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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자동차 역사 바꾼 도요타의 미국 견학 / 홍성욱

기술 속 사상/(23) 포스트 포드주의 고급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 선진국의 공장을 방문하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문은 가끔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뜻밖의 결과를 낳곤 한다. 1950년 봄, 일본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에 도요타 회사의 자동차 생산을 담당하던 도요타 에이지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사의 로그공장을 방문했다. 그의 목적은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조립라인에서 작업을 하던 거대한 로그공장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공장을 방문한 뒤에 도요타 에이지가 내린 결론은 포드사의 대량생산 방식이 일본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본의 자동차 수요는 미국처럼 대량 소비가 가능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또 일본 사람들은 한가지 모델에 만족하기보다 다양한 모델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전후의 일본 경제에서는 거대한 공장과 같은 높은 설비투자를 할 수가 없었으며, 공장의 노동자들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단순 조립 노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품을 정교하게 깎고 여러 종류의 금형을 제작해야 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은 숙련된 장인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지금도 최고급 스포츠카는 수제품임을 기억하라), 헨리 포드는 인간으로부터 이 숙련을 빼앗아 이를 기계에 부여했다. 즉 포드의 공장에는 ‘숙련된’ 기계인 전용기계들과 탈숙련된 단순 조립 노동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숙련노동을 대체한 포드의 전용기계는 매우 복잡하고 비쌌으며, 이를 설치하거나 바꾸는 데에 많은 설비투자가 필요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포드회사가 모델 T에서 모델 A로 생산라인을 바꾸는 데 오랜 시간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미국의 절반만 투자해 생산 두배로 도요타 에이지는 미국과 일본을 비교한 뒤에 ‘미국의 절반만 하자’고 판단했다. 전쟁 때문에 황폐화된 일본에는 자원이 부족했고,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생산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이었다. 절반의 장비와 기계, 절반의 노동력, 절반의 공장부지, 그렇지만 하나의 제품에서 새로운 제품으로 옮겨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절반으로! 절반의 설비투자로 신제품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은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포드사의 혁신이 거대한 설비투자 때문에 늦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도요타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이를 가능하게 할 기술혁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우선 새로운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금형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도요타사의 엔지니어 오도 다이이치는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프레스 공정에서 간단한 금형교환기술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는 생산을 유연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신속하게 많이 생산해서 원가절감을 이루었던 포드식의 대량생산의 이점에, 유연성과 양질의 제품 생산이라는 수공업생산의 이점을 결합한 혁신이었다. (도요타의 생산체계는 이후 대량mass생산과 대비되어 린lean생산으로 이름 붙여졌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핵심은 유연성에 있었다. 그렇지만 유연한 금형제작기술은 도요타 혁신의 끝이라기보다는 그 시작에 불과했다. 또 한번의 새로운 혁신은 전혀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찾아졌다. 오노 다이이치는 1956년에 미국을 방문했는데, 미국의 자동차 공장보다는 수퍼마켓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수퍼마켓은 물건을 고르는 구매자가 자신이 원하는 수량만큼의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면 매니저가 빈 진열대를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다시 채워넣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일본에서 수퍼마켓을 구경하지 못했던 오노에게 미국의 수퍼마켓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서 물건이 채워지는 방식을 주시했고, 일본에 돌아와서 이를 자동차 생산에 응용했다. 기존의 자동차 생산은 부품의 공급에서 시작했다. 생산라인은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해서 다음 라인으로 넘겼고, 그 다음 라인은 이를 받아서 다음 단계의 조립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앞 라인이 뒷 라인의 부품에 의존하다보니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에 항상 재고가 문제가 되었다. 재고 혹은 낭비(muda むだ)를 줄이는 것은 ‘카이젠’이라고 불리던 도요타 공장의 오랜 경영철학이었는데, 미국에서 돌아온 오노는 공장의 생산라인을 수퍼마켓의 진열대 식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소비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골라 들듯이, 한 생산라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품만을 이전 생산라인으로부터 취사선택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생산라인은 다음 생산라인을 위한 수퍼마켓이 되는 셈이었다. ‘저스트 인 타임’과 ‘간판’ 효과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혹은 JIT) 생산방식으로 불리게 된 이 시스템은 뒷 공정에서 필요한 만큼만 앞 공정의 부품들을 인수함으로써 재고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도요타 회사가 시장의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러한 공정상의 혁신이 존재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후공정에서 전공정에 생산량, 시기, 방법, 순서, 운반량, 운반시기와 같은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간판(kanban)’이었다. 간판은 조그만 사각형의 비닐 봉투에 종이쪽지를 집어넣는 것으로, 이는 생산과 조립에 대한 지침을 전달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간판 스스로가 부품과 함께 움직임으로써 생산 공정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했다. 간판이 쌓여있는 곳은 당장 관리를 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도요타 회사의 생산체계는 노동자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했다. 포드 공장을 희화화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포드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와 같은 생산의 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불량부품을 만들어 내거나 조립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비롯한 공장의 생산라인은 24시간 계속 돌아갔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요타 키운 ‘유연성’이 위험으로 반면에 도요타 회사의 노동자들은 불량 부품이 만들어졌거나 조립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생산라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시스템은 ‘지도카’(Jidoka - 자동화)라고 명명되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일반적인 자동화를 의미하는 automation이 아니라 autonomation이라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인간의 지능과 손길을 기계에 부여하는 자동화라는 뜻이다. 일본이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회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를 통해서 일본의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에서 미국차를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포드나 GM과 같은 미국의 거대 자동차 제국들은 일본의 도요타의 모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요타 에이지와 오노 다이이치가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미국 공장을 방문한 지 30년 만에, 미국의 엔지니어와 경영학자들이 도요타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서 일본 공장을 찾아왔다. MIT의 경영학자들은 5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서 5년간 일본의 도요타를 연구했다. 이들의 책은 1990년에 <세상을 바꾼 기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무렵부터 ‘유연성’은 생산은 물론 경영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유연한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충족되었지만, 이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 급변하게 만들었다. 소비자의 수요를 안정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이 어려워지고 신제품의 생산 주기는 더 단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산품, 소비패턴, 노동과정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자체도 유연해졌다. 범세계적인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평생직장을 보장하던 도요타 회사마저도 임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종업원들의 해고를 감행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유연한 것은 불안정한 것, 심지어 위험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59037.html 접속일: 200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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