 마치 전통처럼 되어 있는 독일에서 독일인들은 이번에도 사민당의 단독집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재 가장 유력한 사민당의 연정파트너로 녹색당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커다란 이변이 없는 한 연방차원에서의 최초의 적-녹 연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제도권속으로 돌진'(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을 외치며 20년 전 창당의 기치를 들었던 녹색당은 이제 '대안의 주장' 에서 '대안의 현실화'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점에 서 있다. 녹색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68년 학생운동 출신들, '68' 세대들은 30년만에 비록 연정의 파트너일지라도 권력을 넘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녹색당의 미래와는 달리 68 학생운동의 또 다른 흐름이었던 적군파는 98년 '건군'된지 근 30년만에 해체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녹색당과 적군파,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흐름들이었지만 이들의 정치적인 성격과 내용은 물과 기름처럼 융화될 수 없었으며, 30년이 지난 오늘 이들의 역사적 운명 또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녹색당이 녹색과 평화, 직접민주주의를 주창했다면, 적군파는 적색과 테러, 군대와 같은 규율을 강조했다.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의 자손들이었던 이들의 역사는 오늘 이렇게 다른 길을 밟고 있지만 이들의 발전역사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적군파의 공세는 녹색당의 창당과, 녹색당의 발전은 적군파의 변화와 뗄 수 없는 것이었음을 독일의 현대사는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공화군(IRA)의 평화협상 참여, 바스크민족해방조직(ETA:바스크어 뜻으로는 바스크 조국과 해방)의 정전협정 선언, 적군파의 해체선언으로 도시게릴라를 혁명의 프로젝트로 추진했던 유럽의 3대 무장투쟁조직은 이제 새로운 역사적 변화에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듯 하다.

2.
  적군파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68년 독일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쓴 학생운동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68년 세계는 엄청난 반란에 직면했다. 워싱턴, 파리, 베를린, 도쿄 등 세계의 중심지들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서구세계에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반전시위가 미국을 휩쓸고, 파리의 공장과 밀라노의 대학이 점거 당하고, 베를린의 대학에 붉은기가 오르고, 도쿄의 거리가 학생들의 시위로 온통 소란스러웠다.
  독일에서 학생시위는 60년대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DS)(주3)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운동의 중심지는 베를린의 자유대학이었다. 68년 독일의 학생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67년 6월 2일 베를린에서 이란의 팔레비국왕 방문 반대시위 도중, 학생 벤노 오네조르그(Benno Ohnesorg)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학생들은 각처에서 대학을 점거하고 기존의 강의를 거부하며 '비판대학'을 만들고, 자유발언(free speech)으로 밤을 세웠다. 이들의 시위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해 연일 격렬한 비난기사를 내보냈던 독일최대의 언론재벌인 슈프링어 출판사(Springer Verlag)에 대한 항의시위 이후 점차 시들어져 갔다.
당시 학생운동이 정점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일단 독일 국내에서 학생운동 발단의 직접적인 계기는 기민련/사민당의 대연정(63∼69년)에 의해 추진되었던 비상입법의 관철과 교육비용의 인상시도였다. 학내투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관심은 그러나 점차 사회문제로 옮아가 베트남전 반대시위 등 국제연대투쟁으로 지평을 넓혀갔다.
  사민당의 대연정 참가는 학생들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사민당의 좌파인 빌리 브란트가 수장으로 참가한 대연정하에서 비상입법의 추진은 학생들의 배신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오네조르그의 사망은 학생들의 이런 불만에 기름은 끼얹은 격이 되었다.
  당시 세계적인(특히 서구) 차원에서 학생들의 반란은 학생 수의 급증(주4)에 비한 교육시설의 미비와 무관하지 않다. 전후 경제복구에 성공한 서구의 나라들은 경제발전에 따른 고급인력의 확충이 필요했으며, 대학은 엘리트의 교육에서 이러한 고급인력의 대량확충이 가능하도록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따라 전전에는 대학의 문턱에 접근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자녀들도 대학입학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대학 취학 연령층의 대학입학도 전쟁 직후 5%미만에서 60년대 말로 접어들면 10%이상으로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생 수의 폭증에 비한 교육시설의 증가는 너무나 더디게 전진하고 있었고, 전전 1% 미만의 교육대상을 상대로한 교육자의 숫자는 확실히 덜 '근대적'이었다.
