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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 쪽엔 라디오-97.3MHz를 맞추고(서울)-를
또 다른 한 쪽에선 노트북으로 방송 4사(K,M,S,Y)를 동시에 보고서
(참고로 USB TV카드로 몇 개체널씩 동시로 볼수 있는데
소리는 나오지 않고 몇초 단위로 끊기지만 얼추 상황을 볼 수 있죠)
느끼는 건...
1. 출구조사 때 우울과 희열을 느꼈는데 우울은 뭔지 아실 것이고 희열은 권영길의 득표률이 낮다는 것.(본인이 12월 12일에 탈당계를 택배로 보내었고 민주노동당이 깨지는 걸 바라기에...)
2. 한 7시 쯤에 한 !~2% 개표한 중에 타 방송에선 이명박을 당선 확실로 나올꺼라 예측할 상황에서 유독 S방송만 '당선'이라고 난리친 것.
3. 허경영의 놀라운 공약과 웃기는 광고로 득표수에 유난히 관심있기에 계속 주시하였고 100만표는 아니어도 10만표에 육박한 것.(97년 15대 39,055표와 비교하면 괄목한 것 같음)
4. 뻔한 결과가 이어져도 밤 12시 경까지 노트북 화면에 뚜러지게 주시한 것. ^^
아~ 이럴때 인터넷만 있었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데 말이지요.
지난 8월 우리 ‘식신클럽’교의 열성신자이신
효웅 자매님의 1년여의 철안거(鐵安居) 환송예배 이후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요
정말 언젠가 또 다른 음식신에게 친견을 하여야 함에도
제 주변 일이 많고 이 놈의 수면부족으로 인한 만성피로
- 다르게 부르면 ‘귀차니즘 강림’(?) - 으로 재기할 여분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신도들의 ‘무한 식욕’의 세기는 거세어 가니
이제야 가을이 온 만큼 다시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일단 시점을 10월 20일 토요일 오후 6시로 설정하고
입 속에 느낄 뭔가를 정한 건 임태훈 선생님의 저서와 각 신도들의 요구를 모아서
10월 10일 이후에 선택할 예정입니다.
물론 시간도 바꿀 수가 있으니 이의가 있으신 신도들은 꼭 덧글 달아주세요.
끝으로 이 글은 제 블로그(진보 불로그)에도 실리고 알림도 동시에 올릴 예정이니
참조하세요. (물론 구성원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면 말해주세요)
* 뱀발
이 글을 보시면서 궁금하는 모든 이에게 ‘식신클럽’을 소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희는 ‘전쟁없는세상’ 안에서 뒹굴고 있는 식욕이 왕성한 이들이
여기저기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탁에서 행복을 느끼고 끝내 쓰나미를 친다는
사람들이 모인 불법 지하 소모임입니다.
그리고 제가 ‘초대 교주’로 추대하긴 하였지만 구성원의 의견을
어떻게든 받아 들리려고 하는 평등한 소통구조를 지향하고
물론 채식을 지향하는 이들도 있어서 모두가 최대한 반영할려고 노력하지요.
물론 주로 이제까진 ‘전쟁없는세상’과 관련한 사람들을 주로 전도하고 있지만
전 평화주의를 지향하면서 (어떠한 방향이든) 사회변혁을 바라는 식도락가들이
모였으면 하는 입장이어서 -반대하는 신도들은 날 탄핵하라~!- 이 글을 보시는 님에게도
식신 아래 평화로이 사실 수 있지요.
그러면 이 글을 보시고 본인이
식당 밥 공기가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이후 알림을 주목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9/9) 그 때를 기억하면 정말 화가 나는 걸 물론이고 정말로 무서웠어요.
다름이 아니라 강남 뉴코아에서 투쟁집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날이 민노당 대선후보 선출대회가 있기에 일단 대회가 있는 올림픽 역도경기장에 들렸고, 결과가 나오자 바로 버스를 타서 그 곳으로 향하여 도착한 후 아는 분과 같이 갔었어요. 그런데 집회장 주위 전경들 줄을 넘어 상위에는 힌 옷을 입고 대다수 모자와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 사회자의 지시로 우린 뉴코아 정문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고, 잠시 후 그 - 구사대로 부르는 -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한 우리에게 날카롭게 딴죽을 걸기 시작을 하였으며 우리 중 몇몇이 물병을 던지는 등 항의를 하였지요. 물론 경찰은 이러한 상황에 이들 사이에 서 가로 막은 이외에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지요.
