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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것저것 꾸미면서...

어제 그때그때마다 수감기록을 써야 하건만

청소를 비롯해 이것저것 하다보니 어제 대충 쓴 글로서

마무리를 지었는데...

 

오늘 시내 모대학에서 이 타자질을 하고 있는데

이달이 만기라 돈 벌어야 해서 일자리 있나 알아보면서

제 집 좀 꾸미면서 특히 앞에 목표처럼

십여년 냉전중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전세라도 어떻게든 벌어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저의 예상으로 3년 정도 걸릴 것 같고

임금의 반(최소 50만원)을 적립식펀드이라도 부어서

집값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것이 우선이다면 다산과의 작별은 피할 수 없듯이라서

좀 그렇네요.

 

그럼에도 제 자신도 절박하기에 해야만 하는데

이 나에 대한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것이 정말 싫다.

 

그리고 잡담이지만 전 지금 언론이나 사이트에 보면

짜증이 막 나면서 직접 간부들이나 그 쪽 사람들을 보면

더 짜증이 막 나오는 민노당 당원인데...

 

이번해 당직선거도 있어서

저도 우파들이 득실거리는 이 수원에서 한번(여러번 해야 하지만...)

'평등'의 딴죽을 걸고자 대의원에 출마할려고 합니다.

 

물론 중앙위원이나 중앙당대의원으로 출마를 하고 싶으나

아직 경륜이 모자른 것이라 하향지원으로 경기도당 대의원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출마서류를 다운 받아 어느정도 작성은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선 후보 추천 문제도 있어서

지금이라도 대응을 해야 하는데 참 반응이 없어서 좀 답답하네요.

 

다욱이 저의 경우에도 18명이상의 후보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 인원이 있을련지...

더구더나 낙선도 우려될 수가 있기도 하고요.

 

솔직히 저로선 하나에 집중을 하고 싶지만

쪽수가 없어서 가끔 외도만 하면 되기에 출마를 하려고 해요.

 

그럼 여러 걱정을 안고서 내일 북한인권에 관련한

내부 세미나가 있어 사무실에 가고 꼭 수감기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재소자에 대한 걸로 외전 써볼라고 하는데...

 

* 덧말

 

: 최근 중앙당 당게에서 '상근자 노조'에 대한 막글이

올라오는데 전 한나라나 열우도 있는 노조에 대하여 왜 딴죽을

내는지 이해가 안가면서 당연히 대찬성입니다.

 

물론 '행인'님의 전진에 박수를 주고 싶은데 그 날 갈 수가

있으련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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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방기간이 한 달 남짓 남았건만...

오늘 사무실에 도착하니 옆자리에 편지 뭉치가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봉투를 보니 '~우체국 사서함 ○호-○○○○'...
이른바 징역편지 즉 행형시설에서 수감 당한 재소자에서 보내는 편지이지요.

 

그런데 제 추측이지만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매년 출감하는 '감옥인권' 시리즈를
보고 여기로 보내는 것 같은데, 아직도 옛 주소로 되어 있어서
소인에 찍힌 날짜가 거의 두 달 되는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이러한 '민원'에 어떻게든 답해보려고 다른 분이
하나씩 뜯어보았는데 대부분이 참 제가 있는 단체가 '국가인권위원회'이라는
명칭과 혼동이 되어선지 무슨 진정서 같은 내용이더군요.

 

그러던 중 그 다른 이가 저에게 한 편지를 보는데
글을 읽으니 보내는 이가 과거에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버려
상당한 장애를 입혀 지금도 고통스럽게 지냈는데
다행히 이와 관련한 보상위원회에서 보상금이 나왔는데
본인으로선 그동안 의료비용으로 들은 금액과는 텃 없이 모자란 것이더군요.

 

그래서 국가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행정소송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1심에서 각하(기각도 아닌...) 결정이 나와 항소중이다고 하면서
장황스럽지만 이 소송에 좀 도와달라는 듯한 글이었고,
제가 그 편지에 있는 사건번호를 통해 조회하니 지금도 계류중인 것 같았어요.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요청에 쉽게 받을 수는 없는 듯하고
결국 삼청교육대과 관련하는 활동가에게 전달하자는 결론을 하였은데...
이 알 수 없는 씁쓸함이라...

 

그러선지 '사람' 이달호를 보니
광주교도소에 있는 어느 분이 박래군 씨 이름으로 보낸 편지를 실렸는데
감정적인 판단으로 내린 징벌이나 부당한 처우 등에 대하여
구제를 해야 하건만 그저 본인에게 도움이 안 되는 형식적인 반응뿐이며,
'재소자'(법정용어는 '수용자/收容者'이지만 이 용어가 시혜적인 어감이 있어서
저로선 싫어함)에게는 엄연한 시민임에도 소측에선
이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 이런 구절에는 나도 대단히 동감!
특히 내가 있는 교도소가 대상이 만 20~25세이다보니 공식석상에도
교도관이 반말로 대하니까... -

 

또한 행형시설 내 최대의 악법인 '집필사전허가제'로 인한
원하지 않던 낙인찍힌 것(문제수), 언제나 골치아픈 의료권까지
종합적으로 지금이야 권리구제가 확대되어 인권침해의 정도가
약해졌다고 반문하여도 교정이 아닌 관리에 치중하는 당국의 현실에
'아직 멀었다'다는 답뿐인 듯 느껐습니다.

 

참 제가 지난주 앞선 글의 주인공인 용석씨와
영등포교도소에 있는 김성환 위원장과 병역거부자인 영진 씨까지
아주 행형시설을 왔다 갔다 왔습니다.

 

그 중 이후에 구속당하는 노동자 등의 양심수를 위해
이따금 단식투쟁을 하며 교도소측과 지속적인 사보타주를 하는 김 위원장을
보며 제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음에도 현실에서 여러
어러움이 느낀다는 것에 미안함이 들었고 이 삼성에 치졸한 법정 탄압으로
억울하게 약 2년간 징역살이에 있다는 것에 화가 났었지요.

 

그럼에도 '바쁜데 왜 왔어?'라는 첫 물음에도 반가움이 들었고
현 시국에서 소외 된 듯하다고 보았건만 매달 면회 횟수가 채워지면서
지율 스님도 찾아 왔다고 말을 하였지요.

 

그리고 제가 있는 단체 사람들이나 문정현 신분님, 김지태 이장님의
안부를 여쭙기도 하였지요. 참 직접 안부를 묻지 못하고 한 사람 걸쳐서
안부를 전해야 하는 그 심정... 저도 그러 했기에 만날 수 있다면
전해드리 겠다고 답했지요.

