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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일하는 나...

지금 전 알바로 들어간 일터에 있습니다.

물론 그 때의 악몽(?)과는 벗어난 생태로...

 

그리고 나가라는 말대신 오래 있으라는 말을 할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답니다.

 

특히 여긴 나이 많으신 여성들이 다수라서

그나마 폭력적인 구조가 아니라 쉴 틈도 많이주고

무겁거나 힘든 일이 없이 그저 가내수공업으로 하고 있지요.

 

다시 말해서 여긴 특성상 '엄마를 잡아야 해서'(?)

임신 및 육아 정보와 샘플을 보내는 포장과

배송을 맡고 있고 전 거기서 도와주는 일이지요.

 

물론 남성도 있긴 하지만 정규직 한 분을 비롯한 모두

나이대가 비슷비슷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주변 이들이 부담스럽게 잘 챙겨주어서

앞서 임금 때문에 간 것과 달리 분위기는 good 입니다.

 

그리고 가끔 외부로 가거나 매주 한번 외식도 하는 경우가

있고 여기가 식품회사이다보니 음료수도 주기도 해서 좋아요.

뭐 제가 계속 자랑하는 건 아닌가란 느낌이 나네요...

 

그럼에도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습니다.

먼저 비정규직이다는 건 물론이고 임금이 4대보험과 퇴직금을 빼면

70만여원 정도만 주고, 통근버스가 없어 제 돈내고

시내버스를 타야 하는 것...

 

물론 걸어서 갈 수 있지만(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실듯...)

시간이 2시간이어서 다산으로 가는데 30분과 비교하면...

 

또한 여기서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각 성별 역할을 규정하는

소위 성(性)분화가 있어서 조금(!-미안하지만...) 거슬림도 들립니다.

 

그래도 주 5일(공휴일 휴무)에 일 8시간 노동만 하면 되고

일이 힘들지 않고 맘도 편해서 되도록 오래 있을라고 해요.

그런데 9시까지 가는 건 좋은데 왜 졸리지?

 

그럼 전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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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기뻐야 하는지...

오늘 다른 일자리에 갈려고 면접
(알바이라 무슨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만나는 것...)보았고
내일 다른 곳에서 돈벌이를 하려고 갑니다.

바로 혹시 볼까봐 두렵지만...
영통 근처의 모 유업 물류센터에서 포장하는 일하는 것인데
앞선 것보다는 버스는 시내버스를 타야 하고 임금도
세전 80여만이라서 낮긴 하지만...
(4대보험에다 퇴직금 빼면 70여만원...)

앞에서 남성중심 사회에서 일하는 것과 달리
나이 지극한 여성이 대다수 있어서
그나마 마초성이 적은 곳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적은데 분위기가 좋은지 2,3년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잘 선택한 듯 싶네요.

또한 최대의 약점인 버스를 타도 또 다시 걸어가야 할 듯한
근접성 문제가 있었는데 다행히 현장조사를 한 결과
근방에 버스가 있어 땡 잡은 듯 싶네요.

그 담당자는 오래 다니라고 말을 하는데 뭐 주 5일근무에
9시~18시의 칼퇴근이라서
남은 시간에 활동할 수 있고...
더욱이 월급이 정액제인 이유로 몇일 빠져도
(물론 사전에 예기를 하지만요) 그대로인 것도 좋고요...

하여튼 전 내일 또 다시 첫걸음부터 시작합니다.

여담으로 어제 자작으로 총궐기에 들고 갈 '작은 깃발'을 만들었지요.
바로 검은 색 종이에 흰 펜으로 대충~ 쓴 것이니... 알아서 반겨주실.

또한 위와 관련이 있지만 민노당 당대회에서
개방형 경선제 도입에 대한 '항의'의 근조라벨을 만들었으니
아시죠.

또 회고록을 써야 하는데 참... 난잡한 제 두뇌로 인하여
미루고 있어서 좀 그렇네요.

끝으로 이제 3월인데 왜 눈이 많아 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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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에는...

어제 다산에 가니 누군가 11일에 여수참사 관련 집회를 가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전 그 날 민노당 당대회에 참석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당원으로서도 있고 경기도당 대의원이란

별 볼 것이 없는 직책이 있지만 앞서 출마를 할 때

약간 회의감이 있으나 그 누구도 거들덕보지 않아서

자진해서 한 것도 있어서, 꼭 지켜볼 필요도 있어서 가기로 하였지요.

 

그런데 왜 거길 가는가 하면...

바로 노회찬 의원의 대선출마에 대하여 87인의 서포터즈를

모집하는데 거기에 병역거부자 한 분을 참여해달라는

모 씨의 요청에 내부논의를 거쳐 그 누구도 결의를 하지 않는다면

제가 하겠다고 하였고 결국 떠넘긴 채 가기로 하었어요.


그래서 그 날에 일찍 나와서 뭔가 해야 한다고 하였고

담당자와의 통화를 하여 참석에 대한 확약하고

자기소개를 담은 서류를 제출하였지요.

 

솔직히 전 아직 그 분에게 확실하게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로는 선택할 수 있는 후보이고

병역거부에 대하여 당론이지만 나름 도움을 주었고

특히 제 자신과도 인연이 있어서 Yes!라고 하였고

그 날 가기로 하였는데...

 

이번 당대회에서 여려 안건이 았지만 특히

'진성당원제'를 훼손시키는 대통령선거에 대한 '개방형 경선제' 도입

유무가 걸려 있어서 저로선 참 짜증이 말려 나오네요.

 

그래서 그 날 참관하며 지켜보겠지만

만약 그 걸 통과를 시킨다면 저로선 무슨 일을 벌어서라도

불복종을 할 것이예요.

 

바로 그러한 과정

즉 당내선거부터 그 누구도 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고...