그 후 그 들은 우리를 향해 물병을 던지면서 앞뒤로 집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다가오고 전 이러한 공포를 피하려고 저는 같이 있는 분과 함께하고 싶었으나 일단 바깥으로 옳겼어요. 전과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 힌 옷 입는 사람들에서 느끼는 살기도 두려웠거든요.
그러다가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전경들 사이로 애워 싸면서 다시는 들어갈 상황이 아니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전 안에 상황을 보려고 뉴코아 정문 쪽이 아닌 반포상가 X동 쪽으로 갔고 거기서 지켜보았죠.
그러자 한 힌 옷 입는 사람이 저에게 ‘누구야’라고 물었고 전 대답할 필요가 없어 답을 안했죠. 그리더니 몇몇이 모이더니 ‘학생이면서 왜 여기에 왔냐’ - 전 20대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이었지요 - 이라 듯한 비야냥과 욕설 그리고 그 들의 안면을 보일라 카메라가 있을 것 같다는 추측으로 제 배낭을 빼앗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자동차 사이에서 버티면서 제 목소리로 ‘때리지 마세요’ 라는 울부지게 요구를 하며 엎드렸으나, 발로 제 머리를 때렸고 한쪽에서 경찰인 듯한 사람이 제 앞에서 막아주긴 하였고 다른 쪽에 여기서 나가달라고 회유가 있었지만, 결국 배낭 속 검사를 하였고 - 나중에 보니 다이어리에 있는 제 신분증까지 보았다는 흔적이 있었어요 -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라’라는 말로서 전 그들에서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다행히 제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짓밣힐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의외로 무사하긴 하였는데, 코에 걸여진 부품이 좀 부러졌군요. 흐~ 그럼에도 물병 두 개가 없어진 것 이외에는 제 몸과 소지품은 무사하였죠.
전 그 들이 비록 ‘불법집회’이다고 함에도 사업장 안이 아니고 좀 떨어진 일반 차도에서 이러한 린치를 당하는 건 정말 화가 났었지만, 정말 아무런 관계가 아니고 상대적으로 일반 시민들과 자주 대하는 유통노동자(구사대이간 하지만 직원이나까)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는 건 단지 상부의 지시와 스트레스 해소(?)에 의해 행동을 할지라도 정말 이런 ‘친절’과 ‘폭절’이란 이중적 태도에 정말 묵고할 수가 없다고 보아요.
더욱이 제가 사는 곳에서 걸어서 5분에 2001아울렛이 있고, 좀만 더 가면 뉴코아아울렛이 있어 이따금 애용(?)했던 소비자이기에, 저런 폭력을 당한 전 파업투쟁이 승리하던 말던 거긴 가고 싶지가 않군요.
그리고 제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려고 노력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이고 집회를 참석할 때엔 무조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는 저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평화주의에 원류인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인 이랜드 계열의 노동자와 매장업주로 추정하는 구사대에게 일방의 발길질을 당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치는 저도 그 때의 상황을 기억하니 정말로 무섭고 섬뜩함이 느껴집니다. 그 들의 만행이 결국 부메랑이 될 것을 알지 못한 것인지 마음엔 막장으로 가고 있는 듯 한 그들이 보이더군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들의 행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투쟁쪼끼를 입은 노동자나 이랜드 불매 티셔츠를 입은 사람, 심지어 아무런 표식없이 정장을 입은 사람(민노당 모 시위원이라 밝혀도)까지 한 10여 명씩 몰려들어 날선 고함으로 뉴코아 안이 아닌 지하보도까지 밀어내려고 하거나 쪼끼를 벗으라고 강요하는 등 바깥으로 나가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업주측 시람이 ‘당신 노조야’라고 물으면서 나 흥분하니 나가달라고 할 정도이나 좀 가까이서 ‘싸움 구경’을 보려는 시민들까지 손찌검을 당할 듯 싶었습니다.
