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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한겨레 2006-05-19 16:57]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맑스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자본>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자본 읽기>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자본>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초고>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1844년 초고>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맑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백의 펴냄(1997) 아미엥에서의 주장 알튀세르 지음, 김동수 옮김, 솔 펴냄(1998) (알튀세르의 사상 전반에 접근하기에 좋은 책. 쉽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돌베개 펴냄(1994) (부인을 죽인 뒤 금치산자로서 유폐된 상태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의 자서전) ◇ Mjspinaza(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리뷰)=“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 익명=“프랑스 공산당에 속해 있었던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태에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전체를 비판의 도마 위해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논장=“이 책에 내포된 세적, 정치적 담화들은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 시기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는 탁월한 인식론적 가치 때문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국사신론>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책속으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켜 “당에 들어왔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치적 행동주의나 적어도 순수한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지게 된 상상적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또한 우리 사회 역사의 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동류들 속에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자를 갖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대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들은 …언젠가는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 내지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22~23쪽)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신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규정적인 동시에 규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순은 원리상 중층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116~17쪽) “인간사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호흡하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나 공기인 것처럼 분비한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관만이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들을 상상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유물론에서는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278쪽)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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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의저작권

 

 

디지털 시대의 저작권
- 소리바다를 중심으로

 

 

 

 

 

 

 

 

목차
Ⅰ. 머리말    ……………………………………………………………………………………………3
Ⅱ. 전현대의 저작권   …………………………………………………………………………………4
 1. 저작권 체계의 변화 전망   ………………………………………………………………………4
  (1) 현행법상 저작권의 보호체계    ………………………………………………………………4
   (가) 저작권법의 목적   ……………………………………………………………………………4
   (나) 저작권법의 기본 구조  ………………………………………………………………………4
   (다) 저작재산권의 제한   …………………………………………………………………………5
  (2) 국내 저작권 체계의 변화   ……………………………………………………………………6
 2. 디지털 환경에서의 저작권    ……………………………………………………………………7
  (1) 카피레프트론자들의 입장   ……………………………………………………………………7
   (가) 복제개념의 변화   ……………………………………………………………………………7
   (나) 디지털 환경에서의 정보 소유권과 개인의 접근권   ……………………………………7
  (2) 카피라이트론자들의 입장   ……………………………………………………………………8
   (가) 복제개념의 특징   ……………………………………………………………………………8
   (나) 전송개념 도입   ………………………………………………………………………………8
   (다) 공정이용의 제한   ……………………………………………………………………………9
   (라) 기술적 조치를 통한 디지털 저작물의 보호   ……………………………………………9
Ⅲ. 소리바다 논쟁    …………………………………………………………………………………10
 1. 소리바다 논쟁의 과정들   ………………………………………………………………………10
  (1) P2P솔루션?  …………………………………………………………………………………… 10
  (2) 냅스터 논쟁과정  ………………………………………………………………………………11
  (3) 소리바다 논쟁과정  ……………………………………………………………………………11
 2. 핵심논쟁- 개발자의 입장과 음반협회의 입장  ………………………………………………12
Ⅳ. 해결책   ……………………………………………………………………………………………12
 1. 디지털저작권 관련 논의 분리의 필요성  …………………………………………………… 13
 2. 소리바다의 향후 전망  ………………………………………………………………………… 15
 3.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에 대한 제안  ……………………………………………………… 16 
  (1) CD가격인하와 MP3 유료화  ………………………………………………………………… 16
  (2) 저작권 인정기간 단축  ……………………………………………………………………… 16
  (3) 온라인 상의 저작권 침해 단속 체계 마련  ……………………………………………… 17
  (4) 저작권을 창작자에게로 ……………………………………………………………………… 17
  (5) 교육의 필요성 ………………………………………………………………………………… 17
Ⅴ. 맺음말     …………………………………………………………………………………………18

Ⅰ. 머리말

  지식정보사회로의 이행을 체감하고 있는 요즘 지적재산권의 문제는 이제 몇몇 문화예술가들이 여생을 준비하기 위한 개인적 권리요구라는 차원을 넘어서 ‘자본’과 ‘산업시스템’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50년대 중반 이래 탈산업사회로의 경쟁을 가속화시켰던 소위 테크놀러지 기술개발 전쟁은 천연자원과 토지를 점령하던 시대에서 지식과 정보를 지배하고 선점하는 시대로의 전환을 몰고 왔고, 이 과정에서 소위 산업스파이 비즈니스가 기술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의 위용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21세기인 지금은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문화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렇듯이 지식, 정보, 문화 콘텐츠가 자본의 획득과 독점, 그것의 확대재생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을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적재산권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문화콘텐츠 내에서의 저작권 보호는 갈수록 그 수와 양에서 강력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최근 문화산업계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잦은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콘텐츠의 사용을 둘러싼 지적재산권 충돌의 사례들은 개별 문화영역이나 사건별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터넷에서의 디지털 저작권의 문제이다. 오프라인이나 아날로그 방식의 지적 재산권이 온라인/디지털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정보의 공유와 저작권보호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이나 아날로그 방식에 기반한 저작권법이 온라인에서도 그대로 적용됨으로써, 디지컬 문화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시키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큰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즉 저작권의 침해와 정보의 무조건 공유라는 상반된 입장(소위 카피레프트와 카피라이트)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대립의 핵심에 있는 사건이 ‘소리바다’이다. 검찰은 소리바다에 대해 저작권의 침해 혐의로 기소하였고, 소리바다와 비슷한 인터넷 음악파일사이트 운영자에게도 재판부가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렸다. 이는 아마도 인터넷을 통한 문화적 콘텐츠의 수용이 과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것을 감안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번 판결만으로 디지털 시대의 저작권에 대해 결론짓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오프라인에 기반한 저작권법이 온라인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저작물을 수용하는 환경에 변화를 수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에 인터넷 환경에서 디지털 콘텐츠의 지적재산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저작권의 보호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은 없는지 생각하고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법적인 검토를 할만한 여건이 아닌 관계로, 임시적인 방편을 내놓는 정도에서 결론을 마무리 짓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Ⅱ. 전현대의 저작권

1. 저작권 체계의 변화 전망

 (1) 현행법상 저작권의 보호체계

  (가) 저작권법의 목적

저작권법은 서로 상반된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의 향상 발전을 목적으로 저작자의 권리를 제한하여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한다.
이와 같이 저작권법이 상반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저작물이 지식의 산물이고 이러한 지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어느 한 사람에게 완전히 독점시키는 경우 인류 문화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국의 모든 저작권법은 저작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으며 이러한 제한 범위 안에서 일반 공중은 자유롭게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 저작권법에서 카피레프트 또는 정보 공유 부분을 일컫는다면 바로 이 제한 부분일 것이다.

  (나) 저작권법의 기본 구조

  ① 권리

보통 저작권은 저작인접권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통칭되고 있으나 엄격히 말하면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은 같은 법률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성질은 약간 다르다.
저작권은 저작물을 창작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권리로서 다시 지적재산권(복제‧배포‧공연‧방송‧전송‧전시‧2차적저작물 등의 작성권)과 저작인격권(공표권‧성명표시권‧동일성유지권)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저작재산권이라고 부르며, 후자는 저작자의 명예‧성망 등 인격을 보호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저작인격권이라 칭한다.
저작인접권은 일반 공중에게 저작물을 전달하는데 상당한 창작적 기여를 한 자에게 부여하는 권리를 말한다. 직접적으로 저작물을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창작에 준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저작권에 준하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저작인접권이라 한다. 저작인접권자로는 실연자(가수, 탤런트, 영화배우, 연주자 등), 음반제작자(음을 최초로 고정한 자, 즉 原盤을 제작한 자) 및 방송사업자(방송을 업으로 하는 자)가 있다.

  ② 저작권의 발생 시점 및 발생 요건

저작권은 저작물을 창작한 때부터 발생하며 특허 등 산업재산권과 같이 어떠한 형식이나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저작권을 등록하는 때에는 등록된 저작물의 저작자, 등록된 저작물의 창작년월일 및 공표년월일을 법적으로 추정받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또한, 등록된 저작물을 침해한 자에 대해서는 과실(過失)에 의하여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추정하는 효과도 있다.
미국의 경우 등록된 저작물의 저작권을 침해한 경우 실제 손해액이 아닌 법정손해액과 변호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③ 보호 기간

  저작물은 저작자의 생존 기간과 저작자의 사망 후 50년간 보호된다. 단체명의저작물, 영상저작물 및 무명‧이명저작물은 저작물을 공표한 때로부터 50년 동안 보호되며, 공동저작물은 맨 마지막 사망한 자의 생존 기간 및 사망 후 50년까지 보호된다. 이러한 보호 기간은 1957년 구저작권법에 비하여 20년간 더 연장된 것이다.
인격권은 저작자의 일신에 전속하는 권리로서 이전이나 양도가 안 되며 저작자가 사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 저작권법은 저작인격권 자체가 아닌 그 인격권으로부터 파생하는 인격적 이익을 저작자의 손자녀가 생존하는 동안까지 향유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저작자를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저작인접권의 보호 기간은 실연은 실연을 행한 때로부터, 음반은 음을 최초로 고정한 때로부터, 그리고 방송은 방송한 때로부터 각 50년인데, 이것은 1994년 각 20년이었던 것을 30년 더 연장한 것이다.

  (다) 저작재산권의 제한

  ① 저작재산권의 제한 목적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작재산권의 제한 목적은 저작권법의 제정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저작권법은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하여 문화의 향상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저작재산권의 제한이 필요한 것이다.

  ② 저작재산권의 제한 내용

저작재산권의 제한에 관한 내용은 저작권법 제2장 제6절(제22조~35조)에 규정되어 있다.

  o 재판절차 등에서의 복제(제22조)
  o 학교교육목적 등에의 이용(제23조)
  o 시사보도를 위한 이용(제24조)
  o 공표된 저작물의 인용(제25조)
  o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는 저작물의 공연(제26조)
  o 사적 복제(제27조)
  o 도서관 등에서의 복제(제28조)
  o 시험문제로서의 복제(제29조)
  o 점자에 의한 복제‧배포(제39조)
  o 방송사업자의 일시적 녹음‧녹화(제31조)
  o 미술저작물 등의 전시 또는 복제(제32조)
  o 번역 등에 의한 이용(제33조)

 

 (2) 국내 저작권 체계의 변화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국내 저작권법도 몇 번의 개정을 거듭하였다. 최초의 저작권법인 1957년 법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저작권의 내용도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우리 나라가 국제 협약에 가입하면서 크게 나타났다.
2000. 1. 12. 가장 최근에 개정된 저작권법은 인터넷과 PC 통신을 통한 저작물의 무단 이용을 차단할 목적으로 전송권을 도입하고, 출판물 등을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사기기에 의한 사적 복제를 차단하여 저작권자의 권리를 한층 강화한 반면에 국립도서관 등이 소장한 자료를 복제(디지털화)하여 전자도서관을 구축한 후 다른 도서관 등에 전송할 수 있도록 하거나 학교에서 공표된 저작물의 복제 및 방송은 물론 공연까지 하도록 저작재산권의 제한 범위를 확대하여 공정한 이용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저작물의 공정 이용 측면보다는 저작자의 권리 보호 측면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국내 저작권법은 저작자의 권리 보호와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한다는 저작권법의 기본 목적과 저작권 체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수정을 거듭해 왔다. 또한, 국제적 추세나 다른 나라의 저작권법 등에 비추어 볼 때 저작자의 권리 보호와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의 도모라는 상반된 저작권법의 목적을 나름대로 충실이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디지털 환경에서의 저작권 적용
 
   (1) 카피레프트론자들의 입장

  (가) 복제개념의 변화

  디지털 환경은 근본적으로 ‘복제의 개념’을 변화시킨다. 지적창작물이 책이나 음반같은 유체물에 고착되어 배포되는 경우, 지적창작물에 대한 접근과 복제는 별개의 행위였으며, 복제를 규제하는 것(그래서 Copyright)이 상대적으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접근을 위해 복제는 필수적으로 수반되며(불법복제의 의도와 무관하게), 또한 개인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웹페이지에 접속하는 것 자체가 서버로부터 데이터 파일을 복제, 전송해오는 것이다) 따라서, 복제에 대한 통제, 즉 저작권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행위에 대한 통제까지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자칫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개개인의 파일 교환을 불법적이라고 규정하는 이상 메신저, e-mail 등 다양한 개인간의 소통을 저작권 위반의 가능성이라는 명목으로 모니터링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해줄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 디지털 환경에서의 정보 소유권과 개인의 접근권

 저작권법은 창작적으로 표현된 것을 보호한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어떤 행위를 창조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누구를 저작자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어려워진다. 인터넷 환경은 기존의 정보를 선택, 재배열, 편집하여 새로운 저작물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매우 쉽게 만들었다. 저자가 정보를 선택하고 재배열 할 때의 창작성을 모두 따로따로 인정해준다면 권리의 누적 현상이 심해져 정보의 소유구조도 복잡해지고 가격도 크게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정보 생산자와 수용자의 구별이 희미해지는데, 기존의 저작권제도는 생산자의 보호에 치중하고 있어서 혼란이 야기된다.
 또, 저작권의 원칙 중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한 사용(fair use)의 원리일 것이다. 이 원리는 저작권법이 지나치게 적용되어 공중의 이익이 침해될 가능성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즉, 저작물을 허가 없이 이용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용이 교육적 사용이나 비영리적 이용 등 법으로 명시하는 정당한 사용의 범주에 들어갈 경우에는 저작권 침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저작자의 이해와 이용자의 이해간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중요한 원칙을 디지털 환경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저작자가 정보를 널리 보급할 수 있다는 인터넷의 기능을 시장대체성의 존재를 보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인터넷의 가장 기본적이고 내재적인 특성 자체로 인해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흐름은 정당한 사용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당한 사용의 원리는 저작권의 지나친 보호를 막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경우에는 별로 유용한 도구가 되지 않게 된다.  
  이렇게 같은 법규들이라 하더라도 디지털 환경에 적용할 경우 과다한 소유권 보호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이는 개인의 정보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즉, 디지털화된 정보가 재산화 되감에 따라 개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점점 제한되어 가는 것이다.

