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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른 이야기(외전) #1 - 수원구치소에 대한 잡다한 느낌들... 하나!

제가 구속을 당하기 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을 듣었습니다. 바로 '수원구치소에서는 운동을 옥상에서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저의 상상이나 주위에서 말한 걸 듣어보면, '30분'이지만 햇빛과 땅을 볼 수 있다고 알았건만...

 

그런데 이 구치소에 들어와서, 약 3개월의 삶을 지내다 보니 솔직히 거긴 오래 살아가기가 어럽다는 걸 느껐어요. 물론 외관을 보면 베이지색(자세히 보면 청소 안한 듯하면서 잔금이 쩍쩍 갈려진...) '아파트형'이라 멋있게 보였거든요.

 

더욱이 저의 머릿속에 어럼프시 기억나는 '옛 수원교도소'의 전경과 예전에 뉴스에서 본 구치소 내부를 보여서 뭐~ 시설이 그나마 최신이니까 살기가 불편하지는 않겠다는 상상과 단정을 하였죠.



지금 전 구치소 인근에 원형 육교 위에서 바라보면서 '참 전근대적인 건물이구나'라면서 지금도 수감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고생하고 있겠네'라고 생각을 잠기고 있지요.

 

그럼 그나마 최근에 지은 '수원구치소'가 왜 '전근대적 건물'이라고 단정을 하는지 말해보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재소자 중심이 아닌 - 적어도 배려라도 해주어 하건만 - '교도행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첫 시점을 해당하는 시설이라는 것이죠.

 

참 이런 어려운 말을 말하니까 좀 그렇네요. 그럼에도 이 구치소에 대하여 약간이지만 독설을 내뱉는 건 저와 관련된 것도 있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다른 분들도 느끼는 것이어서 그러한 저의 소견을 말할게요.

 

앞서 제가 운동에 대한 누군가의 말을 하였지만, 제 있어본 즉 실제로는 운동을 하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의 면적이 4~5평 정도이고 모양이 다이아몬드형(◇형이 아닌 윗부분이 깍인 진짜 다이아...)이면서 창가에는 철창이 촘촘이 붙어 있어서 밖을 볼 수 없는 건 물론이고 해도 보기가 어려운 구조이다는 것이죠.

 

그래서 10명이 넘은 인원이 그 좁은 공간에서 운동을 하라고 하면 재대로 할 수 없다는 건 아시죠. 그런건지 몰라도 바닥이 폴리우레탄이고, 뒤늦지만 발바닥 지압판을 설치를 하였지만 수감을 당하는 신분으로는 몇 가지 위안거리인 운동을 재대로 하는 것은 어럽죠.

 

결국 전 원래 운동을 잘 안하긴 하지만, 잠깐의  외출 이외에는 꼼짝없이 좁은 방에서 서식(?)당해야 하는 저로선 이 비육된 체지방을 조금이라도 줄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유일한 취미인 '걷기'를 운동장(민망한 표현이지만...)바깥을 도는 것으로 '운동시간'을 보내었지요.

 

그리고 시간이 좀 남으면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기고, 그 옆에 있는 샤워장에 가서 찬물샤워로서 마무리를 지었지요. 또한 운동을 하기가 좀 그러면 바로 샤워를 하면서 빨래를 하는 것으로 하루의 그 시간을 하나씩 죽어(?) 버렸지요.

 

그런데 여름에도 더운물로 목욕을 하는 낭비된 삶을 살았던 제가 차디찬 물과 오이비누를 이용해서 - 참고로 샴푸는 판매하지 않음. - 샤워를 한다는 것이 저로선 우스워지네요. 그래도 한여름에 있으니 그나마 낫지요.

 

그리고 이건 좀 쪼잔해지는 것이지만, 지금은 해소되었다고 듣었지만 한 때 말도 안 되는 문제가 있었어요. 바로 라면(컵라면)을 판매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까짓 라면 못 먹는다고 무슨 변괴한 일이 나겠는가 이라고 되물어 보겠지만, '담배와 술'등의 즐길 수 있는 것이 없거나 억제 당하는 이 징역살이에서 그나마 즐길 수 있는 이 '음식'에 대하여 딴죽을 거는 것이 작더라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왜 라면을 판매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소측의 입장을 담은 문서를 보았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고 간단히 정리하면 '전기 값이나 물 값이 많이 나간다' 등의 뭐 해괴한 변명을 하는 것이예요.

 

그러면 잠잘 때 계속 밝히는 등밝기 좀 줄이거나 아예 꺼주면 안되겠냐고... 또는 라면 좀 먹어보려고 '사동청소'(소위 '소지'라고 부르는)에게 시키는 걸 줄이려는 소측의 배려(?)라면 좋겠으나 의식주 중에 오직 식(食)을 중요시하는 전 이 먹는 기쁨을 빼앗아버린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더라고요.