끝으로 이후 전 그 때의 상황의 잔상이 남아서 한 동안 공황상태가 되었고 지금도 무서운 느낌인데, 이러한 린치를 당한 저에게 바라는 건 비정규직 철폐와 비정규노동자의 온전한 현장 복귀 등이지만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록 이후에 또 다른 흰 옷입은 이가 위로의 말과 함께 제 몸를 두드리는 약간의 용서를 하는 듯하지만 이러한 만행을 일으킨 주범인 이랜드 그룹 박성수 회장을 비롯하여 임원들에게 무고한 시민에게까지 가해진 폭력에 대한 사과하길 촉구합니다.
휴~ 참 보고서 및 성명서스러운 글을 쓰면서 몸서치고 있네요. 하여튼 이후에도 가긴 하겠지만 그 때의 악몽이 절 움츠리고 두려워질 듯하네요.
기결수로 되어 달라진 건 몇 가지가 있었지요. 먼저 제가 기거하는 장소에서 창문넘어 그나마 밝아진 곳에서 앞에 아파트가 가로 막혀 햇빛이 아예 안보이는 곳으로 옳겨진 것과 면회가 매일 한 번에서 매월 4번 밖에 못하면서 면회가 있으면 이동할 때 앞서 있던 곳보다 멀리 가야 하는 것이 바꿔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사람들이고, 방을 옳김으로 인한 저의 위치의 강등 즉 막내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저를 ‘막내’로 부르고, 제 자신이 제 주변의 사람들이 나보다 상당한 연령차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와 함께 이감과 출역을 준비하는 것과 추가로 기소당해 재판을 해야하는 것이 공존하는 방 분위기인지 잠시의 인원점검 전후 이외에는 방에서 누우며 지내고 인원점검시 복종에 가까운 인사와 함께 각자가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닌 간단한 인사로 끝내고-약간의 불복종을 하는 듯한- 구매도 최소한으로 구입하는 등의 규율이 유연성 있게 운영을 하는 것 같았지요.
이러면서 이후에 몇몇이 입방하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버렸지요. 그럼에도 진로에 대한 불투명과 면회 횟수의 제한으로 하루가 지루함으로 이어젔고 이 묵직함을 편지 쓰기로 어떻게든 해소하려고 하였는데, 이따금 오는 잡지나 책 이외에는 편지는 많지 않았어요. 이러면서 서서히 내가 잊혀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언제나 감초처럼 이 지문날인 문제는 아직도 안개가 거치지 않아서 또 다시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주눅들게 하였지요.
또한 사동에 있는 보조-‘소지’라고 부르죠- 중에 한 분이 저에게 자기가 왕년에 ‘운동권’이라 말하면서 네가 말하는 이상은 옳아도 현실에 따라야 하지 않냐고 그저 물어본 투의 말한 것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저에겐 ‘병역거부’를 하는 것에 부끄러움과 후회하는 것 자체가 전혀 없었어요.
그와 함께 지문날인 거부를 하는 것도 병역거부와 일맥상통한 문제이다고 판단하기에 비록 눈앞에서 벌어진 어려움이 있음에도 나의 원칙에서 물러설 수가 없어서 그러한 말에 대수롭게 느끼지 않았지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서 사회운동을 함에도 생계라는 현실은 무시할 수 없고 주어진 시간 중에 상당수를 그에 투여하고 있지요.
하여튼 이러한 딴죽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다가 ‘전쟁없는세상’에서 보내는 수감자우편물을 보다 아크릴창이 없이 시간도 넉넉하게 면회하는 특별면회를 한다는 걸 보았고, 약속한 날 예정된 사각보다 좀 늦게 만나려 갔지요.
