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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 영역의 재구성을 위한 카피레프트 운동의 함의 / 오영일

재생산 영역의 재구성을 위한 카피레프트 운동의 함의

오병일 - 진보네트워크 인터넷사업팀장

1. 자본에 의한 삶의 종속성

정보통신산업, 문화산업, 그리고 서비스 산업은 현실 자본주의를 주도해가는 핵심적인 산업부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초고속정보고속도로’로 상징되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사람들을 동원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언론으로 바뀌었을 뿐, 또 하나의 새마을 운동을 보는 듯 하다. 사람들이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의하기 전에, 먼저 우리네 삶의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자.
일정 기간동안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람들은 직장을 구한다.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일정 기간의 교육과정이라는 것도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갈수록 연장되고 있다. 기간 뿐만이 아니라, 교육에 필요한 비용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학원교육, 학습지, 참고서, 그리고 영어연수 등 가능한 한 몸값을 높여서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 진행되는 사교육은 유치원 이전부터 진행되어 이미 공교육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안심할 수 없다. 이제 능력위주의 사회가 아닌가? 끊임없이 자신의 몸값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여가시간 마저도 자신을 갈고 닦는데 바쳐져야 한다.
IMF로 많이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등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나는 삶의 수준은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향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소득수준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많아지고 있다. 모두가 생산영역에 투입되기 때문에, 아이를 기르는 일, 부모를 모시는 일, 밥을 먹는 일, 빨래를 하는 일 등 재생산 영역은 기계나 다른 곳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수입은 늘겠지만, 평균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따라서 늘어나게 된다. 재생산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또다시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어야 하는 이 악순환.
그렇다면, 우리의 여가시간은? 우리가 노는 방식, 즉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방식도 패턴화 되어있다. 우리는 극장에서, 노래방에서, 술집에서, 오락실에서 그리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여가를 보내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돈을 뿌리면서 보낸다. 이제 돈이 들지 않고 여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다. 또한 갈수록 자본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오락 상품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체득되고 있듯이, 정보, 문화, 서비스 산업은 이미 현실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기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산업은 전통적으로 생산 영역이 아니라 ‘재생산’ 영역으로, 즉, 내일의 노동을 위해서 휴식을 취하거나, 자신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위한 문화를 향유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기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던 영역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생산 영역은 과거에는 대부분 사람들의 직접적인 노동이나 관계 속에서 해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자본은 재생산 영역까지 자신이 담당하겠노라고 나서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좀 더 편리한 생활, 좀 더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겠다고. 미래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이러한 흐름은 우리들의 노동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쫙 깔린 고속도로가 마을에 편리함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생산 영역에서는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자본에 종속된다. 먹고살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생산 영역은 인간으로서의 우리들 삶을 영위하기 위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삶마저 자본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을까?
첫째, 우리의 삶의 방식이 자본이 설정한 테두리 안에 한정되고 종속된다. 예를 들어, 이제 노래방에서가 아니면 노래를 부르기 힘들다. TV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고, 그것에 집중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정보를 얻게 만들므로써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전세계의 영화시장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가치를 확산시킨다.
둘째, 삶의 다양한 영역의 자체적인 가치보다 ‘이윤 증식’이라는 자본의 가치가 우선하게 된다. 통신망에서 제공되는 정보들은 그것들이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 어떠한 가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무엇이 ‘돈’이 되는가(예를 들어, 연예 정보나 포르노물같은)가 기준이된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주 목적인 의료기관이 상품화되면, 돈이 되는 의료에 집중하게 되며, 평등한 서비스는 뒤쳐지게 된다. 창작행위는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향유하게끔하는 즐거움으로부터 돈을 벌기 위한 행위로 전락한다. (저작권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인격적 측면이 아니라, 재산적인 측면이 아닌가?)
세째,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상품-화폐 관계로 대체되면서 관계가 파편화된다. 예전에는 부모가 아이를 돌보았지만, 이제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본다. 생산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의 하인, 하녀가 되고, 재생산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을 하인, 하녀로 부리게 된다.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일상적인 행위였지만, 이제는 상품화시키기 위해서 정보를 감춘다.
네째, 기업권력에 시민사회가 종속된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MS)는 운영체제 시장을 독점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용할 때 MS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게된다. 그들이 새로운 버젼을 출시할 때마다, 호환성을 위해서라도 또다시 구입할 수 밖에 없다. (상업적인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그렇듯이) 운영체제 내부가 감춰져있음으로해서 운영체제 내부에서 자신들에게 저해가 되는 어떠한 작동이 이루어지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재생산 영역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꼭 상품-화폐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애초에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와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그렇다면 다시 그렇게 재구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지 과거적 관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 이룩해놓은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기반으로 새롭게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상상력과 창조성이 필요하며,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카페라는 사적으로 소유되고 다른 사람을 하인으로 부리는 공간이 아니라, 공적으로 소유되고, 사무실 내에서처럼 사람들이 알아서 자신의 음료를 처리하는 공간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글에서 COPYLEFT라는 한가지 사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실험을 위해서, 그리고 더 폭넓은 상상력과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2. 현실 정보사회의 모순