후보가 누구든지 특별당비 거부와 선거운동 거부를 할 것이면서

그리고 실제 대선에도 민주노동당 후보를

절대 지지하지 않을 것이예요.

 

특히 지금 어쩔 수 없이 돈이 없지만 돈이 있어도

당비를 내지 않을 것은 당연하고요.

 

물론 이 걸로 당기위에 재소를 하면 당연히 나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하면서 그러한 행동에 반박한다면

어차피 탈당이 염원하기에 당연코 내 손으로 탈당하는 것이 아닌

그 들의 손에 의하여 제명 즉 출당을 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여튼 그 날 전 반드시 센트럴시티에 가서 지켜볼 것입니다.

참고로 민노당 수원시위원회에 올린 이와 관련한 저의 글입니다.




먼저 저는 중앙당 대의원이 아니라서 이 안건에 대한 의결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11일에는 다른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있고,
아는 이와의 인사도 나누면서 참관을 하려 당대회가 열 '센트럴시티'로 갑니다.

먼저 이러한 토론에 참여를 하니까 몸내 부담감이 들지만...
결국 이 대선에 대한 '개방형 경선제'는 민주노동당의 정신 중에 하나인
진성당원제를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면서,
이른바 다시 한번 '바람몰이'를 하겠다고 하지만 그 어떤 부응이나 징후 없이
열우당이나 딴나라당 등의 정당의 구성원이 사실상 없는 채
'인물'가치를 높이려는 투기꾼들의 집합체에 국가기금으로서만 유지하는
'기업정당'과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또한 이번 안건이 통과된다면 이후 다른 공직선거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올 수 있기에 더욱더 거부감이 듭니다.

다시 말해서 당대회에 나온 대부분의 안건에 반대하지만
특히 이 '개방형 경선제'에 극렬히(!) 반대합니다.

물론 무슨 51%이니 이번만 한다느니 등등
이 안건에 주도하는 쪽에는 당연코 필요성이 있겠으나,
매월 10,000원 씩 당비로서 은행에서 빠져나가는 건 물론이고
분회나 당내 행사 및 집회, 캠페인에 참여하라고 하면서
공직선거가 있으면 거기에 물신양면으로 지원을 해달라는
저 집행부에 대다수 당원 동지들은 그 것에 응하면서 가능한 수준에서 답하는데
이 안건이 통과가 된다면 과연 이러한 헌신성이 유지할 수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발에 근거한 헌신성이
바로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법과 제도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한 대다수 민중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진보정치를 염원하기에 그러한 맘이 나오는 것인데
이미 그러한 염원에 찬물을 끼얻는 사건이 많이 벌어져서
이제는 탈당자가 입당자보다 많아지는 현실에서
기존정치에서 기득권유지와 무원칙에 실망하던 대중들이
과연 최소한의 원칙도 저버리는 이 제도의 도입으로서
'국민참여'으로서 면피할 수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더욱더 상식적으로 보아도 어느 단체에서 운영진을 뽑는데
기본으로 그 단체의 구성원이 그 운영진에 대한 선거권을 주지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이 단지 몇 푼만 그 단체에 주고 그러한 권리를
주는 무슨 내규가 있는가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한다면 저는 최소한의 상식이나 원칙에 어긋난 이 안건에 반기를 들것이고
진정 이번 대선과 총선에서 다시 진보의 순풍을 불어야 한다면
다시 원점에서 논의해 여러 대안을 가지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안건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표결시
우리 지역위에서는 대다수가 찬성한 것에 실망스럽고,
그동안 분회를 돌며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사실상 면피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었습니다.

또한 노골적으로는 이 걸로 누군지 다 아는 '당외 인사'가 출마를
하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들어서 더욱 분노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이 '대선에 대한 개방형 경선제'가 통과가 된다면
전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도에 의거하여 후보선출 선거와 대통령선거 운동
그리고 대통령선거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모두 거부하는 불복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탈당에 마음먹은 채 결사를 각오하고 있기에
내 손으로 탈당서를 쓰지 않고, 그들의 손에 제명(출당)의 단두대로서
답을 받아 낼 것입니다.

그럼 저의 소견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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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도 열심히 하더니 왠 '쉬어'?

앞서 제가 취직을 해서 기분좋게 일을 하였지요.

비록 원료 자체가 얼음덩이라서 좀 무겁고 바삐 움직여서 힘은 들지만,
쉴 틈도 상대적으로 많고 잔업이나 특근에 대하여 선택권을 주고 있어서
나름대로 '재미있어' 있을 만 하었어요.

물론 앞서 몇 개월이지만 일을 하었던 곳이었고,
대다수 직원들이 저를 알고 있어서 비정규직(알바)이지만 좋았는데...

어제 아침에 일터에 들어서니 나이 지극한 모 직원이 날 보더니

'승규! 왜 여기에 왔어? 혹시 연락을 받지 않았어?'

하는데 무슨 말이냐고 묻더니
제가 유일한 단점이 제가 일하는 곳이 공장과 약간 떨어진 곳인데
문제는 통근버스가 공장에만 간다는 것이어서
당장으로는 직접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문제 좀 해결하는 의미에서
공장으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더니 어쨌든 잘 되는 것
같아서 이런 연락을 받지 않았냐는 것이지요.

결국 그 직원이 연락을 한 후
당장 그 자리에서 있기로 하였는데...

퇴근에 임박할 때 누군가 날 찾는 전화가 와서 받는데...
이딴 말을 하더군요.

'잠시 쉬었으면 하네.'

엥~ 한참 재미있게 일하며 오래 비정규직으로 살며
사야할 걸 고심하던 나에게 왠 쉬어?

즉 지금 공장 내 시설 일부가 공사하고 있어 정규직도 다른 파트로
돌며 하는 상황이라서 부득히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한다는데...

물론 저로선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하였지만...
뭐라 반박할 수가 없어 수용을 당했지요.
그리면서 다른 직원이 조만간 만날꺼라고 위로(?)하며 나갔지요.