제가 면회장소에 들어서니 네 명이 있었는데 대화를 주로 출소한 병역거부자인 임 아무개와 제가 나눴는데, 영치금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운 반응이었어요. 전에는 지문날인이 아니고서는 영치금을 쓸 수 없다는 것만이 중점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 뿐 심각한 정도이다고 보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이다금 어머니가 면회 온 것이 전부일 뿐 지역의 활동가나 민노당 쪽 사람들은 전혀 오지 않는 등의 서서히 무심한 징후를 본 것에 화내며 제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달라고 요구했었어요. 이와 함께 제 예상에도 감안하고 있지만 이러다가 이감갈 수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러면서 면회는 30여분이 이어젔고 아쉽지만 전 악수와 인사 끝에 해여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제 뱃쪽을 건들더니 살 많이 빠졌다고 하더군요... 흐흐
그 다음날 운동시간이라 그 좁디좁은 운동방에서 있는데 누군가 절 부르고 가보았는데 구매 담당직원이 ‘가족’-실제로는 전혀 아닌데...-들의 항의로 몇 가지 생활용품을 주게 되었다고 하면서 저에게 그 걸 주더라고요. 그런데 저로선 해결되는 정도가 아니었지만 이 것으로 어쨌든 기분은 좋았어요.
그리더니 수 없이 보내진 편지에도 묵묵부답이엇던 집에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는데 받을 예정인 날, 즉 2005년 10월 24일에 전 어쩔 수 없이 이감을 단행해 버렸고 그 편지를 받지 못한 채 출소해서야 받게 되었어요.
그 날도 약간의 걱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부쩍 싸늘해진 날씨에도 일어나 일과를 시작할 때 어느 직원이 갑자기 절 부르더니 이감이니 짐쌀 준비를 하라고 말하였고, 제 자신은 잔류에 대한 기대는 않했지만 상당히 빨리 결정한 것에 놀라움도 느껐어요. 그리고 빨리 준비해야 한 것에 정신이 없었고요.
이러면서 제 자신도 준비하고 주변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었고, 이후 철문은 열여지고 전 그분들에게 인사하며 복도를 지나갔고 재확인을 한 후 같이 갈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치소에 입소할 때의 공간으로 이동하였지요.
그리면서 서류확인을 하면서 직원도 저에 대하여 지문날인 문제로 이감간 듯하다는 제 예상과 벗어나지 못하였고, 전 파란옷에서 벗어나 회색의 호송복으로 갈아 입었고 잠시후 원하지 않지만 한 차에 세 명의 재소자와 5,6명의 직원들 그리고 짐과 함께 ‘수원시 우만동 182번지’를 벗어나 동수원 나들목을 향하면서 또 다른 의미의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었죠.
중학교 때 수학여행이나 여행으로 지나쳤을 뿐 잠시라도 머문 흔적이 없었던 그 지역, 전 ‘김천교도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좋은 소식은 그동안 일터에 콕 박혀 일하며 번
노동의 댓가, 즉 월급이 나왔지요.
더욱이 겨우 이틀 만에 사실상 해고를 당한 그 쪽에서
십여만원이 더했으니 총 70여만원...
물론 최저임금에 육박한 금액이나 어찌 갈만한 곳이 있습니까...
뭐 용돈벌이라도 하는 것지요.
그럼에도 조금 아니 큰 걱정을 들게끔 하는 일이 있었지요.
바로 어머니가 저에게 돈 좀 벌었으니 얼마 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사입고 싶었던 것이 있고 어떻게든 생활을 해야 해서
도저히 드릴 여유가 없다고 말했고 다만 생필품 어느정도는 사놨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번뜩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난 과일이면 족하고, 니 아버지에게 담배 한 보루를 사놔라'
물론 이 글을 보시는 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별 다른 것이 아니었는데,
금주금연에 아버지와 10여년 처다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냉전'인 저의 상황에서
아무리 공과금 내주어도 솔직히 사주고 싶지 않더라고요.
더욱이 내가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인 담배를 사오라고 하니...
결국 저는 백해무익와 돈 아깝다다는 논리로 거부 하였고
말다툼으로 한동안 시끄러워졌지요.
그리고 그 전에 다녔던 곳에 계속 있었다면 10만원이라도 줄 것인데
참 어머니에게 거시기함이 느끼더라고요.
내가 사고 싶은 것은 많은데 이 금전이 무한하지 못하니... 휴~
그럼에도 그동안 빌어 붙였던 지인들에게 한 번 사주고 보탰다는 것에
기분은 좋았고, 어제 이것저것 사와서 더욱 나아졌고
조금씩 쓰다보면 어떻게든 생활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언제 4층 식구들에게 사놔야 하는데...