 

또한 영진 씨의 경우 어머니와 전쟁없는세상에 있는 모 님과 함께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나눴는데, 저로선 그 시간동안
모자간의 '깨소금' 냄새가 진하게 나니 눈부터 시작해서 허리 통증
그리고 공황장애까지 있다는 병을 다 당했던 영진 씨가 모습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 아무리 외부용이더라도 이런건 쉽지가 않는데... -
안심이 들고 모자 사이에 나는 이 '깨소금' 냄새에 왠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첫 대면이라 시간상 다른 분과 대화하다 몇 마디 나눈 정도이지만
하여튼 두 번의 좌절 끝에 성사가 되어서 좋았는데...
지금 출역을 하며 적응을 하고 있는데 앞서 공황장애 때문에
소측에서 수시로 작업취소를 시도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다 내면의 선을 넘어 버렸던 이에게
아니 또다시 간섭을 하는 저 행정을 보며 악 화가 났고 어떻게든 버티라고
전하였지요.

 

물론 시간이 끝났다는 방송이 나오면서 마이크가 꺼지는 그
안타까움은 느껐음에도 수시로 손짓을 하는 저 모자의 애잔함이...

 

그리면서 이제 2007년이 되었는데 참 제 자신은
아직 경찰의 부름 없이 무사히 보내고 있지만 참 여러 갇힌 벗들 때문에
원하지 않는 동거는 계속 이어지고 있네요.

 

다시 말해 전 아직도 '갇혀저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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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육신을 끌며 법정에 가보니...

아마도 재소자의 입장으로는 재판을 하려고
목욕재개나 맨밥 먹기 등으로 잡귀신이 몰아내길 빌고 빌었건만...

 

무슨 이유이든 법정 옆 방에서 기다리다
재판이 연기되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처량함은... 아시는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참 그 분의 심정으로 자신이나 밖에 모든 이들이 이 날을 기다리며
빨리 선고해서 벌금으로 마무리가 되길 바랬건만,

오늘 오후 재판에서 변호사 선임의 과정이나 모 활동가의 불참 등으로
재판이 4주 연기하게 되어 1월 24일 오전에 속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으로는 최소 한달 동안 그 춥디추운
구치소 꼭대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우리들이나 피고로 참석한 모든 이들이
그 분의 안면을 그토록 기다렸는데 이후 나오려고 하는데
누군가 하는 말이 참석하려 법정으로 들어가다
아무도 없는 걸 보며 다시 들어갔다고 하네요. 아~참!

 

그래서 저를 포함한 몇몇 이들이 그 분이 구치소에 가려고
호송차로 탈 때 얼굴 보려고 1시간 반을 기다렸는데...

 

이 직원들의 횡포(?)로 사진 못 찍히게 만들고
결국 그 분이 연승줄과 수갑이 채워진 채
이에 가로막힌 철문 사이로 멀리서 보아야 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저 안에선 보이지 않지만
열심히 손을 흔드는 선에서 배웅을 해주었지요.

 

그러다 ㄱ 활동가의 빽(?)으로 이미 면회횟수 다 채웠는데도
한번 더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면회실에 저를 포함해 5명이서
(심지어 7명까지 들어갔다 두분은 얼굴 보다 직원에 의해 쫒겨났죠)
앞서의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 험난한 과정에서도
우리들 얼굴을 보았다고 말해서 그 추운 날씨에도
결심이 있었다고 느끼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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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몸을 끌며(?)...

지금쯤 내가 만날 분이 구치소에서 법정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오늘 수감중인 어느 병역거부자가 평택 행진건으로

검찰에서 기소 붙혀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뭐 대단한 짓을 하는 건 아니라서 당연히

벌금으로 끝낼 수 있겠지만 이 분은 이미 징역 18개월 받고

잘 착실하게 지내어서 교도소내에서 좋은 자리까지 갔었는데...

 

언제나 이 '검찰'이란 집단은 활동가에겐 짜증와 분노를 만드는 것처럼,

결국 저 검사는 모 프로그램에서 '복수'하겠다는 의미의 '너 나와'라고 불렸고

그동안의 고통의 작은 산물은 여지없이 깨져서 지금 수원구치소에서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그 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오늘 재판에 있을 수원지법으로 갈 예정입니다.

 

물론 벌금으로 나오면 좋으려만 문제는 기결수이라

잘못하다는  추가로 실형을 당할 수 있어 걱정이 드네요.

뭘 2/4/6월 정도의 작고 주범(?)이 아니니까 큰 형량을 주지 않지만...

 

저로선 절대자를 믿지 않건만

이렇때에는 정말 그 분의 힘을 기대야 하네요.

정말 벌금 떨렁 10만원으로 나오길 바래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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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파란만장 심리공판 - '주민번호를 말할 수 없다' vs '군대는 없어질 수는 없다'

'한여름'인데도 찌부둥하면서 이따금 비가 내렸던 날씨가 이어지는 2005년의 절반이 넘어가고 또 다시 하루가 시작이 되었는데...



그래서 전 이미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가서 끝까지 저의 양심을 비추면서 행동을 한 것이 병역법 88조 의한 '정당한 사유'이다는 걸 보여주는 걸 보여주고는 싶었으나, 이미 다른 분이 그러한 행동을 진행하였던 상황이었고 이미 대법원 및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잠정)결론이 나온 상황이라서, 제 스스로 '양심'에 대하여 보여주는 자신이 없었기에 무리하게 말고 가는 것보다는 원하는 바를 얻는 차원에서 이런 상념을 기본으로 최후진술문을 작성하는 선에서 별다른 준비 없이 재판을 기다렸습니다.

 

그 날이 찾아오면서 어김없이 이불 개면서 청소를 하는 것부터 '인원점검 → 쓰레기 버리기 → 아침 배식 → 설거지'등의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전 재판결과에 말아 버리지 마라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느리게 먹었던 제가 빨리 먹으려고 국에 밥을 말아먹었던 다른 하루들과 달리 재판이 잘 되어가길 바라는 미신적 사고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모두 다 예외 없이 맨밥을 씹다가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마셨지요.

 

물론 저로선 그런 행동을 한다면서 참 별 이상한 것이 있냐고 되묻고 싶지만, 그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 힘이 없고 앞서의 지문날인 문제로 내 돈임에도 내가 쓸 수가 없다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서 연소한 나이도 있지만 더욱 발언권이 없어서 어쩔 수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었지요.

 

더구더나 이후에 다른 분이 심리공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오뎅국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었는데 주위의 시선이란... 그럼에도 기결수에 되어 다른 방에 가더니 그런 건 미신이다고  추가 건에 대한 결심공판일에 밥 말아먹으라는 라는 말을 하면서 무시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검사나 판사의 말 한마디에 자기의 신분이 상승하는가-석방하는가- 아니면 하락하는가-실형이 나오는가-으로 나오기에 재소자의 입장에선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많이 주거나 담당판사와 가까울 것 같은(법원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거나 사시 동기 등으로) 변호사를 수임하는 등으로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옥문에서 나오길 바라는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와 비슷한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선 뭐 1년 6월의 징역 및 금고로 판결을 받아야만 징병과 관련하여 제2국민역(전쟁이 발발할 때 강제노역을 하는 것 이외에는 사실상에 병역면제와 동일하지요)으로 재판정을 받으면서 빠르게 사회로 복귀할 수가 있기에 그렇게 판결을 받기를 원하지요.