  더욱이 독일에서 대학은 나치시대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전후 60년대에 입학하기 시작한 세대에게 대학은 아직도 과거의 유산으로 비추어졌다. 나치시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대학에 들어간 이들에게 과거의 전력에 당당하지 못했던 전전세대로서의 부모들은 낡은 세대로 인식되었다. 또한 당시 대연정의 수상을 담당했던 키싱어(Kiesinger)의 나치전력은 서독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사회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이 촉발될 수 있었던 또 다른 동기는 세계사적 사건들과도 관련이 있다. 67년에는 당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사망하고, 68년 체코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프라하의 봄'의 진압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10년간의 동란'으로 규정된 '문화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북베트남 폭격에 대한 항의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면서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정책수정이 일어나고 68년 5월 미국과 베트남이 파리에서 첫 협상을 시작하였다. 60년대 후반은 이른바 현존 사회주의와 서구사회의 모순이 가장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였다.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의 무기였던 마르크스주의는 동구권 현존 사회주의의 일당독재에서 질식하고, 사회주의는 더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하게 현존하던 대안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현존하는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실망한 학생들에게 당시 강력한 비판의 무기를 제공했던 것은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과 비판이론에 깊은 영향을 미친 루카치(Lukcas)였다. 루카치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아도르노(Adorno), 그리고 마르쿠제(Marcuse)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사상이 당시 학생운동의 이념형성에 강력한 기반이 되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동구의 공산당에 의해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사변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행동과 실천을 필요로 했던 당시의 학생들에게 루카치의 사상과 비판이론은 역사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적합한 것이었다. 루카치의 대표적 저작인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wu tsein)은 마르크스주의가 아직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굳어지기 전인, 그리고 실천 과정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던 20년대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die Dialektik der Aufkl rung)은 아우슈비츠의 참혹함과 미국 자본주의의 풍요속의 모순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저작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정신을 복원하며, 근대의 계몽이 가진 이중성을 날카롭게 분석한 것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핵심을 총체성(Totalit t)에 두고 이 총체성을 파악하는 주체와 객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강조했으며, 주객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하에서의 물화(Verdinglichung)현상과 물신숭배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다. 호르크하이머의 [권위주의국가](der Autorit re Staat)와 그가 아도르노와 같이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당시 학생들의 사회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호르크하이머는 권위주의 국가(자본주의적인)는 지배로부터 경제적 중재를 박탈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를 회피하며, 시장을 제거하며, 완전한 국가주의(intergraler Etatismus, 현존 사회주의적인)는 모든 사적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롭기에 가장 철저한 권위주의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는 완전한 국가주의는 이른바 작업장 규칙을 전 사회에 퍼뜨리면서, 자유주의적 단계를 생략한 산업화에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독일의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는 경제적인 전제만 다를 뿐 억압적이다. 그러나 그는 루카치와 달리 변혁의 주체는 이미 객관적으로 결정된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으며, 이들은 체제 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마르쿠제에 있어서 혁명의 주체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심부사회의 주변세력과 3세계 민중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호르크하이머의 이러한 인식은 독일 학생들의 당시 정부와 사회주의의 비판, 그리고 학생대중투쟁에 근거를 제공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혁명개념과 객관적 혁명개념을 거부하면서, 마르크스가 초기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강조한 '주체적인'(Subjektiv) 혁명개념을 도입한다. 사회적 변혁은 개체 자체의 변화와 자각된 의지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주5) 그에게 있어서 객관적 혁명과 주체의 변혁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와 아도르노는 근대화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던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면서, 근대는 전체주의와 물신숭배가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물화현상은 그러나 루카치를 넘어 단지 상품의 교환과정에서 제기되는 자연성장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화된 사회의 조직화된 의식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판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 문화로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비판이론의 영향은 당시 독일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두취케의 의식에서도 뚜렷이 보여진다. 이것은 이른바 '직접행동구상'(direktes Aktionskonzept)으로 분출되었다. 두취케에 따르면 혁명은 어떤 새로운 조직된 정당에서 기대할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 정치적 계몽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의 선동, 국가적인 행정권력과 대립하는 조직된 개별 투쟁가들의 감각적 경험은 급진적 반대세력의 확산 속에서 활력적인 요소들을 형성하며 수동적이며 고통받는 대중들 속에서 행동하는 소수에게 점차적으로 자각과정을 가능케 한다. 대중들의 의식은 명확한 비정규적인 행동을 통하여 체제의 추상적인 폭력으로부터 감각적 확실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주6) 비정규적인 행동은 기존의 정당에 의해 조직되었던 정규적인 권위주의적 행동과 행사에 대립되는 반권위주의적인 것이며, 그의 인식 속에는 행동과 계몽이 동시적인 과정 속에서 융합된다.(주7) 두취케를 비롯한 당시 학생운동의 지도부에 비판이론이 남긴 흔적은 일단 철학적으로는 수탈이나, 잉여가치의 축적보다 소외라는 개념이 중심이 되었고,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나 다른 사회적 대립보다는 소비테러에 대한 중산층의 고통이 핵심이 되었으며, 대중들의 조작된 의식은 스펙타클한 그리고 계몽적인 행동을 통해 각성될 수 있고, 기존의 프로레타리아트 정당들의 후진성에 대해 사회운동의 선진성을 부각시키며 반레닌주의적인 노선을 취했으며, 마르쿠제의 주변그룹이론(Randgruppen-Theorie)에 따라 투쟁의 중심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 두면서(주8) 중심부의 활동은 '행위의 선동'에 제한했다.