정보통신, 문화, 서비스 산업의 확장은 정보화의 진전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현 사회를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단어가 ‘정보사회’인 것처럼. 물론 현실 정보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임노동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보화의 진전은 자본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의 힘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기여하고 있다. 첫째, 초국적 금융자본과 자본의 세계화는 전세계적 정보통신 네트워크와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기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둘째,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생산효율성을 향상시켜, 사람들을 일자리로부터 내쫓고 있다. 물론 일시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하더라도, 급격한 기술변동은 그것을 매우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현실 정보사회의 핵심적인 상품은 ‘정보’이다. 여기서 정보는 소프트웨어, 음반이나 영화 등의 문화상품, 그리고 컨설팅 등 정보서비스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정보는 여타 물질적인 상품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처음 생산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한번 생산되면, 그 재생산 비용은 매우 적다. 특히 정보가 디지털화됨에 따라서, 재생산 비용은 거의 0에 수렴하게 된다. 또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되더라도 나에게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정보를 얘기해준다고, 내가 더이상 그것을 모르게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떤 파일을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더라도, 내 컴퓨터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정보는 사람들 사이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이었을 뿐,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는 희소하지 않으며, 경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경제의 기본 전제가 재화의 희소성이 아니던가?) 그러나, 자본은 정보를 상품화하는 방법을 개발해내었다. 바로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즉,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가로막는 것이다.

바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지적재산권’이다. 전술했듯,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 정보는 자연스럽게 유통이 되며,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되어도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다. 그래서, 지적재산권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한다. 즉, 정보 생산자에게 그 정보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부여하고, 다른 사람이 그 정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자에 대한 허락을 받도록 한 것이다.
지적재산권은 크게 산업재산권인 ‘특허’와 문화, 예술분야 생산물에 대한 ‘저작권’으로 나뉘어진다. 최근에는 새로운 기술발전을 수용하기 위한 신지적재산권이 등장하고 있다. 현실 정보사회의 형성과정은 제도적 측면에서 지적재산권을 강화하고 정교화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저작권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문화, 서비스의 산업화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한다. 지적재산권도 이념적으로는 생산자 개인의 권리(노력에 대한 보상)와 공공성(문화와 산업의 발전, 그리고 지식의 확산)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현실적 적용과정이 과연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지적재산권은 생산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산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물론 당연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적재산권이 과연 ‘정당한’ 보상을 담보할 수 있는가? 전술한대로, ‘정보’는 처음 생산하기 까지는 어느 정도 노력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한번 생산이되고 나면, 재생산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따라서, 각 복제본의 판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수입을 보장해준다면, 생산비용을 초과하여 무한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는 MS의 전세계적인 독점에서 실증되고 있다. 보상이 시장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역으로 경쟁에서 패배한 생산자의 경우에는 생산하는데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된다.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그 생산자의 노동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지적재산권은 시장에서 승리한 소수에게는 과도한 보상을 해주며, 패배한 다수에게는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만다.

더구나 현실 지적재산권법은 필자가 보기에 생산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쳐있다. 특허의 경우 기술의 발전속도가 급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년간 보장을 하고 있으며, 저작권의 경우 작가 사후 50년 동안 보장을 하도록 하고 있다. 지적재산권법이 이렇게 공공성의 보장보다는 생산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치우친 것은 현대 사회에서 지적재산권의 대부분을 기업, 특히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한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명가나 작가’라는 일반인의 통념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생산자, 지적재산권의 소유자는 기업이라는 ‘법인’에게 대부분 속해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실 생산자는 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다.
지적재산권은 현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생각해보라. 지적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정보, 문화, 서비스 산업에서 경쟁우위를 갖고 있는 미국이 현재의 경제력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3. 카피레프트 운동의 함의

현실 정보사회가 ‘사유화’에 기반한 정보화의 길을 걷고 있는 반면에, 그것에 대항하는 또다른 흐름도 있다. 바로, ‘GNU/Linux의 카피레프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정보공유‘의 흐름이다.

