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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8/05/15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15
    <사랑맘>사랑받고 싶어서
    백운댁
  2. 2008/05/15
    <사랑맘>아이야, 넌 어디 있니?
    백운댁

<사랑맘>사랑받고 싶어서

 

내 안에 숨어있는 아이를 나는 아직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사진 몇 컷이 떠오르긴 하지만 지금의 내 내적불행의 근원이

어디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미술치료를 공부하면서 내 마음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영성수련이라는 계기도 있었다.

너무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와서 일까, 아니면 그게 습관이 되어 내몸에

일부가 되어 굳어버린걸까. 어쩌면 나는 내 안의 아이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제 76일된 둘째 딸 해랑이는 내 팔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은 신의 축복이라도 내린 듯하다.)

첫째 딸 사랑. 

오늘은 몇 가지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첫째, 세 내어준 집이 다시 이사가게 되어 부동산에 몇일전에 연락했는데 이사 시기를

잘못 알고 있었다. 전화안해봤으면 한달정도 지연될 뻔 했다.

둘째, 오전에 사랑이랑 자전거 타러 나갔다 들어오다가 집 앞에서 차에 치일뻔하고 엄청난

크기의 경적소리에 너무 놀랐다. 집 앞이 버스 종점이라서 그렇다.

세째, 점심을 지으려는데 물이 나오질 않는다. 1층에서 물을 쓰면 여긴 나오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 밥해먹으려면 물이 안나오고 애들 씻기고 있는데 물이 안나오고.. 정말 스트레스

받아서 못살겠다고 집주인 남자에게 말했다.

 

그 와중에 사랑이는 콧물이 흐르는데도 바지를 벗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물장난을 하고 흠뻑 젖었다.

해랑이는 잠시도 내 팔을 떠나지 않는데 줄창 울어대는 거다.

바지 입으라는 내 말이 톤이 높아지자 사랑이가 "아기 깨잖아 조용히 해"라고 소리를 꽥~~~ 지른다.

윽. 언젠가 내가 그렇게 사랑이에게 말했었나보다. 요 몇일 계속 저 말을 내게 해댄다.

나는 또 그게 참을 수가 없어서 아~~~~~악 소리를 질렀다.

작은방으로 가서 혼잣말하며 슬퍼하는 사랑이.

이때 나는 정말이지 죽고싶다. 

 

(시골로 가자! 아기들이랑 뛰어놀 시골로~, 그리고 급히 돈이 필요해져서 우리는 살던 집을 전세 내어줬다.

그리고 이 집으로 급히 이사를 왔다. 시골도 아닌것이 도시도 아닌것이 시골의 불편함과 도시(?)의 불편함이

공존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사람 살데가 아니었다.

벚꽃길(전군도로) 옆 이층집인 이곳은 게다가 조립식 건물이다.

대체 왜 이 집으로 이사올 생각을 했을까. 내 머리가 잠깐 돌았나보다.)

 

 속상해진 나는 전화올 곳도 전화걸 곳도 없어 신랑한테 전화를 했다. 이러저러해서 속상하다며

말하다가 울컥 잉잉 울어버렸다. 그걸 보고 있던 사랑이는 가위로 색연필을 자르다가 그만

손가락을 다쳤다. 검지 손이 움푹 패였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다 또 가슴을 친다.

 

사랑이는 그렇게 자기 몸을 다치게 해서 엄마가 우는 걸 보고싶지 않았던 것 같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끌려고 했던 것이다.

둘째를 낳고 나서 심한 우울증과 집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나는 사랑이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소리 지르고 손자국이 선명하게 엉덩이를 때리고..그러다 지치면 애 앞에서 펑펑 울고...

 

나의 내적 불행이 사랑이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그래서 내 아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대체 무엇이냐. 대체 내 안에 어떤 소녀가 있어, 어떤 아이가 있어 이렇게 날

두들겨 패고 흔들어놓는 것이냐.

 

거친 말과 무시, 비난, 조롱,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부모는 자기 아이에게 그

모습을 그대로 전해준단다. 폭력의 대물림이다.  그러면서 나는 부모에게 완벽한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당신들하고는 달리 살아갈 것이라는 무언의 경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족(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의존하게 되는.

그게 다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폭력적인 가정에서는 조건있는 사랑이 보여진단다.

나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나보다.

거부당할까봐 두려웠나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었나보다.

 

나는 사랑이에게서 거부당할까봐 두려운거다. 아이가 엄마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비난받을까봐 두려운거다.

 

꺽꺽 울다가 문득 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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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맘>아이야, 넌 어디 있니?

아기 우는 소리가 유난히 듣기 싫고, 아이가 울때마다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분명 우리가 아기였을 때 울면 윽박지르거나 야단쳤던 부모가 있다. 우리 부모는 내감정을 받아주지 않았고, 억제 시켰기에 내 어린시절의 아이는 상처를 받았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생명과 같기에 부모가 원하는데로 착한아이가 되기 위해 울음을 그쳤지만, 그상처는 의식의 저편너머 무의식의 어두운 곳 어딘가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았을 때 내아이는 이미 기억에서는 사라졌지만 상처받은 내안에 숨어있는 아이를 불러낸다.
나는 제한 받으며 자랐는데 내 아이는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범위를 넘어 사랑해달라고 요구하면 상처받은 내 마음속의 외로운 아기는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우는 것이 유난히 싫은 것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열심히 책을 읽어주면 옆에서 딴지를 거는 아빠들이 있다.
‘집안이 돼지우리 같다’, ‘반찬이 왜 이러냐’, ‘이제 그만 좀 해라’, 라는 말이 아빠의 입에서 나오면 혹시 내 남편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자는 아내를 자신을 낳고 길러준 엄마로 투사한다.
아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사랑해주면 엄마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던 남편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자기자식과 경쟁하게 되고 아내로부터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은 아이의 아빠이다. 내 아이를 그만 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는 할 수 없다. 직접적으로 할 수 없으니까 옆에서 딴지를 건다.

우리 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상처받은 외로운 아이가 있다. 조건에 따른 사랑은 언제나 상처를 남기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전까지는 무의식안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다면 아이를 키우면서 마찰이 일어나고 종종 분노를 느낀다면, 내안에 숨어있는 아이를 의식으로 끌어내어 달래주고 감정을 풀어주며, 사랑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선뜻 내안의 아이를 찾아 달래주려는 용기를 갖기는 어렵다. 상처받은 초라한 아이를 다시 대면해야하고, 그것으로 인해 착한아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생을 힘들게 살아왔고, 지금까지 내린 어떤 결정도 거짓에 기초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하고 새롭게 변화의 강물속으로 뛰어들기는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한 의지적인 행동이다.
내가 더 이상 내안에 숨어있는 아이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자식에게만은 이 어둠의 고통을 다시는 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결단이다.
내가 부모로서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 부모가 나에게 했던 것보다 더욱 강한 내적불행을 대물림하게 된다.

성장하기 위해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누군가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자기자식에게 질투하고 딴지를 거는 아빠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아이보다 먼저 남편을 무릎베개하고 책을 읽어주어 남편의 내면에 숨어있는 아이를 달래주면, 외로운 내면의 아이가 행복해지면서 남편은 새로운 힘을 얻고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
아이는 부모를 있는 그대로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 부모가 많이 배웠는지 경제적으로 부유한지에 따라 아이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나는 이 우주에서 유일하며 누구에게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도 않은 사랑받을 존재이며, 우리 모두는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다.

 

<출처:푸름이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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