  68 세대는 이렇게 비판이론을 실천적 차원에서 재구성하게 되며, 이는 각각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게 된다. 적군파의 흐름도 이러한 비판이론의 재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상과 마오주의적 실천을 기본으로 했던 적군파의 흐름에서 비판이론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이것은 1) '총체성'의 문제이다. 즉 다양한 문제들이 총체성으로 해소된다. '제국주의 중심부의 총체성'과 '소외'는 핵심적 개념으로 작용하여 독일은 단지 '제국주의 전체시스템'의 일부로 격화된다. 2) 이러한 총체성은 단지 상품관계의 물화 현상이며, 이러한 물화현상의 극복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 3) 이러한 상품관계를 극복하고 '내적으로 생동적이고, 구체적 인간들 속에서 체현된 새로운 자각'만이 유일한 해방의 길이다. 비판이론에서 이것은 비판적 사고의 제국으로의 '도약'(Sprung)이며, 적군파에서 이것은 바로 무장투쟁이다. 언어의 비판과 비판적 사고는 적군파에서 '무기의 비판'으로 전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따라서 다양한 저항의 형태를 사상하게 되었다. 4) 이들이 물려받은 급진적 주체주의는 문제를 첨예화, 예각화했으며, 사회의 다양한 관계를 갈등과 대립으로 단순화했으며, 극단적인 전위주의로 향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적군파의 탄생과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자.

3.

3-1.
  적군파의 탄생은 70년의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 구출작전으로 시작되지만, 실질적인 맹아는 이미 68년 프랑크푸르트의 방화사건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베트남 소이탄 투하에 대한 '복수행동'(Racheaktion)으로 바아더, 프롤(Thorwald Proll), 에슬린(Gudrun Esslin) 등은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2곳을 방화한다. 다음날 체포된 이들은 3년형을 선고받지만, 이듬해에 보석으로 석방되어, 형집행과 관련된 사회봉사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69년 11월 이들의 사면 요청이 기각되고 형집행이 실질효력을 발휘하게 되자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70년 4월 바아더가 베를린에서 체포되면서 적군파는 실질적인 첫 행동으로 바아더 구출작전을 계획한다. 적군파 1세대의 이데올르그였던 마인호프(Ulrike Meinhof)(주9)는 수배중이던 에슬린과 적군파의 창립멤버이자 바아더의 변호사였던 말러(Horst Maler)와 함께 바아더 구출작전을 계획한다. 70년 5월 14일, 마인호프는 테겔교도소에서 바아더와 함께 공동저술을 위해 베를린의 한 연구소를 들려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바아더를 일단 감옥에서 불러낸 후 이 연구소에서 동행했던 교도관과 연구소 직원에게 총격을 가한 후 창문을 통해 탈출한다. 이후 이들은 PLO의 조직 중 하나였던 파타(Fatah)의 도움으로 요르단으로 도주한 후 그곳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다. 바아더 구출투쟁은 적군파의 공식적 탄생을 알리는 첫 작전이었다.
  석 달동안 군사교육을 받은 적군파 1세대들은 70년 9월, 독일로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70년 9월 29일 적군파는 3군데의 은행을 동시에 습격하여 20만 마르크를 탈취한다. 11월에는 마인호프의 주도로 '여권청 작전'을 벌이며 기센의 관청을 습격해 관청용지와 도장을 손에 넣으려 했다. 71년 1월에는 다시 은행 2곳을 습격해 10만 마르크 이상을 손에 넣었다. 은행습격은 72년 2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은행습격(주10)을 통해 적군파는 약 80만 마르크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른바 '재정활동'은 72년 본격적인 활동의 재정적, 실천적, 조직적 훈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적군파의 본격적인 활동은 72년 5월 프랑크푸르트의 미국 헌병대에 대한 폭탄테러로 시작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1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사망했다. 바로 다음 날 적군파는 아우스부르크의 경찰청에 대해 자동차 폭탄테러를 가했다. 이어진 일주일 동안 적군파는 연방법원의 판사에 대해 암살시도를 하고, 보수언론인 슈프링어 출판사에 폭탄테러를 가한다. 또 24일에는 미군 유럽본부에 자동차폭탄을 설치해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적군파의 이런 공세에 대해 독일정부는 71년 2월 '테러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2백8십만 명의 신상을 한번에 비교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조사방법과, 테러와 납치의 방지와 처벌을 위한 법안을 상정한다. 적군파의 투쟁은 자신들이 바라는대로 적군파와 당시 독일정부와의 첨예한 '대립선'을 만들어냈지만, 이들의 투쟁은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가능케 하는 여러 가지 현대적인 법령과 장치(주11)들을 만들어 냈다.
  은행습격으로 자금과 경험을 축적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한 적군파의 주위에는 당시 급진세력과 동조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투쟁의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의 확대와 무장투쟁의 준비는 필연적으로 많은 성원들의 체포를 낳기 시작했다. 72년 6월 1일 '바아더-마인호프 갱단'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바아더의 체포를 시작으로 6월 7일 마인호프마저 체포됨으로써 적군파 1세대들의 대부분이 검거되었다.