 

더욱이 국경일이 되면 으레 지급하는 특식이나 뭐 보여줄 것이 있다고 우리들을 짜증나게 만들게 하는 '환경심사'로 주는 상품을 보면 꼭 '라면'을 빠지지 않고 주는 꼴을 보면 솔직히 저들의 속내는 이해불가입니다.

 

그래선지 몰라도 이 제재(?)를 한 까닭은 예전에 구치소장이 순회할 때 누군가 불만의 표현으로서 컵라면 속에 있는 라면을 던져 놔서 판매를 할 수가 없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언제쯤 모 잡지에서 기고할 때 이 라면 취식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할 정도로 묵은 문제이었는데 이후에 이송해온 분들의 말로는 라면을 팔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건 좀 말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좀 놀라운 사실을 말해볼게요. 바로 최근까지 난방을 하기 위한 온돌과 설거지를 할 때 쓰는 싱크대가 없었다는 것이죠.

 

물론 이후에 소측에서 순차적으로 싱크대를 설치를 하였고 저도 잠시나마 서서 설거지를 하는 혜택을 보았지만(개인적으로는 앉아서 하는 걸 좋아한데...), 5월이나 10월에도 세찬 바람 때문에 춥다는 이 구치소에서 어떻게 밤을 보내야 하는지... 다른 데(서울권)에는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닌다고 하던데 이 최신식 건물에 난방이 안된다는 것은 참 우습게 하네요.

 

그래도 제가 있을 때에는 그나마 더울 때이었고 체질상인지 몸에 열이 잘 나서 어떻게든 잘 버텄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재소자들을 보면 좀 미안하기도 하네요.

 

그럼에도 이런 저의 논문(?)에 쿡쿡 찌르는 저 분들에게 좋은 말을 하자면, 그나마 행정을 유연성 있게 처리하고 제 나이가 어린데도 공식적인 상태에서 존대하려고 하는 직원 그리고 1주일에 한 번 있는 온수목욕 때 그 샤워장에서 따끈따끈한 물을 휘감는 건 좀 좋다고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저에게 불만이 있는 건 건더기가 전혀 없는 멀건 국과 빈약한 양의 반찬들로서 우리들을 먹이도록 하는 급식과 최소한 필요하는 물품까지 자비로 부담하여야 하면서도 이 소중한 영치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이윤을 창출하는 구매문제에 대해선 어떻게든 팔뚝을 뻗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저에겐 시련을 오도록 만드는 지문날인 문제 때문에 정작 필요한 걸 대응을 하지 못하였지요. 휴~ 물론 이 문제들이 한 시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교정국'이나 그 상위기관인 '법무부'에게 죽창을 돌려야 하지만요.

 

그럼 소위 '감옥인권'에 대하여 더 할말이 있지만 여기서 좀 줄이고 다음엔 '가동 6층 1사 10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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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국산 '육류' 먹었다...

...라고 제목을 썼으나 실제로는 '돼지고기' 를 먹었다는 것이지요.

(헤헤~ 그렇더라고 제가 일부러 낚시질 하는 건 아니에요.)

 

하도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총궐기 때 제가 은색 가면을 쓰면서

'광우' 피켓을 들며 날뛰었는데...

그래서 저를 포함하여 소위 'FTA의 유령'으로서 집회에서 대활약을 하여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집회를 보내었죠. 그러면서 이 광우병에 대한

약간의 사전지식을 알고 있어서 좀 두려웠는데...

 

그리더니 어제 모 '대형마트'에 가더니 삼겹살을 굽는 시식판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이 시식에 있어서 프로인 저로선 이걸 놓칠 수 없었고

미리 준비한 녹말 이쑤시개로 삼겹살 조각에 바로 덥썩 찍어서  내 입으로

직행하여 먹었죠.

물론 다른 코너에서도 시식하면서 같이 먹었는데...

 

전 먹은 후 다시 그 장소를 돌아보니 엥~

'성조기' 디자인이 보이는 바로... 쌀나라산 도야지에서

나온 괴기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면서 입 속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삼겹살 조각을 씹으면서

아~ 이 프리온(광우병의 원인 물질 - 변형 단백질{바이러스 아님} - )

이 내 입에서 살아 숨쉬고 있구나라고 느껐지요.

 

그리고 가끅이나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서 나 죽어가겠구나라고

느껐지요.

 

또한 국가나 자본에서 온갖 미디어을 통해 시민들에게

배설(?)하는 정보의 위력도 새삼스럽게 느껐고요...

 

물론 활동가들이 시민들에게 어떠한 사항을 분명히 홍보를 잘 할수만

있다면 이러한 저처럼 감수성이 예민해 지겠지요.

 



총궐기 후 뒷풀이를 하였는데

어떤 분이 이 FTA에 대하여 시민들이 왜 무심하게 반응을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패배주의 등)를 설명을 하던 가운데

저에게 좀 거시기한 단어가 들리는 거예요.