다만 오늘 새로 들어온 비정규직(알바)은 다른 곳에 배치하며
잠시라도 일을 하는데 저로선 의심감이 들었지요.

그리더니 오늘 다산에 가던 중 생활정보지를 보다 열이 나더군요.
바로 내가 들어간 그 자리를 뽑는 광고를 보았거든요.

그래서 약간의 기대감이 들었던 저로선 참 분노하게 하였고
어떠한 사유인지 또 다시 뽑는 것이 뭔지 알아내고 싶어서...
내일 아침에 결판 좀 내볼려고 합니다.

어쨌든 저로선 그 자리에 다시 가는지 아니면 다른데
알아봐야 하면서 그 사건에 대한 의혹을 풀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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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기뻐할 일.

...이라고 말을 할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을 잠시 접을 것 같아서 좀 그렇네요.

(누군가 운동=삶 이라고 말하지만...)

 

바로 다음 달부터 무일푼으로 다산에 있었는데

돈벌이를 하게 되었어요.

물론 면접까지 보고 바로 결정한 것이지요.

 

바로 용인 신갈에 있는 녹십자.

그 중 혈액 중 혈장(혈액을 가만 두면 위에 묽은 부분임)을

가지고 알부민이나 응고인자 등등 '혈액제제'를 만들 때

원료(?) 중 샘플 체취하거나 운반하는 등의 일을 합니다.

 

다행히 제가 예전에 잠시 알바로 바로 그 곳에서

비슷한 파트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고 수혈을 해야 함에도

워나 공급 부족이 되어서 일이 없어 시간이 남을 때

가끔 앞서 한 걸 도와준 적이 있어서

나름대로 익숙하긴 한데 그게 5년전이 되었네요.

 

그래서 가끔의 특근이나 파견근무 즉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건 이외에는 주5일근무에 임금이 100만원정도...

4대보험은 기본이고 집 근처에 통근버스를 탈 수 있고

밥도 주니... 누군가 '귀족'이라고 비아냥거리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나름 괜찮습니다.

다만 오래 일해도 소용없다는 걸 빼고는...

 

그리고 면접에서 병역부분를 묻지 않고

예전 경력으로 무조건 오케이이라 말해서 좋았는데...

문제는 실제 일터가 다른 곳인데 버스로 가기가 어려운 곳이어서

조금은 기우뚱하네요.

 

그럼 전 주중에 열심히 현장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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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흙색이여 안녕. 그리고 Hi! Blue - 기결수 방으로 이동...

앞서 증인 한 분이 방을 옳긴 후 몇몇이 기타방에 들어 왔지요. 그 몇몇은 이후 '바다이야기'로 난리가 났지만 성인오락실을 운영하면서 그 걸로 밥벌이를 하는 분이 있었고 공익근무요원에 있다 2번째로 무단 결근을 하여 법정구속으로 들어온 이가 있었지요.

 

그리고 누군가 '병역거부권이 인정하면 징병체제가 무너진다'고 한 인간에게 한 소리를 하듯이 필리핀에서 몇 년동안 거주를 하였다가 그 때가 되어 자진귀국과 함께 징역살이를 선택한 여호와의 증인이 들어왔지요.

 

특히 성인오락실 사장님은 그 당시 수원지검 모 검사가 성인오락실과 조폭와는 연계성이 있을 거라고 잡아들었는데, 자신이 한나라당 당원이라고 하면서 민주노동당 당원인 저와 나름 사상 논쟁(?) - 별 다른 건 아니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유무 논쟁 - 을 벌었졌죠.

 

그러다가 개천절도 지나더니 10월 4일 아침이 되더니 담당 직원이 절 '전방' 즉, 방을 옳길 준비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앞서 출역신청을 하였기에 나도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는 듯한 설렘과 함께 봉사원 등에서 준 물품과 많은 책들을 이불 속에 넣어서 그 때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 후 한 두 시간 후 담당 직원이 절 나오라고 하였고, 방 사람들과 해어짐의 손저음을 하면서 이 못난이에게 은혜를 주어서 고마움을 주며 두 달하고도 하루동안의 미결수는 끝난 채 짐을 들고 직원이 가라고 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 저와 몇몇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처음 들어올 때의 공간으로 갔고, 상하의를 벗은 다음 수번줄만 때내었지요. 그 다음 세탁을 안한 듯한 퍼런 상하의 뭉치를 주었고, 전 아무거나 집어서 입었고 직원의 설명을 하였는데 역시 면회 횟수의 제한을 알고는 있었으나 좀 아쉽긴 하더라고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 각자 살 방을 찾아갔고 저도 그 무거운 짐을 들고서 제가 살 방으로 갔는데 그 곳은 나동 8층 17방. 역시 앞에 월드 메르디앙 아파트가 있어서 어두침침한 분위기였어요.

 

방 앞에서 도착한 후 짐은 방안에 넣고 그 사동담당 직원과의 대면하면서 대화를 했고, 잠시 후 그 방에 들어오니 처음인 것 자체가 뭔가 움츠리게 하더라고요. 다행히 조폭인 듯한 분이 없었고 인원수도 날 제외하면 3명뿐이어서 분위기는 좋을 듯 싶었으나 역시 작아진 난 변함이 없었지요.

 

그 다음 방 사람들은 짐을 풀어서 방 규칙에 의거하여 제 위치에 차곡차곡 맞추었지요. 그리고 실질 봉사원과 명목상의 봉사원의 방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하였지요. 그 중 핵심은 여기는 기결수 방이고 이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하니 할 일은 하면서 편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 기억이 나군요.

 

그런데 이방에선 왜 봉사원이 두 명이냐고요? 그 건 명목상의 봉사원 즉 소측에서 지정한 봉사원이 너무 오랫동안 하니까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다고 다른 분에게 위임을 하였거든요. 사실 지도자라는 위치가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보이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중압감이 크잖아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넘겨 준 것이지요.