먼저 GNU/Linux와 카피레프트 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자. 최근에 리눅스(Linux)가 또 하나의 운영체제로서 각광을 받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리눅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리눅스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GNU/Linux 시스템이다. 리눅스는 GNU 시스템의 커널(Kernel) 부분에 해당한다. GNU 프로젝트는 유닉스와 비슷하면서도, 더 강력하고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운영체제를 개발하려는 것으로 1984년 MIT 인공지능연구소의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소프트웨어의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프로그래머들 사이의 정보공유와 협력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반대해서, 누구나 소스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개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자유소프트웨어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 FSF)을 만들어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GNU 프로젝트는 1990년대 초까지는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왜냐하면 독립된 운영체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커널이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1991년 리누스 토발즈에 의해서 리눅스가 개발되고, GNU 프로젝트와 결합됨으로써 해결되었으며, 비로소 독립적인 운영체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에 해커나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리눅스는 RedHat과 같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리눅스 배포판이 나오면서 급속하게 대중화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의 이념은 바로 ‘자유’이다. 즉, 어떠한 제한없이 사람들이 소스에 접근할 수 있고, 복제와 수정을 할 수 있으며, 다시 재배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즉 이것이 상업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리차드 스톨만은 독특한 저작권 개념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피레프트’(Copyleft)이다. 카피레프트는 저작권(Copyright License)과 GPL(General Public License)로 이루어진다. 즉, 저작권 설정을 먼저 하고, 누구나 복사 및 수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되, 원래의 프로그램 및 어떠한 변형본도 같은 원칙 속에서 배포되어야 한다는 전제속에서 배포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GNU/Linux 시스템은 통상의 상용 소프트웨어와 같이 특정 기업에 의해서 개발되고 배포되지 않는다.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개발이 이루어지며,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 협력한다. 그리고,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테스트되고 개선되어 왔다. 이제 어느 상용 운영체제와도 견줄 수 있는 막강한 성능과 안정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MS의 윈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GNU 프로젝트로부터, 그리고 Copyleft로부터 어떠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는가?

첫째, 생산수단의 사회화 방식으로서의 ‘정보공유’이다. 공유된 정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관리하는 ‘국유화’의 방식도 아니다. 정보는 그저 네트워크(물리적인 네트워크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포함한다)에 흘러다니며, 모두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고, 자신이 생산한 것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나눈다.
GNU 프로젝트의 경우 프로그램 소스의 공개였지만, 정보공유의 메카니즘은 다른 지적생산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학술, 문화 등 지적재산권이 적용되는 다른 영역에서도 정보공유운동을 벌여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영역마다 어느 정도 차별적인 규정(예를 들면, 카피레프트와 같은 규정)이 필요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지적생산물의 변형, 수정을 아주 쉽게 하고 있으며, 적은 노력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생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즉, 하나의 지적생산물이 더욱 풍부한 다른 지적생산물로 확대 재생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GNU 프로젝트에서 공유된 정보는 단지 프로그램 소스 뿐만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GNU/Linux 시스템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헌신적인 개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이용자 공동체의 역할도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갖가지 버그에 대해서 리포트를 해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메뉴얼을 만들기도 하고, 번역을 하기도 하며,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서로 돕는다. 사실 그들은 개발자이면서 이용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자발적인 참여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보상은 사실 참여 자체로부터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이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겠는가? ‘생산자에 대한 보상’ 이라는 문제는 기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된 상황, 소수의 전문적인 생산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GNU/Linux 시스템은 이미 ‘생산’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이자 유통이며, 소비이다. 혹은 그것은 차라리 ‘유희’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정보공유운동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생산자에 대한 보상 문제는 나타날 수 있다. 이미 이 사회가 전업적인 정보생산자를 확대재생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보 생산자에 대해서 적절한 사회적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들은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보가 생산되는 새로운 방식이다. 정보 공유와 정보가 생산되는 방식의 문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GNU/Linux 시스템은 회사같은 거대한 조직체 안에 체계적으로 배치된 노동자들에 의해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자발적인 개인들의 참여 속에서 생산이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에릭레이몬드의 ‘성당과 장터’라는 문서를 참고할 만하다.

“고요하고 신성한 성당의 건축방식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리눅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의견과 접근방법이 난무하는 매우 소란스러운 시장같았다.” (‘성당과 장터’ 중)

‘성당과 장터’는 프로그램의 서로 다른 개발 스타일에 대해서 논의한 문건이다. 성당은 기업에서 소수의 개발자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방식을 의미하며,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를 형성하며 개발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Open Source Software)의 개발방식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개발 스타일을 비교 분석하면서, 에릭 레이몬드는 장터의 방식이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 영역 외의 다른 영역에서도 풍부하게 실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떠한 지적생산물이 하나의 회사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모델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어느정도의 조정자는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 학술 데이타베이스의 경우 데이타베이스 전문 회사에 의해서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공동의 데이타베이스 공간에 각각의 논문 생산자들이 자기 논문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구축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현재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상업적인 회사에 의해서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의 개발 방향은 ‘이용자 공동체’를 형성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데, 회사는 초기에 이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료 E-mail, 무료 홈페이지, 유용한 정보, 경품 등 유인전략을 구사하지만, 장기적으로 이용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컨텐트를 이용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4. 소프트웨어 외의 영역에서의 실험

