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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27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1)
    로젤루핀
  2. 2007/12/24
    노무현 정권 여성노동정책 평가
    로젤루핀
  3. 2007/12/22
    위로
    로젤루핀
  4. 2007/12/20
    언니, 대통령 탄핵할라면 어떻게 해야해요?
    로젤루핀
  5. 2007/12/07
    5만원권
    로젤루핀
  6. 2007/12/01
    계란한판(6)
    로젤루핀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어김없이 한해가 가고 새해가 오고 있습니다.

 

해가 가는 것과 무관하게 생존의 벼랑에 선

노동자는 투쟁하고 있고, 투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투쟁하는 동지들의 땀과 피가 쌓여서

반드시 새 날로

나아가는 힘이 될 거라 믿습니다.

 

노무법인 O 역시 세월을 흘려보내지 않고 쌓고, 쌓아

새날의 작은 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지들께서도 새날을 향한 새해를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2007. 12.

 

 

 

 

 


 

 

연말연시 사무실로 날아오는 우편물 중에는

다만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진솔한 이야기들이 있기도 하다.

 

따뜻한 이야기

힘이되는 이야기

 

MB 당선 이후 곧바로 몰아닥친 것이

뉴코아-이랜드 노조간부들의 해고와

KTX노조와의 합의사항 번복이지만

그러니 2008년은 얼마나 더 힘들겠느냐, 싶겠지만

 

그렇지만 다만 암울하지만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따스한 마음 힘이되는 마음들이 모여있다는 사실때문.

 

나 역시

시간을 차곡차곡 잘 쌓아가봐야겠다.

아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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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여성노동정책 평가

 

수일을 붙들고 있었지만

영 맘에 안들어...짜집기 누더기 동어반복...

그러나 버릴 수도 없는거...일단.

 

토론이 필요해.

토론을 하고 더 다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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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위기의 책임전가에 맞서 여성의 노동권과 삶의 권리를!

-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 평가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걸고1) 당선된 노무현은 지난 5년간 각종 여성정책을 제출함과 동시에, 관련한 정부기관을 재편하거나 신설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왔다.2) 참여정부 시절 한국사회에서는 여성 관련한 중장기적 정책이 유래없이 다양하고도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5년 간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은 과연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KTX 승무원 투쟁을 비롯해서 뉴코아-이랜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는 여성경제활동 관련한 최근의 통계3)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전문․관리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매년 늘고, 여성의 지방의회 진출은 4년 전에 비해 4배 이상 급증하는 등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고는 하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여성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2006년을 기준으로 남성의 63.4%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10년 전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보장’이라는 목표는 실패한 것인가? 이에 대해 여성의 높은 비정규직 비율과 성차별적인 노동시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인지적 노동시장정책의 내용이 취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이 되기도 한다.4) 이는 일견 틀린 분석은 아닐 수 있으나, 그러나 목표달성을 위한 정책내용의 취약함에서 원인을 찾기 보다는 목표설정 자체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즉 노무현 정부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보장’이라는 것은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위기극복을 위한 여성인력 활용에 불과했다는 점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달콤한 약속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 배경과 목표를 정확히 분석하고 비판을 진행하는 데에서부터 여성의 현실은 비로소 여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1) 노무현 대통령 여성공약(여성정책 13대 부문 70대 과제. 150대 핵심과제)  

○ 여성경제활동 참여율을 선진국 수준인 60%(OECD기준)로 높임

○ 여성 일자리 50만개 창출 - IT 10만/ 전문직(간호원 통역사 보육교사 영양사 관광 미용사 등) 10만/ 여성창업 10만/ 사회복지분야(복지간병인 제도화 등) 15만/ 교육분야 5만

○ 공공 및 사회복지 서비스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 신규 대졸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향상을 위해 취업지원창구 설치, 여성채용박람회 확대

○ 여성의 직업능력개발을 위해 직업교육 확대 유급 교육 훈련휴가제 도입 등 훈련기회 확대

○ 여성인력개발센터의 지원확대

○ 여성과학기술인력지원법 조기 정착 및 채용목표제 확대

1)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여성의 사회참여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보육, 가족정책 병행추진’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기조 하에서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었으며, 호주제가 폐지된 것과 더불어 중장기 보육계획 수립 및 건강가족기본계획 마련 등과 같은 각종 중장기 보육, 가족정책이 제출되었다. 이처럼 여성이 가정에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직장․가정의 양립 지원체계를 마련함과 동시에 여성 고용 확대를 위한 각종 차별 시정 정책과 법 적용이 확대되었다.