 

이후 저에게 할 예기가 있냐고 묻더니 전 당연하게 지문날인 문제로 영치금을 쓸 수가 없다는 걸 양해해달라고 말했지요. 그리더니 바로 봉사원이 직원 면담을 신청하는 등 그 싸늘함은 예상대로 이었지만 반응은 극악이었지요.

 

물론 그러한 불편에 대하여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받아줄 아량이라도 있겠으나 문제는 제한된 체제인 감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측에서 최소한의 생필품 이외에는 지급하지 않는 현실에서 그나마 인간된 삶을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하는데 저와 같은 불순분자(?)에게는 솔직히 도움이 안될 뿐이지요.

 

잠깐의 시간이 지나 그 봉사원은 철문에서 나왔고 이 다음 교대하면서 제가 나왔지요. 그리면서 그 직원은 역시 알아보는 듯한 말로서 오해가 있었다고 하면서 잘 있으라고 하군요. 그럼에도 이후 뒤늦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요구에는 인권위 진정 따위의 핑계로 기다리라는 답만이 들렸지요.

 

그래서 제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 봉사원이 좋은 분이었는지 너그럽게 아니 어떻게든 대리는 듯이 나을 것 같거나 얼마 있으면 갈 사람이다라는 판단인 것 같이 받아 주었지요. 그 다음 오후에 두 분이 더 들어 왔으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좌충우돌한 하루는 끝났습니다.

 

그 다음날 기결수로서 처음 운동시간이 되었는데 그나마 햇빛이 들어와서 화사한 가동과는 달리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감돌은 건 물론이고 구성원도 다르다보니 너무 달랐지요. 그리고 세월라 내월라 그냥 내버러 두었던 시스템과 달리 역시 30분이란 시간를 끝가지 지키려는 듯해서 약간의 부적응이 들었지요.

 

그리고 그나마 편안한 나날을 보냈는데 다시 '막내'로 들어오니 인원수도 적어서 아침저녁으로 설거지를 하게 되어서 좀 적응이 안 되었고요. 그래도 앉아서 TV를 보는 것과 달리 누워서 이불피며 보는 건 좋았지요.

 

그럼에도 직원이 이런 행동에 대하여 뭐라고 터치하는데 그 때 그 봉사원이 반격을 해주었지요. 특히 이분은 저같이 미결수에 있다 기결수가 된 경우와 달리 모 교도소에 있다 구속 전에 있던 사건으로 검사가 기소하여 재판을 받으려 온 상황이었는데 징역말로는 '추가건이 떴다'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징역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알고 있었기에 직원과의 대응방법을 알고 있었고, 또한 국가인권위 진정에 대하여 자주 건수를 높여서 조사관에겐 악질적인 행동을 하였던 분이라 저와는 약간 코드가 맞은 듯 하였지요.

 

그러기에 다음 날 바로 출역 신청을 해주었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그 당시 취사장이라도 좋으니 여기에 남아 있고 싶다는 바램이 좀 강한 것 같았어요. 물론 취사장이 새벽부터 나와서 쉴 시간 없이 고강도 초저임금으로 일하기에 싫을 수 있지만 병역거부자이기에 이후에 어떻게든 좋은 자리로 갈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걸 믿었지요.

 

전 여기서 일하길 바라면서 하루들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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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그리고 어제에는...

그저께...

 

그 날은 목요일. 즉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목요집회에

병역거부를 주제로 치른다고 하면서

소위 '비밀결사체' 주도로 모 병역거부자가 떡을 준비하면서

그 날 즉 2월 22일에 잡기로 하여서 갈라고 하였는데...

 

요즘 날씨가 좋은 것과 슬 때 없는 밤샘으로 인한

피로감과 '느림의 미학'으로 정말 늦게 출발해서 역시나

늦게 도착을 하였지요.

 

다행히 집회가 중반 쯤이었고

전 뒤에서 바라보며 몇몇 이와 인사를 나눴지요.

 

그러다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의 인사 출현이 되어서

반의 두려움과 함께 나와서 마아크 대고 인사를 하였는데...

 

아~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허해지는 내 머리속이란...

결국 어쩌할 방법 없이 주절주절 하며 성함을 부르는 걸로

마무리를 하였지요.

 

그런데 집회 끝나고 어느 어르신(보시면 아실 듯)이

우리들에게 민가협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정작 영치금이나 책을 보내는 건 양심수후원회인데

출소 후에는 전혀 우리 쪽에는 고맙다거나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정말 대놓고 말했는데...

 

물론 제 자신도 미안함이 드네요...

 

그래도 나름 민가협에게 소통해준 고마움이 있었기에

자신있게 말을 했으나 무슨 의도로 극한 서운함을

표현을 하였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이후 어떻게든 양심수후원회로 가서

훈계 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후 성대 근처의 사무실(사실 가정집)에 가서

녹두 뭍힌 떡(뭔지 모르지만 정말 맛있었음)과 과일을

먹으며 민가협 어미니의 조언을 듣으며 앉았지요.

 

그러다가 끝이 나자 각자의 일정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대한 부적응인지 모두 나가게 되었고

전 그 떡에 대한 약간의 미련이 있으나...

다른 곳으로 향해 갔지요.

 

그리고 어제...

 

어제는 병역거부자 용석 씨의 외출일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평택대행진 건으로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는 날이었지요.

 

 전 별 일이 없는데도 또 다시 무기력함과 졸음으로

또 다시 제시간에 늦게 그 법정으로 갔지요.

 

그런데 앞서 재판이 많이 있다보니 아직도 시작이 되지 않았고

뭐~ 밖에서 죄인(?)이나 방청객과 대화를 하였지요.