좀 부담감이 크네요. 헤헤~
지난주 전 몇 주 동안 쉴 틈이 없어서 일부러 집에서 쉬는데...
사상 강렬하다는 황사는 물론이고...
역시나 협상이 끝이 날 것 같았던 이 KOR-US FTA...
아직도 지루하면서 초조하게 만드네요.
더욱이 수중에 금전이 없는 관계등으로 아는 이에게
어쩔 수 없이 쉬겠다고 말하고 라디오나 TV로 수시로 듣는 보도를
보며 진심 밖에 나가고 싶었어요.
특히 분신 항쟁 소식은 말이지요...
휴~ 이따금 인터넷으로 속보를 보며
쳐랑하게 재고조사와 작업을 하는 나에게 이상하시리
슬프게도 합니다.
결국 '협상 결렬 및 무효'... 이 한마디로 듣고 싶어서
모니터를 보고 또 봅니다.
그리고 저도 바깥에 나갔지만 '동지'들의 투쟁에 빛이 오기를...
한미 FTA 저지하라 !!!
오늘도 전 어쩔 수 없이 샘플들을 보내야 하네요...
그리고 다산 누리집에 들르니...
FTA 저지의 '파업중'으로 나서고 있어 더욱 미안함이 느끼네요.
또한 주중에는 밤 이외에는 시간이 없으면서
멀리 나갈 수가 없어 좀 그렇네요...
쩝...
지금 제가 일하다 쉬는데 수면 부족으로 졸리네요.
그 때 전 종로거리 - 낙원상가 - 안국역 - 광화문까지 뛰며
별 것 아닌 불복종운동을 하였는데...
하여튼 그 때 만났던 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참고로
전과 1범(!)인지라 유일하게 마스크 쓰고
방송차 관련 현수막을 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7시쯤에 일어나는데...
아~ 못 일어나더군요.
물론 재대로 잠을 자도 아상하게 졸린 건 기본이지만
최근부터는 이 목근육이나 뼈에서 아픔이 느꺼서
일어날 때 구부리려고 할 때 그 아픔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럼에도 돈을 벌어야 하기에 억지로 참으며 일어나
씻고 법먹고 버스타고 갔지요.
심지어 이 아픔이 지난 토요일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처음엔 왼쪽 목부분만 아파서 잠 재대로 못진 듯하다는 단정과 함께
참을 만 했고 경찰감시활동을 함에도 별 고통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 목부분에다 어께까지
아주 세트로 요동을 추어서 무슨 움직임에도 이게 '잘 있냐'라듯이
쿡쿡 자기확인을 하는데 그 강도는 좀 쎄더군요.
결국 얼굴까지 '아픔의 표시'가 나왔는데
일터 안에 주변에서 아프냐고 물어 보면서 소염진통제를 발라주더군요.
그리면서 사람들이 지난 금요일부터 철문에 발랐던 페인트칠을 벗기려고
끌대로 벅벅 밀다가 그러는 아니냐고 물으면서 좀 무리하게 밀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오늘따라 짐이 들어와서 날라주어야 함에도
조금 하다가 사람들이 좀 쉬라고 말했고 결국 '땡땡이'를 승인받았지요.
심지어 밖에 나가 목욕 좀 하라고 말할 정도이니까요.
하여튼 전 이 아픔을 빨리 내 몸에서 사그러지게 빌고 싶군요.
그리고 요즘 푹 8~9시간 잠을 자는데도 봄이 온 건지 마치 서너시간 잔 듯한
기운으로 일어나서 정말 힘든데 어제 배개속도 샀으니...
재대로 잘 잤다는 느낌을 받길 바라고 싶고요.
아니면 내가 입 열고 자며 코를 곤다고 하니 수면치료라도 해야 할 듯 싶고요.
아~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픔이 계속 이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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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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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 맛난거 먹어서... 난 맛난거는 좋아하는데, 많이 먹지는 못한다...ㅋㅋㅋ부가 정보
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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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지금 사람은 없고 꺼리도 없으니 좀 심심하다.물론 위장 크기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많이 못먹은 분들도 당연히 대환영이죠. 한번 같이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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