 

1) 통계청,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2007.7.3 

 

1) 최상림․최명숙, ‘참여정부 여성노동정책 평가 및 향후 과제’, “참여정부4년 여성정책 평가 및 정책제언 토론회”(한국여성단체연합주최, 2007년 2월)

 

 

 


노무현 정부 여성노동정책의 배경 : 신자유주의 위기극복을 위한 여성인력 활용

‘여성인력개발’이라는 명칭에서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은 다만 경제논리에 종속되어, 여성을 어떻게 노동시장의 인력으로 활용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떠한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는데 지식기반-고부가가치 산업이 요구하는 전문성과 함께 높은 감수성과 창의력을 갖춘 여성인력이 경쟁의 무기가 되며, 전체 경제구조에서 서비스업의 구성비가 높아지는데 발맞추어 ‘여성인력’이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견해1)에 전적으로 부합되었던 것이다. 이는 <여성인력개발 종합계획(‘06~’10)>2)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여성인력개발 종합계획> 정책개요



목 표

 

여성경활참가율 55% 달성

 

여성 일자리 60만개 확대



<5대 부문 15개 중점과제 추진>

1. 다양한 여성 일자리의 전략적 확대

 

2. 여성능력개발 및 고용기회 확대

 

3 여성인력개발 인프라 확충

 

4. 직장과 가정 양립기반 조성

1-1. 사회서비스 분야 여성 일자리 창출

1-2. 국가전략․지역특성화야 일자리 확대

1-3. 공공부문 및 대기업으로의 여성 진출지원

1-4. 중소기업 분야의 여성 일자리 확대

 

2-1. 여성청년층 진로지도 강화

2-2. 근로여성 능력개발 및 고용여건개선

2-3. 경력단절여성 직업훈련 및 고용기회 확대

 

3-1. 고급 여성인력개발 인프라 강화

3-2. 여성잠재인력 능력개발 인프라 강화

3-3. 취업연계 시스템 구축

 

 

4-1. 육아지원서비스 강화

 

4-2. 직장과 가정 양립 지원 제도 강화

 

4-3. 가족친화적인 기업․사회문화조성

 


 

5. 정책추진체계정비

 

 

 

           5-1. 범부처 여성인력개발정책 총괄시스템 구축

           5-2. 지역 여성HRD 혁신 지원



‘여성경제활동 참가율 향상’과 ‘여성일자리 확대’를 통해 선진경제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은 결국 여성노동정책이 국가의 경제성장 논리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즉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제살리기를 위한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우선적으로 정리해고되거나 혹은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비정규직으로 활용되어왔다면,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는 산업구조의 금융-서비스화에 걸맞는 유연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할 것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연한 인력활용을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란 결국 노동의 불안정화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국사회 여성들은 더욱더 불안정한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여성들이 국가의 경제성장 논리에 종속되어 노동시장에서의 퇴출과 유입을 반복하게 되는 한, 여성의 권리 신장이란 요원한 일이 된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각종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과 법 적용의 확대 역시 여성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라기보다 여성고용을 확대시켜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권과 자본의 요구에 부합하는 측면이 크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노동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3)

 

또한 ‘직장과 가정 양립기반 조성’을 여성인력개발을 위한 주요과제로 삼고 있는 것4)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의 배경에는 ‘가족해체’와 ‘노동인구 재생산의 위기’ 모면이라는 신자유주가 사활을 걸고 해결하고자 하는 목표가 놓여있다. 신자유주의 전면화가 야기한 사회파탄은 가족구성 및 유지를 곤란하게 하고 있고, 또한 출산과 양육에 대한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기존의 가족이 해체되는 경향 및 저출산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신자유주의는 그 자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 노무현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위기 담론을 형성함과 동시에 관련 정부기관을 설치하고 각종 사회협약을 체결5)했으며, 보육정책과 가족정책 등을 강화해나갔다. 여성인력개발정책에 있어서 ‘직장과 가정 양립기반 조성’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인데, 즉 노무현 정부는 가족의 유지를 위한 보살핌노동의 1차적 책임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는 그대로 둔 채,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여성을 유휴인력으로 철저히 활용하고자 하고 있으며, 또한 출산율까지 높여 노동인구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정책을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통한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향상’이란 것은 여성을 세련된 방식으로 쥐어짜서 꿩도 먹고 알도 먹고 하겠다는 것에 다를 바 없다.6)

 

이처럼 노무현 정부 여성노동정책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양육-출산-보살핌 노동의 제공자로서, 여성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관리하고자 하는 자기목표가 놓여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노무현 정권 5년이 흐른 지금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겠다.


 

1) ‘21C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여성인력활용 선진화 방안’ (여성개발원/삼성경제연구소, 2001.12.11) 

1) 2006년 7월에 제출된 은 범정부차원의 종합적인 여성인력 개발계획으로, 2010년까지의 여성인력개발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정책 추진과제라기 보다는 이미 각 정부 부처가 추진 중이거나, 추진예정인 사업들을 여성인력개발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경제성장을 위해 여성유휴노동력을 최대한 활용(착취)하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여성의 권리 향상과 무관하다.