 

그 후 누군가 들어오라고 하였고 법정에 들어서니

앞서 누군가 판사가 바꿨다고 듣었는데 역시 판사가 바꿨군요.

 

우리들은 판사가 바꿔서 기대나 우려함이 들었는데...

역시 어린 사람인 듯한 재소자에게 반말로 대하는 등

저번 판사보다는 좀 격이 떨어진 듯하게 보였어요.

 

그래서 앞서 공판에서 진행을 많이 하려고 하였으나

불출석한 어느 분의 심문과 변론만 하고 검사가

그 당시 상해입은 의경과 전경의 증인을 요청하였고

이에 판사가 응하면서 심문을 하겠다고 하면서

다음 기일을 3월 22일 오후 3시

수원지법 410호 법정에서 한다고 끝났지요.

 

그런데 검사 쪽에서 증거라고 하면서 대충 40cm 정도의

증거 서류를 제출하였고 그 두 증인이 피고인 중 누구라도 지목할

가능성이 있어서 걱정이 만발하게 하였어요.

 

(특히 용석 씨는 사회자로 나와서 더욱 그 가능성이 높은데

혹시라도 실형이 나오지 않기를 빌 뿐이지요.)

 

그 다음 죄인(?)들과 방청객은 밥 먹으면서 대책회의를

하였지요.

 

아~참 그 날의 경우 앞선 공판보다는 오는 이가 많이 없었고

CO 쪽에는 오리, 여옥 씨만 왔었지요.

 

또한 용석 씨는 제 두상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12부로 삭발하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이쁜  걸 넣어달라고 하더니 그 결과물은 제가 보기엔

진녹색 군복점퍼(?)인 듯...(미안한 소리인데...)

그래도 따슷하게 입은 듯하게 보였지요.

 

그 후 공석이 남아서 우연치 않게 오리와 면회까지 가게

되었는데, 알 수 없는 어느 교도관의 연락으로

(아마도 용석 씨가 오리 '이모'에게 연락해 달라는 듯.)

버스타서 구치소에 가고 3시 까지 기다리면서 과자 먹으면서

나와 운동관, 병역거부운동 내부, 감옥 쪽에 대한 심대한 대화를 나눴지요.

 

그러다 3시 넘게 면회 신청이 되었고 그 짧은 짧은 10분동안

대화하고 해여졌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대화에 대한 답이 왜 안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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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리 없는 외침 - 뒤늦은 전자서신 개통과 외부에 기고하다.

2005년 9월 십여일.


그 날도 하루를 지나가기 위하여 방안을 버티고 있는데 사동 담당직원이 오더니 나에게 서류를 내밀면서 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내용을 보더니 '정보공개청구서'이란 서류인데 명칭으로는 무슨 대단한 걸 요구하는 듯 하지만, 외부의 사람이 재소자에게 이메일처럼 보내는 전자서신이나 영치금 금액확인, 면회(접견) 확인을 하는데 쓰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선 서비스를 이용을 하려면 재소자 본인의 정보, 즉 이름과 수번을 공개하는 걸 동의하라고 이런 서류를 작성하는 것인데, 전 이미 이러한 걸 알았지만 본인확인을 오직 지문날인(무인)으로 처리한다는 서류 문구를 본 적이 있어서 주저하였지요.

 

그런데 밖에서 하도 뭐라고 해서 서명으로 하라고 해서 쓱싹 써서 적었고 이틀 후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낸 이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데 무단으로 올리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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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인 : 813(수번) ○승규
* 거실(작업장) : 가6동 01층 10호()
* 수신기관 : 수원구치소
* 발신인 : 안○○
* 서신내용 : 승규야 나다...

 

엊그제 면회 다녀오고 나서 사람들에게 면회나 편지좀 하라고 이야기 했는데 다녀갔는지 모르겠다.
그곳에 있으면 바깥소식이 많이 궁금하긴 할텐데 너무 조급해하진 말아라.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예상했겠지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승규에게 관심을 가져줄 만큼 여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다산은 다산나름대로 당은 당대로... 나도 나대로..

면회 자주 못가더라도 이해주길 바랄뿐이다...^^;

 

항상 이야기하는 거지만 남들에게 너무 큰 기대는 하지마. 그렇다고 무시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항상 내가 뿌린 씨앗만큼 거두는 법이니까.
괜한 충고하는 것 같다.

 

전자서신 통해서 소식 종종 전해주마.
처음엔 이것도 니가 지문날인 안해서 안되더라..
그래서 내가 민원제기 했더니 서명으로 바꿔서 처리했다고 하더군... 쩝.

 

인권잡지(사람)은 아마 매달 넣을꺼구..
녹색평론도 정기구독 해서 넣을께..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하고..

 

추석전에 얼굴 보려 가마..

 

사무실에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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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글을 보면서 처음엔 누군가에게라도 편지가 왔다는 사실에 기뻤지요.

 

그런데 내용을 보다 특히 '내가 뿌린 씨앗만큼 거두는 법이니까.'라는 문장을 보니까 2년여 동안 공들어 준비하며 인맥을 쌓더니 정작 수감하니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없다는 현실에 대한 냉소와 분노가 쌓여서 그 문구가 너무나도 동감하게 하더군요.

 

특히 수감 전 그나마 저에게 지원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후 자기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려운 이에게 돌아보지 않은 것에 서운함이 들어서 '면회나 편지 숫자는 그 사람의 인간성에 비례한다'는 명제를 낳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면회 오는 이에게 불만을 담은 말을 하였지요.

 

그런데 같은 날에 낮선 이의 편지가 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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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인 : 813(수번) ○승규
* 거실(작업장) : 가6동 01층 10호()
* 수신기관 : 수원구치소
* 발신인 : ○○○
* 서신내용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승규씨
저는 민가협에서 일하는 ○○○입니다.
혹시 한 두 번 얼굴을 봤을 지도 모르겠네요.
생활하기에 어떠세요? 추석이 다가오는데 가족들이 많이 서운해 하시겠어요.