 
(2) 카피라이트론자들의 입장

 (가) 복제개념의 수정
  저작권법은 복제에 관하여 "인쇄․사진․복사․녹음․녹화 그 밖의 방법에 의하여 유형물로 다시 제작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법 제2조 제14호).  이러한 복제의 개념에 저작물의 디지털화가 포함되는지에 대하여, 디지털화는 무형적 복제이기 때문에 유형물로의 복제만을 인정하는 우리 저작권법상 복제의 개념에 포함될 수 없고, 따라서 종래의 복제개념을 수정하여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처럼 유형물을 그 자체로서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에 한정시킨다면, 녹음․녹화 역시 무형적 복제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에는 찬동할 수 없다.  저작물을 디지털화 하는 행위 및 그로 인한 결과물 역시,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일 뿐 여전히 유형적인 행위이자 대상임에는 틀림없다고 본다.이러한 맥락에서, 저작물을 컴퓨터에 작동시키는 행위․저작물을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는 행위․디지털 파일로 저장된 저작물을 다른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행위․디지털 파일로 저장된 저작물을 다른 컴퓨터로부터 다운로드하는 행위 등은 모두 복제행위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나) 전송(Transmission)개념 도입
  컴퓨터․인터넷 기술의 발전에 직면하여, 저작권법 체계에 전송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인터넷을 통한 저작물의 유통은 모두 디지털 전송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전송개념을 도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터넷상의 저작물에 대하여 그 보호를 부인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전송개념 도입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면, 디지털 전송과 관련된 제문제를 배포권․방송권 등 기존의 저작재산권 개념을 통해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개념으로서의 전송권을 도입하는 방법이 있다또, 저작권법은 방송에 관하여 "일반공중으로 하여금 수신하게 할 목적으로 무선 또는 유선통신의 방법에 의하여 음성․음향 또는 영상 등을 송신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바 (법 제2조 제8호), 이러한 방송의 개념에 저작물의 디지털 전송을 포함시켜 해석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 공정이용의 제한
  저작권법의 기본 목적은 저작권자의 배타적인 권리보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통해 문화․예술의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데에도 있다.  따라서, 저작권법의 기본적인 운영원리는 저작물의 독점을 통한 정보의 불균등 분배가 아니라, 오히려 저작자의 권리를 일정한도 보호해 줌으로써 지적 창작에 대한 의욕고취라고 보아야 한다. 결국, 문제는 저작물의 활발한 생산에 대한 동기부여라는 측면과, 이러한 저작물의 이용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공공복리의 증진이라는 측면을 여하히 조화시켜나가느냐에 귀착한다. 이러한 공공복리의 증진이라는 측면을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 바로 공정이용의 법리인 바, 저작권법은 제22조~제33조에서 저작권의 광범위한 공정이용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공정이용은 저작물의 복제․배포가 용이하지 않았던 현실을 규율하는 데에는 적합할 지 모르나, 저작물의 디지털화로 인해 그 복제․배포․방송 등이 무척이나 신속․용이해진 현실을 감안한다면, 공정이용의 범위를 넓게 인정하는 것은 저작자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된다.  반면, 공정이용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여 해석하는 것은 디지털 저작물의 원활한 유통을 저해함으로써 정보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공정이용을 어느 정도에서 인정하여야 할 것인가는 이와 같은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인터넷상에서 유통되는 디지털 저작물의 이용에 관하여 현재의 공정이용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 기술적 조치를 통한 디지털 저작물의 보호
  인터넷상에서 디지털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의 침해가 발생하는 경우, 그 침해저작물의 전파․확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디지털․통신기술이 발전할 수록 이러한 저작권의 침해는 더욱 용이해지는 반면, 그 적발 또는 구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저작권자들은 기존의 법적인 구제수단 이외에 기술적 조치를 통해 스스로 보다 철저한 보호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가 있기 마련이듯이, 디지털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기술적 조치를 무력화하기 위한 기술 역시 함께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기술적 조치에 대해서도 법적인 보호가 필요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WIPO 저작권은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기술적 조치를 효괒거으로 보호하기 위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긴 하지만, 디지털 저작물 전반에 걸친 기술적 조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역기능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① 저작물의 유통저해 및 합법적 이용의 제한으로 인한 정보의 빈부차 심화, ② 현행 저작권법하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공익과 사익 사이의 균형상실, ③ 저작물의 창작․이용에 관련된 기기의 제조자에 대한 책임전가 우려 등의 이유에서이다. 생각건대,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저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적 조치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법적인 보호가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기술적 조치 역시 저작물 이용조건의 하나로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기술적 조치를 회피․침해하는 행위는 저작물을 그 이용조건에 위반하여 사용하는 것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호기간이 종료된 저작물 또는 비보호 저작물 등에 대해서까지 이 같은 기술적 조치를 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을 통해 달성하려는 공익목적에 반하는 것이므로, 이 경우 기술적 조치를 회피․침해하는 행위는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소리바다

1. 소리바다 논쟁의 과정들
 
(1) P2P 솔루션이란?

  P2P란 인터넷을 통해 각자의 컴퓨터 안에 있는 음악 파일이나 문서․동영상 파일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혹은 프로그램을 이용한 인터넷 서비스를 말한다.  컴퓨터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해 서버 없이도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신기술로 같은 근거리통신망(LAN)에서 PC끼리 파일을 공유하는 기법을 전체 인터넷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일반적인
  인터넷 자료실이 특정 서버(대형컴퓨터)를 통해 불특정 다수가 올린 자료를 다시 불특정 다수가 내려 받는 형태인데 반해 P2P는 인터넷에 접속한 네티즌 개개인의 PC를 직접 검색, 저장된 자료를 1대1로 주고받는 방식이다.  인터넷상의 정보를 검색 포털 서비스 등을 통해 찾는 수직적 방식과 달리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PC로부터 수평적으로 정보를 제공받고 검색 및 다운로드/업로드한다.  P2P에서는 데이터를 담아둘 서버가 필요 없다. 이론적으로는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모든 사람의 PC에 담겨있는 파일과 데이터 등 모든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국내에서도 매스컴과 네티즌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 P2P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외국의 냅스터가 한국 네티즌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어서 국내에서도 소리바다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서 mp3파일 공유가 훨씬 자유롭고 편리하게 이루어 지게 되었다. 

(2) 냅스터 논쟁의 과정들

  냅스터는 미국의 19세 젊은이인 션 패닝이 개발해 인터넷의 엘비스 프레슬리�uc0라는 애칭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음악파일(MP3) 교환 시스템이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던 패닝은 무료 음악파일을 찾는답시고 매일 밤을 지새는 룸메이트가 귀찮아, 단지 편히 잠들겠다는 생각으로 MP3 파일의 위치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자신의 별명인 냅스터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99년에 4개 메이저 음반사들은 냅스터에 대해 음악 저작권 침해소송을 제기했으며, 2000년 7월 연방지방법원은 웹사이트 폐쇄명령을 내렸으나 항소법원은 이 명령을 유보시키고 심의를 계속해 왔다. 그러던 중 미 연방 항소법원은 2001년 2월 12일 냅스터에 대한 항소심에서 냅스터가 온라인 가입자들에게 저작권 음반을 공짜로 다운로드 받게 해 준 것은 위법이라며 이를 즉각 중지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냅스터는 (온라인 가입자들에 의한) 대리 저작권 침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항소법원은 밝혔다. 샌프란시스코 제9 순회 항소법원은 그러나 1심과는 달리 즉각적인 웹사이트 폐쇄판결은 내리지 않았다.  3명의 판사로 구성된 패널은 58쪽 짜리 의견서에서 웹사이트 폐쇄명령을 내린 지방법원의 1심 판결은 너무 광범위하다고 지적, 저작권 보호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춰 이를 재심해야 할 것이라면서 사건을 돌려보냈다.  패널은 또 냅스터에 대해 MP3 파일에 저장된 저작권 음반을 교환하는 가입자들에 대한 링크를 제거할 것을 명령했다.  냅스터는 결국 5대 메이저 중 하나인 BMG의 모회사인 베텔스만에 인수되었고 음악 구독 회사로 탈바꿈하고 더이상 무료 mp3 공유 서비스는 할 수 없게 되었다. 
 

(3) 소리바다 논쟁의 과정들

  국내에서는 냅스터와 유사한 서비스인 소리바다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P2P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소리바다는 인터넷 사용자끼리 서로의 하드디스크에 들어 있는 MP3를 검색하고 편리하게 다운로드도 할 수 있다.  다운로드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실시간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으며, 가수와 제목별 검색, 채팅도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냅스터가 저작권 시비에 몰려 문은 닫은 것처럼, 소리바다에 대해 한국저작권협회(회장 김영광)는 저작권이 있는 파일이 이 사이트를 통해 네티즌간에 1대1로 불법 복제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법적 대응을 추진하고 있다.  7개월의 장고 끝에 지난해 초부터 논란이 되어 지난해 8월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7월 11일 법원이 소리바다의 복제금지 등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받아 드리게 되었고 12일에 법적 대응방안을 찾았으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2. 핵심논쟁 - 개발자의 입장과 음반협회의 입장
 
  개발자인 양일환, 양정환 형제는 지난해 3월 부터 소리바다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해 딱 2달만에 이를 완성했다.  어디 한곳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두고 거기서 네티즌들에게 음악파일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네티즌과 네티즌이 서로 직접 음악파일을 공개하고 검색하고 전송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네티즌 모두가 음악파일의 제공자가 되고 동시에 수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발 의도에 착안해서 양일환, 양정환 두 형제는 ‘접속 회원의 데이터베이스를 서버에서 직접 관리하는 냅스터와는 달리, 소리바다는 IP주소만 알려주는 역할만 한다’며 이는 ‘저작권이 있는 저작물을 공공장소에 올린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상업적 의도가 없이 개인적으로 순수한 자료공유가 가능하도록 프로그램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음반협회는 ‘정확한 상반기 음반산업 규모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해와 비교해서 1/3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마저 나오고 있는 상태다.  소리바다의 공유 기능에 따라 인터넷 상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mp3파일을 서로 제공하는 바람에 음반시장이 축소되고 있다.’ 는 입장이다.  음반산업 협회 이사 이창주는 ‘상품과(저작권자가 있으며 상용인 저작물) 상품 아닌 것(저작권자가 있으나 상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철부지 '소리바다' 운영자는 하루 속히 지적재산권의 소중함을 알고 지금의 범법행위를 중지하도록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한 두 형제는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다. 인터넷은 이용자에게 가능한 제약 없이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다. 방안에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케 한 것은 인터넷이 가져 다 준 큰 선물이다. 이러한 개개인이 만든 세계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대하여 기본적인 룰을 지켜야 더 큰 발전을 가져 올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 소리바다 개발자인 양씨 형제를 포함한 소리바다 폐지 반대를 지지하는 네티즌과 음반산업 협회와의 대립이 더욱 심각해 지고 있다.


Ⅳ. 해결책
 
1. 디지털 저작권 관련 논의 분리의 필요성

  앞에서도 언급됐듯 소리바다 문제는 단순히 소리바다 하나만의 문제로 볼 수 없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음악을 포함해 오프라인의 모든 자료들이 초고속 통신망을 타고 기존의 유통체계를 뒤흔들어 놓는다는 데 있다. 이것의 전파는 오프라인 상에서 이뤄지던 저작권 침해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인류가 인터넷과 컴퓨터에 의존하게 될수록 그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작권 침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이번 문제의 핵심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논의에서는 많은 것이 뒤엉켜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바로 저작권, 지적재산권의 본질에 대한 회의가 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카피라이트론자와 카피레프트론자의 대결구도가, 소리바다 문제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기존 저작권의 디지털 저작권에의 적용문제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둘 사이의 논의가 사실상 좁혀지기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카피레프트가 시작된 것은 광범위하게 봐서는 마르크스 주의가 태동하면서이고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을 일으킨 스톨만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니, 이 논쟁을 하루 아침에 끝낸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의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번 사건 해결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또 각 진영이 내세우는 주된 논리 가운데 하나가 각 진영에 속한 사람 혹은 단체의 자질과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효과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카피라이트 진영에서는 소리바다를 옹호하는 정보공유 운동이 정보독점을 막고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생산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대상이 엄연히 문화적 저작물에 해당된다는 점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보공유운동의 진보적인 취지와는 무관하게 소리바다를 사용하고자 하는 이용자 일부는 지적재산권자의 저작권을 독점 보호하려는 당사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업적인 이득을 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카피레프트 진영에서는 지적재산권은 민중에 대한 통제수단이고 자유로운 정보의 소통과 공유를 방해하며 결국은 정보독점으로 인한 독점자본을 낳아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화시킨다고 주장한다.이에 대표적인 독점자본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들어 익스플로러 끼워팔기라든지 소스 비공개 등을 대표적인 ‘악덕’행위로 고발하고 있다. 그 결과 카피레프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는 지적재산권을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부터 조금 더 완화된 주장까지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논쟁이 이런 양상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의 전통적인 대립양상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번 디지털 저작권 관련 논쟁은, 기존 저작권을 디지털 시대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카피라이트 진영과 카피레프트 진영의 기존 논의는 이후 점진적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한편 이와 같은 문제의 분리가 철저히 카피라이트 진영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숙지한다면 이러한 반론은 조금이나마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된다.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탄생한 개념이고, 이 둘이 추구하는 이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카피라이트의 정신을 살펴보면, 저작권 보호의 목적은 공유에 있으며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공익의 실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카피라이트론자들의 이상을 현실화한 저작권법 제1장 1조에는 "이 법은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카피레프트론자들 역시 공유를 주장한다. 그들은 "저작권은 민중에 대한 통제 수단이고 자유로운 정보의 소통과 사용, 공유를 방해하며 결국에는 독점자본, 정보독점을 낳고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화 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철폐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언뜻 달라보이지만 이들 모두 공유 혹은 공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카피레프트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독점반대에 카피라이트론자들 역시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카피라이트는 독점을 보장하고 공유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보상권을 인정하고 필요한 경우 공익을 위해 공유도 보장하고 주장한다. 사유와 공유는 공익의 전제하에 조화롭게 보호되어야 하며 어느 일방의 독점은 용납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카피라이트는 사유적 보호가치가 있는 것은 사유로서 공유적 보호 가치가 있는 것은 공유로서 보호하는 것이며 사유만을 위해서도 또는 공유만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 카피레프트는 카피라이트안에서 충분히 논의 될 수 있으며 개개인에 있어서 그러한 선택은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며 보장된 권리라는 점이다.
 
(2) 카피레프트가 모든 위법적 권리 침해행위를 정당화시켜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자칫 섣부른 카피레프트로 인해 무고한 자들이 비양심,범법자 대열에 끼어들게 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3) 카피라이트는 카피레프트의 적대개념이나 절대적 반 개념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카피레프트 또한 카피라이트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카피라이트는 카피레프트 정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카피레프트 또한 카피라이트를 전제로 성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절대적 배타 개념이 아님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카피라이트나 카피레프트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상대적인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다음의 논의는 현행 저작권법 하에서 카피레프트의 입장을 고려한 가운데, 어떻게 기존 저작권을 디지털 컨텐츠에 적용시킬 수 있을지를 소리바다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 디지털 저작권이 처한 문제를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논의이나, 앞으로 변화해 나갈 사이버스페이스 상에 대한 개념은 부재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 소리바다의 향후 전망

  소리바다가 음반판매에 극심한 타격을 입혔다고 음반협회는 주장했고, 결국 법원은 음반협회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MP3에 의한 음반의 판매감소로 인한 손해 및 다운로드시장에서의 손해가 발생하느냐의 논란과 손해가 발생한다면 그 손해가 얼마인가에 대한 논란 자체는 아무런 가치없는 논쟁일 수 있다. MP3 및 인터넷의 급속한 이용증가로 인하여 음악을 배포하는 방식은 CD가 아닌 다운로드에 의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의 변화는 오히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바람직한 혁신이라고 할 수도 있다. CD의 등장에 의하여 기존의 LP가 취미용으로 사용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사라진 예나 MP3가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운로드에 의하여 음악을 배포하는 시장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따라서 MP3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디지털방식에 의하여 음악을 배포하는데 있어서 저작권자와 배포자 및 음악저작물 이용자간에 어떠한 관계를 설정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룹 이글스(Eagles)의 멤버였던 헨리(Henley)는 미국 상원의 법사위원회에서 “인터넷상에서 유용하게 배포시키는 시스템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송이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증언하였다. MP3에 관한 문제는 법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법적 판단 이외에 정책적인 판단을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MP3 파일을 인터넷상에서 ‘무료’로 배포하거나 다운로드받는 것은, 현행법의 적용에 관한 해석을 떠나서, 정책적인 측면에서 허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곧 저작권법의 기본적인 토대는 저작자에게 독점적 권리에 기초한 경제적인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저작물이 많이 창작되도록 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일반이용자들이 저작물의 이용에 따른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앞으로 급속하게 확대될 다운로드시장에서 MP3 파일에 의하여 저작물이 무료로 이용될 수 있다면 저작물의 창작을 억제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저작물의 감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MP3 파일의 무료에 의한 전면적인 공유는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카피레프트 진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앞으로 제 2, 제 3의 넵스터나 소리바다가 등장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또한 웹상에서 MP3 파일을 불법적으로 제공하는 사이트를 전면적으로 폐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주요 검색엔진들이 MP3 검색을 위한 특별서비스를 제공해왔고, MP3라는 단어가 검색엔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라는 사실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소리바다 폐쇄판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내린 것이 아니다. 가장 널리 유포돼 있는 저작권 침해현장을 봉쇄함으로써 앞으로 더욱 더 불거질 디지털 저작권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불법 복제를 막겠다는 취지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직 소리바다는 끝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고, 그 중에서도 유료화의 가능성이 가장 현실에 부합해 보이다. 유료화에 대한 걸림돌은 아직도 많은 네티즌들이 유료화를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존의 음반시장이 아니라 다운로드시장이 음악을 배포하는 주된 시장이 될 경우, 그 사정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어떤 식으로 저작권료를 분배할지 음반회사의 힘은 얼마만큼 약화될지 추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것임에 틀림없다.
  다음 장에서는 소리바다 폐쇄 판결 이후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에 대한 제안 몇 가지를 소리바다 중심으로 적어 보았다.