 

바로 '개인주의' 이다는 것이죠.

 

물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타자'나 소외된 이에게 배려나 독려하지 않고

'나'나 그 주변을 중심으로 보는 건 문제가 있지만...

 

이 '개인주의'라는 사상에서는 '남'도 '나'처럼 상대하면서

'타인'의 권리나 양심(사상)도 인정해야 한다는 면도 담아있는 걸로

알고 있고, 저도 스스로 부르고 있기에...

 

이 한국시회의 전체주의의 거류가 흐르고 있구나라는 걸 느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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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005년 8월 2일... ② - 풍파속에서 외로운 나.

“ 이런 사람 봤었어 ? ” / “ 아니? 처음이야. ”

 

이 수원구치소에서 아마도 이런 인간을 처음 본 것인지 직원들의 반응이 이러한 듯하였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장소에 있던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이었지요.



물론 그(재소자)들에게는 그 ‘법규’에 따라야 만이 그 알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출소할 것이고 쓸 때 없이 날 다툼이 나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직원(교도관)의 입장에서는 그 높으신 분이 정한 규칙을 어기면서 배려(?)를 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제 기준이지만 소지품을 영치하면서 그에 대한 확인을 지문날인만으로 해야 한다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고, 전 그러한 지시에 불복하며 서명으로 확인을 할 것을 요구하였지요.

 

그러나 그 분들은 역시나 자기들이 정한 걸 - 영치금관리규정 등 -  찾으면서 저에게 무인(앞서 말했듯이 ‘지문날인’을 무인(拇印)이라고 하지요.)을 찍으라고 윽박지르며 말하였고, 같이 입소한 분들도 ‘쓸 때 없이 싸우지 마라’ 등의 냉소적인 반응이었지요.

 

전 그러한 분위기에서 절대 주저하고 싶지 않았어요. 바로 국가의 개인에 대한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을 하는 의미로서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또 다른 부당한 명령인 ‘지문날인’을 거부를 하기로 결심하였고, 이미 경찰조사와 검찰조사에서 그 걸 실천을 하였는데 저의 결심이 이 행형시설에서 주저한다는 것이 제 자존심으로라도 포기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또한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나 생각 등에 대하여 누군가 간섭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도 있어서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기도 하였고요.
 
그런데 솔직하게 저 ‘주민등록증’은 가지고 있고, 신분증으로서 잘 쓰고 있어 여러분은 이런 불복종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로선 이 지문날인제도에 대하여 예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지 내 지문이 누군가에게 넘겨지는 것이 싫어하긴 하였지만, 이런 반대하는 운동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서 어쩔 수 없이 국가에게 팔아 넘겼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런 신념이라도 지켜보겠다고 발버둥을 쳤고, 결국 무인란에 서명 두 번으로 갈음을 하는 것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치면서 왜 두 번이나 서명날인을 하는 것인지 묻고 싶어지네요.

 

하여튼 이 번잡한 상황에서 벗어났는데, 어떤 직원이 절 부르더니 다른 장소에서 대화를 하더라고요. 그리더니 이런 저에 대한 행동에 대하여 병역거부와 관련하여(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등) 딴죽을 걸더라고요.

 

물론 전 평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원칙으로서 굳세게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였어요. 그럼에도 언제나 이 병역거부에 대하여 이런 논쟁을 하는 걸 보았고, 결국 당연하게 강조하고 싶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양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기에 뭐 그렇지만 이 논쟁에 휘말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더니 그 직원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신상에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 라고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전 이런 걸 듣으니까 어차피 이 사회에서 불편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어서 처음엔 별다른 느낌이 없이 당연히 무시하였지요.

 

그런데 그 이후의 해프닝이 계속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저에게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요. 물론 다음 글에서 확인을 하면 될 것이고요.

 

그 후, 건강진단을 해야 하는데도 여건상 서면으로 대신하는 건강 체크를 하고, - 여기서 전 독방에 가려고 진단서가 있다는 식으로 발버둥을 쳤으나 역시 물증이 없다는 까닭으로 무산되었죠. 그 때 가지고 있을 껄... - 잠깐의 찬물 샤워(목욕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잠깐으로 대신하지요.)을 하더니 그 갈색 상?하의를 대충 사이즈 맞춰서 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늘 입었던 옷과 해어지고, 그 칙칙한 관복과의 대면을 한 뒤 입혔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서 닭볶음탕과 그 유명한 ‘콩밥’(실제로는 정부미와 보리를 섞은 것이지만.)을 맛있게 먹었지요. 그리면서 무슨 사유인지 모르지만 신상과 관련한 서류를 작성하였고 날인란에 역시 서명으로 하였죠.