 

뜬금없이 연락을 하는 이유는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섭니다.
우리 소식지 '민주가족'받아보시죠?
그 소식지에 매달(8월호에는 못나갔지만) "나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꼭지가 있어요.
그 꼭지 원고를 청탁하려고요.

 

그동안은 소식지에 오태양을 비롯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은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 사례들도 여러차례 실었습니다. 민가협의 활동이 양심의 자유를 얘기하고는 있지만 아직 운동사회 내에서도 남성중심적 사고나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담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이들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소식지에 담으려고 합니다.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쉬운 글로 원고를 써주시길 부탁드릴께요.

 

원고를 쓰신다는 전재로 설명하자면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된 이유가 중심이 되겠지만 감옥가기전에 활동한 내용과 영치금 관련 지문날인 등에 관한 의견도 함께 주시면 좋겠습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로 써주시면 됩니다. A4지로 치자면 두장정도 될 것입니다.

 

꼭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고는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되고요.
마감이 넉넉하지는 않은데 다음주 목요일에 받을 수 있도록 되도록 빠른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면서 갑작스럽게 연락하는게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그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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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뜬금없는' 편지이었지만 저로선 할말이 많았지요. 특히 인권위 진정을 하였음에도 지문날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저의 입장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검열을 하지만 이런 시스템을 역이용을 하는 의미로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방에서 샤프와 지우개를 빌리고 편지지와 봉투를 얻어 아주 발랄하게 원고를 작성하여 우편물로 받은 310원짜리 빠른우편용 우표를 붙여 보냈는데 좀 늦게 보냈는지 결국 이후에 실리게 되었다는 답장을 받았지요.

 

그 후 저는 본 단체에 대한 소외감과 다른 이러한 은혜(?)를 입었는지 이따금 민가협에 편지를 보냈고 그 분은 그 힘겨운 해독 끝에 답변을 해주었지요. 물론 출소 후 바로 목요집회에 참석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없다고 하여서 이후 직접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나눴지요.

 

그런데 문제는 당연한 심리이지만 제가 쓴 글을 제 눈앞에 보지 못한다는 성격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밑의 링크로서 보시길 바랍니다.

 

"갇혀있어도 평화와 인권은 소중합니다"('민주가족' 2005년 10월호)
 
그 후 몇 일 후에 김칠준 변호사(현 국가인권위 사무총장)가 변호인접견으로 찾아 왔는데, 앞서 말한 인권잡지 '사람'에 글을 기고하는 것이 어떻나고 물어 보더라고요. 특히 지문날인 문자와 심리공판 때 주민번호 육성발언 거부에 대하여 흥미롭게 보고 있다면서 그런 걸 중심으로 쓰리고 하더군요.

 

그런데 원고를 받는 방법을 우편이 아닌 변호사에게 직접 주도록 하라고 말하는데, 직원의 확인을 하면 공식적으로 줄 수 있지만 정 싫으면 원고를 숨겨서 몰래 주라고 유혹(?)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글을 이해관계가 있는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싫지만, 그러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싫어서 저는 A4용지에 비좁게 원고를 쓴 다음 편지인양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편지봉투에 원고를 넣고 공소장을 함께 넣어서 그 분이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리더니 변호인접견이 왔고 관복에 주머니가 상의 왼쪽에만 작게 있어 그 자리에 넣을 수가 없어서 저는 몰래 사타구니 반대쪽으로 바지와 팬티 사이에 봉투를 끼어 넣고 슬금슬금 걸어가 봉투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변호인접견실으로 갔습니다.

 

물론 양말을 신어 그 사리에 봉투를 넣는 것이 좋지만, 면회예약을 하지 않는 한 갑자기 연락이 오기에 그러한 준비를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저의 이러한 어수룩한 행동에 교도관의 시선이 보일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는데 무사히 피해갔고 김 변호사가 와서 자리를 잡자 바로 그 봉투를 바로 넘겨주었지요. 그 후 원래 10월호에 실리려고 하였는데 앞서 누군가 빨리 도착을 하게 되어서 11월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밑의 링크에...

 

… 관행, 관행, 관행! ('사람' 2005년 11월호)

 

그 후 또 다른 직원이 만기일 통보를 하였고 그 날이 2007년 1월 24일이었는데 봉사원 말로는 많이 안 준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말해 형량이 짧아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한 이번 내용과 다른 것이지만 예기를 더하자면, 불구속 원칙으로 구치소 내의 수용인원이 줄었고 싱크대 설치의 이유로 사동 전체를 비우게 되었어요.

 

그래서 직원이 재소자에게 빈 사동으로 데려가 이것저것 잔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물론 출력을 한 이들에게 시켜야 하지만 인원이 없는지 그 직원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환자가 아닌 방이 제가 있던 방이나 옆의 절도방에 있는 이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더라고요.

 

물론 미결수가 강제노역을 하는 건 안되지만 운동이나 면회가 아니면 움직일 일이 거의 없는 미결 생활이어서 그러한 잡일꺼리에 오히려 환영할 정도이지요.

그러다 옆의 절도방의 사람이 얼마 없어서 소측에서 다른 방으로 재배치를 한 후, 직원은 생생한 나이가 많은 기타방 사람들을 이용하게 되었고, 짙은 녹색 메트리스천 안쪽에 스폰지을 넣거나 방과 복도 사이의 창문을 제자리에 옳기는 일에 우리들은 동원을 받아서(?) 수행하였지요.

 

그리면서 빈 방 구경을 하면서 잠시 땀내며 노동의 기쁨을 느끼며 직원이 준비한 사이다를 마시며 일을 하였는데 누군가 무슨 대가가 있냐고 묻더니 사동담당 직원은 '(행형점수) 1점 더 줄께'라는 답이 나와 지금이라도 석방에 노심초사하는 재소자에게 염장(?)을 부렸다고 하나 뭐하나...