3.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에 대한 제안

 (1) CD 가격인하와 MP3 유료화

  유로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가격이다. MP3가 처음 유통되던 당시에 메이저급 사이트에서는 한곡에 1,000원가량을 받고 MP3 다운로드 서비스를 실시하였는데, 이용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서비스를 중지하고 만 전적이 있다. 
  기존 음반과는 달리 MP3의 경우 하나의 컨텐츠를 더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0에 가깝다. 더욱이 온라인상에서 모든 거래가 끝나므로 유통비용 역시 0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엠피쓰리의 경우 그 가격을 음반에 비해 현격히 줄일 수 있으며, 곡마다 따로 구매함으로써 음반 형태로 구입할 때 마음에 들지 않는 곡까지 사야했던 경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또 곡마다 참가한 세션이 다르고 작, 편곡가의 역량에도 차이가 나는만큼 가격을 차등화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대중가요의 경우 그 인기가 보통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에 감안, 최신곡과 나온지 일정 시간이 지난 곡들과의 가격을 차등화시키는 방안이 필요할 듯 하다. 그리고, 소리바다의 경우, 이미 절판된 음반이라던지 인디밴드의 음악을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경우엔 제작자와 협상을 거쳐 무료로 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를 다른 디지털 컨텐츠에 확장해 본다면, 소프트웨어의 경우 여러 기능이 있는데 각 기능을 첨가할 때마다 부가비용을 내는 식으로 개편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현재의 소프트웨어는 필요없는 기능까지 모두 사도록 한 매체에 모두 저장해 팔기 때문에,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를 일종의 끼워팔기 형식이라 할 수 있는데, 디지털화 된 컨텐츠 판매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방식이다. 또 가격을 인하함으로써 그 동안 불법복제를 가정하고 터무니 없이 높게 책정했던 소프트웨어 가격의 거품이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 저작권 인정 기간 단축

  기존 저작권은 자작권자가 죽은 뒤 50년까지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디지털 시대와는 맞지 않을뿐더러 시장의 요구와도 판이하게 다르다. 음반의 판매는 음반이 발매되는 초기에 집중되며 그 이후로는 급격히 감소, 소장용으로 가치가 있다고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음반만이 소량씩 판매될 뿐이다. 따라서 첫 발매 시기에 따라 가격 차등 정책이 가능하고, 오랜 시기가 지난 음악의 경우 아예 무료로 ‘소리바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음악판매를 더욱 활성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세월이 지난 음악은 시장가치가 떨어지고 방송에서는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이용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이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윈도우와 같은 소프트웨어의 경우에도 시기가 지난 이후 가격을 대폭 내리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디지털화와 상관없이 기술의 발전속도가 빨라지면서 저작권을 굳이 오랜 기간으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윈도우의 경우 95년, 98년, 2000년, 2001년에 각각 새로운 버전이 출시됐음에도 여전히 저작권은 유효하다.

(3) 온라인 상의 저작권 침해 단속 체계 마련

  디지털화 된 콘텐츠의 불법 유통을 완전히 단속할 방법은 없다. 또한 단속이 검열을 수반한다는 데서 그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단속을 완전하게 하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디지털 콘텐츠를 거래할 수 있는 메신저와 이메일 등을 검열하는 것은 기본권의 침해로 저작권 침해보다 더욱 큰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를 잡다가 집 한 채를 다 태우는 격이다. 따라서 소리바다와 같이 한 사람이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디지털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 정도를 막는 수밖에는 없다. 메신저나 이메일 등을 통해 아는 사람들끼리 디지털 콘텐츠까지 막는 것은 불행이다. 이러한 행위는 온라인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만큼 여기까지 단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복제방지 기술을 통해 막는 수밖에 없다.
 
  또 단속을 할 경우 그 대상자는 일반 이용자가 아니라 운영자가 돼야 한다. 일반 이용자는 언제나 공짜를 원하기 마련이지만, 자신의 뜻을 이룰만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 한 그 뜻을 이루기란 불가능하다. 또 소리바다와 같이 이용자가 많을 경우 그 모두를 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운영자만 처벌하되, 운영자가 자신이 관리하는 사이트에서 불법행위가 일어나는지 몰랐거나 운영자의 능력으로 그 행위를 막지 못할 경우에는 그 죄를 감면할 수 있어야 한다.


(4) 저작권을 창작자에게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디지털화 된 컨텐츠를 온라인상에서 유통할 경우 많은 비용이 절감되고 창작자 개인의 능력이 더욱 발휘되기 쉬워진다. 현재 음반에는 각종 홍보비 역시 포함되어 있지만, 온라인상에서는 이러한 비용히 현격히 줄어들게 마련이다. CD를 제작․배포하는데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따라서 음악가가 직접 CD를 제작․배포하는 것은 비능률적이고 이익이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음반회사들은 음악가와 대중간의 중간적인 지위에서 많은 음악가를 대신하여 음반을 제작․배포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이용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음성파일을 만들고 인터넷을 통하여 이를 배포하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이 매우 저렴하고 따라서 중간적인 역할을 하는 음반회사의 필요성이 없어질 가능성이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음반사 등의 능력은 이전에 비해 줄어들게 된다. 물론 텔레비전 출연이 많은 가수들은 해당하지 않겠지만, 음악활동만을 주로 하는 가수라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급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계약관계를 조절해 좀 더 많은 저작권료가 창작자 자신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 소리바다 폐지를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이들이 저작권료가 과연 창작자 자신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왜 돈을 내야 하는지를 의문시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교육의 필요성

  소리바다의 예와 같이 디지털 컨텐츠를 불법으로 주고받는 것은 일반 대중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많다. 디지털 컨텐츠는 창작자가 뼈를 깎는 고통 끝에 내놓은 산물임을 자각도록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에 덧붙여 온라인 상에서의 예절이나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의 개념, 그리고 이것들에 관한 토론이 학교에서 선행돼야 할 것이다.
 
  카피레프트의 정신은 ‘free'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짜‘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자유‘라는 개념에 더 근접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권력의 감시와 거대 소프트웨어 기업의 가격 횡포 혹은 독점적 지위 남용 등이 카피레프트 진영에서 우려하는 바이다. 디지털 컨텐츠 제작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돼야 한다는 점은 카피레프트 진영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Ⅴ. 맺음말
 
  카피레프트론자들은 지적재산은 공유되어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특히 지적산물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모든 지적산물은 과거 여러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즉 역사적 산물임을 자각하고 이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고는 그 동안의 지적산물을 충분히 사용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선행 연구자들의 각종 업적을 돈을 들이지 않고 인용할 수 있었던 점과 인터넷 등을 통해 아주 쉽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점 역시 거듭 밝히는 바이다. 그리고 본고는 기존 연구자들이 이룩한 업적을 그저 다른 표현법을 사용해 나타낸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본고가 주장하듯 기존의 저작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철회할 생각은 ‘아직’ 없다. 디지털 시대로의 이행은 크게 봐서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시장이 옮겨가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고를 작성하면서 지적산물은 역사적 산물이지만 동시에 한 개인의 혹은 집단의 치밀한 사고에 의하지 않고선 제대로 된 지적산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여실하게 깨달았다. 지적재산의 창출에 있어 한 사람의 천재나 노력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다시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큼 본고는 부족함이 많다. 카피레프트론자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박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우려하는 부작용을 제거할 이렇다할 대책 역시 제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주된 연구자료로 삼았던 소리바다의 경우 문화적 컨텐츠였기에 지적재산권의 옹호에 조금 더 적극적일 수 있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만일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적 발견에 관한 특허를 다뤘다면 어떤 방향으로 본고가 흘렀을지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지적재산권 특히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쏟아져 나올 각종 정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로 생각된다. 의학분야와 같이 정보가 중요해 진다면 더더욱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 진영의 싸움은 치열한 경지에 이를 것이 틀림없다. 지적재산의 보호와 공유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화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한 듯 하다.

*카피레프트
카피레프트를 최초로 제안한 GNU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카피레프트는 모든 사람이 프로그램을 다시 배포할 수 있는 자유, 수정할 수 있는 자유를 프로그램의 복사본과 함께 얻을 수 있게 만드는 법적인 방법이다. 즉 프로그램의 소스코드에 까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이런 자유를 빼앗는데 저작권을 사용한다. 이제 우리 소프트웨어 공유자들은 카피레프트를 이런 자유를 유지하는데 사용한다.*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카피레프트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GNU 프로젝트에서 사용하는 카피레프트는 Copyright Notice와 GPL(General Public License)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Copyright Notice는 카피레프트된 프로그램을 누군가 약간 수정하여 현행의 저작권법으로 등록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창조적 노동을 보호한다는 저작권법의 원래 목적에 충실한 것이며, 이는 곧 카피레프트가 단순한 불법 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GPL은 프로그램의 배포, 수정의 자유를 규정하는 문서이다. 최근에는 GPL의 확장된 개념인 LGPL(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카피레프트된 프로그램을 Copylefted Software라고 하는데, 이는 Free Software의 한 종류이다. 완전한 Free Software는 소스코드의 수정, 배포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Free는 공짜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흔히 알고 있는 셰어웨어(shareware)와는 다른 개념이다. 셰어웨어는 우선 소스코드가 공개되지 않으므로 수정의 자유가 없으며, 등록 요금을 지불하는 것을 전제로 복사와 분배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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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 영역의 재구성을 위한 카피레프트 운동의 함의 / 오영일

재생산 영역의 재구성을 위한 카피레프트 운동의 함의

오병일 - 진보네트워크 인터넷사업팀장

1. 자본에 의한 삶의 종속성

정보통신산업, 문화산업, 그리고 서비스 산업은 현실 자본주의를 주도해가는 핵심적인 산업부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초고속정보고속도로’로 상징되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사람들을 동원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언론으로 바뀌었을 뿐, 또 하나의 새마을 운동을 보는 듯 하다. 사람들이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의하기 전에, 먼저 우리네 삶의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자.
일정 기간동안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람들은 직장을 구한다.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일정 기간의 교육과정이라는 것도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갈수록 연장되고 있다. 기간 뿐만이 아니라, 교육에 필요한 비용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학원교육, 학습지, 참고서, 그리고 영어연수 등 가능한 한 몸값을 높여서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 진행되는 사교육은 유치원 이전부터 진행되어 이미 공교육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안심할 수 없다. 이제 능력위주의 사회가 아닌가? 끊임없이 자신의 몸값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여가시간 마저도 자신을 갈고 닦는데 바쳐져야 한다.
IMF로 많이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등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나는 삶의 수준은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향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소득수준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많아지고 있다. 모두가 생산영역에 투입되기 때문에, 아이를 기르는 일, 부모를 모시는 일, 밥을 먹는 일, 빨래를 하는 일 등 재생산 영역은 기계나 다른 곳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수입은 늘겠지만, 평균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따라서 늘어나게 된다. 재생산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또다시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어야 하는 이 악순환.
그렇다면, 우리의 여가시간은? 우리가 노는 방식, 즉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방식도 패턴화 되어있다. 우리는 극장에서, 노래방에서, 술집에서, 오락실에서 그리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여가를 보내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돈을 뿌리면서 보낸다. 이제 돈이 들지 않고 여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다. 또한 갈수록 자본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오락 상품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체득되고 있듯이, 정보, 문화, 서비스 산업은 이미 현실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기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산업은 전통적으로 생산 영역이 아니라 ‘재생산’ 영역으로, 즉, 내일의 노동을 위해서 휴식을 취하거나, 자신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위한 문화를 향유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기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던 영역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생산 영역은 과거에는 대부분 사람들의 직접적인 노동이나 관계 속에서 해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자본은 재생산 영역까지 자신이 담당하겠노라고 나서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좀 더 편리한 생활, 좀 더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겠다고. 미래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이러한 흐름은 우리들의 노동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쫙 깔린 고속도로가 마을에 편리함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생산 영역에서는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자본에 종속된다. 먹고살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생산 영역은 인간으로서의 우리들 삶을 영위하기 위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삶마저 자본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을까?
첫째, 우리의 삶의 방식이 자본이 설정한 테두리 안에 한정되고 종속된다. 예를 들어, 이제 노래방에서가 아니면 노래를 부르기 힘들다. TV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고, 그것에 집중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정보를 얻게 만들므로써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전세계의 영화시장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가치를 확산시킨다.
둘째, 삶의 다양한 영역의 자체적인 가치보다 ‘이윤 증식’이라는 자본의 가치가 우선하게 된다. 통신망에서 제공되는 정보들은 그것들이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 어떠한 가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무엇이 ‘돈’이 되는가(예를 들어, 연예 정보나 포르노물같은)가 기준이된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주 목적인 의료기관이 상품화되면, 돈이 되는 의료에 집중하게 되며, 평등한 서비스는 뒤쳐지게 된다. 창작행위는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향유하게끔하는 즐거움으로부터 돈을 벌기 위한 행위로 전락한다. (저작권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인격적 측면이 아니라, 재산적인 측면이 아닌가?)
세째,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상품-화폐 관계로 대체되면서 관계가 파편화된다. 예전에는 부모가 아이를 돌보았지만, 이제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본다. 생산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의 하인, 하녀가 되고, 재생산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을 하인, 하녀로 부리게 된다.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일상적인 행위였지만, 이제는 상품화시키기 위해서 정보를 감춘다.
네째, 기업권력에 시민사회가 종속된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MS)는 운영체제 시장을 독점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용할 때 MS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게된다. 그들이 새로운 버젼을 출시할 때마다, 호환성을 위해서라도 또다시 구입할 수 밖에 없다. (상업적인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그렇듯이) 운영체제 내부가 감춰져있음으로해서 운영체제 내부에서 자신들에게 저해가 되는 어떠한 작동이 이루어지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재생산 영역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꼭 상품-화폐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애초에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와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그렇다면 다시 그렇게 재구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지 과거적 관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 이룩해놓은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기반으로 새롭게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상상력과 창조성이 필요하며,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카페라는 사적으로 소유되고 다른 사람을 하인으로 부리는 공간이 아니라, 공적으로 소유되고, 사무실 내에서처럼 사람들이 알아서 자신의 음료를 처리하는 공간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글에서 COPYLEFT라는 한가지 사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실험을 위해서, 그리고 더 폭넓은 상상력과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2. 현실 정보사회의 모순

정보통신, 문화, 서비스 산업의 확장은 정보화의 진전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현 사회를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단어가 ‘정보사회’인 것처럼. 물론 현실 정보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임노동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보화의 진전은 자본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의 힘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기여하고 있다. 첫째, 초국적 금융자본과 자본의 세계화는 전세계적 정보통신 네트워크와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기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둘째,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생산효율성을 향상시켜, 사람들을 일자리로부터 내쫓고 있다. 물론 일시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하더라도, 급격한 기술변동은 그것을 매우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현실 정보사회의 핵심적인 상품은 ‘정보’이다. 여기서 정보는 소프트웨어, 음반이나 영화 등의 문화상품, 그리고 컨설팅 등 정보서비스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정보는 여타 물질적인 상품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처음 생산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한번 생산되면, 그 재생산 비용은 매우 적다. 특히 정보가 디지털화됨에 따라서, 재생산 비용은 거의 0에 수렴하게 된다. 또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되더라도 나에게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정보를 얘기해준다고, 내가 더이상 그것을 모르게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떤 파일을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더라도, 내 컴퓨터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정보는 사람들 사이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이었을 뿐,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는 희소하지 않으며, 경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경제의 기본 전제가 재화의 희소성이 아니던가?) 그러나, 자본은 정보를 상품화하는 방법을 개발해내었다. 바로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즉,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가로막는 것이다.

바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지적재산권’이다. 전술했듯,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 정보는 자연스럽게 유통이 되며,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되어도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다. 그래서, 지적재산권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한다. 즉, 정보 생산자에게 그 정보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부여하고, 다른 사람이 그 정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자에 대한 허락을 받도록 한 것이다.
지적재산권은 크게 산업재산권인 ‘특허’와 문화, 예술분야 생산물에 대한 ‘저작권’으로 나뉘어진다. 최근에는 새로운 기술발전을 수용하기 위한 신지적재산권이 등장하고 있다. 현실 정보사회의 형성과정은 제도적 측면에서 지적재산권을 강화하고 정교화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저작권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문화, 서비스의 산업화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한다. 지적재산권도 이념적으로는 생산자 개인의 권리(노력에 대한 보상)와 공공성(문화와 산업의 발전, 그리고 지식의 확산)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현실적 적용과정이 과연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지적재산권은 생산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산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물론 당연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적재산권이 과연 ‘정당한’ 보상을 담보할 수 있는가? 전술한대로, ‘정보’는 처음 생산하기 까지는 어느 정도 노력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한번 생산이되고 나면, 재생산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따라서, 각 복제본의 판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수입을 보장해준다면, 생산비용을 초과하여 무한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는 MS의 전세계적인 독점에서 실증되고 있다. 보상이 시장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역으로 경쟁에서 패배한 생산자의 경우에는 생산하는데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된다.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그 생산자의 노동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지적재산권은 시장에서 승리한 소수에게는 과도한 보상을 해주며, 패배한 다수에게는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만다.