 

그리면서 앞서 저에게 딴죽을 하였던 그 직원이 저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국가인권위 진정’이나 ‘정보공개청구’(전자서신을 받기 위해서는 재소자 본인이 따로 신청을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성폭력을 당할 우려가 있는 ‘신입식’ 자제 등을 중심으로 도움이 되려는지 모르는 교육을 하였지요. 그리면서 국가인권위 진정과 관련하여 예시를 저를 대상으로 하는데 저로선 참 주목을 당하는 것이 몸내 싫더라고요.

 

그 후 이 어지러운 시간은 끝나고, 어디론가 가더니 어느 사동(나중에 알았지만 ‘신입’ - 처음 들어온 이들을 가리킴 - 사동이더라고요. ‘사동’은 재소자들이 사는 시설을 일컬음.) 그 분들이 정하신 방대로 들어갔는데 3.92평에 9명이서 TV보다가 자는데... 그 때가 여름인지 땀을 잘 내는 저로선 정말 자기가 불편하더라고요.

더욱이 널찍하게 자던 습관을 가진 상태에서, 그 건장한 남성들끼리 틈이 거의 없이 앞에 누워야 하니까(소위 ‘칼잠’을 자야 할 정도이니) 아~ 끔찍했어요. 그래서 생체난로를 피하려 일행이 누울 때 발바닥에 있는 쪽으로 옳기면서 까지 어떻게든 시원하게 자기 위한 별짓을 다하기까지도 하였죠.

 

그러다 다음 날이 되면서 잠시간의 인원점검이나 배식 준비등으로 어수선한 것 이외에는 유치장에 있던 듯하게 편히 있었고 그러다 몇몇 분들이 다른 방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 후 또 하루가 지나가면서 어떤 직원이 남은 이들 모두에게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말하였고, 시간은 지나가니 모두 철문에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분과 다르게 층수도 다르고 방도 다른 곳으로 배정받아서 어쩔 수 없이 해어지게 되었지요.

 

그리면서 전 그 배정받은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바로 가동 2층 1사 10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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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군대 가기가 싫은 건 아닌데요?

어제 전 유명한(?) '아랫집'에 가려다 시간이 좀 남아서

잠깐 여의도에 들렸지요.

 

그래서 민노당 당사에 잠깐 들려 아무개에게 인사하고

그 날 민주노총 경고 총파업 집회가 있어서 전 아는 사람 찾는 겸해서

지켜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우습겠지만 오랜만에 집회에 나오니 기분이 좀 좋네요. 헤헤~

 

그러다가 모 병원 노조에서 오신 분 중에 날 아시는 분을

제 눈으로 찾긴 하였으나 내가 얼굴 살이 좀 빠진 것인지 몰라도

- 아니면 일부러(?) 외면한 듯 - 알아차리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던 중 또 다른 노조에서 있는 분 (평조합원이지요) 이 절 알아보시고

'고생했다' 등의 격려를 하였는데 이런 말도 하더군요.



그래서 전 건성으로 '해결되었죠' 라고 말하면서

'바로 민방위로 빠지게 됩니다 ' 라는 친절한 답변을 덧붙었지요.

 

그러나 그 분과 해여지고 홀로 지하철로 이동을 하면서

제 마음 속에선 뭔가 어지러워 지는데...

 

' 난 병역거부를 하면서 군대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보다는

폭력에 대한 저항을 담은 실천이자 성찰

그리고 내 스스로의 자유로운 전진을 위한 것인데...'

 

'왜 대다수 나를 아는 이들은 내가 병역거부를

실천하는 건 군대이라는 내삶에서 걸림돌을 없애려고

저지른 건 아니냐는 말을 하는 것 같다.'

 

하여튼 이딴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앞서 도다른 분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하여서

다른 이의 말에 신경쓰지 않았던 제가

이런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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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05년 8월 2일... ① - 검찰청에서...

전 포승줄과 수갑을 동행(?)하고 유치장에서 나와 검찰청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나 머리 속을 뒤져보니 어자피 힘든 나날이 이어지는데 이왕이면 편하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볼까 고심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말해 검찰에서의 조사도 중요하지만, 이런 건 저의 진정성이 '법원'에서 인정을 하는 것이 우선(1년6월을 선고 당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어요. 단지 구치소에서 일하면서 살다 출소를 하는 것을 원하였기에 집단에서 살기가 싫은 개인주의자인 전 독방 신청을 해서 편히 있고 싶었죠.

 

그러하기에 이 조사에서는 앞선 경찰조사처럼 하면 될 듯 싶었죠. 그러면서 수원지검에 도착은 되었고 전 그 분들과 동행하며 유치장과 비슷한 구치감이란 공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전 밧줄과 쇠팔찌와 해어지고 어느 한 방에 들어가는데, 여기서 있다보니 저로선 불만이 생겼습니다. 바로 저로선 형식적인 절차인 검찰조사를 받으려고 아침 일찍(8~9시)부터 오후 늦게(17~18시)까지 TV나 책 같은 볼거리이나 담요같이 잠잘꺼리 없이 맨 종일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좁은 공간에서 왔다 가거나 돌면서 보내고 아니면 바닥에 누워 자기도 하였지만 정말 저로선 지루한 나날이었죠. 물론 잠시 머물다 나가는 구금시설이지만 너무하다고 생각이 드더라고요.