  이 당시 이들의 인식은 '도시게릴라 구상'(Das Konzept Stadtguerilla)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시게릴라 구상'은 71년 4월에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70년에 체포된 말러의 구상에 대한 응답과 같은 것이었다. 적군파의 창립멤버인 말러는 감옥에서 적군파가 지하의 광범위한 하부구조를 건설하고, 군사훈련과 정보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도시내에 각계각층의 동조자 그룹들 속에 핵심을 건설하며, 이들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이들 속에 군사적 준비정도를 확산해야 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주12) 그러나 바아더-마인호프 그룹은 이러한 구상에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게릴라 투쟁에 대한 구상을 '도시게릴라 구상'(이하 구상)을 통해 공개했다.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문서는 매 장마다 마오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이 문서에서 적군파는 기존 좌파와 자신을 엄격히 구별하며, 학생운동의 혁명적 정통성을 자신이 계승함은 물론 이들의 한계 또한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게릴라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적군파는 이 문서에서 드뷔레(Devrey)가 정립한 초점이론(foquismo)에 따라 혁명적 상황의 성숙여하에 관계없이 주체들의 무장투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이들은 말러와는 달리 70년 이후 1년간의 경험에서 동조자 그룹들내에서 적군파의 하부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독자적인 지하구조와 무장투쟁의 방법으로서 지하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무장투쟁은 의회투쟁의 한계와 기존 좌파투쟁의 한계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 어떠한 이론적 준비보다는 실천과 투쟁이 모든 것을 결정(Primat der Praxis)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이 문서에서 이들의 당시 일부 학생운동세력의 합법당 건설노선에 반대하면서 적군파의 무장투쟁을 강조하고, 무장투쟁은 혁명전야가 아니라 지금 즉각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13)
  이후 발표된 글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적군파 전략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그것이 공세의 의미보다는 대항(Gegen)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구상에서는 국가의 무장에 대한 자신들의 무장과 국가의 탄압에 대한 첨예한 대립전선 건설의 필사적 노력이 강조되어 있으며, 80년대의 반제전선(antiimperialistische Front)구상, 90년대의 사회적 대항권력(gesellschaftliche Gegenmacht)의 구상에서도 이러한 단순화된 대립과 타방에 대한 대항의 의미가 이들 전략의 전반을 관철하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인 투쟁은 은행털이, 동지들의 구출투쟁 등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실질적인 공세와 주도권은 이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3-2.
  78년의 '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은 적군파와 독일좌파 뿐만 아니라 전후 독일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독일의 가을'은 77년 9월 5일 적군파가 독일 경제인연합 의장인 슐라이어(Hans-Martin Schuleyer)를 납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75년 2월 27일, '6월 2일 운동'(Bewegung 2. Juni)(주14)이 기민련의 로렌츠(Peter Lorenz)를 납치하고 정치범의 석방 요구를 관철하자, 적군파는 이에 고무 받아 4월 25일 2달의 단식으로 사망한 동료 홀거 마인스(Holger Meins)의 이름을 붙인 '홀거 마인스작전'으로 스톡홀름의 독일대사관을 점령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한다. 슈미트정부는 그러나 적군파의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경찰을 투입하여, 진압과정에서 인질 2명과 게릴라 1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한 게릴라 1명은 후송도중 사망했다. '홀거 마인스작전'은 적군파의 투쟁이 군사적 투쟁으로 국한되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홀거 마인스작전'의 실패 이후 적군파는 검찰총장 부밬(Siegfried Buback)을 살해하고, 드레스덴 은행 총재인 폰토(J rgen Ponto)를 납치하는 도중 실수로 사살했다. 적군파의 이러한 군사적 공세는 75년∼77년 4월 사이에 진행된 적군파 1세대의 재판과 관련이 있다. 적군파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군사적 공세와 납치 시도에 투쟁의 중점을 맞춘다.
  폰토의 생포에 실패한 적군파는 다른 대안으로 슐라이어를 납치했다. 슐라이어의 납치를 통해 적군파는 동료들을 석방시키는 한편 슐라이어의 나치전력을 공개하여 현 국가의 나치체제의 계승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적군파와 감옥의 1세대와의 연결은 77년 2월에 석방된 2세대의 지도부인 몬하웁트(Brigitte Mohnhaupt)에 의해 수행되었다. 몬하웁트는 감옥에 있는 1세대들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왔으며, 그들은 바깥에 있는 동료들이 자신들의 석방을 위해 투쟁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적군파는 '지그프리드 하우스너작전'의 이름으로 슐라이어를 납치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슈미트정부는 즉각 위기대책반을 구성하는 한편 이들과의 협상을 질질 끎으로서 슐라이어와 적군파의 소재파악에 주력했다. 대책반은 모든 언론매체에 적군파와 관련된 검열령을 내렸고, 언론들은 이 검열에 대부분 자발적으로 임했다. 반핵발전소 운동으로 고양되던 신좌파의 흐름들은 적군파의 이러한 무모한 행동에 대해 거리를 두고 이들을 비판했다. 모든 언론과 여론은 적군파를 궁지로 몰아 넣었으며, 정부는 민주주의의 모든 측면을 압박하면서 적군파의 도전에 대답했다. 감옥의 1세대들은 완전히 격리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을 옮기고 검색 당해야 했다. 좌파와 시민운동세력들은 정부와 적군파의 대립을 중재하려 했지만 양측 모두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적군파의 입지는 독일 여행객들이 탄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해 납치되면서 더욱 좁아졌다. 적군파 성원들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동의아래 이루어진 비행기 납치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자기 동료들의 석방은 물론 적군파 1세대들의 석방도 동시에 요구했다. 여론은 물론 좌파도 적군파가 이제 사회의 상부와 대중들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맹목적인 조직이 되었다는 비판이 비등해졌다.