더구나 현실 지적재산권법은 필자가 보기에 생산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쳐있다. 특허의 경우 기술의 발전속도가 급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년간 보장을 하고 있으며, 저작권의 경우 작가 사후 50년 동안 보장을 하도록 하고 있다. 지적재산권법이 이렇게 공공성의 보장보다는 생산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치우친 것은 현대 사회에서 지적재산권의 대부분을 기업, 특히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한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명가나 작가’라는 일반인의 통념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생산자, 지적재산권의 소유자는 기업이라는 ‘법인’에게 대부분 속해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실 생산자는 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다.
지적재산권은 현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생각해보라. 지적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정보, 문화, 서비스 산업에서 경쟁우위를 갖고 있는 미국이 현재의 경제력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3. 카피레프트 운동의 함의

현실 정보사회가 ‘사유화’에 기반한 정보화의 길을 걷고 있는 반면에, 그것에 대항하는 또다른 흐름도 있다. 바로, ‘GNU/Linux의 카피레프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정보공유‘의 흐름이다.

먼저 GNU/Linux와 카피레프트 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자. 최근에 리눅스(Linux)가 또 하나의 운영체제로서 각광을 받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리눅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리눅스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GNU/Linux 시스템이다. 리눅스는 GNU 시스템의 커널(Kernel) 부분에 해당한다. GNU 프로젝트는 유닉스와 비슷하면서도, 더 강력하고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운영체제를 개발하려는 것으로 1984년 MIT 인공지능연구소의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소프트웨어의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프로그래머들 사이의 정보공유와 협력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반대해서, 누구나 소스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개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자유소프트웨어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 FSF)을 만들어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GNU 프로젝트는 1990년대 초까지는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왜냐하면 독립된 운영체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커널이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1991년 리누스 토발즈에 의해서 리눅스가 개발되고, GNU 프로젝트와 결합됨으로써 해결되었으며, 비로소 독립적인 운영체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에 해커나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리눅스는 RedHat과 같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리눅스 배포판이 나오면서 급속하게 대중화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의 이념은 바로 ‘자유’이다. 즉, 어떠한 제한없이 사람들이 소스에 접근할 수 있고, 복제와 수정을 할 수 있으며, 다시 재배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즉 이것이 상업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리차드 스톨만은 독특한 저작권 개념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피레프트’(Copyleft)이다. 카피레프트는 저작권(Copyright License)과 GPL(General Public License)로 이루어진다. 즉, 저작권 설정을 먼저 하고, 누구나 복사 및 수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되, 원래의 프로그램 및 어떠한 변형본도 같은 원칙 속에서 배포되어야 한다는 전제속에서 배포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GNU/Linux 시스템은 통상의 상용 소프트웨어와 같이 특정 기업에 의해서 개발되고 배포되지 않는다.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개발이 이루어지며,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 협력한다. 그리고,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테스트되고 개선되어 왔다. 이제 어느 상용 운영체제와도 견줄 수 있는 막강한 성능과 안정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MS의 윈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GNU 프로젝트로부터, 그리고 Copyleft로부터 어떠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는가?

첫째, 생산수단의 사회화 방식으로서의 ‘정보공유’이다. 공유된 정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관리하는 ‘국유화’의 방식도 아니다. 정보는 그저 네트워크(물리적인 네트워크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포함한다)에 흘러다니며, 모두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고, 자신이 생산한 것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나눈다.
GNU 프로젝트의 경우 프로그램 소스의 공개였지만, 정보공유의 메카니즘은 다른 지적생산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학술, 문화 등 지적재산권이 적용되는 다른 영역에서도 정보공유운동을 벌여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영역마다 어느 정도 차별적인 규정(예를 들면, 카피레프트와 같은 규정)이 필요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지적생산물의 변형, 수정을 아주 쉽게 하고 있으며, 적은 노력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생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즉, 하나의 지적생산물이 더욱 풍부한 다른 지적생산물로 확대 재생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GNU 프로젝트에서 공유된 정보는 단지 프로그램 소스 뿐만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GNU/Linux 시스템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헌신적인 개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이용자 공동체의 역할도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갖가지 버그에 대해서 리포트를 해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메뉴얼을 만들기도 하고, 번역을 하기도 하며,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서로 돕는다. 사실 그들은 개발자이면서 이용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자발적인 참여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보상은 사실 참여 자체로부터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이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겠는가? ‘생산자에 대한 보상’ 이라는 문제는 기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된 상황, 소수의 전문적인 생산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GNU/Linux 시스템은 이미 ‘생산’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이자 유통이며, 소비이다. 혹은 그것은 차라리 ‘유희’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정보공유운동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생산자에 대한 보상 문제는 나타날 수 있다. 이미 이 사회가 전업적인 정보생산자를 확대재생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보 생산자에 대해서 적절한 사회적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들은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보가 생산되는 새로운 방식이다. 정보 공유와 정보가 생산되는 방식의 문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GNU/Linux 시스템은 회사같은 거대한 조직체 안에 체계적으로 배치된 노동자들에 의해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자발적인 개인들의 참여 속에서 생산이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에릭레이몬드의 ‘성당과 장터’라는 문서를 참고할 만하다.

“고요하고 신성한 성당의 건축방식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리눅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의견과 접근방법이 난무하는 매우 소란스러운 시장같았다.” (‘성당과 장터’ 중)

‘성당과 장터’는 프로그램의 서로 다른 개발 스타일에 대해서 논의한 문건이다. 성당은 기업에서 소수의 개발자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방식을 의미하며,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를 형성하며 개발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Open Source Software)의 개발방식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개발 스타일을 비교 분석하면서, 에릭 레이몬드는 장터의 방식이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 영역 외의 다른 영역에서도 풍부하게 실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떠한 지적생산물이 하나의 회사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모델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어느정도의 조정자는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 학술 데이타베이스의 경우 데이타베이스 전문 회사에 의해서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공동의 데이타베이스 공간에 각각의 논문 생산자들이 자기 논문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구축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현재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상업적인 회사에 의해서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의 개발 방향은 ‘이용자 공동체’를 형성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데, 회사는 초기에 이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료 E-mail, 무료 홈페이지, 유용한 정보, 경품 등 유인전략을 구사하지만, 장기적으로 이용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컨텐트를 이용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4. 소프트웨어 외의 영역에서의 실험

GNU 프로젝트는 어떤 탈자본주의적 이념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구체적인 운영 형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탈자본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인 시스템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실험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한 실험은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실험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다음 사이트에서는 소프트웨어 영역 외에서도 카피레프트 운동이 시작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http://www.gnu.org/philosophy/nonsoftware-copyleft.html
Ram Samudrala라는 사람은 Free Music Philosophy (FMP)라는 글을 쓰고 카피레프트의 적용을 받는 음악을 창작하고 있다. 이미 저작권이 소멸한 책들을 전자화하여 인터넷을 통해서 일반에게 제공하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 Project)도 카피레프트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지향을 가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운영원칙으로 카피레프트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상용통신망의 경우, 서비스 회사에서 정보제공자에게 돈을 지불하든가, 혹은 이용자가 사용한 시간만큼 비용을 지불하도록 정보를 유료화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는 PC 통신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 서비스되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 카피레프트를 적용하고 있다. 즉, 진보네트워크에 제공되는 정보들은 각각의 정보생산자들이 아무런 댓가없이 제공을 하는 것이며, 이용자들은 이렇게 제공된 정보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정보생산자들은 주로 사회단체이거나 개인 이용자들이다. 결국 이용자들이 스스로 정보를 제공하고, 또 이용하는 것이다. 몇가지 실험적인 것을 들자면, 먼저 여성뉴스를 얘기할 수 있다. 여성 뉴스 게시판에 매일매일의 여성운동 관련 뉴스들을 퍼와서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는데, 몇명의 이용자들이 요일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또, 인터넷 홈페이지의 사회운동 뉴스같은 경우, 각 단체의 발간물을 제공하고 있는데, 진보네트워크는 공동의 데이타베이스 시스템을 제공하며, 각 단체는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여 여러 단체가 함께 공동의 사회운동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실험이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하기 이르다. 아직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상업적인 정보제공자가 있는 다른 상용망에 대해서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고, 여러 이용자들의 정보제공을 체계적이며, 계속적으로 운영한다는 것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운동의 형태를 띈 것도 아니고, 카피레프트를 표방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정보공유의 생생한 현장은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에는 개인들이 혹은 소모임, 단체 등이 제공한 무수한 정보가 있으며, 상당부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갈수록 인터넷이 상업화의 길로 가고 있지만, 주로 전자상거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회사들도 정보 자체를 섣불리 상품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미 무료로 제공되는 정보들이 인터넷 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의 초기 구축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정보공유의 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론

정보의 사유화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적 정보화는 정보의 생산을 위해서 ‘개인에 대한 금전적 보상과 경쟁유발’을 기본 방식으로 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정보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지적재산권 제도는 개개인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담보하지도 못할 뿐더러, 자신이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벌더라도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정보를 사기위해 그만큼의 비용을 지출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정보공유운동은 정보의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에서 탈피시킨다. 그것은 자본에 종속된 재생산 영역을 인간간의 직접적인 관계로 다시 재구성한다. 그것은 ‘소통’과 ‘유희’의 과정이다. 정보공유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강제받지 않고 자유로우며,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정보공유의 주체는 단지 전문적인 정보생산자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알고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다. 아주 전문적인 학술논문만이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며, 비전문적인 당신의 간략한 영화평도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가치있는 정보가 될 수 있다.

정보공유운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함의는 자본에 종속된 우리들의 삶을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재조직활 할 수 있으며, 서로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삶의 풍요로움은 보다 편리한 서비스와 보다 많은 정보생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소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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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자동차 역사 바꾼 도요타의 미국 견학 / 홍성욱

기술 속 사상/(23) 포스트 포드주의 고급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 선진국의 공장을 방문하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문은 가끔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뜻밖의 결과를 낳곤 한다. 1950년 봄, 일본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에 도요타 회사의 자동차 생산을 담당하던 도요타 에이지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사의 로그공장을 방문했다. 그의 목적은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조립라인에서 작업을 하던 거대한 로그공장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공장을 방문한 뒤에 도요타 에이지가 내린 결론은 포드사의 대량생산 방식이 일본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본의 자동차 수요는 미국처럼 대량 소비가 가능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또 일본 사람들은 한가지 모델에 만족하기보다 다양한 모델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전후의 일본 경제에서는 거대한 공장과 같은 높은 설비투자를 할 수가 없었으며, 공장의 노동자들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단순 조립 노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품을 정교하게 깎고 여러 종류의 금형을 제작해야 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은 숙련된 장인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지금도 최고급 스포츠카는 수제품임을 기억하라), 헨리 포드는 인간으로부터 이 숙련을 빼앗아 이를 기계에 부여했다. 즉 포드의 공장에는 ‘숙련된’ 기계인 전용기계들과 탈숙련된 단순 조립 노동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숙련노동을 대체한 포드의 전용기계는 매우 복잡하고 비쌌으며, 이를 설치하거나 바꾸는 데에 많은 설비투자가 필요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포드회사가 모델 T에서 모델 A로 생산라인을 바꾸는 데 오랜 시간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미국의 절반만 투자해 생산 두배로 도요타 에이지는 미국과 일본을 비교한 뒤에 ‘미국의 절반만 하자’고 판단했다. 전쟁 때문에 황폐화된 일본에는 자원이 부족했고,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생산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이었다. 절반의 장비와 기계, 절반의 노동력, 절반의 공장부지, 그렇지만 하나의 제품에서 새로운 제품으로 옮겨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절반으로! 절반의 설비투자로 신제품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은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포드사의 혁신이 거대한 설비투자 때문에 늦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도요타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이를 가능하게 할 기술혁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우선 새로운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금형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도요타사의 엔지니어 오도 다이이치는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프레스 공정에서 간단한 금형교환기술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는 생산을 유연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신속하게 많이 생산해서 원가절감을 이루었던 포드식의 대량생산의 이점에, 유연성과 양질의 제품 생산이라는 수공업생산의 이점을 결합한 혁신이었다. (도요타의 생산체계는 이후 대량mass생산과 대비되어 린lean생산으로 이름 붙여졌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핵심은 유연성에 있었다. 그렇지만 유연한 금형제작기술은 도요타 혁신의 끝이라기보다는 그 시작에 불과했다. 또 한번의 새로운 혁신은 전혀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찾아졌다. 오노 다이이치는 1956년에 미국을 방문했는데, 미국의 자동차 공장보다는 수퍼마켓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수퍼마켓은 물건을 고르는 구매자가 자신이 원하는 수량만큼의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면 매니저가 빈 진열대를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다시 채워넣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일본에서 수퍼마켓을 구경하지 못했던 오노에게 미국의 수퍼마켓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서 물건이 채워지는 방식을 주시했고, 일본에 돌아와서 이를 자동차 생산에 응용했다. 기존의 자동차 생산은 부품의 공급에서 시작했다. 생산라인은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해서 다음 라인으로 넘겼고, 그 다음 라인은 이를 받아서 다음 단계의 조립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앞 라인이 뒷 라인의 부품에 의존하다보니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에 항상 재고가 문제가 되었다. 재고 혹은 낭비(muda むだ)를 줄이는 것은 ‘카이젠’이라고 불리던 도요타 공장의 오랜 경영철학이었는데, 미국에서 돌아온 오노는 공장의 생산라인을 수퍼마켓의 진열대 식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소비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골라 들듯이, 한 생산라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품만을 이전 생산라인으로부터 취사선택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생산라인은 다음 생산라인을 위한 수퍼마켓이 되는 셈이었다. ‘저스트 인 타임’과 ‘간판’ 효과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혹은 JIT) 생산방식으로 불리게 된 이 시스템은 뒷 공정에서 필요한 만큼만 앞 공정의 부품들을 인수함으로써 재고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도요타 회사가 시장의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러한 공정상의 혁신이 존재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후공정에서 전공정에 생산량, 시기, 방법, 순서, 운반량, 운반시기와 같은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간판(kanban)’이었다. 간판은 조그만 사각형의 비닐 봉투에 종이쪽지를 집어넣는 것으로, 이는 생산과 조립에 대한 지침을 전달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간판 스스로가 부품과 함께 움직임으로써 생산 공정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했다. 간판이 쌓여있는 곳은 당장 관리를 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도요타 회사의 생산체계는 노동자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했다. 포드 공장을 희화화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포드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와 같은 생산의 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불량부품을 만들어 내거나 조립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비롯한 공장의 생산라인은 24시간 계속 돌아갔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요타 키운 ‘유연성’이 위험으로 반면에 도요타 회사의 노동자들은 불량 부품이 만들어졌거나 조립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생산라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시스템은 ‘지도카’(Jidoka - 자동화)라고 명명되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일반적인 자동화를 의미하는 automation이 아니라 autonomation이라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인간의 지능과 손길을 기계에 부여하는 자동화라는 뜻이다. 일본이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회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를 통해서 일본의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에서 미국차를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포드나 GM과 같은 미국의 거대 자동차 제국들은 일본의 도요타의 모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요타 에이지와 오노 다이이치가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미국 공장을 방문한 지 30년 만에, 미국의 엔지니어와 경영학자들이 도요타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서 일본 공장을 찾아왔다. MIT의 경영학자들은 5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서 5년간 일본의 도요타를 연구했다. 이들의 책은 1990년에 <세상을 바꾼 기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무렵부터 ‘유연성’은 생산은 물론 경영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유연한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충족되었지만, 이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 급변하게 만들었다. 소비자의 수요를 안정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이 어려워지고 신제품의 생산 주기는 더 단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산품, 소비패턴, 노동과정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자체도 유연해졌다. 범세계적인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평생직장을 보장하던 도요타 회사마저도 임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종업원들의 해고를 감행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유연한 것은 불안정한 것, 심지어 위험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59037.html 접속일: 200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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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량생산 대중소비, 포드주의 / 송성수