 

그리고 재미있는 것을 보았어요. 바로 벌금이 잇다는 걸 알 듯 모르듯하게 지내다 불심검문(당연히 거부할 권리가 있는...)으로 구금을 당하는 이들이 있는 방을 보았는데 서로들 휴대폰을 들고서 빨리 벌금 입금하라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물론 글로서 이 광경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징역살이를 해야만 하는 저로선 벌금만 내면 자유가 되는 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노동자이나 빈민처럼 벌이도 시원치 않은데 갑자기 몇백이나 몇천만원이나 내라고 한다면 좀 처참하다고 느낄 것 같더라고요.

 

그러한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다 드디어 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게 되었고, 별 반갑지 않는 포승줄과 수갑과 재회하며 별 긴장감 없이 당당하게 검사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검찰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뭐 경찰조사와 비슷해서 별다른 건 없었지만 역시나 조서 작성 후 본인확인을 하는데 제가 지문날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조사하는 이(계장이라고 하죠.)가 따로 이와 관련하여 진술서를 쓰라고 하였고 뭐 대수롭지 않게 그 것에 응했지요.

 

그리고 담당 검사가 여성분이었는데 저의 이 당당하게 병역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며 굳이 형사처벌을 감행하는 것에 대하여 좀 안쓰럽다는 걸 느끼는 듯한 말을 한 걸로 듣었기도 하였지요. 그래도 예전처럼 윽박지른 건 전혀 없었고 인권보호를 위한다는 걸 이유로 뭔가 확인하는 서류에 서명하라고 하는 걸 하기도 하였죠.

 

그러나 그 때 나의 실수가 있었는데 바로 당연히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심신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조사에 임해야 하건만, 포승줄과 수갑을 채운 채 진술을 하였다는 것이 가장 아쉬움이 드네요. 또한 검사가 그 걸 풀으라고 지시를 하지도 않았고요.

 

물론 도주의 우려가 있을까라는 염려 때문인지 몰라도 저로선 어차피 18개월 징역살이를 하겠다고 작정한 건데 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한 건 좀 그렇더라고요.

 

그리면서 1시간동안 한 편의 희극다운 비극을 끝내고 다시 구치감에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를 포함한 상당수 - 벌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까지 - 는 수원구치소로 향하는 줄줄이 행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가면서 가끔씩 보았던 아파트형 구금시설인 수원구치소에 도착하는데 밖에 보기에는 뭐 담장이 낮아서 어떻게 탈출(?) 방지를 하는지 궁금하였던 저에게 답이 보이더라고요.

 

바로 구치소 입구가 지나가더니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우리들은 거기 안에 들어가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ㅁ자형 건물이어서 속엔 비어있는 건데 밖에서 보기엔 뭔가 괜찮다는 걸 느꼈는데 안에 들어서니 벽이 잔금이나 베이지색이라선지 몰라도 좀 더럽다는 걸 보았어요. (물론 이 구치소에 대한 걸 더 말하고는 싶지만 다음에 기약하면서...)
 
그래서 우린 차량으로 내려섰고 교도관의 지시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느 공간에 모이더니 신원확인을 하고 각자가 소지하는 물품을 영치를 당하면서 그에 대한 본인의 확인으로서 지문날인(여기선 무인[拇印]이나 손도장이라고 함)을 요구하게 되면서 저에게 상당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 이러한 요구에 경찰조사이나 검찰조사에서 당연하듯 지문날인을 거부한 만큼, 당연한 듯 거부하였고 그 후 이러한 행위가 저에게 엄청난 풍파가 밀려나오게 됩니다.

 

또한 '감옥인권 개선'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어 이러한 불합리에 맞설 각오는 있었지만, 이런 작은 행동으로 인하여 저에게 크나 큰 시련과 탄압이 올 것이라는 걸 미 알지는 못하였고 결국 그러한 걸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재소자의 본인확인을 위해 지문날인을 강제하는 관련 제도가 제 앞에서 가로 막히게 되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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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뭘 먹고 살아 남아야 하지?

요즘 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오늘은 제가 사는 곳에서 약 두시간을 걸어서 어느 대학에서 타이핑을 칩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다 보니 주변에 공단 비슷한 지역을 거쳐가야 하는데

참 처량하다는 걸 느끼네요.

 

왜냐고요. 전 실업자 아니 이 사회에서 소외단하는 계급 중에 하나인

'전과자' - 병역법 88조 위반으로... - 이거든요.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번듯하다는 일자리를 원하지만

뭐~ 제가 고를 수 있는 건 소위 '비정규직' 뿐...