 

물론 집총을 비롯한 군사훈련을 거부하여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휴가'등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시간이 있는 군대와 비교해도 그러한 비극을 몸써 보여야 하는 것이 정말 우습지요.

 

그럼에도 이러한 비극이 앞서 1930년대 말부터 시작하였다는 것과 5여 년전에는 3년형을 받아야 하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전국의 9백여명이 병역거부자가 수감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저 자신도 위해서도 있지만 후세에 저와 같은 길을 가고싶은 모든 이들을 위해 자청하여 '쇠팔찌'를 차는 것이지요.

 

그래서 별다른 고민이나 준비 없이 18개월만 받기를 바라면서 시간이 흘러갔지만 역시 중요한 관문이라서 조금은 불안했었지요.

 

그래도 봉사원은 저에게 재판 잘 받아서 평안하길 바라면서 설거지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땅이 아닌 콘크리트를 밟기에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양말에 발을 신으라고 하면서 직원의 부름을 기다렸지요.

 

아침 8시경. 직원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철문이 열리고 재판을 잘 보라는 방 사람들의 성원을 안고서 흙색 상하의를 입고서 고무신이 질질 끌며 미리 준비한 최후진술서를 들고서 몇번 차를 타라는 직원의 부름을 기억하며 몇몇 이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출정-재판에 나선다는 의미 인 듯-대기실에 이동하면서 소위 부정한 것이 들어 있어 심신에 해가 올까라는 소측의 염려에 의해 재소자의 신체를 기분 나쁘게 어루만져주고, 잠시 잊었던 쇠팔째와 앏은 동아줄을 재회하게 되어 교도경비대원에 의해 다시 착용하였지요.

 

그 후 탑승할 차량에 있을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를 잊어버리지 말고 같이 잘 지내라는 배려 차원에서 세 명씩 동아줄로 이어주었고, 잠시 후 햇살에 고립 당한 채 살다 갑자기 자외선에 쪼여 피부에 상하지 마라고 전후좌우에 작은 구멍이 있는 철창이 유리창 안에 있는 3번 버스에 몸을 실렸고 버스는 보름간 내 앞에서 굳게 닫혔던 철문은 열리면서 수원지법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면서 오랜만에 나서니 공사중이었던 원형 육교가 보이고 아주대정문에서 대학생이나 시민을 보며 나도 저 속에서 신나게 걸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이라는 탄식함이 느껐죠. 그리고 저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보았을까라는 물음도 하고 싶었고요.

 

그러다가 수원지법 앞 사거리(고가도로가 있는)에서 좌회전을 한 후 법무법인 '다산'이 있는 법전 빌딩을 지나 정문에 들어섰고 검찰청-법원사이 길에 들어가더니 버스는 왼쪽 검찰청이 있는 쪽으로 틀어지더니 소위 '출입제한'안으로 들어 가거군요.

 

그 후 '수용자'에게 어떠한 불편을 주기 않으려고 동행한 구치소 직원은 저희를 법정에 인도하고자 내리라고 하였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 상해를 입지 않고자 설치한 버스 안 철문을 지나 진짜 버스 문에 나선 뒤 잠시 바깥공기를 마신 후, 밧줄에 이어진 재소자와 함께 나란히 지하로 내려가서 법원으로 가는 통로로 간 후 법정에 세울 인간들이 다 왔는지 또 다른 직원의 검사에 걸쳐 지하 공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져온 인연은 경비교도대원에 의해 풀어주어서 여기서 잠시 끊어지고, 직원의 호명에 의해 각자 제 위치로 흩어졌지요. 전 양손에 쇠팔찌를 차고 2층으로 올라갔고 또다시 여닫이형 철창을 지나 같은 법정에서 설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게 됩니다. 이때가 아마 9시40분경 정도.

 

사실 실형을 원하고 있는 저인데도 무언가 결정이나 그러한 시험 등에 대하선 왠지 긴장감이 드는 것처럼 어쩔 도리가 없이 맨 앞에 교도대원에 찬 전자시계를 뚫어지도록 보며 기다리는데 이 초조함이라는 건 검판사의 말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하는 현실에 놓인 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나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면서 오전 10시는 지나가는데 동행한 직원 한 분이 절 부르면서 제가 가져온 용지에 대하 뭐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미리 준비한 최후진술문이고 재판관에게 전달할 거라고 말하더니 그 직원은 원래 확인 받아야 한다면서 나설 때 검신 때에 어떻게 통과가 되었다는 등의 난리를 피더라고요.

 

물론 저로선 아니 외부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면회할 때 직원들의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는 건 알고 있고 국가에서 만들어진 문서 즉 법률상 써 있다는 건 알고 있다만 참 재판부에 제출할 때에도 그러한 검열을 거쳐한다는 건 좀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요.

 

그리더니 그 직원은 그 걸 가지고 있지 마라고 하더니 전 말이 어눌하고 생각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제발 소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말을 하더니 그 직원은 그 진술문 내용을 외우면 되지 않느냐고 말을 하는데...

 

아니 편지지 3페이지 분량을 그 짧은 시간에 외어지냐고요. 그래서 저 기억력 좋지 않다고 말을 하였고 결국 가지고 있기로 얼버무렸지요. 그 후 예정된 순서가 오고 저에게 마지막 장애물인 수갑이 풀려지면서 법정으로 가는 문으로 아주 씩씩하게 걸어갔습니다.

 

물론 씩씩하게 걸어가는 건 당당하게 실형을 받겠다는 다짐을 보여주면서 양심에 의하여 병역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사법의 심판에 대한 희극에 가까운 비극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그리면서 잠시나마 올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보더니 어쩌다 후원인이 된 분을 포함해 3명정도 있더군요.

 

그리면서 중앙에 있는 피고인석에 섰고 앞에서 그 권위적인 상좌에 있으면서 차림새론 '나 권위있다'라고 외치는 재판관님이 절 묻더군요. 주민번호는?

 

물론 이건 당 사건에서 피고인이 진짜 맞는지 확인하는 인정심문이었지요. 전 당당히 답했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선 주민번호는 말할 수 없다'고... 그리고 공소장에 나와 있는 인적사항이 맞다는 등을 마이크를 통해 들려 왔습니다.

뭐~ 이러한 저의 말에 재판관은 물론이고 절 도와주겠다는 변호사, 그리고 뒤에 있던 구치소/법원 직원, 방청객 모두 마음속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니 당연한 절차에 왠 거부?

 

물론 헌법상이나 형사소송법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진술거부권이 반드시 보장되어 있지만 이건 피의자 본인이 불리하다고 인지하는 진술에 대하여 발설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주민번호을 비롯한 개인정보를 진술을 거부하는가?