기술 속 사상/(22) 대량생산 대중소비, 포드주의 철도가 19세기를 상징하는 교통수단이라면 20세기 이후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자동차이다. 내연기관을 이용한 가솔린 자동차는 1880년대 독일에서 처음 발명되었지만 1910년대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만 해도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자동차의 소유가 보편화되는 이른바 ‘마이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자동차의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이다. 포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계공의 길을 걸었고 청년 시절부터 자동차에 도전하였다. 그는 1896년에 자동차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후 기술자 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19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그 회사는 오늘날에도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와 함께 미국 자동차업계의 ‘빅 3’로 불리고 있다. 포드사의 급속한 성장은 ‘모델 T’에서 비롯되었다. 포드는 모델 T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수많은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이다. 최고의 재료를 쓰고 최고의 기술자를 고용하여 현대 공학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디자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적당한 봉급을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입해서 신이 내려주신 드넓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만 해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기술자가 힘들여 제작한 고가품으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생활필수품으로서의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의 출발점은 동일한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핀은 다른 핀과 똑같고, 성냥 또한 그렇다. 이것은 자동차도 마찬가지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립라인 완성→작업 단순화 1908년 10월에는 검정 색상의 소형자동차인 모델 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새로운 합금강을 사용하여 견고할 뿐만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델 T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모델 T에게 ‘틴 리치’(Tin Lizzie) 혹은 ‘플리버’(Flivver)라는 애교스러운 별명을 붙였다. 틴 리치는 ‘털터리 자동차’를, 플리버는 ‘싸구려 자동차’를 뜻한다. 포드주의의 두 기둥: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포드사는 1910년에 4층으로 된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 공장을 신설하였다. 그것은 작업이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최신 공장이었다. 4층에서는 차체가 만들어지고, 3층에서는 바퀴에 타이어가 부착되면서 차체에 페인트가 칠해졌다. 2층에서 모든 조립이 끝난 자동차는 경사면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와 최종 검사를 받았다. 모델 T의 생산대수는 1910년의 19,000대에서 1913년에는 248,000대로 크게 증가하였다. 하이랜드 파크를 건설하면서 포드는 생산과정을 연속화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당시에 그는 시카고로 여행하던 중에 푸줏간 주인이 도살한 소를 손수레로 이동시키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위별로 고기를 발라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포드는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계들을 그룹별로 묶어 본 후 나중에는 생산물을 중심으로 기계체계를 구성하였다. 결국 포드사의 생산과정은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로 연결된 조립라인(assembly line)이 구축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물이 이동하고 노동자의 작업 위치는 고정되었는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인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는 이러한 상황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부’ 만들어 노동자 생활 조사 조립라인이 완성되자 포드사의 생산성은 급속히 향상되었다. 그것은 1914년의 자동차 생산량과 노동자의 수를 비교해 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당시에 포드사에서는 13,000명의 노동자들이 26만 72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던 반면, 미국의 나머지 299개 자동차업체들은 28만 6,770대를 생산하기 위하여 66,350명의 노동자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의 단순화는 높은 이직률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작업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무슨 노동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1913년 한 해 동안 포드사는 100명의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무려 936명을 고용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포드는 1914년 1월 5일에 ‘일당 5달러’(Five-Dollar Day)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루 8시간 노동에 대하여 최소한 5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미국의 노동자들이 하루 9시간 일한 대가로 2.38달러를 받았으니, 포드사는 통상적인 임금의 2배 이상을 보장했던 셈이다. 포드는 이를 가리켜 “내가 한 것 중에서 가장 멋진 비용절감 운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와 동시에 포드사는 노동자의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사회부’(Sociological Department)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사회부는 노동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노동자의 인간관계, 경제적 여건, 생활습관 등을 조사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포드사의 경영진은 해당 노동자가 일당 5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였다. 음주나 도박에 문제가 있는 노동자들은 경고를 받았고 그것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해고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포드사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을 자동차 고객층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에 모델 T의 가격은 290달러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포드사에 근무했던 일반 노동자의 3달치 봉급과 비슷하였다. 이제 일반 노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포드사는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정책을 통해 ‘대량생산’(mass production)과 ‘대중소비’(mass consumption)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는 풍요한 경제와 모델 T를 배경으로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돌입하여 1930년에는 가구당 1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량생산과 대중소비를 연결하기 위한 포드사의 실험은 이후에 ‘포드주의’(Fordism)로 불렸다. 그러나 포드사의 온정주의적 정책도 경영 환경이 나빠지자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었다. 경영 환경이 악화된 이유 중의 하나는 포드사가 한 가지 차종에 집착함으로써 소비자의 새로운 기호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4년은 포드에게 역설적인 한 해였다. 1924년은 모델 T의 생산량이 1천만 대를 넘어섰던 해이자 제너럴 모터스에서 시보레(Chevrolet)가 출시한 해였다. 시보레는 모델 T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신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크랭크 대신에 전자 시동장치가 부착되었으며, 무거운 톱니바퀴식 변속기 대신에 부드러운 3단 기어가 장착되었다. 시보레는 자동차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지만, 포드는 자신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검정색의 모델 T에 끝까지 집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차가 팔리지 않는 이유를 몰랐으며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포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객은 누구나 원하는 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이 까만 색깔인 한.” “까만 차가 아니면 차가 아니다” 포드사의 상대적 쇠퇴와는 별도로 포드주의는 오랫동안 호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소설의 백미로 평가되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현대사회에 ‘A.F.’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After Ford’의 약칭으로서 포드가 현대사회를 건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했으며, 거기에는 포드주의의 확립과 확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포드주의는 상당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포드주의는 소비자의 수요가 다양화되는 추세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막대한 설비투자나 임금의 상승과 결부되어 자본의 수익성을 감소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강화를 배경으로 포드주의는 노동을 비(非)인간화하는 상징으로 간주되어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결국 포드주의는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퇴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포스트 포드주의’(post Fordism)가 모색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송성수/부산대 교양교육원 조교수·과학기술학 triple@pusan.ac.kr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56986.html 접속일: 200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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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포스트포디즘 논쟁: 몇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 김명진

포스트포디즘 논쟁: 몇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이 글은 1980년대 이후 기존의 주류적인 대량생산(mass production)방식을 대체할 것으로 각광받아 온 '새로운' 생산방식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린 생산방식(lean production), 포스트포드주의(Post-Fordism), 일본적 생산방식, 팀 생산방식, 도요티즘(Toyotism)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1960-70년대의 일본에서 몇몇 기업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후 80년대 이후에는 미국이나 유럽 등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산방식의 성격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새로운' 생산방식에 대한 논쟁에서 드러난 몇 가지 쟁점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서 이로부터 약간의 함의를 도출해 내려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세 권의 책을 선택하여 이들의 입장을 상호비교하는 방식으로 글을 풀어나가 볼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세 권의 책에 대한 주제서평의 형태가 되는 셈이다. 세 권의 책은 다음과 같다: James P. Womack, Daniel T. Jones and Daniel Roos, The Machine That Changed the World (MacMillan, 1991) [국역: 현영석 역, 『생산방식의 혁명』(기아경제연구소, 1991)], Mike Parker and Jane Slaughter, Choosing Sides: Unions and the Team Concept (Labor Notes Book, 1988) [국역: 강수돌·이호창·강석재·김종환 역, 『팀 신화와 노동의 선택』(도서출판 강, 1996)], 이영희 저, 『포드주의와 포스트 포드주의』(한울, 1994). 국내에 이미 상당수의 연구서들이 편저의 형태로 나와 있음에도 이 세 권의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① 각각의 저자들은 서로 다른 관점과 연구방법에 입각해서 '새로운' 생산방식을 바라보고 있으며, 때로는 뚜렷하면서도 때로는 미묘한 입장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종종 다른 책에서 주장한 내용을 서로 언급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입장의 비교가 용이하다. ② 이 세 권의 책은 경영학 전공자, 사회학 전공자, 현직 노동운동가에 의해 각각 씌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방식을 바라보는 여러 분야의 입장을 다양하게 접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③ 이 세 권의 책은 편저가 아니라 자동차산업을 분석대상으로 하는 단일 연구서(monograph)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책 전체를 통해 저자들의 입장이 일관되게 전개되므로 이들의 입장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용이하다. 아래에서 필자는 먼저 각각의 책의 논지를 간략하게 요약한 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의 논점을 잡아 저자들의 입장차이를 정리해 보고 결론부에서는 필자의 입장을 한두 가지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 * * 먼저 『생산방식의 혁명』(아래에서는 『생산방식』으로 줄여 쓴다)을 보자. 이 책은 MIT 경영학과에서 발주한 프로젝트인 국제자동차산업 연구프로그램(IMVP)의 연구보고서로서 1991년에 출판되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들의 입장은 간단명료하다. 이들은 20세기 초에 수공업적 생산방식을 대량생산방식이 대체했던 것처럼, 현재의 시기는 대량생산방식을 새로운 린 생산방식이 대체해 나가는 시기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기존의 대량생산방식은 부품조달이나 재고관리, 신제품개발, 기업경영의 측면에서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반면, 새로운 린 생산방식은 생산성의 제고와 효율의 극대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시장상황에의 적응, 다기능화를 통한 노동자들의 직무만족도 상승이라는 여러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혁신적인 생산방식이다. 린 생산방식은 단순히 공장 안에서의 변화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부품조달 하청업체와의 관계, 자금조달방식, 신제품개발 팀의 인적 구성과 운영, 판매방식의 변화 등 기업운영의 모든 측면에 미치는 것이다. 저자들은 린 생산방식이 (그것이 생겨난 지역적 장소인) 일본에 고유한 사회특성들의 결과로 가능해진 것이라는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린 생산방식에 관한 한 주된 연구대상이 일본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린 생산방식이 갖는 '보편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즉, 린 생산방식은 '또하나의' 생산방식이 아니라 생산방식의 진화과정에서 수공업적 생산방식과 대량생산방식의 뒤를 잇는 중요한 '역사적 단계'의 지위를 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들은 대량생산방식에서 린 생산방식으로의 단계 전환이 효율 면에서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인간화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것이라는 함의를 이끌어 낸다. 이들에게 있어서 린 생산방식은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제거해 가면서라도 하루빨리 확산시켜야만 하는 당위이자 절대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팀 신화와 노동의 선택』(아래에서는 『팀 신화』라고 줄여 쓴다)의 저자인 파커와 슬로터는 입장을 달리한다. 이들은 GM과 도요다의 미국 내 합작공장인 NUMMI의 사례를 주로 들면서 노동운동가의 입장에서 본 '팀 방식' - 이 당시에는 아직 린 생산방식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지 않았다 - 의 본질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이들은 (흥미롭게도) 팀 방식의 '보편성' - '일본화'와는 반대되는 의미에서 - 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이 파악하는 팀 방식의 보편적 성격은 앞서 『생산방식』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팀 방식의 '우월성'과는 관계가 없다. 이들이 보기에 팀 방식은 "모든 나라의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을 쥐어짜기 위해 만국의 경영자들이 서로 앞다투어 채택하고 있는 '경영 관리' 기법"(『팀 신화』, p. 52)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들은 팀 방식을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라고 이름짓는다. 이들에 따르면 팀 방식의 높은 생산성과 효율은 생산방식이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원리(내지는 '철학')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생산체계 내의 모든 지점들에 물리적·사회적·심리적 스트레스를 가해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부품을 적시에(Just-In-Time) 조달하며 세부 작업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 방식은 전통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혁신이 아니라, 전통적인 방식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설치되었던 완충 장치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적 방식을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라고 이들은 결론내린다. 이어 이들의 논의는 생산현장 내에서 노동조합이 어떻게 팀 방식의 확산과 이에 따른 노동강도의 강화에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로 초점이 옮아가고, 마지막에는 몇 가지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책을 끝맺고 있다. 앞의 두 책에 비해 볼 때, 『포드주의와 포스트포드주의』(아래에서 『포드주의』로 줄여 쓴다)는 좀더 본격적인 연구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이 책은 앞의 두 책과는 문제설정의 지점을 달리한다. 구체적인 입장을 어떻게 취하고 있는가와는 별도로 '과거와는 <다른> 생산방식의 광범한 도입'이라는 거시적인 문제설정에 일단 동의하고 있는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그런 식의 문제설정이 한계를 안고 있음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유연전문화론 등의 거시적인 개념틀들이 실제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사례연구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지 못하므로 이를 검증하기 위해 개별 공장이나 기업을 대상으로 한 미시적 연구가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이 책은 문제설정과 포스트포드주의 논의에 대한 일반적 서술, 연구방법론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는 3장까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분량을 현대자동차, 도요다자동차, 볼보자동차의 비교연구에 할애한다. 이들 기업들이 처한 정치·경제·사회적 환경과 개별작업장 내에서의 미시적인 '생산의 정치'가 어떻게 각 기업들 내에서 특정한 생산체계를 정착시키게 되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포스트포드주의'라는 거시적인 개념틀의 유효성을 점검해 보겠다는 것이 저자의 전략이다. 그 결과로 도출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먼저 도요다자동차의 생산체계를 전통적인 포드주의적 생산방식과 단절한 '포스트'포드주의로 파악하는 것은 명백한 오해라는 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도요다자동차의 경우, 중앙집중적으로 관리되는 컨베이어벨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여전히 '규모의 경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숙련의 배제에 기반한' 다능공화(多能工化)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 자율권의 행사가 생산효율성의 측면에서만 형식적으로 부여되고 있다는 점 등으로 판단컨대, 전통적 생산방식과의 단절로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컨베이어벨트의 폐기, 직무의 통합, 더 넓어진 노동자의 자율권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볼보의 우데발라 공장과 같은 경우를 포드주의적 원리들로부터 명백히 벗어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 * * 이상의 요약으로부터 세 책의 저자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의 차이가 어느 정도는 드러났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네 가지 정도의 논점을 중심으로 해서 저자들간의 입장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면서 이러한 입장의 차이들이 생겨난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포스트-', 즉 '연속'과 '단절'의 문제 우선 세 책의 필자들은 '새로운' 생산방식을 지칭하기 위해 각기 다른 용어 - 린 생산방식, 팀 생산방식(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 포스트포드주의 - 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그 용어선택 속에 '새로운' 생산방식이 무엇을 넘어섰는지, 혹은 무엇을 넘어서지 못했는지에 대한 판단이 녹아들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먼저 『생산방식』의 저자들은 '대량(mass)'이라는 말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작은(lea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린 생산방식은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대량생산방식에 대해 대안적인 생산방식으로 제출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 린 생산방식이 과거의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 - 이들은 포드주의라는 말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듯하지만 - 을 '넘어선(post-)'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팀 신화』와 『포드주의』의 저자들은 모두 이러한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다. 『팀 신화』에서는 린 생산방식이 과거의 생산체계는 온존시킨 채 단순히 관리기법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보며, 『포드주의』에서는 팀 방식을 도요다자동차에서의 그것(=린 생산방식)과 볼보 우데발라 공장에서의 그것으로 나누어 후자만을 포스트포드주의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왜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빚어졌을까? 물론 이를 간단히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반영한 결과'라고 말해 버릴 수도 있을 테지만, 필자는 이보다 좀더 정교한 설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에 관점의 차이를 빚어낸 결정적인 요인은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서 비롯된다. 『생산방식』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량생산방식의 핵심은 ... 이동식 조립공정이 아니라 부품의 완전하고 일관된 호환성과 부품장착의 용이성이다."(『생산방식』, p. 50) 물론 부품의 호환성이 대량생산방식의 구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고 나면 대량생산방식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테일러주의적인 직무세분화와 정교한 시간-동작연구와는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반면, 『팀 신화』와 『포드주의』의 저자들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이들은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이 직무세분화와 구상과 실행의 분리, 그리고 중앙집중적 통제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이 여전히 근본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린 생산방식은 결코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저자는 도요다자동차의 작업조직이 노동자의 다능공화 원칙을 도입하긴 했지만, 이는 여전히 직무의 세분화에 근거한 가운데 그것의 수평적 확장을 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테일러주의의 원칙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린 생산방식은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의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주긴 하지만, 결코 포드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2) '보편'과 '특수'의 문제 린 생산방식이 대량생산방식의 문제점을 극복한 '새로운' 생산방식이라는 주장에 대해 주어졌던 (경영자측·노동자측 양측 모두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것이 '일본'이라는 특수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황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언급이었다. 이런 점을 특히 강조하는 이들은 '일본적 생산방식'이나 '일본화(Japan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생산방식』과 『팀 신화』의 저자들은 '보편'과 '특수' 사이에서 '특수'의 측면을 강조하는 이러한 주장에 서로 다른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 이들은 린 생산방식이 일본의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생산방식의 핵심을 몇 가지의 원리나 요소들로 추려낼 수 있으며, 이러한 원리나 요소들이 일본과는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 하에서도 도입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단 공통적이다 (이들은 모두 앞서 언급한 NUMMI의 사례를 공통적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으로부터 이끌어내는 함의는 서로 다르다. 『생산방식』의 저자들의 경우에는 "따라서 하루빨리 이 생산방식을 전세계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라는 식의 결론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팀 신화』의 저자들은 '일본화'에 대한 논의가 일본 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적인 편견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영 주도의 효율성 향상'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흐려 그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특수의 측면에 대한 강조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러나 『포드주의』의 저자는 다소 견해를 달리한다. 개별사례 연구를 통해 '포스트포드주의'라는 거시적 패러다임의 유효성을 검증하겠다는 그의 입장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특정한 공장에서 어떤 생산방식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특수한 환경뿐만 아니라 개별 공장 내에서의 노사관계의 성격, 경영측과 노동측이 각각 취하는 전략 등의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따르자면 도요다 공장에서 정교화된 린 생산방식을 몇 개의 원리들의 묶음으로 치환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원리들의 묶음이 다른 공장에서 도입될 때에도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 필자는 『포드주의』가 취하는 이러한 입장이 현상을 설명해 내는 틀로서는 물론이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을 보장해 준다는 면에서도 앞서의 거시적인 논의들보다 좀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러한 입장은 "일본 내의 일부 공장들은 특별히 '린'하지도 않으며, 북미의 많은 공장들이 린 생산방식의 실현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생산방식』, p. 126)는 『생산방식』의 저자들의 주장을 오히려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그것은 일부 공장에서 '앞선' 린 생산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뒤처져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하기보다는, 앞서 언급했던 다양한 거시·미시적 요인들이 공장마다 차이를 보여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3) '노동의 인간화' 문제 『생산방식』의 저자들은 린 생산방식이 생산성 및 효율의 제고와 노동의 인간화라는,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우월함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자면 이들은 린 생산방식의 구현 속에서 상반되는 가치들 사이의 '최적화(optimalization)'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팀 신화』와 『포드주의』의 저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흔히 선전되는 바와 달리, 린 생산방식 속에서는 현장노동자에게로 책임의 광범한 이양이 이루어지거나 하지 않으며, 도리어 수평적 직무확대로 인한 노동강도의 강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팀 신화』의 저자들은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 하에서 노동자들은 오히려 일상적인 물리적·심리적 스트레스 하에 시달리게 된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직무확대 내지는 다기능화가 반드시 직무만족으로 이끌리는 것은 아님을 여러 가지 경우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팀 신화』, pp. 229-232). 아울러 『팀 신화』의 저자들은 '팀 내부의 협동작업에 대해 노동자들이 대체로 만족감을 표시한다'는 주장을 공격한다. 이들에 따르면 작업이 막 시작되어 라인이 제속도를 내며 돌아가기 전까지는 불균등한 작업이 이루어지므로 노동자들간의 자발적인 상호협력이 가능한 반면, 라인이 완전히 제속도로 일단 돌아가기 시작하면 상호협력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팀 워크란 불가능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팀 신화』, p. 126). 『포드주의』의 저자 역시 수평적 다기능화가 직무만족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볼보 우데발라 공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직무의 통합과 자율성의 확장이야말로 인간적 노동으로 향하는 길임을 주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생산방식』의 저자들이 이러한 비판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린 생산방식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결국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 기법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그것을 스트레스가 아닌, '지속적인 도전' 내지는 '창조적 긴장감'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어 이들은 볼보 우데발라 공장의 '실험'을 '신장인주의'라고 명명하면서, 이런 생산방식이 직무만족도를 높여 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산성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반박한다 (『생산방식』, pp. 142-146). 이상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특정한 가치의 개입을 요구하는,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컨대, 단순작업을 하면서도 생산라인에 좀더 몰입하도록 강제하는 린 생산방식이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인 도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경영자측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 듯하다. 마찬가지로 우데발라 공장의 실험이 생산성이나 효율의 측면에서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은 결국 노동의 인간화보다는 생산성과 효율을 더 상위의 척도로 놓은 결과가 아닌가라는 반박을 피해가기 어렵다. 결국 필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생산성 및 효율의 극대화와 노동의 인간화 모두를 만족시키는 어떤 최적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둘 사이의 대립은 서로 상이한 가치들 사이의 대립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생산성'과 '효율'의 문제 지금껏 줄곧 서로 분명하게 다른 입장을 보여 왔던 세 책의 저자들은 흥미롭게도 '효율'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입장을 같이한다. 즉, 린 생산방식은 분명히 여타의 생산방식에 비해 보았을 때 생산성과 효율의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책의 저자들은 높은 생산성과 효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서는 역시 서로 입장을 달리한다. 『생산방식』의 저자들은 린 생산방식이 생산성의 면에서 뛰어난 이유를 이전의 대량생산방식과 결별한 지점에서 찾는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린 생산방식은 '포스트포드주의'이기 때문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린 생산방식이 생산성 및 효율과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 하에서는 달성되지 못했던) 노동의 인간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생산방식이라는 이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팀 신화』와 『포드주의』의 저자들은 입장을 달리한다. 이들은 린 생산방식이 결코 대량생산방식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린 생산방식의 높은 생산성은 오히려 대량생산방식의 '빈 곳'을 공략하여 그것을 극단적으로 합리화시킨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노동의 관점에 볼 때, 이는 곧 노동강도의 강화와 스트레스의 배가를 의미한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이들 중 특히 『포드주의』의 저자는 유연적 포드주의로서의 도요다자동차와 포스트포드주의로서의 볼보 우데발라 공장을 대비시키면서, 도요다의 높은 생산성은 결코 '포드주의를 넘어선' 요소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이에 덧붙여, 우데발라 공장의 생산성이 전통적인 포드주의적 공장들에 비해 보았을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높은 수준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데발라 공장의 생산성이 린 생산방식을 적용한 도요다의 그것에는 확실히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노동의 인간화를 추구하는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의 '실험'의 전망이 상당히 암울할 것이라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측은 볼보자동차의 경영합리화의 결과, 우데발라 공장이 문을 연 지 3년만에 폐쇄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 * * 지금까지 부족하나마 세 권의 책을 중심으로 해서 린 생산방식과 포스트포드주의에 대한 몇 가지 논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물론 위에서 정리한 것이 각각의 책들에서 주장한 핵심적 내용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은 못된다. 그러나 적어도 '새로운' 생산방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첨예하게 제기되는 몇 가지 지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대립구도가 명확해진 듯하다. 필자는 이 대립구도를 근거로 해서 이제 몇 가지 '확실해'졌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아래에서 필자의 주된 관심은 노동의 인간화 쪽에 맞추어질 것이다. 먼저, 린 생산방식으로 흔히 알려진 '새로운' 생산방식이 전례없이 높은 생산성과 효율을 성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포드주의적 요소들로부터의 일탈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진 것 같다. 즉, 흔히 받아들여지는 생각과는 달리 린 생산방식과 포스트포드주의는 서로 친화도가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포드주의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소의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포드주의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의 핵심적 요소가 무엇일지는 자명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린 생산방식은 생산성 및 효율과 노동의 인간화의 대립을 중개하면서 이 둘을 최적화하는, 그런 '환상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라는 점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결론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필자는 과연 생산성(및 효율)과 노동의 인간화가 양립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오래된 논쟁에 새로이 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점을 잠시 접어둔다면, 적어도 이 둘을 서로 이질적인 가치체계의 대립으로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진 것 같다. 즉, 이 중 어느 한쪽을 다른 한쪽의 논리나 언어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데발라 공장에서 있었던 포스트포드주의적 실험의 예를 다시 상기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우데발라 공장은 경직적 포드주의에서 성취한 정도의 생산성과 대단히 높은 수준의 직무만족을 동시에 이끌어 냄으로써, 앞서의 오랜 논쟁에 출구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인적 생산방식을 도입한 우데발라 공장이 포드주의적 공장의 극단적 합리화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 도요다 공장의 생산성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문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 놓는다. 『팀 방식』의 저자들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첨예한 국제 경쟁의 시대에 생산성과 효율의 향상으로 얻은 비교우위는 모방에 의해 금방 상쇄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만약 저항이 없다면 린 생산방식은 지역적으로 분명 확대될 것이고, 그 결과 결국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은 가장 극단화된 형태의 린 생산방식과 생산성의 면에서 경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린 생산방식에 의한 '최적화'가 노동의 인간화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결국 노동의 인간화를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은 다양한 미시적·지역적 실천에서 도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볼 때, 그 미시적인 실천은 자본의 다국적화라는 현상 앞에서 상대적으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다소 암울한 예측이 앞서의 결론에 따라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여기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지구화(globalization)의 경향 속에서 지역적(local)인 실천이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 될 것 같다. 필자는 『팀 신화』와, 같은 저자들이 지은 Working Smart: Unions' Response to Participation Program and Reengineering(1994)과 같은 저서들이 내놓은 구체적 방안들이 이러한 지점에 있어 상당히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팀 신화』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들은 최근에 린 생산방식의 확대와 관련하여 북미 지역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개관해 주고 있는데 이들 사건들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고 생각되며, 린 생산방식의 미래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http://myhome.naver.com/walker71/postford.htm 접속일: 200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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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20세기를 나른 컨베이어벨트/김성희