  77년 10월 18일 독일의 특수부대 GSG9(주15)은 모가디슈에 착륙해 적군파 성원들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납치비행기에 들어가 납치범들을 사살했다. 같은 날 이 소식을 감옥에서 접했던 적군파 1세대 3명은 동반자살을 했다.(주16) 다음 날인 19일 적군파는 슐라이어를 사살했다고 공표했다.
  정부와 적군파의 대립은 당시 독일사회 전반을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정부는 가장 첨예한 대립과 민주적 권리의 심각한 제한으로 나아갔으며, 적군파는 단호한 무장행동으로 응수했다. 한 달여에 걸친 극도의 긴장상태로 사회내에는 긴장과 분열이 심화되고 '게릴라와 국가' 사이에서 좌파는 무기력의 좌절감과 새로운 모색 속에서 갈등했어야 했다.
  77년은 과잉폭력의 난무 속에서 사회전반에 동의의 창출과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과제로 남겨 놓았으며, 68년 이후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던 좌파는 본격적인 녹색당 건설에 착수한다.
  77년 '독일의 가을'을 겪으면서 적군파는 77년의 패배를 분석하지 않은 채 80년대 새로운 전략으로서 반제전선을 내놓는다. 독일국가가 나치의 과거를 철저히 분석하고, 청산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비난처럼 이들은 77년에 대한 토론을 금기시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주17)

3-3.
  적군파는 82년 [게릴라, 저항 그리고 반제전선](Guerilla, Widerstand und antiimperialistische Front, 이하 전선)라는 문건을 통해 새로운 노선을 제기한다.
  여기서 그들은 77년 투쟁의 패배는 국가의 승리가 아니라, 국가가 얼마나 폭압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자평하며, 77년 투쟁이 직접 무장투쟁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문제는 발전 가능한 중심부 전략의 전망적 소실점 속에서 게릴라, 전투적, 정치적 투쟁들이 통합적 요소로서 함께 수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이후 제국주의는 그야말로 레닌이 이야기하던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에 와 있으며, 전후 전체 역량관계는 소련의 강화로 동-서, 남-북, 국가-사회의 대립과 불안정한 평형상태가 형성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고리, 즉 제국주의가 최후로 의존할 수 있는 국가들을 강력하게 묶어세우는 것이 현재 미국의 의도이며,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반제전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세계적인 반제전선을 가능케 하는 시도는 중심부 자체내에 전선건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77년 투쟁은 범위의 차원에서 투쟁을 전체 서유럽으로 확산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했으며, 심도의 차원에서 전 사회에 걸친 억압과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국내적 전선형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행동하는 전선'(handelnde Front), '투쟁하는 전선'(k mpfende Front)에는 행동뿐만 아니라, 연대와 구조건설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선의 건설에서 게릴라와 무장투쟁, 비합법투쟁은 역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전선에서는 또한 77년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는데, 미제국주의와 그의 종속국, 미국 자본과 기타 자본, 미국 정계와 독일 정계라는 전체 체제를 수직적 위계를 가진 총체성 속에서 파악하면서, 당시 투쟁의 오류를 자신들의 노선적 오류라기 보다는 판단의 오류로 격하했다.(주18)
  전선의 공개이후 적군파의 활동은 문건에 표현된 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그들의 활동은 은행습격, 미군기지에 대한 테러 활동으로 제한되었다. 적군파는 실제 77년 이후 거의 정체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많은 이탈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비판하던 현존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류가 80년대 본격화되면서, 군사훈련과 물자들을 지원 받는 것은 물론 성원들의 일부가 동독으로 빠져나가 체류했다. 이들은 통일 후 대부분 기존 동독 정보부와 서독 정보부의 합작으로 검거되었다.
  전선 이후 이들의 활동 가운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두 사건이었다. 하나는 85년 프랑스의 직접행동과 '서유럽 혁명가들의 단결' 성명을 발표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은 87년 지도부의 대부분이 검거됨으로써 투쟁이 불가능해졌다. 다른 하나는 프랑크푸르트의 미공군기지의 테러에 필요한 신분증 확보를 위해 미군병사 피멘탈(Pimental)을 뒤통수에 총을 대고 사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적군파의 도덕성에 다시 한번 치명타를 가했는데 적군파는 이후 성명을 통해 그를 사살한 것이 오류였음을 인정했다.