1) 노무현 정부는 여성고용의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해소한다는 취지에서 남녀고용평등법에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ffirmative Action)제도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2006년 3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적극적 고용개선조치는 1,000명 이상 사업장, 정부산하기관 정부투자기관 총 546개소에 불과하고, 기업이 보고해야하는 고용평가지표에서는 비정규직이 제외된 채 정규직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등 그 적용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 비정규직 등 고용형태에 따른 성별 현황과 성별 임금실태가 드러날 수 있도록 제도가 재설계되어야 한다는 주류 여성운동진영의 의견이 있으나, 그러나 제도 도입의 근본취지가 유연한 인력으로의 여성고용 확대에 있는 한, 이러한 요구가 반영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1) 노동부는 2007년 3월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내용을 기존 남녀고용평등법에 포함하는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는 “일하는 엄마의 노동시장 이탈을 방지하여 국가 인적자원의 활용을 높이기 위해”, 또 “여성 고용확대 및 저출산 문제 완화에 기여”하고, “기업의 생산성 제고 및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 구축”하기 위한 것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1) 현재의 저출산․고령화 위기 담론에 대한 사회운동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난 6월 20일 정부와 재계․노동계․시민사회단체․종교계․여성계 등이 참여하여 [저출산 고령화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민주노총은 이는 노동현안을 논의하는 노사정위원회와 다른 사회복지정책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을 논의하는 장이라며 <저출산․고령화대책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등, 민중생존의 위기를 관리하는 신자유주의와 저출산․고령화 위기론을 분리 사고하면서 오히려 신자유주의 위기 관리전략에 순응하고 있다, 여성운동의 대응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 없이 남녀임금격차, 남녀빈곤율 격차 해소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불안정노동 확산에 동원되거나 활용될 위험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여성정책이나 빈곤대책이 한계적이긴 하지만 필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여성을 공적부조가 확대적용된 수급자로서 위치지어 여성의 자율성을 고양시키기 보다는 국가정책이나 제도, 기존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에 기대는 여성운동의 양태를 확대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1) 실제로 이미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정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형태의 삶을 영위해오고 있었다. ‘직장 내 탁아소 설치’ 등과 같은 요구가 제출된 것은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요구가 묵살되었으면서, 이제와서 이러한 삶이 새롭게 포장되어 부쩍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여성노동정책의 효과


그렇다면 이러한 배경을 지닌 노무현 정부 여성노동정책은 어떠한 효과를 가져왔는가?


① 비정규직 여성일자리 양산, 빈곤의 여성화 심화, 성별분업 강화

참여정부 출범 당시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을 60%로 향상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졌으나, 2006년 들어서 목표를 수정하여 2010년까지 55%로 증가시키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2002년 49.8%이던 여성경제활동 참여율은 2006년 50.3%로 고작 0.5%증가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치에 전혀 근접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문제이기도 하나, 비교대상이 되고 있는 OECD국가들과의 사회․경제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경제성장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의 상관관계를 단순히 수량적으로 목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러한 수량화는 여성경제활동참가율 향상을 위해 주되게 시행되고 있는 여성일자리 창출사업의 목표를 단순히 일자리의 수를 늘리는 것에 집중시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일자리가 여성의 삶에 진정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 등은 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아무리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라고 할지라도 여성일자리 숫자를 늘리는 것이라면 일단 환영부터 받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은 비정규직 여성일자리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노동의 저임금․불안정화를 가속화시켜 빈곤의 여성화 심화로까지 연결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특히 여성일자리 창출사업의 일환으로 각광받고 있는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 사업>1)은 저임금의 일자리를 양산하고 시급제․계약직․파견직․일용직 등과 같은 불안정한 고용조건을 심화시킨다2)는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의 성별분업적 구조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현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산모․신생아도우미, 노인돌보미, 지역아동돌보미 등 사회서비스 일자리의 내용 전반은 전통적으로 가족이나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이 책임져야 할 일로 여겨져온 것들이다. 그런데 엄마라면, 며느리라면, 아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져왔던 이러한 ‘돌봄노동’을 또다시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로 귀결시키는 것은, 노동시장의 성별분업적 구조 강화로 이어진다는 문제점을 갖는다. 성별분업은 여성의 노동을 부차화시키고 희생과 봉사정신을 양산하는 등, 여성의 종속을 지속시키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결국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은 여성이 처한 억압적 구조를 개선시키는 것과 거리가 멀다.

여성의 직업능력을 개발하고 평생교육 참여여건을 강화한다는 정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2006년 시흥 여성희망일터지원본부 사업은 아직 시범사업이기는 하지만 전업주부 및 경력단절 여성과 기업이 밀집한 공단을 연계하여 기업 인구력인 DB를 구축하고 기술 기능교육 및 현장 실습교육으로 중소기업분야 맞춤형 직업훈련을 실시하여 취업을 연계하고 취업후 사후관리, 셔틀버스 보육 반찬가게 등 일․가족 양립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프라를 구축하여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주목되고 있다3)고 평가되나, 그러나 이는 기존의 성별분업 구조에 기대어있기에 노동시장의 성별분업화를 더욱 고착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유념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업이 당장은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는 여성억압적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한다는 점이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의 평가지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여대생커리어개발센터 운영’ 역시 2003년에는 5개 대학에 불과하던 것이 2006년 39개 대학에 달하게 되었다는 수치를 가지고 마냥 성과적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교육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기준으로 비판적으로 평가가 되어야 한다.