[경제] 20세기를 나른 컨베이어벨트 포드사 창립 100주년을 맞아 돌아본 포드주의…철저한 분업과 노동통제로 저항 부르기도 자동차 생산의 살아 있는 역사인 포드자동차가 6월16일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창업자인 헨리 포드는 1903년 디트로이트에서 자본금 10만달러와 노동자 12명으로 포드사를 설립해, 1908년 세계 최초의 대중차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대중화 시대와 함께 내구 소비재의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대를 열었다. 헨리 포드는 큰 성공과 작은 실패를 여러번 경험한 뛰어난 사업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삶과 포드사의 부침의 역사는 20세기 자본주의의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포드주의(Fordism)라는 말이 생산방식과 노동편성 방식, 나아가 자본주의 경제순환 방식을 특징짓는 이름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세기는 포드주의의 생성, 발전, 변형 또는 소멸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로 특히 그가 파격적으로 지급한 ‘일당 5달러’는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기인 전후 황금기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생산할 당시 자동차는 장인 노동자의 숙련노동에 의존해 주문 제작하는 고가의 사치품으로 ‘말 없는 마차’에 불과했다. T형 포드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1908년 당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자동차 값은 평균 2천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포드는 825달러에 팔았다. 그 후 가격을 300달러 이하까지 낮췄다. 포드는 어떻게 싼값으로 자동차를 공급할 수 있었을까? 헨리 포드가 착안한 것은 노동자가 작업대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물이 이동하여 정해진 위치에 있는 작업자들에게 흘러가는 컨베이어벨트였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장인들의 수공 조립품이었다. 포드는 이동 조립라인을 통해 단기간의 훈련을 거쳐 생산현장에 투입되는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낮은 비용으로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 컨베이어벨트가 활용되려면 작업자 한 사람마다 과업이 구분되도록 분업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공정이 표준화·단순화되어야 한다. 당시 작업 과정을 ‘과학적으로’ 관찰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하는 과학적 관리 기법이 테일러에 의해 시도되고 있었다. ‘시간동작 연구(time and motion study)’로 불리는 테일러주의는 집고 들고 걷고 구부리고 맞추는 작업 동작을 ‘초시계’로 측정해 반복작업을 표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능력을 향상시켰다. 테일러식 노동분업과 과학적 관리의 원리는 포드의 컨베이어벨트라는 기계적 생산시스템과 결합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극단적 분업과 기계속도에 의해 통제되는 단순반복적 노동으로 표준제품을 만들고, 이에 따라 싼 가격으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이 관습과 경험으로 체득한 작업관련 지식을 모두 빼내 공장의 시간동작연구실로 옮겨 와 관리자의 손에 집중시켰다. 이제 노동자는 관리자의 손에 독점된 노동과정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된 작업지시서에 따라 일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해리 브레이버만은 1974년 <노동과 독점자본>에서 테일러주의가 추구하는 극단적인 노동분업으로 인해 노동자는 탈숙련화되어 더 이상 두뇌노동이 필요없이 손노동만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헨리포드는 보통 노동자의 임금이 일당 2, 3달러이고 10시간 노동제이던 1914년 8시간 노동에 일당 5달러라는 파격적인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한다. 헨리 포드가 박애주의자는 전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럼, 왜 헨리 포드는 파격적인 임금을 노동자에게 주었는가? 노동에서 ‘인간의 얼굴’을 지우다 현대 경제학의 한 조류에서는 이를 효율임금가설로 해석한다. 주어진 생산성 수준에서 되도록 낮은 임금으로 고용한다는 효율성의 원리를 뒤집어, 높은 임금을 주어 노동자의 사기와 헌신도를 높여 더 높은 생산성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헨리 포드는 효율임금론이 등장하기 전에 이를 먼저 실천했다. 강화되고 단조로운 노동으로 인해 육체적·정신적 피로도가 높은 데도 불구하고 결근율은 75%나 감소했고 이직이 줄었다.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산출물 단위당 노동비용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고임금의 효과만은 아니다. 오히려 포드는 전과자로 구성된 구사대를 동원했고, 생산현장에 T형 포드자동차 대수보다 더 많은 헨리 포드의 첩자를 뒀다고 한다. 작업현장의 주류판매 금지, 성적 타락 금지 등의 노동규율도 강요했다. 헨리 포드의 사고에는 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이유가 없다는 가부장적 노사관계관이 깃들어 있다. 포드주의 생산방식에 구현된 이런 강화된 노동규율은 이후 포디즘의 해체를 가져오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한다. 대량생산이 개화함으로써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그러나 대량 생산된 내구재를 대량으로 소비해 줄 구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재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드의 일당 5달러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비싼 내구소비재에 대한 구매력의 원천이었다. 생산성 증대로 인한 이득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상대적 고임금으로 지급해 돌려준다면 내구소비재의 대량소비도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장의 호순환 구조인데, 일당 5달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자본주의 황금기(Golden Age)를 떠받든 하나의 지주가 된다. 축적체제로서 포드주의는 노동조합의 역할을 인정해 고도성장의 과실을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포드는 대량생산 방식을 통한 생산성 이득을 노동자에게 고임금으로 배분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임금이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떠받드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개혁좌파(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몫이 되었다. 전후의 주도권을 발휘한 사민주의 정당들의 정책을 통해 대량생산 방식으로서 포드주의는 대량소비를 뒷받침하는 복지국가와 케인즈주의 거시경제 관리와 함께 자본주의 황금기를 일구어낸 중심축이 된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포디즘에 구현된 테일러주의의 극단적인 분업과 단순반복적 작업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결근율이 다시 높아졌다. 포드주의 작업장에 대한 불만도 치솟았다. 노동자들은 ‘공장 문 앞에 멈춘 민주주의를 공장 안까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공장 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서기에 이른다. 유럽을 휩쓴 68운동의 혁명적 분위기와 미국의 반전운동의 기운에 힘입어 노동자들은 경제적 분배 정의의 요구를 넘어 인간화된 작업장을 실현하라는 산업민주주의의 요구를 분출시켰다. 생산방식이자 노동편성 방식으로서의 포드주의는 극단적인 분업과 기술적 합리성에만 의존하여 노동의 인간화 요구를 무시했기에 노동자들의 불만과 집단적 저항의 표적이 되었다. 이런 내적 한계로 인해 포드주의는 70년대 들어 고도성장의 한계에 봉착하고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다품종 소량생산과 포드주의의 몰락 헨리 포드는 자신의 성공을 가져온 단순한 디자인 T형 자동차를, 그것도 검은 색만 고집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20년대에 GM에 1위 자리를 내주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헨리 포드의 이런 경직적 태도로부터 힌트를 얻었을 법한 포드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등장했다. 전용기계를 사용하고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를 활용해 소품종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으로서 포드주의는 소비자 기호가 다양해지고 품질과 디자인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에 맞지 않는 경직적 체계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탈포드주의(post-fordism)와 유연화(flexibilization) 주장은 포디즘의 몰락을 확인한 이론적 성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직적’ 노동의 몰락만이 아니라 노동권 자체의 쇠퇴를 가져온 출발점이 되었다. 독점기업의 고도성장 과실을 노동자에게 배분한 포드주의는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했지만, 비인간적이고 통제 위주인 노동편성의 한계로 인해 노동자의 저항을 받아 내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다국적기업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시대에 경직적 체계인 포디즘의 효용성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를 이끈 포디즘의 저력은 일당 5달러라는 노동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과 함께 신화로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생명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포드사는 자동차 생산 세계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세계 100대 기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김성희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 경제학 박사 출처: http://www.hani.co.kr/section-021011000/2003/06/021011000200306250465050.html 접속일: 2006.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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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성쇠/김형기