  전선은 "폭넓은 동맹이나, 개방과는 진정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전선구상은 아주 목적의식적으로 좌파의 전투적, 급진적 부분에 제한되었다."(주19) 77년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서유럽의 다른 테러조직과 국내의 급진세력과 반제전선을 구성한다는 전선의 취지는 80년 내내 실현될 수 없었다. 전선은 77년 이후 변화된 객관정세를 이른바 미제의 위기와 위기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반제전선사이의 문제로 격하하고, 주관정세에서 자신의 고립을 극복하고자 급진적 좌파와의 접근을 시도했지만 해산성명에서도 드러나듯이 77년 이후 독일의 좌파는 적군파와 더 이상 연대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신을 정립했다. 결국 전선은 77년 패배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 더 이상 자기변신을 모색할 수 없는 무능력을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3-4.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90년 통일은 적군파에 있어서 77년 패배 이후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이미 82년 전선 발표 이후 2세대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된 상황에서 적군파는 자신을 유지하는데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야했다.
  투옥된 적군파 성원들은 현 적군파의 노선과 자신들의 진로를 놓고 분열했으며, 감옥과 바깥의 연계는 노선의 갈등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다. 더욱이 89년 이후 동독에 은폐했던 전 적군파 이탈자와 성원들의 체포가 이어지면서 기존의 증언들이 번복되고 새로운 재판이 재개되는 등 적군파의 해체는 90년대 들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 속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적군파는 92년 4월 "우리는 경제와 정부의 대표자들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이하 공격중지)라는 휴전에 가까운 성명을 발표한다. 이 성명은 적군파의 수세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89년 이후 서독에서 저항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투쟁이 진행될 수 없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의 출발점은 1) 냉전이 종식되고 공동의 국제투쟁이 변혁을 열어 젖히지 못했으며.... 2) 89년 이전에 정책을 수행했던 것만큼 우리가 더 강해지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더욱 약해졌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에게 공동투쟁을 가능케 하는 흡입력을 상실했다..... 우리가 모든 결정을 하고 다른 이들은 이것에 쫓아오는 방식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의 정책을 매우 강력히 제국주의자들의 전략에 대항하는 공격으로 격하시켰으며, 우리에게 결여되었던 것은 직접적인 긍정적 목표의 추구였으며, 여기서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사회적 대안이었다.... 우리가 관련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대부분 어떻게 공동의 공격을 조직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고 발전시킨 가치는 결정에서 어떠한 공간도 차지할 수 없었다.... 토론과 이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가 아래로부터의 대항권력(Gegenmacht)이라고 부른 역량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들에 대한 동지들의 경험과 토론에서 게릴라가 더 이상 건설의 이러한 과정에서 중심에 놓여질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국가와 경제의 우두머리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사살활동은 더 이상 현재의 과정을 앞으로 전진시킬 수 없다."(주20) 공격중지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대항과 단순한 전선적 대립에 갇혀 있지만 무장투쟁은 더 이상 투쟁의 핵심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사회의 대항권력 건설이라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89년 투옥된 적군파성원들의 89년 단식 이후 점차 제기되기 시작했으며(주21) 석방된 성원들의 적군파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사회운동세력과의 대화와 토론을 일정정도 반영한 것이었다.
  공격중지 이후 적군파의 활동은 바이터스타스(Weiterstadt)의 신축감옥 폭파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공격중지는 모든 테러활동을 중지한다는 휴전선언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공격중지는 그러나 '전투성 없이는 일상적 생존투쟁을 상상할 수 없는' 적군파에 있어서 활동중지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82년의 전선에서 제기된 국가-사회의 대립 속에 모든 것을 해소한 공격중지의 대항권력의 개념은 다시 다른 전망과 지평을 사상한 채 총체성의 블랙홀로 빨려들어 갔으며, 적군파가 그렇게 강조했던 주체성은 92년 이후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공격중지는 89년 이후 독일내의 변화 속에서 77년의 패배를 소화하지 못한 게릴라, 무장투쟁, 비합법을 고수했던 적군파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그들은 서독사회 내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동독 사람들, 그리고 통일독일의 사회 속에서 어떤 대안도 모색할 수 없었다. 더욱이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은 자신들의 차별성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질적인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 활동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공격중지의 대항권력은 사회적 역동성의 반영이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대안모색과는 실질적인 관련이 없었기에 결국 해체의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4.
  적군파는 역사가 되어버렸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과거는 독일인들에게는 상당히 소화하기 힘든 역사로 남아있다. 2백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적군파의 투쟁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적군파의 투쟁으로 독일의 법적, 형사적 제도와 장치들은 비대해졌으며, 운동세력들은 과거 동료들의 극단적이고 첨예한 사회대립화 구도로 '동-서'라는 대립과 더불어 '게릴라-국가'라는 또 다른 흑-백 사이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해산선언에서 적군파는 30년 적군파의 역사와 노선을 역사와 대중의 평가로 남겨두지 않았다. 해산선언에서 그들이 발휘한 자기 역사에 대한 '주체성'은 다시 다른 사회운동과 대중들에게 자기 역사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영원한 역사의 창고로 이것을 던져버렸다.
  비판철학의 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와, 마오주의적 실천으로 '비판의 무기'를 '무기의 비판'으로 대체하며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이들은 결국 좌절의 역사만을 남겨놓았다.