 

1) 2006년 9월 20일 발표된 이후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전략>의 골자는 보육, 간병, 방과 후 활동, 문화․환경 사회서비스 분야 일자리를 2010년까지 80만개 창출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한 제도개선과 정부 주도 일자리 창출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까지 정부가 주도해서 만드는 일자리는 80만개 중 초기 2년의 10만개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민간시장의 활성화와 경쟁을 통해 ‘자생적’으로 늘어날 수 있도록 보조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이 잠재적 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를 통해 민간기업의 개입을 용이하게 하는 각종 방안이 시행되고 있으며, 그리고 저비용 고효율을 위한 인건비 절감 및 노동자 지위에 대한 제약을 통해 유연한 인력활용 방안을 찾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또한 이 정책은 비공식부문 ‘돌봄노동’ 일부의 제도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동안 자본주의 생산․재생산 관계에 있어 은폐되어왔던 노동의 영역을 양지로 드러내고 이것을 ‘사회화’하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노동의 시장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즉, 재생산에 대한 책임이 노동자 가족(특히 여성)에게 전가되어왔던 구조 및 성별분업적 노동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가족 내 여성이 수행해온 재생산 영역의 서비스를 필수적인 사회적 서비스로 만들자는, 기간 여성들의 요구와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다.

1) 정부 재정 지출을 통해 창출한다는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기간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에 대부분 여성들이 참여(70%)해 왔던 것에 근거한 기대치에 불과한데, 기간 정부에서 추진한 사회적 일자리 사업은 직접고용의 비율(05년 33.8%)이 낮고, 직접고용이라 할지라도 1년 미만의 단기적 일자리(44.4%)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고용불안정이 심할 뿐 아니라, 최고 80만원에서 최하 20만원으로 겨우 최저임금 수준이거나 그 이하인 저임금 일자리로,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빈곤층을 양산하는 사업이었다. 실제로, 사회서비스 촥충전략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복지부의 4대 바우처 사업의 경우, 2007년 6월 공공노조 자활지부에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바우처 사업 해당 노동자들의 월평균 임금은 59만4천원(사업단별 - 산모사업 76만원, 노인사업 47만원, 장애인사업 45만4천원, 지역별 - 특별/광역시 55만원, 시 46만5천원, 군 77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② ‘저출산․고령화 위기’ 극복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사회위기로 담론화되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탄력근무제, 단시간 근로모델 등 근로형태의 다양화, 직무․성과급 중심 임금체계 확산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 제출되고 있다. 즉 생산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양육을 동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근로형태와 임금형태를 다양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친화적 근로시간제도’라는 미명아래 저출산․고령화 대책 및 보육․가족 정책 등과 맞물려 비중있는 여성노동정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1차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

제1차건강가정기본계획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

○ 산전후휴가급여 등 지원 확대

·06년부터 중소기업 지원 확대

·유산·사사휴가에 대한 급여 지원

·배우자 출산간호휴가제 도입

 

○ 육아휴직제도 활성화 및 근로형태 유연화

·육아휴직 활성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도입

·근로형태 유연화

 

○ 출산·육아기 이후 노동시장 복귀 지원

·출산여성재취업장려금 도입

·비정규직 여성을 위한 출산후계속고용지원금 신설

·전업주부 노동시장복귀 프로그램 운영

·경력단절 여성인재뱅크 운영

 

○ 가족친화적 기업인증제 도입 등 직장문화 개선

·가족친화적 기업경영모델개발지원

·기업인증제 등 가족친화적 기업 지원

·가족친화적 교육프로그램 개발·보급

○ 남성의 가족생활 참여 지원

·배우자 출산간호휴가제 도입

·아버지 육아휴직할당제 도입 검토

·가사·양육 관련 정보 제공 및 교육·상담·홍보 프로그램 운영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 촉진을 위한 정부·기업의 참여 촉진

·학부모 저녁모임 확산

 

○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기반 구축

·모성보호 비용의 사회적 분담 수준 확대

·육아휴직제도 개선

·육아휴직 장려금 제도, 대체인력 지원 등 이용여건 조성

·기혼여성의 재취업 기회 확대

·기혼여성 대상 직업훈련의 다양화

○ 육아지원 서비스의 확대

·영유아 보육료․교육비 지원 확대

·국공립 및 직장보육시설 확충

·수요자 중심의 육아지원 서비스 제공

 

○ 직장과 가정 양립지원제도 강화

·산전후휴가 급여 지원 및 유산·사산휴가 법제화

·육아휴직 사용요건 완화 및 대체인력 채용지원

·남성의 육아휴직 활성화

 