 

그 건 제가 예전에 다른 병역거부자가 구속하면서 재판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원래 공판이라는 용어 자체가 시민 누구에게 공개하는 재판이다라는 의미이기에 특정한 큰 사건이 아니다면 대부분 사건의 경우 시민 누구나 아무런 부담 없이 재판에 방청할 수가 있는데도 인정신문에서 왜 주민번호와 주소, 본적을 부르고 있는 앞선 병역거부자의 반응에 '인권활동가'로서 정말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인정심문에서 피의자의 중요한 개인정보 하나가 보통의 시민들에게 알려질 우려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수가 집행유예나 벌금 등으로 석방되는 실정에서 유포할 개연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지만 이러한 정보를 악용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어서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위반되는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별 다른 지식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아예 작정해서 불복종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더니 당연히 판사는 이러한 행위가 잘못하다는 불이익을 줄 수가 있다는 말의 협박으로 답했고, 심지어 변호사도 당황하였는지 애원하는 말을 하더군요.

 

솔직히 제가 1심으로 종결하고 싶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하였는데 제가 '다산'에 있다보니 알아서 법무법인와 상의해서 무료 변론을 해주었지만, 이러한 재판의 경우 지금까지 사실상의 양심검증의 장으로 가는 이상 본인의 병역거부의 사유와 군복무의 의지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 변호사는 정말 필요함이 적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면서 지루한 신경전을 지나더니 판사 왈 서면으로 주민번호를 쓰라고 하더군요. 사실 거부만 밝혔지만 그 대안에 대해선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잠깐의 잔머리를 굴린 끝에 전 내이라고 답했고, 긴급히 준비한 이면지에 주민번호를 쓰더니 판사는 '주소/본적'을 불렸고 뭐 알아서 써서 법원 직원을 통해 제출하였고 저의 재미있는 투쟁은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공판담당 검사의 진술과 질의를 하였는데 그 중 왜 입영을 거부(기피)하였다는 질문에 '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에 대한 고민'과 '국가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에 의하여 거부하였다고 마이크를 통해 답했고, 변호사의 변호진술을 하면서 '내 그렇습니다'의 되돌이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판사의 발언이 참 나의 가슴에 사정없이 흔들었지요. 지금 생각하니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 핵심은 '군대는 있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더군요.

 

참 저로선 아니 저의 양심에 대하여 좀 사상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 사실상 이 한국사회에서 검증의 장이 된 법정에서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함에도 저로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판사가 던졌는지...

 

그런데 한 국가의 시민의 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출발하였지만 내부에게 폭력을 가하면서도 '국가주의'나 '군사주의'를 양성하고 시민의 삶에 피해를 주면서 사실상 어느 특정한 '국가권력체'를 호위하는데 앞장서는 '군대'는 당연히 사라져야 할 집단이었기에 두말 없이 그렇다는 답을 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책에선 평화주의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자신 스스로에게 함정을 빠뜨리기 위한 술수이다는 걸 안다면 무시하거나 딴 소리를 하라고 조언을 보았지만, 그 대 당시에는 어차피 실형을 받을 각오이어서 갈 때까지 가는 일념에 휩싸였지요.

 

그런데 전 이후에 또 다른 병역거부자의 판결에서 징역 1년 6월이 아닌 1년 8월을 받았다는 걸 듣은 후로는 '십년감수'한 심정이었지요.

 

그리더니 그 판사는 앞선 저의 투쟁에 대한 반격인지 몰라도 절 설교하게 하는데 이건 저의 상상이지만 '넌 아직 어리니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생각 좀 하라'라고 하는데 아니 3년 넘게 끝없이 고심하다가 작심하고 수의를 입는 인간에게 생각 좀 하라니...

 

물론 그 판사는 그러한 설교에 대꾸를 수시로 말하였지만 역시나 뭔가 아는 건 많다는 걸처럼 개무시하고 끝내 자기 하는 말 다하였지요. 그래서 전 어쩔 수 없이 생각 좀 하라는 말에 응했지요.

 

그러나 만약 '병역거부'라는 길을 포기하고 다른 이의 삶처럼 살아도 무조건 집행유예로 주는 상황에선 몸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고, 다시 거부하면 앞선 형량을 더해 살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심지어 병역면제가 안 될 수가 있는 문제가 있기에 전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면제'를 바라고 수감을 자처하는 건 아니고 살다온 경험으로는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밝히고 싶네요.

 

그 다음 최후진술을 하라고 하는데 이 판사가 시간 좀 적게 쓰라고 말한 듯 진술문 쪽수를 물으면서 계속 딴죽을 걸었더니 평상시대로 미리 적혀진 글을 낭독한 후 판사는 그 내용이 궁금해서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문을 전달하였더니 다시 되돌러 주더니 나중에 보내라고 말하는 절 끝까지 걸더군요.

 

끝으로 검사는 담당검사의 측은함이 배인 듯 1년 6월을 구형하였는데, 변호사는 당연히 무죄이라고 변론을 해야 함에도 저의 입장 그대로 밝히는 건 좋아도 알아서 주어 달라는 듯한 말을 하는데 좀 기분이 좀 그랬습니다.

 

결국 이런 파란만장한 심리공판이 끝난 후 테이프에 되감는 것처럼 내가 사는 큰집으로 돌아왔고 이미 점심식사 시간이 끝나가서 어쩔 수 없이 광복절 때 특식으로 준 컵라면과 밥, 단무지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구형량에 대하여 저와 같은 이가 수원구치소에 온 경우가 없었는지 주위에선 적었는지 뭐 집행유예나 1년 6월을 안 준다고 말이 나왔습니다. 물론 전 전국적으로 앞선 병역거부에 대하여 선고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줄꺼이라고 답했지만 하루들이 지루한 것인지 이러한 심리를 즐기는 듯 싶었네요.

 

그리고 이번 공판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투쟁을 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같았는데,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사복을 입고 출정을 하였으면 더욱 의의가 있었을 것인데 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지요.

 

그리면서 이 다이나믹한 하루는 저물어 가면서 전 저의 입장이 증명하길 바라면서 9월 1일 선고공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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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사라진 내 지갑이여~

오늘 갑자기 수원구치소로 이감온 용석씨 보려

면회를 하고 난 뒤 밥을 먹었지요.

 

그리면서 다 식사 다 마치고 밖으로  나가는데...

뭔거 허전함이 들더니 역시나...

 

나의 삶에 대한 지킴이 중에 하나인

지갑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 보았지만...

앞서 신분증 꺼내려고 한 것 이왼 전혀

내 머리속에 기억이 없다는 것이죠.

 

물론 그런 걸 없다고 삶이 뭐라 달라지나라고 말할 수는 없고,

주민증은 있으니 2차 문제은 없고

통장에 있는 액수는 어느 정도는 가지고는 있으니

절대 빈곤과 난감함은 피했지만...

 

앞서 4년여 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을 때

웃고 넘어 갔는데 이번엔 길가에 주어서 잘 써먹었던

학생용 교통카드까지 사라지니 참 가슴에서 오는 무거움이란...

 

아~ 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일단 다산에 가서 마저 해야할 걸 처리하면서

위안삼아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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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제 늦은 과제를 마첬다.