 

그래도 저의 이적행위로 그 직원에게 고생을 시켰는데, 이후 저의 행형점수표를 보았는데 그 직원이 일반적으로 2점을 주는 상황에서 3점을 주더라고요. 그 직원 나이도 많은데 근황이 궁금하네요.

 

그리면서 저와는 같은 선고일에 같은 형량을 받은 여호와의 증인은 구치소 안에 친형이 있다는 이유로 빨간 색 공범마크를 찍힌 채 이감을 할 우려를 안고서 기결수가 되어 전방갔고 저도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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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강남 땅 휘젓기.

어제 아침. 어디 갈 곳이 없기에 푹 자고 있는데

어머니의 이 한마디에 어떻게라도 나가야 했지요.

 

바로 ' 친가 및 외가 쪽 친척들이 온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어린 시절이외에는 이따금 만나도 무슨 할 예기가 없고

활동가이지만 실제 돈벌이 없이 보내고 있어서 취업이나

결혼(이미 비혼으로 살겠다고 각오함) 예기가 나올까바

짜증이 밀려 나왔는데...

 

더욱이 내 자신이 그들의 눈에는 군대 안 가서 감옥을 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비춰질까봐 도저히 방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날 아침부터 상 좀 내려놓거나 방 청소를 하라고 해서

일어나 이것저것 하다가 얼굴 씻고 바로 나가겠다고 말한 뒤

'하루 가출'을 하였지요.

 

다행히 친척들이 아침 식사를 하려고 올라고 하였으나,

좀 늦게 온다는 전화가 와서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였고

정말 수년만(!)에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였지요.

 

결국 아침 9시에 집에 나선 후 걸어서 남문을 거쳐 수원역으로 간 뒤

잠시 어디로 가는지 고심한 후 가까운 곳인 유행의 첨단을 달린다는

'강남'으로 가기로 하였지요.

 

그래서 시간을 보내려고 하였음에도 먼 거리로 전철 및 지하철을

통해 출소 후의 처음으로 고속터미널역에 내렸습니다.

 

그 다음 S백화점 지하층과 5층을 둘려보고 7호선을 따라

쭉 걸어간 뒤 그 중심인 '청담역'에서 시종에 달리는 듯히 걸어서

삼성역으로 향하였지요.

 

그래서 COEX나 지하 몰 그리고 H백화점를 둘려본 뒤

그 비싼 음식 사이에 가장 저렴한 컵라면 하나으로서 끼니를 채웠지요.

 

그 후 2호선을 타듯이 걸어가서 강남역 거리를 둘려본 후

어느 정도 시간이 되어서 교대역에서 타서 잡으로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잠깐의 휴식 이외에는 거의 서며 걸어가서

왼발등에서 예리한 통증이 나네요. 아후~

 

특히 밤에 집에서 누우며 쉬는데 갑자기 친척 한 분이 전화가 와서

날 찾는데 정말 할 말이 없는데 무슨 알려고 하는지 정말...

좀 그랬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대신 받았는데 왜이리 나의 생각과는

왜국된 말만 하는지 한심함까지 들었고요.

 

결국 쓸 때 없이 하루를 보냈어요.

물론 오랜만에 낮선 거리를 하게 되어서 좋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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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당장의 기쁨을 위해 ‘양심’을 저당 잡힌다. - 감옥 안에서의 ‘빽’들...

선고공판이 끝난 후 기결수가 되어 확정방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언 한 달 동안은 저에게 편안한 시절이었지요. 왜냐하면 ‘병역법 위반’으로 들어온 이들이 많이 수용하는 방 특성상 구속 후 한두 달 후에 있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하거나 실형을 선고한 즉시 항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바로 나가는 이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먼저 자리 잡던 이들이 몇 주후가 되어 방에서 나가서 제가 No.3이 되었지요. 그러기에 봉사원은 제가 나이가 많고 오래 있었다는 걸로 이따금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것 이외에는 이후에 들어온 사람에게 방내 시설의 사용법이나 규칙을 알려주거나 방내 업무(?)에 대한 기획 정도만 하는 역할이어서 편했지요.


그리고 위의 두 어르신 또한 성격이 나쁜 편이 아니라서 저에게 뭐라 터치를 하지 않았지요. 물론 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이어서 자화자찬으로 이 방이 편한 방이다 이라고 말할 정도이었지요.


하여튼 그렇게 파란 옷을 입을 때를 기다렸던 저에게 참 대단하신 분을 보았지요. 먼저 이후에 들어온 ‘군무 이탈자’인데 이 사람은 (지금도 근무하고 있어 실명을 말할 수 없고...) 모 법원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원 거주지는 서울 쪽인데 이 사람의 친형이 바로 그 모 법원에서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어서 좀 편하게 있으려고 여기로 끌어온 것인데...


본인의 말로는 구속된 것이 여자 친구와 어디 좀 갔는데 데드라인인 8일 동안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고 하면서 친형을 통해 이 사실을 무마하려고 하였는데 걸린 것이라고 하다군요.


그래서 이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자진 출두를 한 후 잡혔는데, 초범이어서 집행유예로 나올 것이라고 봉사원은 판단을 하였는데 문제는 심리공판에 간 후 선고기일을 알려주지 않고 구형량도 1년만 주는 거예요.


물론 본인의 말로는 그 법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검사나 판사들과 안면이 있다고 하였고, 추석 전까지 나올 수 있도록 말을 하였지만 통산 2주 터울로 정하기에 ‘빽’이 없이는 안 될까라고 보았지요.