○ 가족 친화적인 기업․사회문화 조성

·탄력근무제, 단시간 근로모델 등 근로형태의 다양화, 직무·성과중심 임금체계 확산

·가족친화기업 인증제 등 가족친화적인 기업문화 조성

·공동육아, 야간학부모회의 등 가족 돌봄의 사회적 책임 확대

그러나 이는 여성을 비롯한 모든 노동자들의 삶의 불안정화로 직결되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여성이 출산․양육과 노인부양 등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제도로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저출산․고령화가 국가적 위기로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도의 반노동자성이 비판될 여지조차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산율이 낮아지고 고령인구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문제시되는 상황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파탄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를 목표로 하는 정책은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출산율 문제는 결국 노동인구의 재생산의 위기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노동자민중의 위기라고 하기 어려우며, 자본과 정권의 체제유지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문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이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 것은 결국 ‘여성친화적’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신자유주의 체제 위기 극복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③ 여성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선별적으로 관리통제, 여성내부의 분할과 위계 가속화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은 여성의 권리를 선별적으로 관리통제하고 여성내부의 분할과 위계를 가속화하는 결과 역시 가져왔다. 여성인력활용방안은 고급-엘리트 여성인력의 활용을 통한 높은 노동생산성 달성과 기혼 여성인력의 개발 및 활용을 통한 유연한 노동인력확보라는 두 가지 큰 방향 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일자리 창출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회서비스 확충 사업의 경우를 통해 단적으로 확인된다. 보육, 가사․간병 등 사회서비스 제공을 통해 여성을 ‘가사로부터 해방’시키고 또한 주부와 고령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성장잠재력 확충 및 연쇄취업효과라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된 사회서비스 일자리 사업은 여성을 여전히도 보육 및 가사․간병에 적합한 노동력으로 취급하여 성별분업적 노동시장 구조를 강화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서비스 노동제공자인 중고령층 여성과 사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소위 커리어 우먼과의 위계서열화를 통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환상을 강화하였다는 문제를 지닌다. 일부 여성이 가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대다수 여성이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가사노동에 ‘종속’되어야 하는 구조가 과연 ‘여성’을 위한 노동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외견 상 여성의 요구를 긴급성에 따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단계적으로 확대시키는 듯한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본질적으로는 철저히 신자유주의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여성의 출혈적 이중부담을 강화하고 그를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완충장치를 만드는 지연책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증가와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삶의 파탄 문제가 그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비정규직 확대를 꾀하는 정책기조는 그대로 두면서 비정규직 여성 개개인에 대한 시혜적인 조치를 내세우거나,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삶의 불안정화가 ‘저출산․고령화’라고 이야기되는 현상을 가져온 것임에도, 이러한 현상을 야기하는 구조는 그대로 두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유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 출산․양육 및 노인요양을 계속하여 전담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여성에게 이중적으로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현실이 경제적 수치나 통계상으로도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불안정노동층을 형성하고 있는 대다수 여성들의 삶이 더욱 곤란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무현 정권 5년의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급진화된 요구로 여성노동권 쟁취하자!


이러한 모습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명박 정권에서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의 당선에는 ‘정권교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동반되고 있으나,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저출산․고령화 대책 관련한 각종 중장기 정책 역시 변함없이 추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위 ‘경제 대통령’의 출현 이후 한국사회의 유일무이한 척도가 되고 있는 실용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온전한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진지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현재 여성에게 던져진 문제는 ‘어떻게 노동시장 참여의 기회를 보장받을 것인가’하는 것을 훨씬 초과한다. ‘여성인력의 전략적 활용’이 자본의 요구로 적극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고용의 확대’는 더 이상 급진적인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시장 진출 기회의 확대는 오히려 여성들에게 새로운 시련을 가져다주고 있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출산-양육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을 보살피는 노동’에 대한 1차적 책임을 전재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과 달리 노동시장에서 정규직보다 임시직, 파트타임 등의 비정규직 혹은 비공식부문의 직종을 선택하도록 강제된다. 이런 노동은 노동시장 내에서 숙련을 요하지 않는 부차적인 노동으로 간주되어 저임금이 당연시된다.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노동자성조차 인정되지 않음에 따라 근로기준법상의 기본적인 권리가 박탈될 뿐만 아니라 임금체불, 업무상 재해와 각종 부당노동행위, 인원유린에 심각하게 노출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소득을 메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경우가 많아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은 이러한 성별분업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기 보다는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이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노동시장에서의 ‘구조적인 불평등’을 은폐하고 단순히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즉 노동시장으로의 유인)하면 여성의 힘이 강화되고 평등을 이루는 조건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강화하고 있기에, 여성의 현실개선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의 노동권을 오히려 후퇴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급진화된 요구이다. 즉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좋은 여성 일자리 창출’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요구는 ‘여성이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온전히 살아갈 권리’가 되어야 한다.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쟁취하는 것은 물론이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출산과 양육 등의 ‘권리’(‘의무’가 아니라!)를 ‘포기하지 않아도 될 권리’ 역시 보장받아야 한다. 이를 테면 ‘출산율 저하’ 는 ‘노동생산인구 저하’라는 관점에서 접근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써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기쁨’이 아닌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공포와 두려움’이 되어버린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요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여성이 가정의 일차적인 전담자 역할을 여전히도 수행하면서도 노동시장에서 유연한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현실을 인정하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즉 여성에게 스스로의 노동과 삶에 대한 통제권이 박탈되어 있는 한, 아무리 ‘여성친화적’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다한들 탄력적인 근무시간제도와 다양한 돌봄서비스 제공이라는 것은 결국 여성의 종속을 세련된 방식으로 유지․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신자유주의 정권 하에서 ‘실행가능한 제도’로 가다듬어 정부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의뢰’하는 방식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또한 개별화된 여성들에게 선별적으로 혜택이 주어지는 방식 역시 극복되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 5년, 신자유주의 위기의 책임전가로 인해 더욱더 삶이 파탄나고 있는 여성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여성의 노동권과 삶에 대한 권리는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로 요구되어야 하며 또한 여성들의 집단적인 행동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쟁취될 수 있다는 당연한 전제가 되새겨져야 할 때이다.