  해산선언은 자신의 좌절과 역사의 좌절을 동일시하면서 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현상에 대한 맹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적군파의 좌절은 역사의 좌절이 아니며, 사회주의의 종말은 희망과 대안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로벌 현상은 그 자체로서 사실일 뿐이며, 지지나 반대를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글로벌화 하는 세계의 발전 속에서 경제현상이 두드러지고 이에 대해 일정한 지역의 한계 속에서 완성태를 추구한 정치의 한계가 드러나며, 국가간(inter-national) 관계 역시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제한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적(global), 지역적(regional), 지방적(local) 문제들은 글로벌한 현상 속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라는 관점은 이제 글로컬(Glocal)한 문제의식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적군파는 지난 시기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계급투쟁에서 찾았으며, 후기자본주의 사회 혁명의 핵심적 문제는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인 국가의 문제이며, 합법성의 위기(Legitimationskrise)를 겪고 있는 국가는 무장투쟁만으로 전복될 수 있고, 이러한 무장투쟁은 도시게릴라가 수행하며, 도시게릴라는 무장투쟁으로 전체 반국가-반자본 투쟁을 선도하며 도시주변그룹들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좌절로 맑스-레닌주의의 3가지 버전, 동구권의 10월 혁명 프로젝트, 반둥 프로젝트, 서구사회의 공산당-도시게릴라 프로젝트의 총체적 파산을 보았다. 전선, 동맹, 인민민주주의독재, 국유화를 중심에 둔 다른 소유형태의 결합 등의 변종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전위정당, 계급투쟁, 피티독재, 국가사회주의를 기본으로 했던 점에서 이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첨예한 계급적 대립 속에서, 지역과 경제권을 중심으로 각종의 제도를 구축했던 근대 민족국가에서 출발했던 마르크스주의와 후진적 러시아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억압을 내재화했던 레닌주의를 결합시켰던 맑스-레닌주의의 프로젝트는 결국 사회의 다양화와 민족국가의 약화와 정치-경제-사회 관계의 변화와 글로벌화의 심화라는 변화 앞에 낡은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프로젝트 전반을 쇄신하지 못한 채 맑스-레닌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을 고수했던 적군파의 좌절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 Eric Hobsbawm, Das Zeitalter der Extreme, Weltgeschichte des 20 Jahrhunderts, Carl Hanser Verlag M nchen Wien 1995, 원제: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2) [BRD-RAF] "Die Rote Armee aufbauen": Erkl rung von Andreas Baader. GNN, Verlagsgesellschaft Politische Berichte m.b.H, Ausgew hlte Dokumente der Zeitgeschichte 1. Aflg. K ln, 1987
별도의 주석이 없는 경우, 적군파의 성명들은 [BRD-RAF]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자료들은 온라인 버전으로 구해 볼 수 있다. 주소: http://www.trend.partisan.net 혹은 http://www.nadir.org
3)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는 1946년 사민당의 학생조직으로 출발했지만, 1960년 반핵에 대한 사민당과의 견해 차이로 거리를 두고 결국 사민당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받는다. SDS는 당시 동독에서 망명해온 루돌프 두취케(Rudolf Dutschke)라는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지도되었다. 68년 4월 11일 SDS회관 앞에서 두취케가 총격으로 쓰러지면서 SDS는 69년 분열과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SDS 내에는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했는데, 당시 이들의 사상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이론이었다. SDS는 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독일의 이후 재야운동(au 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PO)과 대안운동(alternative Bewegung)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취케는 70년대 들어 녹색당의 건설에 참여하다 79년 총격의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4) 유럽 학생운동의 진원지였던 프랑스의 경우 40년대 말에 비해 60년대 대학생수가 4배 이상 증가했다. 독일의 경우도 3배 이상 학생이 증가했으며, 이태리와 스페인의 경우는 40년대와 비교해 볼 때 5배 이상의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학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육시설과 인력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낙후하고 충분치 못했다.
5) 이러한 인식은 물론 당시에 전개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즉, 기존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조직들의 억압적 조직형태로 동화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이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철권통치는 비판이론 1세대들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성에 대한 회의를 심화시켰다.
6) TAZ Nr. 2876 Seite 13-14 vom 05.08.1989
7) 비판이론 2세대의 대표주자인 하버마스는 그러나 당시 학생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68년 6월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학생운동을 '의사혁명'(Scheinrevolution)이라고 비난하면서 테제를 발표했다. 그의 테제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 혁명의 징조라고 간주되는 모든 요소들이 결핍되어 있으며, 사회경제적 계급의 대립은 사회적 보상의 기초 위에서 대중특권을 보장하는 지배체제에 의해 조종되며, 따라서 체제를 위협하는 계급충돌은 잠복하게 된다. "감정적 차원에서 생산된 정체화는 어떠한 가치도 가질 수 없으며", '새로운 데모기술'은 성장하는 자들의 경솔하지만, 그러나 관용적인 부모에 대한 압박과 불만의 의식(儀式)화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은 연령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결국 학생들은 심볼과 실제를 혼돈하고 있으며, 대중적 계몽에 주어진 전략의 자리를 의사혁명의 전술이 차지한다. 학생들은 현실적이어야 하며, 행동공간의 경계를 인식해야 하며 특권적인 영향력의 기회를 가진 노조 등과 공동사업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인식은 이른바 합법성문제(Legitimationsproblem)로 발전되고, 노조와 같이 파업의 합법성을 학생운동이 창출하여야 하며, 반대로 국가나 후기자본주의는 자신의 지배를 합법화하지 못하면 커다란 위기에 빠지게 된다. 후기자본주의에 들어와 이러한 합법성의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제(System)로부터 생활세계(Lebenswelt)를 방어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의사소통행위(Kommunikatives Handeln)가 실종되게 된다는 것이다.
