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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1
    가사노동(3)(1)
    하얀저고리

가사노동(3)

나의 친정어머니는 결혼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교복을 입은 채로 첫 교단에 섰던 어머니는

일제시대와 해방 후 전쟁을 모두 겪으신 분이다.

또한 아버지를 만나 결혼 후 4.19를 겪고 

5.16 군사혁명 이후 유신정권 하에서 많은 고초를 안고 살아 온 여성이다.

 

그냥 여자로서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내가 어머니의 생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일본에 갔을 때 추쿠바 대학의 모교수님을 만나고부터이다.

그 교수님은 나를 처음 보고 어디서 많이 나를 보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살았던 나는 일본 교수님이 나를 알턱이 없으므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분은 츠쿠바 대학에서 유일하게 한국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한국사람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고향을 물어 보시고 어머니에 대해 물어 보시더니

자신이 나의 어머니와 같은 국민학교에 근무 했었다는 말을 하시면서...

내가 나의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그러신다.

자신은 국민학교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동경 사범대학에 유학을 떠났다고 말했다.

동경 사범대학이 쓰쿠바 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이 곳에서 조교수직을 맡고 있다고...

사람의 인연이란게 참으로 기묘하다.

나의 얼굴에서 어떻게 엄마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에게 그 교수님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꼬질꼬질한 바바리 코트에 '콘사이스'라는 별명이 붙은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고....

그러나 지금은 젊은 일본 학생들과 교정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 교수님의 인생과

꼬질꼬질한 부엌에서 가사노동에 찌들인 현재 어머니의 삶이 비교되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가 교편생활을 왜 그만 두게 되었는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했다.

 

어머니는 여성의 몸으로 그 교수님처럼 홀연히 유학을 떠날 수 없었다.

전쟁 후 상흔이 짙은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머니는 결혼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 이중노동으로 인한 과로로 첫 아기를 낳은 지 하루 만에 잃고 정신적 후유증을 앓는다.

그 후 집에 은거생활을 하다가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고 넷째를 낳았는데 

유난히 자식 욕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2남 2녀를 슬하에 두게 되신다.

어머니의 생애는 출산과 양육을 하는 10년(1기)과 

경제활동과 양육을 동시에 하게 되는 20년(2기)과

자녀들의 출가와 경제활동을 하는 10년(3기)으로 나눌 수 있다.

남편의 수발을 하며 자녀들의 경제보조로 살아가는 삶을 이후의 삶(4기)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과 양육이라는 부분과 삶의 형태가 함께 맥을 같이 하며 흘러간다.

나의 어머니의 삶이 특이한 점은 여성으로서의 억압과 현실을 온몸에 받으면서

동시에 식민지 현실의 남북분단과 사회적 억압을 동시에 받으며 살아야 했던 점이다.

어머니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인상깊다.

 

'남편과 부부싸음을 하고 옆집에 왔는데 저녁해가 기울자 젖이 퉁퉁 불어 아기가 생각 나 집으로 들어 갔다.'(1기)

'강인한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도 자신에게는 ‘여필종부’라며 순종을 강요했다. 나는 이런 남편의 이중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나와 동지가 되어 함께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면서도 자신의 가부장적인 지위는 끝내 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남편이었다.'(1기)

 

'1965년이었다. 낮에는 우유로 밤에는 모유로 이사람, 저사람, 공장사람, 손에서, 등에서 그렇게 막내 아이는 자랐다.'(2기)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밖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밤늦게 들어오면 녹초가 되었다. 잠이 부족하여 실컷 잠을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2기)


'석방이 된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고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남편은 나를 ‘수성’이라고 불렀는데 오수에서 따 온 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필종부’ 순종하는 연약한 수성이가 아니라 어린 4남매를 혼자 가르치고 세파를 헤치며 살아온 오수로 별을 따러 가는 투사에 가까웠다.'(3기)
 

'결혼해서 55년이란 세월을 그 사람의 주변에서 맴돌다 또 다시 혼자가 되는 운명인 것을....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음식도 마음대로 못 먹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 그의 곁에 남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4기)

 

어머니의 가사노동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낮은 계급에 머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질곡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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