 

1) 노무현 대통령 여성공약(여성정책 13대 부문 70대 과제. 150대 핵심과제)  

○ 여성경제활동 참여율을 선진국 수준인 60%(OECD기준)로 높임

○ 여성 일자리 50만개 창출 - IT 10만/ 전문직(간호원 통역사 보육교사 영양사 관광 미용사 등) 10만/ 여성창업 10만/ 사회복지분야(복지간병인 제도화 등) 15만/ 교육분야 5만

○ 공공 및 사회복지 서비스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 신규 대졸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향상을 위해 취업지원창구 설치, 여성채용박람회 확대

○ 여성의 직업능력개발을 위해 직업교육 확대 유급 교육 훈련휴가제 도입 등 훈련기회 확대

○ 여성인력개발센터의 지원확대

○ 여성과학기술인력지원법 조기 정착 및 채용목표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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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위로가 되는 말

 

 ( adventre 曰 ),  "그런 생각이 안드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우리의 잘못도 많구요.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각종 제약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더구나 지금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라는 시대적 제약도 있지요. 이번 선거로 너무 많이 실망들 안했으면 합니다. 실망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면 우리 운동은 그만큼 더 후퇴를 하게 되겠지요."

 

 

위로가 되는 글

 

(절망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새해인사 中),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허탈하고 막막하고 불안하다는 것, 뭔가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더없이 소중한 감정이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변화의 출발점이다. 다만 이 감정이 연말 연시 바쁜 일상 속에 봄눈 녹듯 사라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5년동안 이 감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구경꾼이기를 거부하자.

절망하는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당신의 그 절망감이 현실을 바꿀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 역설도 말장난도 아니다. 진실이다."

 

 

 

그리고....

 

 

 

 

우연찮게 베토벤의 "합창" 공연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오늘 공연을 통해 알게 된 건데, 베토벤의 "합창"은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 1886-1954)의 1951년 바이로이트 음악제 실황연주가 가장 으뜸으로 쳐진다고 한다.

 

그 연주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재개를 축원하려고 1951년 7월 29일 열렸다.

푸르트뱅글러 독일의 모든 극장이 폐쇄되기 직전인 1944년 여름에 그 장소에서 마지막 지휘를 했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 바이로이트 극장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손상을 입었고, 미군은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이 극장을 위락시설로 징발했다. 그리하여 이 극장은 바그너家가 연례 페스티발을 재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까지 미군들이 사용할 때 말고는 어둠속에 묻혀 있었다. 푸르트뱅글러는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가 세운 이 극장의 재헌당식이라는 막중한 무대의 지휘자로 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연주는 1942년 히틀러의 생일을 기념해 열렸던 음악회에서 연주된 그것(위의 동영상)과 분명 같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임에도 불구, 아주 상이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1942년의 연주는 암울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합창 악장조차도 낙원을 그리는 비전보다는 진노의 날의 예감을 드러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바이로이트의 연주는 비극을 극복한 즐거운 축하 의식의 기분에 젖어 있다. 위대한 우주의 힘들이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해석에서 늘 그러듯이 서로를 지배하고자 충돌하고 있지만 이 연주에서 이제 갈등은 햇빛으로 가득 차 있다.

1942년의 실황 연주가 임박한 대환란을 암시하는 고뇌에 찬 외침이라면, 바이로이트에서 연주한 9번은 푸르트뱅글러가 이 작품을 위안과 갱생과 정신적인 치유의 선언서로 묘사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인다.

1951년 폐허가 된 독일 땅에서 바이로이트 합창단과 함께 부른 합창 교향곡은 정말로 ‘환희의 송가’라 불릴 만 했다. 울림은 컸으며, 둥글고 유장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찬연한 소리 앞에서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1942년 녹음은 마치 「교향곡 5번 운명」을 듣고 있는 것 아니냐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격렬했다. 내면에 침잠했던 분노를 내뿜는 듯, 그래서 너무나도 위풍 당당한 직선적인 소리-‘고난의 송가’. 이를 재치 있게 비유하면, ‘고난을 넘어 환희의 소리’ 바로 「합창」이 되는 셈인데, 진정, 그의 개인사처럼 그의 「합창」이 인류의 합창이 된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나에게 "합창"은 1942년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징조를 읽어내는 이들도 많다.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고 그렇게 두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51년 버전의 "합창" 역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코 쉽지 않지만, 결단코 불가능하지는 않겠기에, 이는 '믿음'이라기보다 일종의 '역사'이자 '과학'이겠기에,)

그래서 오늘의 공연은 역시 큰 위로가 되었다.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공연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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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대통령 탄핵할라면 어떻게 해야해요?

 

 

집에 들어서는 나를 향해 같이 사는 후배(활동하는 친구는 아니다)가 묻는다.

 

"언니, 대통령 탄핵할라면 어떻게 해야해요??"

 

휴....

또 한번 한숨이 나왔다.

탄핵이라도 외칠 수 있다면, 덜 답답하련만.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그것도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이 된 이명박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오늘 투표장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또! 말이다 -_-;;)

 

챙겨간 펜으로

비정규직 철폐, 한미FTA 반대, 를 하는 0번 후보를 만들어서 거기에 사람인자를 지긋이 찍었다.

 

아 이 얼마나 자위적인가 .... ㅡ_-;;;;

그래서, 투표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초라하고 슬펐다.

 

그리고 돈벌이를 하러 학원에 갔는데

마침 토론 주제가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대선 이야기가 오고갔고, 그 와중에 한 학생이 이러는 거다.

