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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12
    커피숍(1)
    이유

커피숍

강남 교보, 1층 커피숍을 지나치다 그 멀리서도 안의 사람들이 쥐고 있는 커피잔이 눈에 띄어 냅다 들어갔다. 둥글고 뭉툭하고 큰 자기 잔. 장식없는 흰색. 이거면 내 속이 뒤집혀도 매일매일 커피를 마시겠다. 사실 난 커피를 좋아한다. 그러나 커피숍에서 돈 주고 사먹는 커피가 돈 하나도 안 아까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돈을 치르고 나올땐, 이 돈이면 차라리 뒀다 술 값에 보탤걸, 하는 생각이 꼭 뒷통수에 달라붙는다. 커피숍은, 뭐랄까, 하여튼 쓰잘데기 없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거기서 카프카의 <성>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것만한 대작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런데 커피숍 밖에서는 안을 기웃하게 된다, 왠지. 영화에서 보는 빠리의 까페들, 아, 저기 가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꼭 머리 속에 달라붙는다.

그러고 들어가, 전망좋은 테이블을 잡고 앉아 맛있는 커피를 내가 좋아하는 뭉툭하고 큰 흰 자기 잔에 마시며 지나가는 빠리지엔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땐 돈 생각이 안들까.

 

강남 교보 1층 커피숍에서 난 <성>도 아니고, 고등학교 불어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언젠간 들를 빠리의 까페를 위한 준비였다면 차라리 나았지, 과외 준비였다. 이 지긋지긋 이갈리는 과외를 아직까지 하고 있으니, 인생 정말 별거 아닌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하루빨리 소망과 허영을 구분하고, 담담한 소망만 가뿐하게 살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비록 교과서 따위를 읽고 있지만, 커피는 맛있고, 오랜만에 뭉툭하고 큰 흰 자기 잔을 손 안에 넣고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고 있고, 더구나 외부를 향한 통유리창으로 주룩주룩 빗줄기와 젖은 땅이 보였다. 흠, 커피숍이란 이런 사치를 위한 것이군. 그 순간, 딱, 렛잇비가 나왔다.

 

아, 이것은 누구의 선물인가. 과외15년 인생을 어여삐 여긴 과외요정인가, 커피숍을 비로소 흡족하게 바라봄을 기특하게 여긴 커피숍요정인가. 렛잇비가 슬그머니 나오는 순간(그 피아노 소리),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렛잇비는 그렇다.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렛잇비가 끝나고 예스터데이가 나왔다. 아, 이건 또 누구의 선물이란 말인가. 렛잇비와 예스터데이를 하나의 씨디에 묶어놓지 않았다고, 장삿속 밝은 비틀즈라 평했던, 1999년 영국문화원에서 열렸던 비틀즈 박람회 어느 하루 만났던 아줌마 아저씨 무리들이 (그들은 씨디를 사려고 씨디더미 앞에 서서 이것저것을 고르고 있었다) 떠오른다. 그들의 선곡은 정말 완벽하구나. 렛잇비에 이어 예스터데이라니, 기어이 눈물을 빗줄기마냥 주룩주룩 터뜨리려고...

 

폴 매카트니 엄마가 그랬대나, 존 레논 이모가 그랬대나, 맨날 기타만 치고 있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떻게 먹고 살거냐고. 그 아줌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맨날 기타만 쳤던 사춘기가 수학문제 풀고 영어지문 읽었던 사춘기 보다 골백번 낫다. 인생은 정말 그런 것이다. 뭉툭하고 큰 흰 도자기 잔과 빗줄기와 렛잇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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