GNU 프로젝트는 어떤 탈자본주의적 이념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구체적인 운영 형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탈자본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인 시스템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실험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한 실험은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실험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다음 사이트에서는 소프트웨어 영역 외에서도 카피레프트 운동이 시작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http://www.gnu.org/philosophy/nonsoftware-copyleft.html
Ram Samudrala라는 사람은 Free Music Philosophy (FMP)라는 글을 쓰고 카피레프트의 적용을 받는 음악을 창작하고 있다. 이미 저작권이 소멸한 책들을 전자화하여 인터넷을 통해서 일반에게 제공하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 Project)도 카피레프트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지향을 가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운영원칙으로 카피레프트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상용통신망의 경우, 서비스 회사에서 정보제공자에게 돈을 지불하든가, 혹은 이용자가 사용한 시간만큼 비용을 지불하도록 정보를 유료화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는 PC 통신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 서비스되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 카피레프트를 적용하고 있다. 즉, 진보네트워크에 제공되는 정보들은 각각의 정보생산자들이 아무런 댓가없이 제공을 하는 것이며, 이용자들은 이렇게 제공된 정보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정보생산자들은 주로 사회단체이거나 개인 이용자들이다. 결국 이용자들이 스스로 정보를 제공하고, 또 이용하는 것이다. 몇가지 실험적인 것을 들자면, 먼저 여성뉴스를 얘기할 수 있다. 여성 뉴스 게시판에 매일매일의 여성운동 관련 뉴스들을 퍼와서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는데, 몇명의 이용자들이 요일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또, 인터넷 홈페이지의 사회운동 뉴스같은 경우, 각 단체의 발간물을 제공하고 있는데, 진보네트워크는 공동의 데이타베이스 시스템을 제공하며, 각 단체는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여 여러 단체가 함께 공동의 사회운동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실험이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하기 이르다. 아직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상업적인 정보제공자가 있는 다른 상용망에 대해서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고, 여러 이용자들의 정보제공을 체계적이며, 계속적으로 운영한다는 것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운동의 형태를 띈 것도 아니고, 카피레프트를 표방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정보공유의 생생한 현장은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에는 개인들이 혹은 소모임, 단체 등이 제공한 무수한 정보가 있으며, 상당부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갈수록 인터넷이 상업화의 길로 가고 있지만, 주로 전자상거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회사들도 정보 자체를 섣불리 상품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미 무료로 제공되는 정보들이 인터넷 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의 초기 구축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정보공유의 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론

정보의 사유화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적 정보화는 정보의 생산을 위해서 ‘개인에 대한 금전적 보상과 경쟁유발’을 기본 방식으로 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정보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지적재산권 제도는 개개인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담보하지도 못할 뿐더러, 자신이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벌더라도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정보를 사기위해 그만큼의 비용을 지출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정보공유운동은 정보의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에서 탈피시킨다. 그것은 자본에 종속된 재생산 영역을 인간간의 직접적인 관계로 다시 재구성한다. 그것은 ‘소통’과 ‘유희’의 과정이다. 정보공유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강제받지 않고 자유로우며,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정보공유의 주체는 단지 전문적인 정보생산자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알고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다. 아주 전문적인 학술논문만이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며, 비전문적인 당신의 간략한 영화평도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가치있는 정보가 될 수 있다.

정보공유운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함의는 자본에 종속된 우리들의 삶을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재조직활 할 수 있으며, 서로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삶의 풍요로움은 보다 편리한 서비스와 보다 많은 정보생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소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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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Hand In Mine / Explosions In The Sky @ Troubadour, LA 12/16/05

지난 1월쯤 호주의 한 농장에서 일을 할 땐 매일, 저녁 내내 술을 마셨다. 그러다 밤이 깊어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하나 둘씩 내일 새벽 일어나기 위해 잠을 청하려 자기 방으로 들어 갔다. 구석구석 옹기종기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취기는 올랐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안뜰에 나갔었다. 거기엔 잉글랜드 억양이 억센 사내 녀석들 셋이 맥주를 빨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모두 잠든 백팩에 불은 꺼져 있었고 안뜰 위에 밤 하늘이 제법 산뜻하고 아름답다. 그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는지 자기들끼리도 소근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퍽 정다워 보인다. 조용히 옆자리에 앉아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어딘가 들떠 잠 못 이루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그 때 이 음악이 흘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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