 

"지금의 한국사회 정치현실은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것 이상이하도 아니다"

 

그래...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그 말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

지금, 한국사회의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왜 이 모냥이냐?

왜 이명박을 찍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냐?

 

5년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와신상담(적절한 고사성어일지는 모르겠으나;;)하는 자세로다가...

 

혹자는, 대중들은 그래서 우매한 존재, 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대중들을 타자화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해법이 아니라고 했을때,

이명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중의 삶의 조건을 정/확/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운동진영의 무능함은 결코 우회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얼마전에 택시를 탈 일이 있었는데,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노무현이 욕을 해서

옳다쿠나~하고 같이 맞장구를 쳤는데

그 아저씨, 결론은 "그래서 이명박"이라는 거다.

 

뽑을라면 큰 도둑놈을 뽑아야 하는데, 노무현은 작은 도둑놈이라서 지 호주머니만 챙겼다는 거다.

그러니 명박이같은 큰 도둑놈을 뽑아서 지 호주머니 뿐만 아니라 서민들 호주머니도 좀 챙겨주게끔 해야 한다는 거다.

 

기사 아저씨 이야길 들으니,

사람들은 홍길동이를 원하는 건가...싶어졌더랬다;;;;

 

아무튼 문제는

이명박이는 결코 큰 도둑놈이 못된다는 것이고,

또한 그렇다고 해서 기사 아저씨와 같은 사람들이 원하는 '큰 도둑놈'이 이명박이 아닌 누가 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묘연하다는 것.

 

뭐, 어렵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명박이한테 걸었던 기대가 당연히 파탄에 이를 5년 후에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 않을라면

(세계경제의 불황은 내년 한국경제가 호전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뭘 할까...어떤 의사쟁점으로 진실을 흐려놓을까...

그리고 기대가 깨어진 빈 자리를 메울 대안이 없다면...대중들은 어떻게 더욱 보수우경화될 것일지...)

 

납작 엎드려서 5년 동안 제대로 살아야 한다.

너무 슬프고 처량맞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능함을 뽐내고 있는 형국아니냐 우린.)

정신 똑바로 차리고 힘내야지.

 

 

 

 

 p.s.

명박이가 당선되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 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라걱정 하게된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이 걱정들을 잘 모아서

위기를 돌파할 힘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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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권

 

 

 

5만 원 권이 말하는 여성의 삶


 

이꽃맘 | 회원, 참세상 기자


5만 원 권이 나오고, 10만 원 권이 나온단다. “나오면 뭐하나 만져보지도 못 할 텐데”라며 헛웃음을 날리고 있는 순간 고액권에 들어갈 위인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5만 원 권에 신사임당이 들어간 것.

한국은행은 신사임당 선정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의식을 제고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한편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라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해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예상 된다”라고 밝혔다. 차라리 그냥 “여자는 자고로 가정에 충실해야 하며, 이런 사실을 널리널리 알리기 위해”라고 속 시원히 밝혔으면 미친놈들 하고 넘어갔을 수도...  하지만 주저리주저리 내 놓은 설명은 오히려 화를 불렀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은 여성인물 선정에 대해서는 “진일보한 일”이라고 평가했으나 신사임당이 선정된 것에 대해 “자녀의 교육적 성취와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보조적 역할로 한정하고 있어 시대의 상황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런데 관심 갖는 것이 여연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여연도 그저 신사임당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얘기할 뿐 별다른 건 없다. 우리 쪽(!)에서도 입장을 한번 내 보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국은행의 의도는 뻔하다. 아니 남성의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의 의도는 뻔했다. 출산율도 낮아지고 있고,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고...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체계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기를 쓰고 막아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를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인 화폐를 통해 또 한 번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4천 만 민중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돈’에 신사임당이라는 현모양처의 표상을 넣어 “여성들이여! 가정으로 돌아오라”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말 잘 듣고 돈 조금 줘도 군말 없는 노동자가 필요하니까 “여성들이여! 사회로”를 외치며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이니 뭐니 내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여성들에게 “가족도 파괴하면 안 돼! 애도 낳아야지”를 외치고 있다. 맨 날 반복이다.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이도 낳을 수 없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일하려면 지금 형태의 가족은 불필요한 것이고, 아니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매주 한 번 씩 하는 ‘사랑과 전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그렇다고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많은 여성들은 그저 가르침 받은 대로 참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잠깐 딴소리. 이 논란에서 나를 가장 웃게 만들었던 것은 ‘이프’라는 여성단체의 기자회견 내용이다. 이프는 음모론을 들고 나섰다. 이승일 한국은행 부총재가 이율곡, 신사임당과 같은 ‘덕수 이씨’ 종친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음모론은 이승일 부총재가 “나는 덕수 이씨가 아닌 신평 이씨”라고 호적등본을 제시해 유야무야 되었다. 왜 이런 제기를 어떤 생각으로 했을까 그냥 궁금하다.

 

어쨌든 이프와 여연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의 반발에 남성의 얼굴을 한 언론들은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패배적으로 만든다”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마치 여성들 편을 들어주는 듯 한 모습을 하고 말이다. 이 반박에 여연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뭐라고 대답을 할까.