그저께 모 영화관 사이트를 보다가 다른 분들이 보자고 하였는데

여려가지 까닭으로 거절한 그 영화가 아직도 상영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까지 상영을 하기로 되어 있고

시간도 오후 2시 40분밖에 없어서 

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사실 제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을 뿐 만이 아니라

TV도 뉴스나 다큐, 애니 등 특정프로를 잠깐 보는 것 이외에는

눈이 안가더라고요.

 

물론 돈이 없어서 영화나 콘서트 안 간다는 것도 있지만

제 마음엔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중)문화엔 좀 문외한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럼에도 제가 왜 그토록 무심하던 '영화'를 보려고 하였는지...

뭐 심지어 어제 좀 늦게 일어나자 마자 밥을 '먹지 않고'(!)

무작정 그 영화관으로 갔을 정도이니까...

 

음... 이 블로그를 잘 보았다면 착 알 수가 있겠는데

바로 '방문자'를 늦게야 봤거든요.

 

심지어 제돈(7000원) 내고 들어 갔으니...

또한 오늘 종영한다고 어제에도 매진이었음에도

제가 도착할 때에는 다행히 표가 있어서 제빠르게 샀지요.

(알아보니 좀 연장되어 있더군요)

 

뭐~ 그 걸 본 느낌은 그냥 관객 입장에는 몇개의 배드신이

15세 관람가 치고는 좀 이해가 안들 듯 싶었으나

(아니면 내가 늙어서 그런가?)

조금씩 솟아오는 웃움거리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병역거부자로서 느낌을 말하자면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리를 약간 안다면 알 수 있는 실소와

병역법 위반에 의해 재판 당할 때 계상의 최후진술 신과

구속 후 면회 신(특히 호준의 아들이

'삼촌 왜 못 나와'라고 되물어 말을 할 땐 오히려 호준이 '꺼내줄께.'라는

명대사보다 왠지 잊혀짖 않네요)을 보며 눈가에 맻히는 눈물...

 

또한 끝난 뒤에 뭔가 가슴이 무거운 듯 한동안

재대로 가누가가 어러웠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뭘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다음에 정리를 하겠지만 저도 재판에서 최후진술 때

미리 적어둔 글을 바라보며 읽은 것이 생각이 나네요.

 

하여튼 뒤늦게 '방문자'를 보니 정말 제돈을 잘 냈다고 평하고 싶네요.

정말 이 별 볼 것도 없는 영화도 부지기수인데...

 

그럼에도 정이 매마른 것인지 왜 이리 눈물이 펑펑 울지 않고

찔끔 나오는지 참 답답함이 드네요.



그저깨 모 사무실에 있는데 정말 오랜만에

'CEO'라고 부르는 형이 나타냈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심심해서 오는 건 아니고 어느 단체에서

회의를 하려고 온 듯 싶었는데 문듯

저에게 이런 걸 묻더라고요.

 

물론 최근에 나온 'UN 자유권 권고'나 '개인통보에 대한 권고' 등

병역거부에 관련한 소식을 들먹이면서

이 병역거부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액션을 해야하지

않는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제가 뭘 주도하는 성격이 아니고

발언력도 떨어져서 (운동 특성상 뭔가 물고 늘어지는

분위기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별 다른 답을 내놓지 못했지요.

 

전 그 물음 이후에 생각에 잠겨 봤는데...

최근 장애운동진영에서 '사회복지법' 개정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국회까지 72시간 연속 3보1배를 하였는데...

 

혹시 우리 쪽도 이런 걸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좀 겁이 나고 부담이 가긴 하지만

병역거부권 인정을 요구하며 청와대에서 국방부를 지나 국회까지

쉼없이(아마 24시간 이상이 걸릴 듯...) 때로 마빡이를 하며

도보 행진을 하는 것은 어떤지...

 

* 덧글 : 그동안 바쁜나날을 보내다 잠시 쉴 틈이 생겼건만

이번주 토요일에  병역거부로 수감당한 한 분과 면회하기로 되어있고,

끝나면 홍대쪽으로 가서 모 단체의 후원파티를 가야 하면서

그 다음날엔 평택 송년한마당까지... 참 쉴 시간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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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원구치소 측의 '반격' - 지문날인 없이는 영치금을 사용할 수가 없다!

"*승규씨 무인 찍어주세요." 

 

 "저는 지문날인을 거부하니 서명으로도 해줄 것을 원합니다."



저로선 앞서 아마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어봐서 그들의 놀라움은 당연할 뿐이었지요. 저 높으신 분들의 명에 의해, 정해진 그들만의 시스템에 한 보잘 것 없는 인간에 의해 도전을 당하는 것이니까요.

 

더욱이 가족이나 지인 등이 민원실에 통해 구입해준 물품이나 재소자들이 구입을 신청한 후  본인에게 전달하면서 그러한 행정에 대한 본인확인을 할 의무가 있고, 그러한 의미로서 날인을 해야 하기에 가장 완벽한 식별확인을 할 수 있다는 지문을 찍는 것이 좋겠다는 저 위대한 '빅브라더'들의 결정에 그동안 그 누구도 의의가 없이 순응을 하며 규정대로 집행을 하였지요.

 

그러나 지난날부터 이어져 온 전통(?)에 아니 어느 누가 반동을 하는 것이냐라는 물음은 저 분들은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고 뭔가 위기감(?)이 오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비록 저로선 이 단순한 행동이라도 국가의 통제와 '국민'들의 감시 속에서 반박하기가 쉽지 않지만, '안보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의 생체정보를 채취 당하는 '국가의 부당한 명령'이기도 한 지문날인에 대하여 병역거부자로서, 아니 하나의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그러한 잘못된 관행에 제동을 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지문날인'거부도 동시에 암묵적인 선언을 하였고, 개인의 자유를 법률로서 억압하는 수감생활에서도 끝임 없이 지켜 내었는데...

 

그 무인(지문날인)을 날인할 것을 요청하던 구매담당 재소자(징역말로는 '구매 소지'라고 부르지요.)는 저의 이러한 반응이 역시 처음인지라 당연히 대동한 직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 내었고, 반입해 준 구매물도 다시 모으라고 하였지요. 그 '악몽'에 대한 변주곡처럼...

 

그리더니 사동 담당자가 철문을 열면서 뭔가 말을 할 것이 있듯이 절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고, 복도에 나서니 다른 쪽에서 다른 직원이 갱지를 들고서 절 보더니 '*승규씨 맞습니까?'라고 묻더군요.

 

물론 맞다고 하였더니 그 직원은 들고 있던 갱지 즉 영치금사용신청서를 적혀진 수번과 이름 그리고 뻘건 인주가 묻은 신원 미상의 지문이 묻혀진 걸 보여주면서 다시 한번 물어 보았지요. ' *승규씨 지문이 맞냐?' 라고...

