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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 문국진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아낀다는 실천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노동, 사회적 실천을 전개하다보면 항상 시간에 쫒기고 해야 할 업무에 쫒기고 여러 가지 바쁜 일들에 쫒기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기만을 위한 일’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부족한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나만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 5일 근무제도의 확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신을 아끼지 못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타인을 자기 몸과 같이 아낄 수 있으랴?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1. 생명 이어가기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을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에 말하기를 “천하를 얻고도 자기 건강을 잃으면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말하며 자기 건강의 유지가 극히 중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욱 더 중요하다는 평범하면서도 결정적인 진리를 드러낸 말이다. 싯다르타 역시 인간의 삶을 고해(苦海)라고 표현하면서, 네 가지 고통, 즉 생(生), 로(老), 병(病), 사(死)를 말하였다.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새 생명이 형성된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인간은 “세계 내에 던져진(被投的) 존재자”이다. 나고 자라는 과정 자체가 이미 괴로운 삶의 과정이다. 우주에 새 생명으로 던져진 그 순간부터 “생존을 위한 투쟁”이 불가피하다. 개인은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환경이나 타 생물과의 교류 없이 단독자로서 살아갈 수 없다. 생 자체가 이미 공동체적인 삶이며, 그 삶의 과정에서 개인은 온갖 불협화음과 부조화, 갈등을 겪으며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 자신의 본질은 (칼 맑스가 설파한 대로) 사회성이며, “관계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결론은 인간 존재 자신의 주체성을 스스로 정립하는 문제이다.
 
 2. 주체를 정립해나가자
 
 주체란 스스로를 자신의 삶과 활동의 주인으로서 굳건히 서는 것이다. 노예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는 타인에게 얽매여서 산다. 따라서 해방된 노예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삶과 활동의 ‘주체’가 된 사람이다. 임금노예로만 살던 노동자가 노동운동을 통해 스스로 ‘변혁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런데 주체로서의 자기 정립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이고 흐름이며 끝없는 연속적 운동이다. 현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부단한 변화를 겪게 된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그에 적응하고 맞추어 살기 위해서는 주체 스스로가 이미 변화를 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주체 정립은 하나의 과정이다. 또한 삶의 과정은 이미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기계적인 대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고식적인 활동이 아니라 부드러운 활동이다. 주체의 자기 정립과정은 하나의 유연한 흐름이 되어야 한다. 또 주체로서의 자기 연마는 삶이 끝마칠 때까지 연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처럼 주체의 자기 정립은 어떤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고 흐름이며 끝없는 연속적 과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3. 죽음의 문제, 실존적 각성
 
 우리의 인생은 하나뿐인 인생이다. 지구도 하나뿐인 지구라 하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뿐인 인생,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주어진 인생을 소중히, 그리고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떤 대상의 그 반대를 생각하면 본래의 것의 귀중함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에 우리는 삶의 귀중함을 더욱 값있게 여길 수 있게 된다. 필자는 부친의 임종을 바라보면서 정말 “살아계실 때에 잘 해드릴 것을” 하고 뉘우치고 후회한 적이 있다. 죽음은 당사자의 생명의 종언일 뿐 아니라, 주변과의 영원한 이별인 것이기 때문에, 그 영원한 이별을 겪기 전에 한시적인 우리의 만남과 교제를 더욱 값어치 있도록 가꾸어가야 할 것이다.
 사형제도의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 역시 인간의 생명 존엄성에 대한 가치부여에서 비롯되는 주장이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했는데 어찌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그것을 합법화하는 것 자체가 몰인간적이라고 생각된다.
 
 실존주의 철학사조에서 죽음의 문제가 많이 거론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죽음에 대해 철저히 숙고할수록 우리의 “실존, 즉 살아 있음”에 대해 철저히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의 문제를 중시해 왔을 것이다.
 실존적 각성, 즉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응시하고, 살아 있음을 진정으로 깨달으며, 사는 것이 어떠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비단 실존주의 철학자들만이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도 실존적 각성을 철저히 가지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매 순간들을 철저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자기 존재의 소중함과 실존적 각성에 충실함으로써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잘 아껴 써야 할 것이다.
 
 4. 자신을 아껴야--심신의 단련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자신을 아끼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세상 만물 중 그 무엇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바로 타인에게 비추인 나 자신의 모습 속에서 찾아야한다. “타인은 곧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나 자신이란 곧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비추인 나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위의 말은 곧 나 자신이란,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실천 속에서 비추어진 나 자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사회도 변화해가고, 타인과의 관계들도 변화해가고, 그에 따라 나 자신의 사회적-관계적 의미도 역시 변화해가기 때문에, “나 자신”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이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항상 “자기 성찰”에 노력한다면 현재 나 자신의 위치와 존재의 의미와 나의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의 근본 토대가 되는 것은 곧 자기애, 즉 나르시스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그 때문에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을 아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아낀다는 실천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노동, 사회적 실천을 전개하다보면 항상 시간에 쫒기고 해야 할 업무에 쫒기고 여러 가지 바쁜 일들에 쫒기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기만을 위한 일’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부족한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나만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 5일 근무제도의 확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신을 아끼지 못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타인을 자기 몸과 같이 아낄 수 있으랴?
 
 5. 다음으로 타인도 소중하게 여겨야
 
 나라는 존재의 소중함 못지않게 나의 이웃, 그리고 타인의 존재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덕훈은 시대를 초월하여 깊이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 때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현대는 개인주의, 그리고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시대이다. 남을 짓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더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사회일수록 우리는 더욱 타자에의 연민과 타자에의 배려가 더 가치 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개인주의 대신에 공동체주의를 추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더 나은 세상’은 ‘타인과 공동체의 다른 성원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사회적 실천’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삼라만상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존재자는 저마다 특별한 존재 이유를 가지고, 나서 자라고 관계 맺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중에서도 어떤 질서가 있어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자가 있을 것이다. “단독자” 혹은 유일자로서 자기 자신, 즉 “자아”가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는 자아의 절대적 존재성”에 이르른 데까르뜨의 통찰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자아 존재의 절대적 유의미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도달한 자아 주체는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세상을 부여안고 세상의 온갖 존재들, 이웃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적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함께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고 사회의 더 나은 발전을 향해 함께 손잡고 개척해가야 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개인 주체 자아는 더욱 강화되고 더욱 의미 있는 삶의 주체로 발전해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070319 http://marxsarang.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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