 

나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는 것에 즐거워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패배적으로 만드는 것은 남성의 얼굴을 한 언론이며, 자본주의이며, 국가이다. 그 수많은 여성들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그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그녀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번 화폐 논란을 그저 단순히 어떤 인물을 선택 하느냐로만 볼 수 없다.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모두 다 그렇듯이 화폐에 들어가는 상징 하나도 그 사회의 생각과 자본주의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한국사회에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녀들의 삶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정말 그녀들이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등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사임당도 마찬가지이다. 꿈이 많았던, 다재다능했던 그녀가 왜 아들에게, 남편에게 목메고 살아야 했는지, 당시 사회가 어떻게 그녀를 가족 안에 가둬놓게 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여성들이 제대로 인정받으며, 권리를 누리고 책임을 다하며 살 수 있는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방식은 무엇인지 논의할 수 있었으면 한다.(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덧붙임. 나 같으면, 10만 원 권에 현재를 가장 열심히 살아가는 뉴코아-이랜드 비정규직 언니들을 넣을 텐데...

 

 

 


 

 

나의 덧붙임.

비정규직 언니들 원츄~^^

노동자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오면

새 지폐도 만들고 (물론 지폐의 쓰임새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와는 다를 것이다)

거기엔 투쟁하는 자매들, 동지들의 모습을 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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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한판

 

 

1.

지난달,

코스콤 비정규지부 단식농성투쟁 하루연대하러(릴레이 단식농성) 망루에 올라 한나절을 보낼 때였다.

 

 

"젤루 큰 어려움이 뭐예요?"

 

한평 남짓한 망루에는 굶은지 아흐레되는 부지부장과 나, 그리고 조합원한분(편의상 '아스테릭스'라고 하겠음^^) 이렇게 세명이 있었는데,

아스테릭스 동지한테 나는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조합엔 가입하게 되었느냐, 가입해보니 어떠느냐, 등등...

매우 상투적인^^; 그러나 언제나 궁금했던^^;; 점들.

그러다가, 힘든게 뭐냐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덩치 큰 아스테릭스 동지...한숨을 가만히 내쉬면서 이렇게 말문을 연다.

 

"이제 두달 후면 계란 한 판인데..."

 

오오~~~~~~~~!!!!

알고보니 동갑~!!!

 

반가움에 놀라움을 표했더니,

아스테릭스 동지 또다시 한숨을 가만히 내쉬더니 이런다.

 

"제가...좀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죠..."

 

^^;; 겉모습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내가 놀란거로 생각한 것이었다ㅎㅎㅎ;;;

암튼, 아스테릭스 동지는

계란한판이 되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일텐데, 파업투쟁이 그때까지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있다고 하였다. 물론 계란한판을 훨씬 넘어 40대 50대 조합원도 있으니, 그런 고민은 크게 내색은 못하지만서도 말이다.

 

 

끝을 바라보면서 하는 싸움은 아닐테니, 끝에 연연해하지는 말자고

또 언제 끝이 오겠느냐 싶을 때, 문득 끝이 오기도 하는 거 아니냐고

힘내자고

나는 그런 말로 응답했다. 역시나 매우 상투적인;; 그러나 진실일 수밖에 없는...

 

 

 

 

 

2.

오늘은,

12월의 첫 날이자 올해를 꼭 한달 남겨둔 날이다.

 

 

요즘 나는 새로운 한 가지를 깨닫는 중이다.

평생 노동자로 일하면서 지루하고 무력한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가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두려운 게 뭔지 아나? 겉보기에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 삶을 견디는 것이다.

매일 매일의 밥을 위해 노동 속에 숨죽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질기면서도 강하게 인간을 단련시켜주는 모루인 셈이다.

한 순간 불꽃처럼 타다가 사라지는 불나비 같은 인생, 나 역시 이런 신기루 같은 꿈을 꾸고 살았던 때가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신기루가 아닌 진짜 현실이란 꿈을 꾸면서 살고 싶다.

불타오르는 열정이 식은 다음에서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듯이

새로움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이 식은 다음에서야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하지 않더냐?

일상적 삶이 그런 거라면 이제야말로 평생이 걸릴지 모르는 긴 기다림의 출발지점에 선 셈이라고 볼 수 있겠지.

 

 

집회에 다녀와서, 읽던 소설책을 펼쳐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퍽이나 방황하던 주인공이 마음을 다잡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편지속의 이야기는, 마치 날더러 들으라고 쓰여진 것만 같았다.

 

불나비 같은 인생일 줄 알았는데...

한몸 불사를 마음은 진즉 갖추어놓았는데...

 

그러나 막상 현실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너무나 지리멸렬하고 또한, 구차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려면

내가 먼저 자리를 잡아놓아야 할 터,

열심히 살아서 자리를 잡겠노라고 다짐했는데...

 

그러나 막상 나는,

계속 미끄러지는 듯 했고 헤매이고 맴돌고만 있는 듯 했다.

 

 

이게 아닌데...아닌거 같은데...

뭔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다는 느낌에 사실 퍽이나 괴로웠다.

 

그러나 서른을 코 앞에 두고서야

이제야말로 시작,인 것이로구나ㅡ깨닫게 되고 있다.

비로소 시작이니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자괴감 따위 부질없는 것이겠구나ㅡ여유있을 수 있게 되고 있다.

 

마음이 평온하다.

서른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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