 

전 그 지문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아니요'라고 말을 하였고, 당연한 결과로서 '사용신청'은 불허 당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봉사원(방의 대표)의 말에 의하면 영치금 사용을 일체 사용을 할 수 없고 구매신청도 할 수가 없다는 듣게 되었어요. 그리고 반입하던 물품은 회수 조치를 당하면서 그 금액은 환불하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었지요.

 

결국 자기들 입장으로는 '재산권 보호'라는 명목은 있어 보이지만 저에게 또 다른 '옥쇄'를 채워지면서 '내 돈'임에도 내가 쓸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지요. 물론 저로선 지문날인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이에 행동을 한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겠지만 '양심상' 되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구치소측의 '반격'은 그동안 별다른 고민 없이 지냈던 저에겐 엄청난 첫 번째 '시련'이었지요.

 

그런데 왜 지문날인을 거부를 한다면서 어떻게 영치금사용을 하면서 지문날인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전하면서 '공동구매'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실만한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감옥에서 엄연한 자본주의 사회이라서 나름대로 무상지급(음식이나 의복, 소량의 생필품 등)을 해주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는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력과 인맥으로 음식들이 너무 많아서 유통기한이 다될까봐 시간 죽이기 용으로 하지만 윷놀이를 하며 억지로 먹어야 하는 방이 있는 반면, 너무 빈곤해서 사동 청소에게 밥 좀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방도 있는 빈부의 차가 크는 또 다른 사회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 방에도 돈 있거나 없는 사람들끼리 차려진 반찬들의 차이를 두면서 따로 먹는 경우까지도 있지요. 적어도 다양한 까닭으로 어떤 방에 들어와도 어떻게든 '가족' 같이(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지만...) 같이 먹고사는 분위기가 다수인데 좀 치사하다는 반응이 들리겠지만 정말 냉혹한 현실이지요.

 

그래서 이 징역살이에서 방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위하고자 일정 요일이 되면 '봉사원'은 방에서 돈 있는 이들에게 서로의 여력을 살피고 시기나 재고를 바라보면서 품목이나 개수를 똑 같이 정하면서 신청하는 '공동구매'를 하게 됩니다.

 

물론 마구 물품을 시킬 수는 있지만, 금액의 제한이 있고 이후의 시비도 날 수가 있어서 따로 장부를 작성하면서 똑같이 나누면서 적지요.

 

그렇더라도 재력이 있는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구매를 할 수 없도록 해주기도 하지만, 이 감옥내의 심리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논리에 맞선다는 것이 솔직히 쉽지가 않기에 비록 각자의 마음속에 아깝다는 반응이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돈을 써야 하는 것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하기에 앞서 구매 신청을 할 때에도 당연히 구매 신청서에 제 이름을 넣어 적으면서 또 다른 사람이 몇몇이 그렇게 적은 신청서에 한꺼번에 손가락에 인주에 찍게 되는 것이지요. 비록 내 이름에 다른 사람의 지문을 찍혀진 것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또 다른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 아니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타협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저의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주는 것에는 서로 참 착잡함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기에 이 영치금 사용 문제는 이 징역살이에서 정말 민감한 문제이기에 저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방 사람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어이없음과 비아냥거림, 심지어 같이 살수가 없으면서 '전방'(前房)을 요청하려고 할 정도로 냉랭함 그 자체이었어요.

 

특히 실제로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어른들 입장으로는 빈약한 급식에 대한 보충과 억제 당한 욕구의 충족으로서 구입하는 식품부터 최소한의 생필품까지 영치금을 통해 자비부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돈이 있음에도 그까짓 무인을 찍지 않겠다고 돈을 쓰지 않겠다고 하니 절 같이 지내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제 나름대로의 사유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설득할 수는 있겠지만, 저로선 병역거부와 마찬가지이겠지만 비록 구속을 당하건만 절대 '범죄자'가 아니며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에 반박하는 보잘 것 없지만 소박한 양심에 따라 국가 권력에 불복하는 것 자체가 '비국민' 취급을 당하는 만큼 이 파시즘에 엇대어 버린 사람들에게 사실 이러한 말에 입 밖에 나오는 것은 그에 대한 예상된 반응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 이상의 폭력이 나올까봐 정말 두려웠어요.

 

그럼에도 그 비상식과 비이성이 가득 찬 이 사회에서 당연히 이 진리(?)를 설파하며 해독을 시켜 주어야 하건만 이 소심한 성격 탓인지 지금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일년 전에는 어째 하겠습니까?

 

그래도 조금씩이지만 이런 제 심경을 약간씩 밝혀 주었지만 심지어 '지문날인 거부한다고 병역기피를 한다'라는 허황된 반응이 나오기까지 하였지요. 그동안 당연하게 지켜지는 한 것에 대하여 어느 누가 반동을 하니 재소자까지 주변까지 '튐'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은행업무이나 행정서류 신청까지 서명날인을 하면서 여기선 지문날인 만을 고수하는 것이 문제가 있냐고 말하더니 어느 정도는 먹혀 들어가기도 하였지요. 그럼에도 뒤늦게 이 방에 증인이 들어서면서 그 들의 원칙에도 반대하는 것이 없더라도 양심상 그렸더라면 이해하는 반응일 뿐, 그 냉소함은 끝내 당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봉사원은 전방까지 요청하려고 하였지만 다른 방에 가도 린치를 또 당할 수밖에 없다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주었지요. 그리면서 제가 기결수 방으로 가면서 그 분이 가지고 있었던 물품을 다 주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그 두 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런데 빌려준 속옷을 갚아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다행히 다른 분이 면회를 하면서 방에 있는 다른 분 이름으로 차입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여서 어떻게든 갚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가끔씩 면회를 하려 구치소에 가면서 소시지나 과일 등을 차입해 주면서 방안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을 하였는데 그 다음날에 환불 당하면서 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면서 차마 못 먹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이 잘 먹었다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차입 자체가 안 된다고 하니 제 눈앞에서 비추는 분노와 우울함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건 정말 한숨이 나오게 하더군요. 물론 제 자신의 고역은 어째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사야 할 것도 많은데 어차피 징역살이를 해야 하기에 이불을 비롯한 생활용품을 사야해서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말 한마디 없이 구속을 해야 하였던 저로선 또다시 대목을 박히게 하던 것에 어떠한 말로서 설명이나 변명이라도 할 자신이 없었지요.

 

그래서 재소자로서 이러한 처우에 침해한 만큼 당연히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해보겠다고 결심하면서 밖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제가 직접 진정신청을 할 것이니 필요한 자료 좀 보내라고 요청을 하였는데, 이후 '다산인권센터' 쪽에서 알아서 진정을 하였지요.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다행히 옷가지 등의 생활용품이나 서적, 등기우편 등의 경우에는 처음엔 반입을 할 수가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좀 거시기하잖아'라는 담당자의 입처럼 저의 서명으로 본인확인을 하여서 어떻게든 반입을 해주었지요. 저로선 그 거시기하다라는 반응이 영치금 사용허용까지 이어질 것 원하였지만 끝내 그 문은 열리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서명 날인을 하면서 '주민증' 있다고 하는데 뭐 대단한 것도 아니면서 무슨 짓이냐라는 주위의 비아냥거리는 언행이란... 심지어 사동담당 직원이 날 '싸인맨'이라고 놀려 줄 정도이니까요.

