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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Piaget 이론의 세 가지 중요한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식은 환경 내에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둘째, 지식의 발달은 이전의 인지구조로부터 새로운 인지구조를 건설하는 과정에 기초하며, 새로운 구조들은 환경에 지적능력이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셋째, 인지발달에 영향을 주는 근본 요소는 물리적 환경, 사회적 환경, 성숙, 평형화이며 이 중 평형화는 학습자의 자기조절과 자기수정 과정이다(교재 159쪽 참고).

Piaget 이론에 근거하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학습자가 된다. 여기서 유기체란 신경계를 가지고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 세계와 직면하여 자극을 수용하고 이에 따른 반응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때 종들의 진화 수준 혹은 우열성 여부는 신경계의 복잡성, 자극과 반응 사이의 텀 그리고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 양식의 다양성 등을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Piaget 이론에서 인간을 단순히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진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 이후로 서양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였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해지며 따라서 인간 학습에 대한 근본 가정 자체도 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학습 더 나아가 교육을 규정함에 있어 더 이상 보편타당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벗어나서,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정체성들이 경합하는 과정으로 학습을 규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 지식의 선지자로서의 교사라는 전통적인 규정 역시 해체가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Piaget 이론에서 학습은 ‘정상적인’ 유기체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학습자의 자극을 촉진하는 존재가 꼭 교사로 한정될 필요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Piaget 이론이 교육을 고민하는 데 시사하는 바는 이성 중심, 지식 중심으로 학습을 규정짓는 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 있다. 특히나 근대적 교과지식의 학습과 이로 인한 안목의 형성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는 교육철학․교육과정학자들의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생리학적 접근에서 출발하는 Piaget 이론을 바탕으로 도출될 수 있는 교육의 개념은 결국 ‘삶의 방식의 변화로서의 학습’이며 이는 현재적 삶과 괴리되어 추상화된 지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교과교육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에서는 단순히 Piaget 이론만을 충실하게 적용한다고 해서 뭇 사람들이 말하는 교육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 발달의 과정이 동화․조절․평형화라는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되었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인지 발달의 과정을 추동하는 자극은 어떤 기준으로 교육적 정당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사(성인/정상인/국가)중심적 교육과정으로 인한 자극의 편파성을 문제삼는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 반대의 주장은 아이들을 말 그대로 ‘방목’해야 하는 것일까?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초적 쾌락에 대한 유혹은 연령․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학습의 저해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자극과 반응이 동시적인 유기체는 아메바인데 인간은 아메바가 되기에는 머리가 너무 커버린 존재들이지 않나. 자극과 반응 사이에 텀을 둘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반응 양식을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학습에 있어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와 너, 나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합하는 과정 속에서 학습의 의미를 찾는다고 했을 때 인간(배우는자)의 자율성은 어느 누구도 군림하지 않는 의사소통의 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유의미한 자극을 주고받으며 양자 모두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교육적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구속하는 뜨거운(hot) 관계도 아니고, 쿨(cool)함이라는 명목 아래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행사하는 ‘방목’도 아닌 그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래서 관계를 고민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특히나 요즘 나에게는 더욱더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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