<참여연대 ‘참여사회아카데미’ 특별기획 강좌 강의 1999. 6. 8>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성쇠 -자본주의 황금시대와 그 종언- 김 형 기(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1. 머리말 20세기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대표적 키워드 중의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포디즘(Fordism)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포디즘이란 용어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의 이름과 그의 새로운 경영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적 관리의 원조인 테일러(F. Taylor)에 이어 포드는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생산방식과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자본주의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포디즘은 미시적인 생산체제 수준에서 정의되기도 하고 거시적인 축적체제 수준에서 정의되기도 한다. 미시적 수준에서 사용할 때 포디즘은 과학적 관리인 테일러주의(Taylorism)에 컨베이어 시스템(conveyor system)을 결합시킨 대량생산체제(mass production system)이고, 거시적 수준에서 사용할 때 포디즘은 19세기 자본축적 방식과는 구분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에 기초한 축적체제(accumulation regime)이다. 나아가 포디즘은 경제, 정치, 문화를 포괄하는 사회구성체 차원에서 19세기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20세기 자본주의 발전모델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포디즘을 미시적 생산체제와 거시적 축적체제를 포함하는 발전모델로서 사용한다. 그리고 20세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포디즘적 발전모델로 파악한다. 포디즘적 발전모델은 포드가 T형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위한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한 1913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이 확립되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이다. 자본주의는 이 포디즘적 발전모델을 통해 2차 대전 이후 30년 동안 이른바 ‘황금시대’(Golden Age)를 누린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는 다름 아닌 이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위기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위기와 함께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성쇠는 바로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의 현대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성립과 위기 그리고 해체의 과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고찰 과정에서 우리는 포디즘적 발전모델이 인간의 삶의 질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서로 다른 길을 검토하고, 포디즘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 2. ‘발전모델’ 분석을 위한 개념들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특징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발전모델을 분석하기 위한 주요 개념들을 알아보기로 하자. 발전모델이란 개념은 주로 프랑스의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에서 자본주의 유형 분석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발전양식이라고도 한다. 조절이론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 그리고 자본주의의 가변성과 다양성을 해명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들을 개발하였다.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조절이론의 기본개념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발전모델(development model)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이 결합된 것을 지칭한다. 축적체제(accumulation regime)란 사회적 생산물이 소비와 투자로 배분되는 체제, 생산과 수요가 연계되고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이 연계되어 거시경제적 순환이 지속되는 체제를 말한다. 따라서 축적체제란 일정기간동안 안정된 거시경제적 규칙성을 말한다. 거시적 수준의 축적체제속에는 미시적 수준의 생산체제(production system)가 포함되어 있다. 생산체제에는 노동과정과 노사관계가 주요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자본에 의한 임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축적체제는 적대성을 가지기 때문에 부단한 대립과 갈등을 야기한다. 또한 무정부적인 시장경쟁을 통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축적체제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조절양식(mode of regulation)은 이러한 축적체제에 규칙성을 부여하는 메카니즘의 총체를 말한다. 축적체제의 규칙성은 다양한 형태의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실현된다. 조절이론에서는 제도를 기본적으로 경제주체들간의 투쟁과 경쟁을 통해 형성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제도는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급투쟁과 자본가간의 경쟁의 산물이다. 동시에 제도는 경제주체들의 행동 즉 투쟁과 경쟁에 제약을 가한다. 제도가 부과하는 강제적 질서는 개인의 행동에 체현된다. 이렇게 되면 개인들은 제도가 부과하는 질서에 따라 행동하게 되므로 축적체제는 규칙성을 가지고 유지된다. 한 사회의 관습과 규범도 제도형태에 영향을 미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제도형태에는 임노동관계, 화폐형태, 경쟁형태, 국가형태, 국제체제에의 편입형태 등을 들 수 있다. 임노동관계는 노동력의 사용과 재생산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말한다. 화폐형태는 본위제도를 포함한 화폐신용관계를 말한다. 경쟁형태는 자본간 경쟁의 존재형태와 시장구조를 말한다. 국가형태는 국가개입의 형태와 사회경제정책의 성격을 말한다. 국제체제에의 편입형태는 세계시장과의 관계 혹은 국제분업에서의 위치를 말한다. 이 제도형태들중 임노동관계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러한 제도형태를 통한 조절에 의해 축적체제가 유지되고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절양식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발전모델을 주도하는 사회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계급 혹은 계층의 이익을 접합시키는 정치적 타협을 해야 한다. 여기서 주도계급을 중심으로 한 계급동맹 혹은 계층연합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발전모델을 주도하는 사회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계급동맹 혹은 계층연합을 헤게모니 블록(hegemonic bloc)이라 한다. 헤게모니 블록은 지배계급의 이해와 피지배계급의 이해의 일부를 접합시킴으로서 발전모델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그것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때 축적체제는 헤게모니 블록에 참가하는 계급 혹은 계층의 이해를 보장해야 한다. 어떤 특정한 발전모델을 가진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지배적인 가치관 및 세계관을 사회 패러다임(societal paradigm)이라 한다. 사회 패러다임은 헤게모니 블록을 향해서 무엇이 정당한 이익인가를 가려주는 판단기준이 된다. 하나의 발전모델에는 그것에 적합한 사회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패러다임의 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사회 패러다임은 사람들의 관습과 규범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패러다임은 제도형태와 함께 조절양식의 내용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이와 같이 축적체제, 조절양식, 제도형태, 헤게모니 블록, 사회 패러다임 등의 요소들의 총체를 발전모델이라 한다. 따라서 발전모델이란 광의로 보면 경제, 정치, 문화 등을 포괄하는 사회구성체 수준의 개념이다. 협의로 보면 발전모델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을 결합한 것을 의미한다. 이제 발전모델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간의 관계를 보면 <그림 1>과 같다. 발전모델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이다. 축적체제에는 경제주체들간의 투쟁과 경쟁이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제도형태는 축적체제의 구성요소임과 동시에 제약요소이다. 제도형태와 관습 및 규범은 조절양식의 내용을 구성한다. 제도형태는 경제주체들간의 투쟁 및 경쟁 그리고 사회의 관습 및 규범의 산물이다. 역으로 경제주체들의 투쟁 및 경쟁 그리고 사회의 관습 및 규범은 제도형태에 의해 제약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다. 경제주체들간의 투쟁과 경쟁 속에서 특정한 헤게모니 블록이 형성된다. 헤게모니 블록은 제도형태의 형성과 경제주체들의 투쟁과 경쟁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패러다임은 관습 및 규범과 제도형태의 형성에 작용한다. <그림 1> 발전모델의 구성 요소들 ??????????????? ??????????????? ?헤게모니 블록?←?????????????사회 패러다임? ??????????????? ??????????????? ? ?????????????????????????????? ? ???????????? ???????????? ???????????? ?투쟁?경쟁???→? 제도형태 ?←???관습?규범? ???????????? ???????????? ???????????? ? ????????????????????????????? ? ? ? ? ? ???????????? ???????????? ? 축적체제 ?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한편 고생산성이 고임금 지급으로 연결되고, 고임금이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고, 대량소비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고생산성은 고이윤을 가져오고 고이윤은 고투자를 유발하여 대량생산을 지속시킨다. 다른 한편 대량소비는 고투자를 유발하고 고투자는 고생산성을 실현하여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고투자는 대량소비와 함께 직접적으로 대량생산을 뒷받침하는 총수요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고투자-고생산성-고이윤-고임금’을 통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결합되는 호순환이 이루어져서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포디즘적 축적체제를 ‘내포적 축적체제’라 한다. <그림 2> 포디즘적 축적체제의 거시경제적 회로 ???????????? ???????????? ? 대량생산 ?? 고임금 ? ???????????? ???????????? 포디즘적 축적체제의 바탕에는 포디즘적 생산체제가 있다. 포디즘적 생산체제의 특징은 대량생산체제(mass production system)이다. 전용기계 중심의 기계화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단일 품종 혹은 소품종의 대량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저비용을 추구하려는 것이 대량생산체제의 생산전략이다. 포디즘적 대량생산체제에는 포디즘적 노동과정이 존재한다. 포디즘적 노동과정은 간단히 ‘테일러리즘+기계화’로 요약될 수 있다. 테일러리즘(Taylorism)은 테일러(F. Taylor)가 주창한 과학적 관리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구상과 실행의 분리, 육체노동의 단순화, 위계적 노동통제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노동과정 혹은 작업조직을 말한다. 테일러리즘의 요체는 생산을 구상하는 사람과 생산을 실행하는 사람간의 분리에 기초하여 육체노동을 단순화하고 직무를 세분화하여 상명하달의 위계적 통제를 통해 노동강도를 높임으로써 잉여가치 생산을 증대시키려는 것이다. 테일러리즘에서는 생산현장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 구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엔지니어나 경영자의 업무지시에 따라 오직 세분화된 단순반복노동을 수행할 뿐이다. 생산현장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적 숙련이나 지식 혹은 창의성이 아니라 주어진 세분화된 직무를 최대한 빠른 시간에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포디즘적 대량생산체제에서는 이러한 테일러리즘에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상징되는 기계화가 결합되어 테일러리즘의 원리가 더 철저하게 관철된다. 중간생산물의 이전이 자동화되는 컨베이어 시스템이 도입됨에 따라 작업속도가 크게 증대하여 노동강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다음으로 포디즘적 조절양식을 보자. <그림 2>의 거시경제적 회로에서 고생산성과 고임금의 연계, 대량소비와 고투자를 통한 총수요의 유지 등이 축적체제의 규칙성과 안정성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러한 포디즘적 축적체제에 규칙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안정화시키는 제도형태는 무엇인가? 포디즘의 주요 제도형태는 임노동관계 측면에서는 단체교섭제도, 최저임금제도, 사회보장제도, 화폐형태 측면에서는 관리통화제도와 소비자신용제도, 경쟁형태 측면에서는 과점적 대기업제도와 대기업의 독점적 가격설정, 국가형태 측면에서는 케인즈주의적 재정금융정책과 복지국가, 국제체제 측면에서는 IMF-GATT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등을 들 수 있다. 단체교섭제도는 고생산성을 고임금으로 전환시켜주는 제도형태이다. 노동3권의 법적 인정과 노동조합의 교섭력에 기초한 단체교섭제도는 생산성 향상이 임금인상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해 주었다. 최저임금제도는 노동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임금소득을 지지해 준다. 사회보장제도는 노동자가 실업 상태에서도 소비를 가능하게 해 주어 대량소비를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단체교섭제도와 최저임금제도, 사회보장제도는 경기변동과 노동시장 상황이 임금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력을 제한하여 노동시장을 경직화시키는(혹은 안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관리통화제도는 정부가 통화량을 조절하여 고투자와 유효수요를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소비자신용제도는 대량소비를 촉발하는 작용을 하였다. 과점적 대기업에서의 대량생산과 안정적인 시장수요 및 높은 수익성이 고투자를 지속하게 하였다. 케인즈주의적 팽창적 재정금융정책과 복지국가는 지속적 성장을 위한 유효수요를 뒷받침해 주었다. 팍스 아메리카나 아래의 IMF-GATT체제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각국은 환율을 쉽게 조정하여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포디즘적 발전모델에서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담보한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급타협이었다. 우선 기업수준에서는 단체교섭을 통해 노동측이 테일러리즘을 수용한 대신에 자본측이 생산성 연동 임금을 제공하는 노사타협이 이루어졌다. 노동편성에서의 노동측의 양보와 임금형성에서의 자본측의 양보를 통해 노사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를 포디즘적 노사타협이라 한다. 국가수준에서는 최저임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 등 복지국가의 친노동적 제도가 실시됨으로써 노동자의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급타협이 이루어짐으로써 포디즘의 헤게모니 블록이 형성되었다. 이 헤게모니 블록에는 발전모델을 주도하는 대 자본가를 중심으로 중소 자본가와 신중간층 그리고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가 포함되었다. 생산성 연동 임금제, 최저임금제도, 누진세제도, 실업보험제도 등이 존재하여 포디즘적 발전모델이 구축된 사회에서는 국민의 2/3정도가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포디즘의 사회는 ‘2/3사회’라 불린다.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사회 패러다임은 어떠한가? 우선 노동과정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당연시하는 사고를 들 수 있다. 생산현장 노동자는 작업지시에 따라 단순반복노동을 숙달되게 실행하는 것만이 요구되고, 지식을 가지거나 자율성을 가져서는 안되고 가질 필요도 없다는 사고 방식이다. 이는 현장노동자에 대해 노동과정에서의 어떠한 지적 참가(intellectual involvement)도 부정하는 테일러주의적 패러다임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소비가 미덕’이라는 소비주의(consumerism) 사고이다. 포디즘의 거시경제적 순환에서 필수적인 대량소비를 위한 사회적 요구가 ‘소비가 미덕’이라는 관념을 형성시킨다. ‘저축이 미덕’이라는 사고는 부적합한 낡은 사고로 치부된다. 이에 따라 절약 정신은 사라지고 향락과 사치 그리고 낭비를 부추기는 소비문화가 형성된다. 소비주의는 ‘소비자가 왕’이 되는 소비자 주권(consumer's sovereignty)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기업의 조직적인 광고를 통해 소비가 조장되어 ‘소비자가 봉’이 되는 타율적 소비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국가는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케인즈주의 관점, 국가가 국민의 기초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복지국가의 사상을 제시한 비버리지(Beveridge)의 관점이 포디즘의 사회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디즘적 패러다임에는 포드와 케인즈와 비버리지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장지상주의는 또 다른 포디즘적 패러다임이다. 성장과 개발이 지상의 목표이고 생태계 유지와 환경보전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사회진보의 기준은 경제성장, 구매력 증대, 소비수준의 향상으로 간주된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득, 더 많은 소비’를 통한 행복 추구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쾌락주의적 생산력주의’ 모델이 포디즘적 패러다임이다. 포디즘적 패러다임이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미국적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이라 할 수 있다. 4. ‘포디즘’의 위기와 그 원인 포디즘은 미국에서 먼저 구축되었지만 2차대전 이후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들로 확산되어 간다. 미국이 서유럽과 일본에 기술과 자본을 이전하여 산업을 재건한 마샬 플랜(Marshall Plan)이 포디즘을 확산시킨 계기였다. 포디즘적 발전모델이 구축됨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는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다.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거시경제적 성과는 어떠한가? <표 1>에서 1870년이후 OECD 국가들의 경제성장 관련 지표를 보면, 국내총생산(GDP), 1인당 국내총생산, 1인 1노동시간당 국내총생산, 고정자본 스톡 모두 1950-1973년 사이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에 비해 훨씬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포디즘적 발전모델이 구축된 이후 약 30년간(1945-1974) 선진자본주의는 고도성장을 달성한다. 이에 따라 ‘고성장-완전고용-고복지’, ‘고생산성-고임금’으로 특징지워지는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표 1>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성장 관련 지표 연평균 성장률: % ????????????????????????????????????????????????????????????????????????????????????? 시 기 GDP 1인당 GDP 1인 1노동시간당 고정자본 스톡 GDP ????????????????????????????????????????????????????????????????????????????????????? 1870-1913 2.5 1.4 1.6 2.9 1913-1950 1.9 1.2 1.8 1.7 1950-1973 4.9 3.8 4.5 5.5 1973-1979 2.5 2.0 2.7 4.4 ????????????????????????????????????????????????????????????????????????????????????? 주: OECD 16개국 산술평균임 자료: A. Maddison, Phases of Capitalist Development, 1982, 山田銳夫, 레규라시옹 이론 1993, 講談社, 104-105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포디즘적 발전모델은 1973년 석유파동이라는 외적 충격을 계기로 위기에 빠진다. 1974년 이후 이윤률의 하락과 생산성 둔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 결과 기업의 투자활동이 위축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며 실업률이 크게 증대한다. <표 3>에서 OECD국가의 GDP, 생산성, 고용 동향을 보면 1960-1973년 시기에 비해 1973-1989년 시기가 경제성장률과 생산성 증가율이 현저하게 둔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3>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생산, 생산성, 고용 추이 연평균 증가율: % ????????????????????????????????????????????????????????????????????????????????????? 구분 시기 OECD 유럽 미국 일본 ????????????????????????????????????????????????????????????????????????????????????? GDP 1960-1973 4.8 4.7 4.0 9.6 1973-1989 2.7 2.2 2.6 3.9 생산성 1960-1973 3.7 4.3 2.1 8.2 1973-1989 1.6 1.8 0.6 3.0 고용 1960-1973 1.1 0.4 1.9 1.3 1973-1989 1.1 0.4 2.0 0.9 ????????????????????????????????????????????????????????????????????????????????????? 