 

그래도 제가 사는 곳은 다행히 전자 계통쪽으로 있긴 하지만 저로선

선뜻 마음에는 안드네요...

 

그렇더라도 제가 원하는 걸 집으려고 해도 역시나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 이나 ' 병역을 필한 자' 또는

나이나 학력 제한을 있는 글귀를 보면 아~

답답하네요.

 

물론 알바로 돌아설 수는 있지만 이 사람사이의 감정노동에

견뎌낼 자신이 없어 고를 수 있는 것이 얼마 없고

그 중에서도 골라도 역시나 마음엔 안들고...

 

또한 운동을 하여도 이제 제 갈 길을 찾아야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물론 누구에게는 이런 어라광(?)이 우습거나 분노를 자하게 할 것이예요.

뭐~ 맞는 말이지요.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내. 내. 맞는 말이지요.

그럼에도 제가 오랫동안 하고 싶고 벌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어찌하겠어요.

 

결국 빠른 시일 안에 다 얻으면 장땡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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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폭풍이 지난 뒤에... - 구속당한 후부터 검찰청을 향하여

 구속을 당하면서 전 수원중부서 유치장 3번방(맞나?)에 있었습니다. 그때 맘 같아선 하기가 싫었던 기자회견까지 하며 불구속을 해서 남은 사간을 어떻게든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제 갇혀지게 되어서 허탈했지요.

 

 그리면서 제 손에 아무 것도 없이 매일 쉼 없이 형광등이 밝혀진 부채꼴 시설에서 있게 되었지요. 뭐~ 다른 이들에게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빨리 탈출을 하려고 하겠지만, 저로선 어차피 수감을 각오하는 마음이라서 빠른 시일에 구치소로 넘어가기를 바랬지요. 그럼에도 구속영장이 금요일에 발부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주말을 유치장에서 보내게 되었지요.

 

 



 음... 먼저 유치장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할께요. 일단 수원중부서가 비교적 최근에 지은 시설이어서 그다지 불쾌한 건 아니지만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였는지 - 특히 화장실! - 꽤째째함이 보였고, 그 당시가 여름 한 철이었음에도 에어컨이 항시 틀어져 있어서 쾌적함이 있었지만 한번 역시나 청소 안한 듯한 필터는... ( 물론 격무에 시달리는 경찰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자기들 건강까지라도 위해서라면 좀 청소하시죠.)

 

 그리고 역시나 양(?)이나 질에서 불만이 많은 급식과 나이가 적다고 하대하는 경찰관 태도는 문제가 많았지요. 그래도 제가 존대말을 하라고 하여서 뭐라고는 하지 않지만... '편안하게 대하려고 그랬다.'는 어떤 경찰관의 말에서 좀 씁쓸함이 들었어요. 그 후에도 모 교도소로 살면서 느낀 것처럼 말이지요.

 

 앞서 제가 구속전 까지 부모님에게 이러한 짓거리를 할꺼라는 걸 말하지는 않았다고 하였죠. 역시나 어머니에게로 연락이 갔었고 이후에 면회를 하려 왔었습니다.

 

 아~ 아크릴판과 철창살 사이로 어머니를 보니 참 할말이 없더라고요. 시살 농담이 셖어 있는 표현이지만 '난 두 번 쓰러졌으니 한 번 쓰러지게 하면 다신 못 일어난다'고 이따금 말한지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믿지 않는 저으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20여년간의 저의 삶에서 묵묵히 이끌어오신 분 중에 하나이어서 여려가지로 미안함이 많기에 차마 마주보기가... 그랬어요.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는 살아있는 아니 울다 지친 상태에서 저 보려 왔었는데 그 때 저의 해명을 전달되었지만 그 당시 기억이지만 '니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의 답을 듣었지요. 제가 고집이 세기도 하여서 그당시에는 포기를 한 듯 싶었는데 이후에 '그 종교 좀 포기하라'라는 말을 듣었지요.

 

 왜냐하면 어디선가 듣으신 것 같지만 아직까지엔 '병역거부자 = 여호와의 증인'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사회에 있다보니, 예전에 교회에 광적(?)으로 다니는 걸 보아선지 몰라도 하번엔 이런 말을 하시는 걸 득었지만 그 때에는 제가 기결수이어서 '엎지러진 물' 이라는 것이지요.

 

 그래도 의외로 잘 계시는 걸 보니 다행이었지만, 지금도 이런 저의 흔적 때문에 미안해집니다.

 

 또한 제가 유치장에서 있으면서 한가지 일꺼리를 해치우게 되었어요. 바로 '내가 왜 병역거부를 하는가' 라는 것이었어요.