 

그래서 저로선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걸 줄이려고 어느 날에 밖의 지인에게 비누나 편지지(봉투), 볼펜 등의 생필품을 보내주라고 하더니, 소포로 도착하여서 내 눈  앞에서 개봉을 하더니 자기들 규정을 보여주면서 납득할 수 없는 저에게 반입을 해주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답변만이 들렸어요.

 

그때 저로선 화가 영치금으로 뭐 생필품을 살 수 없다면 최소한 외부에라도 반입을 할 수 있겠냐라는 반박을 하며 분노하였고 상담을 요청하려고 하였지만, 지금은 혹시 행형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추측만이 남아 있지만, 다양한 취향과 체질과 상관없이 획일화되는 시스템은 정말 싫다는 건 어쩔 수밖에 없네요.

 

그 후 이러한 폭풍이 지나가면서 평상의 하루들이 지나갔고 8.15에는 컵라면과 부라보콘을 특식으로 주면서 꼼짝없이 보내다 저의 심리공판일인 8월 17일이 시나브로 다가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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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힘이 든다. 그리고 울고 싶다.

방금 전 '다산'에서 발행하는 모 (여러분은 아실 듯) 주간지에 실릴

원고를 탈고한 뒤 이렇게 잡담을 씁니다.

 

먼저 어제까지 심신이 피곤하게 징역살이를 하다 출소한 뒤로

수원인권영화제부터 시작해서 경기도청르 생대로 하는

활동보조인에 대한 실질적 도입 투쟁

 

그리고 최근 평화수감자의 날 준비나 한미FTA 저지 총궐기로

수시로 왔다 가니가 정신도 없었고 쉴 틈이 없네요.

또한 집안일을 해야 함에도 딱 필요한 것 이외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해서 부모님의 시선이...

 

더구더나 2차 및 3차 총궐기에서는 소위 '불법폭력시위'로 인하여

연행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가석방의 취소 그리고

남은 116일을 구금당해야 하는 억울함까지 있어서 거리에

있지 못하고 인도에 남아 있거나

전경이 가로 막힌 라인에 가까이 가는 걸 피할려는 저의

내적 갈등에 대한 외적 표현이 미안하기까지 하네요.

 

그래도 거창하게 조국과 민족은 절대 싫어하고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민중'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 가슴에 손 엊어 옳다는 것라면 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악화되는데

그 누구도 영향을 피할 수가 없는 (한미)[모든] FTA에 반대하고,

전 세계의 군사주의를 심화하게 하는

이라크와 레바논 그리고 이 딸에서의 전쟁(위기)에 반대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제가 앞서 구속을 당해선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 한기를 피할 수 없는 평화수감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주시는 것도 하나의 실천이고요.

 

특히 요즘에는 이메일처럼 재소자에게 편지를 보낼수 있는

전자서신제도나 화상전화처럼 멀리 있는 재소자에게

면화를 할 수 있는 화상면화제도가 있으니까 시간이 되시면

(물론 여유가 있으련지 모르지만 ) 꼭 해주세요.

 

그렇더라도 나와는 잘 모른다고 무관심하지 마시고,

부담감 갖지 마시고 자기 소개식으로 글이나 말을 걸어 주세요.

 

저도 작년 이맘쯤에 관계가 없던 어느 분이 갑작스럽게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착이 되었고 그 이후에도 편지로서 교류까지

이어젔거든요. 더구더나 여러가지 이유로 심신이 피곤하였고

외로웠던 저로선 작은 손길이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건만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보니 보답할 틈이 없네요.

 

참고로 전자서신을 쓸 때 이 반인권적인 주민번호로 통한

본인확인이 거슬리기도 하지만, 주소란이 있어도 반드시 내용 중에 

주소를 정확히 꼭 쓰시면 답장을 할 수 있다는 걸 아시고,

면회도 그 대상자의 후원인이나 소속단체 등에 연락해서

반드시 확약을 받아야 하는 건 아시죠.



다름이 아니라 이 병역거부운동 내부에서 광풍(?)을 불고 있는

'방문자'에 대해서죠.

 

더욱이 가끔 제가 있는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하는 아무개의 글을

보다 문듯 눈물이 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감수성이 둔해진 것인지 왜 눈물이 나지 않고 맹글러리는지...

 

하여튼 그 감상문을 보며 저의 재판과정을 더듬어보니 정말

왜이라 할 말이 많아지고 우울해지는 것인지...

 

그리고 참 내가 허구나 자본주의적 요소가 싫다면서

영화나 드라마 잘 안보는데 또 다른 이에게 표를 얻을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건 왜 이러는 지...

 

물론 다른 분들이 서로나도 보겠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서울에 가기가 쉽지 않는 저로선 스스로 놓쳤지만...

 

참 내가 바보고 정말 보고싶다.

그리고 울고 싶다.

 

지금도 수감을 당하는 양심수나 평화수감자에게

"꺼내줄께"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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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병역거부자 〓 '여호와의 증인' - '잡범방'에서의 하루들.

엘리베이터에서 6층에 문이 열리고 전 그동안 같은 곳에 있었던 분들과 작별의 손짓을 내고 6층 1사로 가게 됩니다. 그리더니 거기에 상주하는 직원(교도관)이 어떻게 왔냐고 하더니 전 ' 신입입니다 ' 라고 답했지요.



그리더니 그 직원은 직원이 머무는 공간에 잠시 대기를 하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 자리에 서더니 그 공간에 있었던 한 눈에 보아도 '여호와의 증인(이하, 증인)'스러운 사동청소(소위 '소지'라고 부르는)가 절 여러 가지로 묻더니 노트에 적더라고요.

 

물론 잠시 후에 알았지만, 그 직원 나름대로 수용자레 대한 파악 좀 하려다보니 이름이나 죄명 정도 물어보는 것이었죠. 그러던 중 제가 죄명을 물어보더니 그 들의 선에 따라 '병역법위반'이라고 답했는데 그 사동청소의 말은 역시나 '증인'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전 증인이 아니다고 답하면서 비슷한 까닭으로 구속을 하였다고 말했고, 혹시 이런 경우를 처음 보신 것 아냐고 물어보더니 그 사동청소의 반응이 저에게 오히려 놀라웠어요. 바로 그러한 분들 만나봤다고 그 분이 말을 하더라고요.