자료: OECD, Historical Statistics, Economic Outlook, 필립 암스트롱 외, 김수행 역,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1993, 동아출판사, 350쪽에서 재인용 <표 4>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실업률 단위: % ????????????????????????????????????????????????????????????????????????????????????? 시 기 유럽 미국 일본 ????????????????????????????????????????????????????????????????????????????????????? 1961-1970 2.2 4.7 1.2 1971-1980 4.0 6.4 1.8 1981-1990 9.0 7.1 2.5 ????????????????????????????????????????????????????????????????????????????????????? 자료: European Commission, European Economy, No.63, 1997 pp.68-69 실업률은 <표 4>에서 보는 것처럼, 유럽의 경우 1960년대 2.2%에서 1970년대 4.0%, 1980년대 9.0%로 증가하고, 미국의 경우 1960년대 4.7%에서 1970년대 6.4%, 1980년대 7.1%로 증가한다. 이윤율과 이윤 몫(이윤/부가가치)은 <표 5>에서 보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인 1950, 1960년대 동안 높은 수준에 있다가 포디즘이 위기에 빠진 1970년대 이후 크게 하락한다. <표 5>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이윤율 및 이윤 몫 추이 기간 평균: % ????????????????????????????????????????????????????????????????????????????????????? 시 기 OECD 유럽 미국 일본 ????????????????????????????????????????????????????????????????????????????????????? 이윤율 1952-1959 26.8 22.6 29.3 26.7 1960-1969 26.2 17.4 29.4 48.1 1970-1979 17.8 13.3 18.4 28.5 1980-1987 13.1 13.3 12.4 14.6 이윤 몫 1952-1959 23.5 27.6 20.3 29.1 1960-1969 23.9 23.4 21.2 40.6 1970-1979 19.6 18.2 17.6 28.7 1980-1987 17.1 17.7 14.8 20.1 ????????????????????????????????????????????????????????????????????????????????????? 주: 제조업의 순이윤율과 순이윤 몫임 자료: 필립 암스트롱 외, 김수행 역,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1993, 동아출판사, <부표 1> 및 <부표 3>에서 정리 이와 같이 1970년대 이후 성장률, 생산성, 이윤율 등의 대폭적인 하락은 포디즘이 위기에 빠졌음을 말해 준다. 포디즘의 위기는 1980년대까지 지속된다. 이 위기 과정에서 포디즘은 해체되어 간다. 그러면 포디즘의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자본주의에서 경제위기는 무엇보다 이윤율 하락으로 표출된다. 그렇다면 포디즘적 발전모델에서 이윤율 하락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이윤율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P/K=(P/Y)?(Y/L)?(L/K) 여기서 P는 이윤, K는 자본투입량, Y는 산출량, L은 노동투입량을 나타낸다. 이윤율(P/K)은 이윤 몫(P/Y), 노동생산성(Y/L), 자본-노동비율(K/L) 이라는 세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윤율의 하락은 ① 이윤몫(P/Y)의 하락, ② 노동생산성(Y/L)의 하락, ③ 자본-노동비율(K/L)의 상승 등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포디즘의 위기 속에서 나타난 이윤율 하락도 이러한 세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이윤 몫은 실질임금 상승과 노동생산성 둔화로 인한 이윤압박(profits squeeze)으로 하락하였다. 유럽에서 실질임금은 1960년대 말에 큰 폭으로 상승한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실질임금 상승률은 1965-1967년에 2.9%이었으나 1968-1969년에 5.4%이었고, 독일의 경우 1966-1968년에 연평균 3.3% 증가했으나 1969-1970년에 9.2% 증가하였다. 이러한 노동생산성 상승을 초과하는 이러한 ‘임금폭발’은 이윤을 압박하여 이윤 몫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노동생산성은 포디즘적 노동과정 즉 테일러리즘의 효율성 하락으로 인해 그 상승이 둔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구상과 실행을 엄격히 분리하고 육체노동을 탈숙련시키며 위계적 노동통제를 하는 테일러리즘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과 반항이 증대함에 따라 생산성 상승의 원천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테일러리즘은 처음에는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지만, 노동자들의 교육수준 향상, 자의식 증대, 직무만족과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욕구 증대에 따라 점차 효율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테일러리즘에 기초한 포디즘적 대량생산체제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한편 기업간 경쟁 격화에 따른 과잉투자로 인해 자본-노동비율이 상승하였는데, 이는 이윤율을 하락시킨 요인의 하나였다. 과잉투자 혹은 과잉축적은 한편에서는 노동력 수요 증대로 임금을 상승시키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설비를 초래하여 이윤율을 하락시켰다. 이와 같이 생산성 둔화로 나타난 ‘생산성 획득의 위기’에 이윤 몫 감소로 나타난 ‘생산성 분배의 위기’가 중첩되어 이윤율이 하락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효수요를 증대시키기 위한 케인즈주의적 재정금융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뿐이었다. 그래서 생산은 침체하는데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이 출현한다. 이러한 공급측 요인과 함께 수요측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소비자 욕구의 다양화와 가변성 증대에 따라 다품종 소량소비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소품종 대량생산체제와 모순되었다. 이와 같이 다품종 소량소비로의 소비패턴 변화에 따라 전용기계에 의해 소품종을 대량생산하는 경직적인 포디즘의 기술이 부적합하게되어 대량생산체제에 위기가 발생한다. 아울러 글로벌화의 진전에 따른 국제경쟁의 격화로 국내수요가 정체되고 국민국가가 유효수요를 통제하여 성장을 관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축적체제의 불안정성이 크게 증대하였다. 한편, 생산성의 둔화와 임금의 경직성으로 인해 고생산성과 고임금의 호순환 구조가 깨어진다. 이에 대응하여 자본가들은 임금을 삭감하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구한다. 경기변동과 노동시장 상황에 따라 임금과 고용을 신축적으로 조정하려는 노동시장 유연화 시도로 포디즘적 노사타협이 해체되고 임노동 관계가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길로 나아간 미국과 영국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아울러 사회보장제도의 위기가 나타난다. 사회보장지출 증대로 인한 재정적자 누적, 기업의 조세 부담 증대는 자본축적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아울러 사회보장 확대에 따른 실업의 규율효과가 감소하여 자본의 노동통제가 그만큼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자본과 국가가 사회보장지출을 삭감하려는 시도를 한다. 여기서 포디즘 발전모델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복지국가가 해체되어 간다. 그리고 자본의 세계화(globalization)가 진전함에 따라 환율, 주가, 금리가 세계경제 상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 성장, 고용, 물가 등 에 대한 국민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의 효력이 약화되었다. 종래의 케인즈주의적 개입정책의 유효성이 떨어진 것이다. 아울러 세계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국가간의 성장에 균형을 맞추고 세계경제를 조절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협약과 같은 국제적 조절양식이 결여되어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이 크게 증대한다. 세계무대에서 유럽과 일본이 등장하여 미국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팍스 아메리카나가 해체됨에 따라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이 증대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에 기초한 포디즘은 하나뿐인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생태위기(ecological crisis)를 초래하였다. 원재료와 에너지와 같은 자연자원의 대량사용에 기초한 대량생산은 인류의 공유재산인 자연자원을 파괴하고 고갈시켰으며 대량의 이산화탄소(CO2)와 산업폐기물을 배출하였다. 대량소비는 에너지의 대량 사용과 생활 쓰레기 대량 배출을 가져와 환경을 파괴하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필요로 하는 대량의 에너지를 화석 에너지에 의존하는데 한계에 부딪히자 개발한 원자력 에너지는 지구의 생존과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공할 흉기로 등장하였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도래시킨 포디즘은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지 모를 생태위기를 야기시켰다. 이상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테일러리즘의 모순으로 인한 생산성 획득의 위기, 노동생산성 둔화와 실질임금 상승으로 인한 생산성 분배의 위기, 세계화로 인한 수요의 정체와 불안정 등의 요인이 중첩되어 축적체제의 위기가 발생하고, 포디즘적 노사타협의 해체, 복지국가의 해체,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정책의 효력 약화, 팍스 아메리카나의 해체로 인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의 증대 등과 같은 요인들이 중첩되어 조절양식의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포디즘적 발전모델은 총체적 위기에 빠져 해체되기 시작한다. 5. 포디즘 이후의 발전모델 포디즘의 위기는 1970년대 중반이후 점차 심화되어 1980년대에는 해체 현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포디즘이 초래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두 가지 길이 나타난다. 포디즘 위기 탈출의 두 가지 길은 포디즘 이후의 서로 다른 발전모델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하나는 네오 포디즘(Neo-Fordism)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 포디즘(Post-Fordism)의 길이다. 우선, 네오 포디즘은 포디즘 위기의 주요 원인을 임금 및 고용의 경직성과 사회보장지출 증대에 따른 고비용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윤률 하락의 원인을 임금상승으로 인한 이윤 몫(P/Y)의 하락 즉 생산성 분배의 위기에서 찾는다. 임금 상승은 포디즘적 노사타협에 의한 임금 및 고용의 경직성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임금 및 고용의 경직성을 폐지하는 것, 다시 말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구하는 것이 네오 포디즘의 위기탈출 전략이다. 즉 생산성 연동 임금제를 해체하고 노동자를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하며, 임금을 경기변동과 노동시장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조정하는 자본의 권능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본은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거나 무노조 전략을 구사하여 단체교섭을 약화시키거나 폐지하려는 경영방식을 추구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는 테일러리즘적 노동과정은 그대로 두었다. 극소전자(ME) 기술과 정보기술을 이용할 경우 종래의 테일러리즘적 노동과정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온존?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네오 포디즘을 ‘컴퓨터 지원 테일러리즘’(computer-aided Taylorism)이라 부른다. 그리고 테일러리즘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네오 테일러리즘(Neo-Taylor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부는 노동시장에 대한 친노동자적 규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하여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촉진하였다. 그리고 국영기업 혹은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공공부문의 노사관계가 시장원리에 지배받도록 하였다. 사회보장지출을 대폭 삭감하여 복지국가가 후퇴하거나 해체되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증대시키는 케인즈주의 거시경제정책은 후퇴하고 자유시장의 완전성을 믿고 국가 개입에 반대하는 통화주의 정책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에 미국의 Reagan정부와 영국의 Thatcher정부와 같은 보수정권이 집권하면서 나타났다. 이 정권들이 추구한 정책 노선이 바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에 이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글로벌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다른 선진국, 신흥공업국, 이행도상국(구사회주의권) 등에로 범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이들 국가들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네오 포디즘’적 발전모델을 따르고 있다. 외환위기를 당한 채무국에 강제되고 있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도 그러하다. 네오 포디즘과는 달리 포스트 포디즘의 길은 포디즘 위기의 주요 원인을 대량생산체제와 테일러리즘적 노동과정의 비효율성에서 찾는다. 이윤율 하락의 원인도 임금인상으로 인한 이윤 몫 감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노동생산성(Y/L) 둔화와 과잉설비(K/L의 증대)에서 찾는다. 즉 생산성 분배의 위기가 아니라 생산성 획득의 위기에서, 고비용 구조가 아니라 저효율 구조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생산성 위기는 기본적으로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는 테일러리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따라서 생산체제 및 노동과정 혁신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는 것, 고효율 생산조직을 창출하는 것이 위기탈출의 전략이다. 즉 임금과 고용의 경직성(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노동과정을 테일러리즘으로부터 반테일러리즘(Anti-Taylorism)으로 전환하려는 전략이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 매뉴얼화된 단순작업, 하이에라키적 명령조직이란 테일러리즘 원리를 완화하거나 폐기하고 참가의식을 가진 다기능 숙련노동으로 작업조직을 재편성하는 것, 노동자들의 지식과 창의성을 동원해서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시키려는 것이 이 전략의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지식과 창의성을 노동과정의 개선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때의 자율성은 생산체제가 부과하는 책임을 다하는 자율성 즉 ‘책임있는 자율성’(responsible autonomy)이다. 노동자가 자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교섭에 기초한 참가’(negotiated involvement)가 필요하다. 여기서 교섭에 기초한 참가란 노동자가 생산성 분배에 대해서 교섭하고 생산성 획득에 적극 참가하는 것이다. 요컨대 ‘교섭에 기초한 참가’를 통해 노동자에게 ‘책임있는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능력과 창의성을 동원하여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려는 전략이 포스트 포디즘의 길이다. 그리고,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기업이 임금을 동결 내지 삭감하고 고용을 줄이는 방어적 전략을 취하는 ‘네오 포디즘’과는 달리, 포스트 포디즘은 노동조직을 유연하게 하여 노동자를 배치전환 하거나 교육훈련을 통해 노동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공격적 전략을 취한다. 즉 네오 포디즘은 수량적 유연성(numerical flexibility) 혹은 외적 유연성을 추구하지만 포스트 포디즘은 기능적 유연성(functional flexibility) 혹은 내적 유연성을 추구한다. 한편 포스트 포디즘에서는 복지국가(welfare state)의 위기를 복지의 축소가 아니라 복지공동체(welfare community)의 건설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 신자유주의적 네오 포디즘은 복지지출의 삭감과 사회보장제도의 폐지, 복지를 시장기능에 맡기는 사보험 실시 등을 통해 복지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와는 달리 포스트 포디즘에서는 시장부문도 정부부문도 아닌 ‘제3부문’(third sector)을 건설하여 사회복지를 지역공동체가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공동체 지향 제3부문’은 새로운 복지모델일 뿐만이 아니라 경제관계를 인간화하는 새로운 발전모델의 핵심 요소로서 의미를 가진다. 아울러 포스트 포디즘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실업을 줄이고 고용을 창출하는 대안을 지향하며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생태주의(ecology)를 지지한다. 포스트 포디즘적 발전모델은 1980년대에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이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가 걸을려고 했던 길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자본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함에 따라 이 발전모델은 위기에 빠진다. 20세기말인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과연 글로벌화 속에서 이 발전모델이 생존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발전모델의 생명력이 다했다고 할 수 없다. 21세기가 희망의 세기가 되기 위해서는 포스트 포디즘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6. 맺음말: 포디즘 성쇠의 교훈 포디즘은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포디즘의 흥망성쇠의 교훈은 무엇인가? 포디즘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고성장과 완전고용 그리고 고복지를 달성하였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한 세대동안 그야말로 ‘황금시대’라고 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였다. 포디즘의 시대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측면이 있는가 하면 하락시킨 측면도 있다. 우선, 포디즘은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임금 상승 및 소득증대로 국민의 물질적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자동차, 가전제품 등 내구소비재의 대량소비를 통해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욕구가 상당정도 충족되었다. 포디즘적 노사타협에 의한 고용안정, 최저임금제도, 실업보험제도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복지국가를 통해 전체 국민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포디즘의 여러 제도들은 소득분배를 상대적으로 균등화시켜 저소득층의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은 약화되었다. 신중간층과 노동자들의 소득과 부가 지속적으로 증대하여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었다. 따라서 포디즘의 시대 동안 선진자본주의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수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디즘은 삶의 질을 하락시키기도 했다. 포디즘의 대량생산체제에서의 테일러주의적 노동과정은 현장 노동자들에게 구상기능을 없애고 세분화된 직무에서 단순반복노동을 행하게 하며 위계적 노동통제에 따르게 함으로써 현장 노동자들의 노동소외를 크게 심화시켰다. 아울러 컨베이어 시스템은 노동강도를 크게 증대시켜 노동력의 소모를 가속화하였다. 따라서 다수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의 질(Quality of Working Life)은 오히려 하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은 에너지 및 자연자원 사용 증대와 산업폐기물 배출증대로 인해 생태계 파괴를 가속화시켰다. 대량소비는 생활쓰레기를 대량배출하여 환경오염을 심화시켰다. 지구촌의 생태위기는 상당정도 포디즘적 발전모델의 산물이다. 그래서 소득은 증대했지만 마시는 물과 숨쉬는 공기는 오염되어 생명이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소비주의의 만연으로 인해 상품관계를 매개로 하지 않는 인간적 삶은 오히려 궁핍화되었다. 물질만능주의의 지배로 인해 사회는 더욱 비인간화되었다. 이와 같이 포디즘은 인간의 삶의 질을 증대시킨 빛과, 삶의 질을 떨어뜨린 그림자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포디즘이 인간의 삶의 질에 미친 순효과가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성장지상주의자들은 당연히 플러스라고 말할 테지만 생태주의자는 마이너스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포디즘의 성쇠가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포디즘은 생산성 연동 임금제, 단체교섭제도, 최저임금제도,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비교적 공평한 제도들을 통해 고도성장을 달성하였다. 따라서 포디즘 성공의 교훈은 ‘공평성 없이 효율성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포디즘은 직무가 세분화되고 고정되어있는 경직적인 노동조직, 관료화된 경직적인 대량생산체제, 관료화되고 인센티브 없는 사회보장 시스템 등의 요인 때문에 위기에 빠져 해체되었다. 따라서 포디즘 실패의 교훈은 ‘유연성 없이는 효율성 없다’는 것이라 하겠다. 포디즘이 이룬 공평성을 이어받고 시스템과 조직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유연성을 통해 새로운 효율성을 실현하는 대안적 발전모델을 21세기에 구축하기 위해서는 포디즘이 남긴 이러한 교훈을 음미할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브와예 지음, 정신동 옮김, 『조절이론』, 학민사, 1991 아랑 리피에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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