 

 이 글을 보시면서 혹시 '무슨 소리이냐?' 아니면 '병역거부를 하면 자기의 양심(신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어 보시겠지요. 내~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말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사실 병역거부를 2년여 준비를 하면서 정작 '왜?'라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으로선 형사처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고, 이에 각오할 자신은 있었지요.(솔직히 그 때에도 각오의 정도는 좀 작았죠.)

 

 그럼에도 구속 전까지 아무리 고심을 겨처도 '왜?'라는 화두에 답하지 못하였던 내가 딱 유치장에 있다보니 그동안 뒤죽박죽하던 제 머리 속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이냐고요?

 

 일단 일반인에게는 '유치장'이라는 공간이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되는 곳이다고 봅니다. 그래서 구속이 될까라는 조바심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하지요. 그런데 저 같이 구금을 각오하고 쇠팔찌를 채워 당하니 아~ 제 맘이 싹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더구더나 구속을 하면서 읽을 꺼리나 금품이라도 준비를 해야 했었는데 미처 가져오지 못하다보니, 먹고 자고 잠시 면회하고 TV를 보는 이외에는 생각을 할 시간이 많게 되었고 결국 '왜?'라는 물음에 어느 정도 답을 할 수가 있게 되었어요.

 

 무엇이냐고 하면 졸렬하지만 ' 평화에 대한 실천을 고민하고 국가에 대한 명령에 불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러한 물음을 하실 것이예요. 당신 평화주의자이냐고... 그러면 전 단언하게 아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솔직히 '평화주의' 라는 철학이 저에게 맞지 않는 것이 있고 아직까지 부담감이 들기도 해요.

 

 그럼에도 전 그 누구나 어떠한 시류에 휩쓸지 않는 자유로운 하나의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싶었고, '병역의 의무'라는 것이 국가가 개인에 대한 강제명령이기에 최소한의 선택권으로서 요구하는 의미에서 결정을 하였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행동이 폭력에 저항하는 하나의 평화로운 실천이기에 최소한 - 아니 큰 - 원칙 즉, 어떠한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물질적이나 구조적으로 폭력을 가하지는 않겠다는 건 분명히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 만큼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지요.

 

 또한 잡스럽지만 수면을 취하기 전에 인원점검을 하는데 번호를 잘 못 부른다고 '군대 안갔으니...'등의 어떤 의경의 말이 좀 그랬고, 컴퓨터에 부착한 스피커에서 '비'의 노래가 계속 맴돌게 들려주니 짜증이 난다는 또 다른 분의 말이 기억이 나네요.

 

 여하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고 주말을 지나 드디어 8월 2일. 제가 그토록 원하던(?) 입소(?)를 하는 - 구치소로 가는 - 의미으로 포승줄이 둘려지고 수갑은 제 손목에 차여진 채 검찰청으로 가는 차에 몸을 맏기게 되면서 유치장과는 안녕을 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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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 없는 혼돈을 지나가며 -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당할 때까지.

2005년 7월 28일.

 

앞서 저는 수 차례 연기 끝에 경찰조사를 받았고 저는 영장실질심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잠시 다산인권센터(이하, 다산)에 들리다가 결정의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고요.

 

바로 영장실질심사가 오늘이었고, 그 전날 저와 다산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준비하였고, 저 개인적으로는 기자회견 때 말할 글을 쓰면서, 부모님에게 전할 글을 쓰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시간을 보내었고 그 때 새벽 1시 반까지 자리에 앉아 타이핑을 계속 하고 있었지요.

 

그 때 저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불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지만 솔직히 제 안면을 사회에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 몹내 싫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차츰 준비를 하고 있었고,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병무청에 이와 관한 통보를 하며 주위 사람들에 이러한 의사를 보여져 있어선지 그다지 두려운 것도 없었고 오히려 당당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부모님에게 이러한 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려줄 자신이 없다는 것이 저로선 큰 장벽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자심으로선 괴롭지만 어자피 이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주위의 의견에 있었고 저로선 동의를 하였지만, 이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를 한다는 것이 범법을 하는 것이어서 차마 이러한 범법을 한다는 사실을 '가족'이라는 저의 기초 집단에게 보여질 자신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이러한 까닭과 함께 이 소극적인 성격 탓으로 언론노출을 하지 않았고 선언할 때 조용히 만찬을 하는 선에서 머물었는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이 절 관심을 보여주지 않다는 다른 부작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병역거부 자체의 셩격상 대중성이 전혀 없는 각 개인의 시민불복종으로서의 운동이고 한국 사회에서 민감한 '병역'에 대한 사안을 건들었기에 이러한 무관심은 예상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제 개인으로서 분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건 바로 모 단체에 있는 사람들의 냉소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산에 있기 전에 그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굳은 일을 맡았기에 생각의 차이를 있을지언정 구속을 당하는 것만큼 적어도 그에 대한 인간적인 보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듣으니까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 그러한 무심함에서 벗어나면서, 어자피 알려질 것 대범하게 알리자는 의미에서 몇몇 이들이 제안을 하였던 기자회견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고, 주제를 앞서 말했듯이 불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걸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무죄'가 아닌 '불구속'를 요구하는 것인가 라고 물어 보실 것입니다. 저도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당연히 무죄이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문제는 형사소송법상에서 구속의 사유가 엄연히 있음에도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수사과정에 순순히 응하였는데도 무조건 구속을 강제하는 사실이어서 저로선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제기를 해야 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말에는 재판기간 동안에 구금하면 재판부에서 실형을 줄 때 그 일수를 더하기에 절대 불이익이 아니다고 하지만, 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구속을 요구하였습니다.