그 후 나흘 후에 그 사람의 선고일이 나왔다고 직원이 알려주었고, 역시 그날 아침에 나간 뒤 정오가 되어도 오지 않은 채 방에 붙여있는 표도 뺐지요. 더욱이 이런 경우에는 통상 변호사를 사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도 그 법원에서 잘 나가는 이를 샀다는 걸아니까 좀 씁쓸함이 드네요.


더욱더 확정방으로 가기 전쯤에 들어온 어느 ‘군무이탈자’의 경우 앞서 집행유예로 선고를 받았는데 유예기간 막바지에 같은 걸로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을 당했다고 하면서 몇 주 후에는 앞선 결정이 ‘깨진다’고(소멸이 되는 것이 맞지만 이 쪽 용어로...) 말을 하여서 결국 변호사를 사야 공판연기가 가능하다고 판단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문제는 부모님과의 연락이 오지 않아서 이 작전을 성공할 수 없을 수가 있어서 걱정이 태산 같았지요. 물론 이후 소식을 모르지만 아마도 이대로 구금시설에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어느 전직 조폭인 듯한(대화를 듣어보니...) 근육질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서 김지태 이장에 대한 글을 쳤지만 그렇게 오래있지 않게 놀라운 사실을 보았습니다. 바로 오후 4시 반쯤에 재소자를 방콕하게 하는 ‘폐방’의 잠금 소리 이후 도무지 알 수 없는 열쇠소리가 나는 것이에요.


그리면서 그 직원이 그 아저씨를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리면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보석’이란 말과 함께... 물론 저를 포함한 방 사람들 모두 이 사실에 기뻐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식기를 챙기고 나갔지요.


물론 그 분이 변호인 접견을 통해 보석신청을 할 것이라는 건 알려 주어서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 걸 실현이 되었다는 걸 보면서 내 자신도 어서 나가고 싶다는 심정이 들었지요.


특히 방에서 두 번째로 있는 ‘수청동 주민’에게는 더욱 참담한 심정이 들었지요. 이 분의 경우 지역의 공안사건을 담당하는 모 변호사가 아닌 ‘전관예우’로 벼락부자를 꿈꾸는 최근 퇴직한 검사출신 변호사를 선임을 하였는데 그 당시 철거민 투쟁에서 처음 사망사건이 나왔고 구속자도 26명이나 되어서 정말 비싼 돈을 주어서 빨리 출소를 하려고 발버둥을 치었지요.


그래서 장시간 공판이 길어져 있어서 그 일환으로 변호인 일동이 ‘보석’ 신청을 하려고 시도를 하였는데, 역시 담당 판사는 안 되는 반응이었지요. 그 후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를 보며 대다수에게 중형을 선고한 걸 보며 역시나 판사** 이라고 되묻고 싶었지요.


끝으로 저에 대한 말인데, 아마 추석연후 전일 것입니다. 오후 쯤 어느 직원이 갑자기 절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통상 무슨 일이 있으면 그 걸 말하고 나오라고 하는데 앞서 지문날인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진정확인으로 나오라고 한 것 이외에는 이런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오더니 사동에 있는 직원공간에 기다리더니 앞에서 또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저의 신원 확인을 하더니 2층으로 내려가 조사실에 넣어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면서 전 혹시 말로만 듣었던 특별면회가 아닌가란 상상을 하였지만 다른 것도 있겠지이라고 생각을 하였지요.


잠시 후 어느 직원이 절 부르면서 어느 사무실으로 가라고 하더니 제 앞에 어느 낮선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면서 본능적으로 정식명칭으로 장소변경접견 즉 특별면회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다음 소개를 듣으니 ‘유선희’ 민주노동당 전 최고위원과 청년 담당 당직자이라고 하면서 지금 추석이 다가오는데도 갇혀진 ‘구속당원’에게 위안을 주려고 당 차원에서 특별면회를 하였다고 하네요. 이 때 저는 언제나 불만이 쌓였던 민노당에 약간 덕을 보았구나 싶었지요.


그리면서 저는 ‘지문날인거부’로 당하고 있는 불편에 대하여 해결을 요구를 하였더니 이미 중앙당에서도 알고 있으니 노력하고 있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답변을 듣었지요. 또한 지역에서 ‘면회’나 편지 조직을 안하고 있는 등의 본인에게 너무 관심을 없다고 말하더니 역시나 지역위위원장에게 알아보겠다고 말했지요.


하여튼 이런저런 불만이나 요구를 말한 것에 고마웠지요. 그럼에도 제 성격이 나쁜 건 알지만 밖에서 무관심한 것에 불만을 표출한 대화이었지요. 그리면서 당내에서 병역거부에 관심있는 모 씨에게 와달라고 전하는 걸 끝으로 그 밖의 대화와 잠깐의 손을 만지는 걸로서 30여분의 접견이 끝났습니다.


이후 몇 번의 특별면회를 하였는데, 앞서 모 님의 특별면회에 대한 냉소한 듯 한 글을 보며 생각한 것이 있었어요.


바로 비록 짧은 시간의 면회이지만 재소자의 입장으로는 소중하거든요. 특히 최근 전국 행형시설에서 무인접견시스템이 도입한 후 여분 없이 정해진 시간동안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하니 감시당하는 건 싫지만 대동한 직원에게 몇 분이라도 시간을 얻어내었던 예전 시스템이 좋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렇기에 마이크는 물론이고 서로에게 장벽이 되어버린 유리창 없이 시간이 넉넉히 주면서 직원 눈치를 보며 가끔 손을 잡을 수 있는 이 장소변경접견은 당사자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임에도, 누구나 신청할 수 있지 못하고 국회의원이나 정부기관을 통해서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씁쓸한 느낌입니다.


또한 이러한 ‘빽’에 저항해야 함에도 이용해 버리는 공범이 되거나 추가 면회를 허용하라면서 단식을 해야 하는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 현실에 미안하고 감옥 내 다른 문제에 제기하지 못 하였다는 것에 고개가 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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