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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꾸와 오라이

가다들 중에 독종으로 이름나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아이가 있는데 이런 아이를 우리는 독고다이라고 불렀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말이 우리말 속어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대충 한자로 獨孤對독고대 쯤으로 써놓고 '홀로 상대하여 다 때려눕힌다'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웬걸, 이 말이 가미가제 특공대라는 일본말일 줄이야! 일본 놈 특공대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독고다이라는 말이 생활 속에서 그대로 쓰였겠니? 태평양 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가 전투기를 몰로 연합군 구축함의 굴뚝으로 뛰어들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더니 그것이 한국인의 언어생활에 뛰어들어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특공대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특공대 중의 특공대, '람보'의 실버스타 스텔론. 이 람보Rambo라는 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오로지 '난폭'하게 폭력만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난폭亂暴의 일본말 발음이 람보이니까.

-1993년 2월 16일 "람보", 54-55쪽.

 

무데뽀無鐵砲라는 말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행동을 보고 흔히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적어도 내겐 무척 친근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할머니의 별명이 무데뽀였거든. 아무리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일지라도 할머니가 우겨버리면 모두들 항복하고 말았으니까. 때문에 겨우 고린전이나 남겨 먹는 행상 아치들도 우리 할머니가 깎아달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무데뽀 기질에 맞게 손이 크셔서 인심 한번 쓰면 온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실 정도였지.

이 무데뽀라는 말은 한자로 무철포無鐵砲라고 쓰는데,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영주들 간에 영토 전쟁이 끊일 새 없던 일본의 도요또미 히데요시 시절, 어느 두 영주 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한쪽은 신식무기인 철포(총)으로 무장을 하였고 다른 한쪽은 그냥 재래식 무장이어다네. 재래식 무장을 한 쪽은 철포의 위력을 모른 채 저 따위 작대기 총으로 무슨 힘을 쓰랴 하고 무작스럽게 '도쯔께끼'를 감행했다고 하지. 결과는 너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때부터 무모한 행동을 일컫는 말로 '철포도 없이 달려든다' 하여 무데뽀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누가 지어낸 것인지 아무튼 그럴 듯한 이야기지?

-1993년 4월 21일 "할머니는 무데뽀", 160쪽

 

 

 

*옛날엔 책값으로 쓰는 지출이 상당했는데, 도서관에 맛을 붙인 요즘엔 웬만해선 책 살 일이 잘 없다. 인터넷 서점 회원등급도 덕분에 플래티넘에서 가장 기본 등급으로 떨어진지 오래다. 아마 딱히 관심을 가지고 파는 분야가 없이 그냥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사놨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쟁여놓는 습관은 확실히 없어졌다.

고등학교 도서관이서 그런지 장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개중에도 둘러보다 보면 눈길을 끄는 책들은 늘 있다. 남은 일주일, 보고싶었던 책인데 직접 사기엔 좀 아깝다 싶은 생각이 드는 책들을 더 빌려다 봐야겠다.

 

*황대권 선생의 글을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징역을 오래 살았단 얘기는 알고 있었는데 13년 2개월이라는 숫자를 들으니 숨이 턱 막혀온다. 걔다가 처음 선고는 무기징역이었단다. <빠꾸와 오라이>는 저자가 1993년 초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려던 참에 일본어사전 1700여쪽을 쭈욱 독파하게 되면서 만나게 된 일본어 단어들을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함께 회고하면서 풀어쓴 서한 묶음집이다.

1993년에 YS가 집권을 시작하면서 대사면의 바람이 불었다 한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그래서 그 해 2월 말 즈음에는 선생의 편지가 뜸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면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접은 뒤에 바로 다시 위의 일본어 사전 독파+어린 시절 회고 작업을 시작한다. 지난 몇 년간의 내 생활은 수감생활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상상하는 시기였기에, 옥중서한 형식의 글을 볼 때마다 더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고, 덩달아 나도 착잡해질 때가 많다. 이참에 <야생초편지>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내 에너지를 다른 곳에 더 잘 써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내 한 켠에 수감을 염두에 두고 살다보니 너무 진지해지거나 갑자기 슬럼프에 빠질 때가 많아지는 건 아닌지, 하는 자기위안도 변명도 아닌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내가 겪는 힘듦의 원인을 '이게 다 병역거부때문이다'라고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럼 내 마음이 좀 더 편해지느냐 하면 그런건 또 아니다. 오히려 끝없는 수렁으로 바닥을 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어 하는 시기는 있는 것이고, 난 수인의 몸이 된다는 좀 더 구체적인 조건에 놓여있기 때문에 자기수양을 남들보다 오히려 더 하드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냉소와 발랄함, 진지함과 가벼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자기애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잡을 수만 있다면. 수감이 끝나도 인생에 답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닐텐데, 그 때 가서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더 열심히 준비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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