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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량생산 대중소비, 포드주의 / 송성수

기술 속 사상/(22) 대량생산 대중소비, 포드주의 철도가 19세기를 상징하는 교통수단이라면 20세기 이후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자동차이다. 내연기관을 이용한 가솔린 자동차는 1880년대 독일에서 처음 발명되었지만 1910년대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만 해도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자동차의 소유가 보편화되는 이른바 ‘마이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자동차의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이다. 포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계공의 길을 걸었고 청년 시절부터 자동차에 도전하였다. 그는 1896년에 자동차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후 기술자 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19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그 회사는 오늘날에도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와 함께 미국 자동차업계의 ‘빅 3’로 불리고 있다. 포드사의 급속한 성장은 ‘모델 T’에서 비롯되었다. 포드는 모델 T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수많은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이다. 최고의 재료를 쓰고 최고의 기술자를 고용하여 현대 공학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디자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적당한 봉급을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입해서 신이 내려주신 드넓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만 해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기술자가 힘들여 제작한 고가품으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생활필수품으로서의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의 출발점은 동일한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핀은 다른 핀과 똑같고, 성냥 또한 그렇다. 이것은 자동차도 마찬가지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립라인 완성→작업 단순화 1908년 10월에는 검정 색상의 소형자동차인 모델 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새로운 합금강을 사용하여 견고할 뿐만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델 T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모델 T에게 ‘틴 리치’(Tin Lizzie) 혹은 ‘플리버’(Flivver)라는 애교스러운 별명을 붙였다. 틴 리치는 ‘털터리 자동차’를, 플리버는 ‘싸구려 자동차’를 뜻한다. 포드주의의 두 기둥: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포드사는 1910년에 4층으로 된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 공장을 신설하였다. 그것은 작업이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최신 공장이었다. 4층에서는 차체가 만들어지고, 3층에서는 바퀴에 타이어가 부착되면서 차체에 페인트가 칠해졌다. 2층에서 모든 조립이 끝난 자동차는 경사면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와 최종 검사를 받았다. 모델 T의 생산대수는 1910년의 19,000대에서 1913년에는 248,000대로 크게 증가하였다. 하이랜드 파크를 건설하면서 포드는 생산과정을 연속화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당시에 그는 시카고로 여행하던 중에 푸줏간 주인이 도살한 소를 손수레로 이동시키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위별로 고기를 발라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포드는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계들을 그룹별로 묶어 본 후 나중에는 생산물을 중심으로 기계체계를 구성하였다. 결국 포드사의 생산과정은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로 연결된 조립라인(assembly line)이 구축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물이 이동하고 노동자의 작업 위치는 고정되었는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인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는 이러한 상황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부’ 만들어 노동자 생활 조사 조립라인이 완성되자 포드사의 생산성은 급속히 향상되었다. 그것은 1914년의 자동차 생산량과 노동자의 수를 비교해 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당시에 포드사에서는 13,000명의 노동자들이 26만 72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던 반면, 미국의 나머지 299개 자동차업체들은 28만 6,770대를 생산하기 위하여 66,350명의 노동자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의 단순화는 높은 이직률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작업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무슨 노동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1913년 한 해 동안 포드사는 100명의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무려 936명을 고용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포드는 1914년 1월 5일에 ‘일당 5달러’(Five-Dollar Day)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루 8시간 노동에 대하여 최소한 5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미국의 노동자들이 하루 9시간 일한 대가로 2.38달러를 받았으니, 포드사는 통상적인 임금의 2배 이상을 보장했던 셈이다. 포드는 이를 가리켜 “내가 한 것 중에서 가장 멋진 비용절감 운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와 동시에 포드사는 노동자의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사회부’(Sociological Department)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사회부는 노동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노동자의 인간관계, 경제적 여건, 생활습관 등을 조사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포드사의 경영진은 해당 노동자가 일당 5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였다. 음주나 도박에 문제가 있는 노동자들은 경고를 받았고 그것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해고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포드사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을 자동차 고객층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에 모델 T의 가격은 290달러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포드사에 근무했던 일반 노동자의 3달치 봉급과 비슷하였다. 이제 일반 노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포드사는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정책을 통해 ‘대량생산’(mass production)과 ‘대중소비’(mass consumption)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는 풍요한 경제와 모델 T를 배경으로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돌입하여 1930년에는 가구당 1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량생산과 대중소비를 연결하기 위한 포드사의 실험은 이후에 ‘포드주의’(Fordism)로 불렸다. 그러나 포드사의 온정주의적 정책도 경영 환경이 나빠지자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었다. 경영 환경이 악화된 이유 중의 하나는 포드사가 한 가지 차종에 집착함으로써 소비자의 새로운 기호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4년은 포드에게 역설적인 한 해였다. 1924년은 모델 T의 생산량이 1천만 대를 넘어섰던 해이자 제너럴 모터스에서 시보레(Chevrolet)가 출시한 해였다. 시보레는 모델 T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신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크랭크 대신에 전자 시동장치가 부착되었으며, 무거운 톱니바퀴식 변속기 대신에 부드러운 3단 기어가 장착되었다. 시보레는 자동차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지만, 포드는 자신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검정색의 모델 T에 끝까지 집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차가 팔리지 않는 이유를 몰랐으며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포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객은 누구나 원하는 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이 까만 색깔인 한.” “까만 차가 아니면 차가 아니다” 포드사의 상대적 쇠퇴와는 별도로 포드주의는 오랫동안 호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소설의 백미로 평가되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현대사회에 ‘A.F.’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After Ford’의 약칭으로서 포드가 현대사회를 건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했으며, 거기에는 포드주의의 확립과 확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포드주의는 상당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포드주의는 소비자의 수요가 다양화되는 추세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막대한 설비투자나 임금의 상승과 결부되어 자본의 수익성을 감소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강화를 배경으로 포드주의는 노동을 비(非)인간화하는 상징으로 간주되어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결국 포드주의는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퇴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포스트 포드주의’(post Fordism)가 모색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송성수/부산대 교양교육원 조교수·과학기술학 triple@pusan.ac.kr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56986.html 접속일: 200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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