 

먼저 부모님(가족)과의 소원한 관계를 풀어야 하고, 재판에서 혼자서 재판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고 있어서 원활한 재판준비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경찰조사에서 순순히 응하였다는 것과 제 집과 법원과의 거리의 근접성 등을 내밀면서 도주의 우려가 없으니 불구속으로 수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잠시간의 수면을 한 후 집에 나섰고, 기적을 바라면서 다산으로 갔었고 28일 오전 10시 반. 주적주적 내리는 비가 내리면서 수원지법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느낌을 말로써 할 수 있지만, 저로서는 참 말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새련되게 보여져야 하건만 옷차림은 남루하지 언변은 이리저리 못하는지... 휴 그 땐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 후 사회에서의 마지막 음식을 삼겹살로서 섭취한 후 다시 다산으로 돌아가서 그 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나의 담당 형사이지요. 잠시후 저의 사건담당 형사님은 오늘도 한 건(?)을 해치우려 절 찾으시고 저는 그 분 따라 영장실질심사에 맞서기 위해 수원지법으로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장실질심사를 하게 되었는데, 저로선 다행히 법무법인 다산 소속 변호사가 절 변호해주어서 작은(?) 도움을 얻으며 저의 행동이 비록 형사처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건 이해할 수 있고 감수하지만, 적어도 앞서 말하는 것들이 있어 불구속을 해줄 것을 -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할 것을 -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판사는 저에게 '다산'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 또는 임금이 얼마냐는 등의 단지 '안정된 직업'인가에 대한 검증만을 하여서 기분이 언짢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정식재판이 아닌 약식이라 짥게 끝나고, 담당 형사는 절 대리면서 법원까지 같이 있어준 몇몇 분들과 헤여지고 드디어 수원중부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장 기각' 이라는 기적을 기다리며...

 

그 후 경찰서에 들어섰고 그 형사는 날 조사실에 두다가 유치장으로 들어 보내었고, 이 의미심장한 말로서 저의 운명이 정해 졌습니다. '5시까지 대려오지 않으면 구속한 걸로 알아라'라고...

 

내. 예상대로 구속이 되어진 것이지요. 물론 그 때 당시에는 쭈그리며 앉으면서 그 분(?)이 오시길 빌고 빌었건만 구속을 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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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살이 428일의 여정'에 대한 소개

먼저 안녕히 살아 계시는지 알고 싶네요.

 

저야 지금 가끔 다산에 들리는 것 이외에는 집안일을 하며, 남은 시간을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 잘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긴장되는 삶을 지내다 보니 은근히 피곤해지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징역때를 벗겨내고 있답니다.

 

또한 최근에는 저와 유사한 까닭으로 수감을 당한 병역거부자들을 면회를 하기도 하였는데, 제 눈으로는 겉으론 편안한 모습이건만 사방에서 일려오는 스트레스에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표시인 듯 싶습니다.

 

전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고 있지만,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봐야 하니까 참 답답함이 듭니다. 물론 수감하면서 상상했던 것들도 있지만, 역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놓여져 있으니까 참 공허해 지네요. 물론 이후의 고민 -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가' 와 '돈을 어덯게 벌어야 하는가' 등 - 에 대해서 차츰차츰 성찰해 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고민들을 하면서 참 중요한 일을 놓쳤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바로 제가 구금을 당했던 시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과제를 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고 제가 외부에 보내었던 편지들을 모으거나 교도소에서 적어 놓았던 글로서 정리를 할 수 있지만, 제가 보아도 단순한 암시나 요구만 적혀 있는 편지만으로는 좀 모자르다는 걸 느꼈고 글을 남기는 것도 아직도 남아있는 '집필 사전허가제'라는 악법으로 일기라도 쓰지 못했습니다.(안 했다고 하는 것이 가까운 듯...)

 

그래서 이 참에 기록을 하지 못하면, 점차 왕성해지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힘을 당할 수가 있어서 비록 오는 이가 없는 카페에 '회고'하는 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수정을 해야 한다면 이후이라도 꼭 시정을 하겠습니다. 또한 제 시간의 여건상 집필이 늦을 수 있을 것이지만 보다 완성도를 높기 위한 노력이다고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미약하지만 저의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니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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