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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현재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쭉 훑어보았다. 한 5년쯤, 아니 10년 쯤 뒤에 내가 다시 교육생애사를 써본다면 여기서 어떠한 내용이 어떻게 추가될지 자뭇 궁금하다. 지금 이전의 나의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달라질 지도 역시나 궁금하다.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가치관을 못마땅해 여기시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라신다. 생각해보면, 나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궁금해진다. 분명히 나는 ‘변화’하였는데 그 변화의 동인은 무엇인지 과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나(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조금씩 ‘변태’하고 있는 나)의 정체성에 이르도록 만든 외부의 자극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환경과 접촉하면서 그것을 인식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겪어왔지만, 특정한 시점에 나는 특정한 자극들을 예전과 다르게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 자극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만일 한 인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과정들을 일컬어 ‘교육이 일어났다’라는 말로 표현을 한다면, 교육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 몸 안의 변화과정들에 대해서는 ‘학습’이라는 말로 지칭을 해보고자 한다.
사실 나의 외양은 계속해서 ‘변화’해왔지만, 내가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삶은 ‘변화’가 없는 삶이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과 관련해서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을 한정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점에서 ‘변화’가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나는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에게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해서 성찰적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서 환경과 조응하며 ‘변화’한다는 점에서 ‘교육’은 일정 부분 ‘사회화’ 혹은 ‘인식의 적응’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인간의 변화가 곧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사람도 생존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감각을 인지하고 반응하면서 자신의 스키마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곧 내 스키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급격한 전환의 계기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독서의 경험일 수도 있고, 내 스스로의 성찰일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과 관련한 모든 자극과 변화들에 대해 ‘교육’ 또는 ‘학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자극들을 예민하게 포착해내고 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섬세한 언어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고민을 바탕으로 나는 ‘교육’을 “한 개인이 자신의 ‘학습’과정에 대한 메타 학습이 가능한 상태”라고 명명한다. 의식(인식)의 변화와 몸의 변화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데, 몸의 총체적인 변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나의 메타학습은 여전히 한정적일 것이며 행여 새로운 자극에 대한 학습과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써 변화한 내 스키마는 내 몸과 괴리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머릿속 생각을 말로 글로 언어화하는 과정에서도 나의 학습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른 나무이다.”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언어(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며 자신의 색안경의 질에 따라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이해진다. 교육을 고민하는 것은 그래서 현재 내 삶을 성찰하는 언어를 고민하는 것이며, 이 과정은 늘 고통스럽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쉬운 언어라는 것은 ‘익숙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익숙하다는 것은 곧 내 학습과정에 대한 메타학습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씨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일”이지만 고통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깨달음과 내 몸의 ‘변태’를 느끼는 순간의 희열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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