8) [Rebellische Subjektivit t und Internationalismus], Verlag Arbeiterbewegung und Gesellschaftswissenschaft: Marburg. 1989
9) 마인호프는 학생시절부터 유명한 학생운동가였다. 독일학생운동을 주도했던 SDS의 반핵죽음위원회(Anti-Atomtod Ausschu )의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좌파 월간지로는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콩크레트(Konkret)에서 59년 이후 기자생활을 하다 62-64년에는 이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독일공산당(DKP)의 당원이기도 했다. 마인호프의 이러한 경력은 적군파가 레닌주의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0) 적군파는 이러한 은행습격에 대해 이것은 "재정문제를 다른 식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논리적으로 올바르고, 이것은 몰수작전이기에 정치적으로 정당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기에 전술적으로 합당하고, 게릴라의 재정에 이바지하기에 전략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1) 72년 3월 사민/자민당 연정은 '국내안보를 위한 중점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연방형사청의 인원을 933명(69년)을 2천62명으로 2배 이상 늘리고, 예산을 6배 이상(2백20억에서 1천2백2십억 마르크로)으로 늘렸다. 그리고 각 지방의 기동경찰을 1만 8천명에서 2만2천명으로 늘리고, 이들의 무장을 현대화하고, 좌우테러를 감시하는 헌법감시청의 인원을 50%이상 증가시켰다. 이러한 국내질서대책은 74년 개인의 자유를 특정한 상황에서 제한할 수 있는 법령 개정으로 이어졌다.
12) [BRD-RAF]
13) [BRD-RAF]: das Konzept der Stadtguerilla
14) '6월 2일 운동'은 오네조르그가 죽은 날을 자신의 단체명으로 삼은 무장투쟁조직이다. 적군파가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면, 6월 2일 운동은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단체는 적군파가 인텔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데 비해 노동자와 인텔리가 같이 결합된 조직이었다. 80년 초 적군파에 합류함으로써 '6월 2일 운동'은 해소된다.
15) GSG9은 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이스라엘 선수들 사살과 적군파에 대한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16) 76년, 감옥에서 자살한 마인호프와, 77년 슈탐하임(Stammheim) 감옥에서 자살한 바아더, 라스페(Jan-Carl Raspe), 에슬린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마인호프는 수건으로 목을 메달았으며, 바아더와 라스페, 에슬린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어떻게 비행기 납치범들의 사살을 알 수 있었으며, 고립된 감옥에서 어떻게 서로 동시자살을 시도하기 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며, 하루에도 6회 이상의 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들을 적군파의 동조자들은 제기한다. 그러나 적군파 성원들의 상당 수는 이들이 감옥에서 라디오를 조립해 들었으며, 서로간의 의사소통도 했고, 총기를 반입하여 감추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Taz, 96년 6월 16일, Taz Magazin 5567, 27. 06. 98)
17) 마약중독자였다가 마인호프와 바아더에 의해 의식화돼 적군파에 참여 한 이후 슐라이어 납치에 참여했던 2세대 지도부인 봌(Peter-J rgen Boock)은 적군파 내부에서 77년 슐라이어 납치와 슈탐하임의 동료들의 자살에 대해 적군파 내에서 토론된 적이 없었으며, 완전히 타부시 되었다고 한다. (Taz 6월 16일)  이에 비해 또 다른 2세대 지도부인 몬하웁트는 '성명 77'에서 스톡홀름 이후 적군파는 무장투쟁으로 국가와 대립을 시도했으며, 이 투쟁에서 적군파는 '게릴라와 국가'사이에 갈등했던 좌파와 이들의 개량주의를 분명히 했으며, 제국주의 중심부 국가에 대한 반제전선 구상을 구체화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BRD-RAF)
18) BRD-RAF: Guerilla, Widerstand und antiimperialistische Front
19) Lutz Taufer(전 적군파성원), Gesellschaft oder Isolation Teil I, ak 363, 09.Febrbuar 1994
20) TAZ Nr. 3682 Seite 3 vom 14.04.1992, "Wir werden Angriffe auf f rende Repr entanten aus Wirtschaft und Staat einstellen"
21) Lutz Taufe, Gesellschaft oder Isolation Teil II, ak 364


* 김정수(독일 베를린 홈볼트대학 학국학과를 수료)
* 이 글은 시대정신 [1998 11-12월호] 창간호에 수록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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