 

전 처음엔 무슨 소리이냐고 되물어 보았지만, 제가 지정당한 방에 들어서면서 그 궁금함은 일거에 풀려버렸지요. 바로 구치소의 경우 죄명별이나 범법 횟수 등에 따라 분류를 하는데 제가 들어갈 방이 바로 '기타방' 즉 잡범방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병역법 위반의 경우 바로 '기타방'으로 가게 된 것인데,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가져도 어떠한 사안에 대한 당사자를 만나지 않는다면 알 수가 없듯이 이 병역법 위반의 경우에도 저를 포함한 병역거부자의 경우에는 88조 '입영의 기피'으로 적용을 당하는 분류가 있지만, 이와 다른 분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공익근무요원 등의 대체복무로 근무를 하다가 여기서도 재수없는 표현인 '정당한 사유없이'-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그 분들의 시선에게는 정당한 사유가 아니다는 것처럼 - 통산 8일 이상 근무를 하지 않는 경우, 즉 현역병에게는 '근무이탈'과 비슷한 범법을 하게 된다면 89조의2 '공익근무요원 등의 복무이탈'에 위반하게 되어 구속당하는 분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에는 재판정에서 복무의사가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에 집행유예로 석방을 해주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나중에 말하겠지만 참 이 것도 사람 미치게 만드네요. 하여튼 이러한 기존의 선에서 벗어난 위인(?)이 나타난 것에 대하여 놀라운 표정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다 그 직원이 절 불렸고 드디어 입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더니 그 방의 대표(이하, 봉사원)이 누군가에게 식기 세척이나 자기 짐 안내 등의 이런저런 걸 시키면서 절 불렸지요. 그리더니 편안한 방에 왔다는 일종의 자랑을 하면서 처음이나까 이 방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살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면서 제 소개를 하더니 역시 '병역법위반'에 대하여 '증인'이냐고 물어보는데 전 아니다고 말했죠. 그런데 또 다른 분이 저에게 혹시 '양심적 병역거부'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단어로서 물어보는데 정말 이 운동권(?)의 세계 바깥에서 이런 단어가 제 귓가를 스친 것에 정말 놀라웠지요. 물론 전 맞다고 답했지요.

 

그리고 본인으로선 혜택을 받았지만, 국가권력이 재소자에 대한 당근 중에 하나인 '가석방'에 대하여 내년(2006년) 9월 말이나 10월 말에 나올꺼라는 희망을 봉사원이 제시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면서 이 징역살이에서 영치금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어럽다고 말을 하면서 영치금이 있는대로 쓰라고 하더군요. 전 솔직히 이런 말을 듣으면서 무슨 소리인지 되울어 보고 싶었고, 심지어 속물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 감옥에서도 자본주의의 광풍이 미치고 있다는 걸 느겄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필품까지 구입을 해야 할 정도이라서 이 영치금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어럽고, 직설적인 표현으로서 인간적인 삶까지 포기할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 '또 다른 분'이 제가 '다산인권센터'에서 일한다고 하더니 법무법인 '다산'이나 김칠준 변호사를 들먹더니 (오산)세교지구를 알고 있냐고 물어보면서(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지요.), 작년 철거용역 한 사람의 죽음으로서 알려진 '오산 수청동 철거투쟁' 와중에 구속을 당한 이들(26명) 중에 한 사람이다라고 말을 하였지요.

 

그리고 민가협에서 출간하는 '민주가족'을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서 그러한 질문을 한 것 같았습니다. 물론 '양심수'로 지정하여서 방에는 우송한 '민족21'이 꽂혀져 있었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민족21'을 내용상에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참 징역살이에서 읽을 것이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전 약간의 오버이지만 조만간 저도 '양심수'가 된다고 말하면서 양심수 명단 속에 적혀있던 병역거부자들 대다수가 잘 알고 있다고 말을 하였지요. (좀 미안한 소리이네요...)

 

그럼에도 그 분이 소위 활동가가 아닌 소박하게 살았던 주민이어서 내면에서는 '한국인'스러운 보통사람이어서 그렇게 대화를 할 이가 아니었지만, 지금 출소를 하였다고 알게 되었고 이후 모 잡지에서 나온 사진 중에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는데, 어떻게 사시고 있는지 궁금하고 신세 지은 것들이 많아서 답례라도 해주고 싶네요. 물론 전철연 쪽을 통해 알 수는 있겠지만...

 

그러다 상의를 벗더니 봉사원 눈에서 꽤죄죄한 면티를 보더니(물론 수감을 당하면서 미리 옷가지를 준비하지 않았지만) 속옷을 빌려(!) 주었고, 앞서 말했지만 또 다른 '병역법위반'자 두 명과 함께 3.92평에서 자게 되었고 2005년 8월 4일은 저물어 가게 됩니다.

 

그 후 저녁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한 후 제가 먼저 샤워를 하라고 하여서, 더운물이 필요하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찬물로 샤워를 하더니 진한 녹색 매트리스 깔고 법무부마크 모포 깔면서 밍크담요를 까는 잘 준비를 하더라고요. 그 다음 콜라 한잔씩 돌리면서 TV를 시청하는데 개인적으로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바로 잤지요.

 

시간은 흘러 아침 6시가 되니 봉사원이 다들 깨우면서 밖에선 한 여성이 뭐라고 소리를 치면서(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소리의 내용은 투쟁구호이고 수청동 관련 '공범'이다고 하네요. 그런데 대단한 건 제가 이 방에서 있는 동안 거의 쉼 없이 투쟁구호를 내지더라고요.) 이불을 개는데 뭘 보여 줄 것이 있다고 봉사원이 각 접고 순서대로 하라는데... 참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네요.

 

그러면서 언제나 상호존중이 아닌 상명하복이란 군사주의적 시스템이 깔려저 있는 짜증스러운 인원점검을 하면서 또 하루가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운동시간과 접견, 편지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게 됩니다.

 

그러다 날 법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공소장'이 도착하게 되고 그 처단을 준비하는 날 즉 심리공판을 8월 17일 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변호사 선임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법무법인 다산'이 해주는 걸 공소장에서 써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공소사실을 담은 내용이 반 페이지 분량인 것이 좀 실망했지요. 단지 다산인권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한 것을 담은 것 이외에는 언제쯤 입영사실을 알면서도 입소하지 않았다는 등의 국가권력의 눈으로는 앞선 병역거부자와 똑같다는 것이지요.

 

전 이렇게 재판기일을 기약하면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하루들'을 살아가면서 이따금 아침 9시경에 찾아오신 어머니나 다산 등의 4층 사람들 등이 찾아와 이 짧은 7분의 면회하면서 그나마 있으만 해도 이 좁은 방에서 사생활이 없이 집단생활을 하는 고역이나 그동안 지냈던 이들과의 해여진 것에 대한 외로움에서 작으나마 '마취제'를 맞고 다녔지요.

 

그러다 어느 날 다산에서 제가 않는 자리 옆에 자리하는 분이(누굴까요?) 면회를 하면서 앞서 빌린(?) 속옷을 갚아야 하고 제 스스로 필요하게에 속옷 좀 차입하라고 하였고, 그 다음 날 아침 그 언약대로 구치소에서 판매하는 속옷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면서 구매담당 재소자가 본인이 수령하였음을 확인하는 절차에 따라 명부에 지문날인(무인)을 요청하였고 전 당연히 지문날인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반응에서 저와 제가 있던 방 사람들 모두 놀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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