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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보고 싶던 평화를 다 보았네.

사슴 한 마리, 목초지와 시냇물,

눈을 감으면,

사슴은 내 팔 안에 잠들고,

사냥꾼은 저 먼 곳,

자기 아이들 곁에 잠드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네> 부분

 

나는 푸른 하늘을 만든 모든 하늘빛 입자들을 사랑한다. 그 하늘빛 속에서 말(馬)들은 유영하고. 나는 우리 어머니의 작은 것들, 가령 어머니가 닭장에 가려고 아침 첫 현관문을 열 때 그분 옷에서 풍기던 커피의 향기를 사랑한다. 나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들판을 사랑하고, 우리 감옥 간수의 아이들을 사랑하며, 저 멀리 가판에 진열된 잡지도 사랑한다. 나는 우리에겐 없는 그 장소에 대해 스무편의 풍자적인 시를 썼다. 나의 자유란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작은 감옥을 더 늘려 내 노래를 실어 나르는 것이다. 문은 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서는 걸어 나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불행하기도 그곳은 낙원이었다>

 

바닷가에 한 소녀가 있고,

그 소녀에겐 가족이 있고,

그 가족에겐 집이 있고,

그 집엔 창문 두개와 현관문 하나.

바다에는 게임을 시작한 군함이 있고,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에게 조준하여,

넷, 다섯, 일곱, 모래 위에 투하하네.

소녀는 연기의 가호로 살아남네,

어떤 천상의 가호가 소려는 구하러 온 듯이.

소녀는 비명을 질렀네, 아빠, 아빠, 집으로 가요, 바다엔 안돼요.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이 없네.

그는 거기 부재의 고통 속에 누눠있네,

부재의 고통 속 그림자에 휩싸인 채.

소녀의 손바닥엔 피가, 하늘의 구름에도 피가,

소녀의 비명은 저 멀리, 저 높이 바닷가로 날아가네.

소녀는 막막한 밤에도 비명을 지르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고,

폭격기가 돌아와 두개의 창문과 현관문 하나짜리 집을 부수어

소녀는 쓸모없어진 이 흉보를 전해줄 영원한 비명이 되었네.

 

-<소녀/비명>

 

또다른 날은 올 것이다, 여성적인 날이,

메타포는 투명하고 존재는 꽉 찬.

다이아몬드와 눈부시게 흐르는 성가 행렬,

가벼운 그림자와 더불어.

아무도 느끼지 못하리라, 자살이나 작별의 욕망을.

.............

또다른 날은 올 것이다, 여성적인 날이,

율동 속에 노래하듯, 인사와 악보 속에 푸르게 빛나듯.

과거 밖에서는 모든 게 여성적이 되리니.

바위의 가슴에서 물이 플러내리리.

먼지도, 가뭄도, 패배도 없이.

 

-<또다른 날은 올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이어줄 공동체의 끈은 바로 이런 시적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종결짓고 대지에 뿔리내리기 위해서는 군사력 증강보다 가족과 친구, 나무와 바람, 가축과 논밭은 같은 민중들의 일상의 평화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기억하려는 시적 저항이 우선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 견고한 서구 제국주의가 무너진다면 결국 이런 일상의 작은 평화에 대한 염원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

다르위시는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자유와 독립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서로 묶어줄 공통의 끈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떨어져나가면 누구나 쉽게 뿌리뽑히기 때문이다. 한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광풍 앞에서 서로를 단단히 묶어줄 끈은 바로 자기가 태어난 땅과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지키려는 저항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향수라 부르든, 애국심이라 부르든, 혹은 민족주의라 부르든 추상적인 명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처음부터 한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 나아가 집요하게 나누고, 가두고, 분열시키려는 힘에 온 몸을 다 바쳐 저항하는 것,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삶의 아름다움을 끝끝내 놓지 않으려는 것, 그것이 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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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시란 그렇군요.

처음으로 깨달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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