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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사태와 새로운 진보정치

 

통진당 사태와 새로운 진보정치  -화니짱- [2012 SKHU 레포트]

 

통진당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자는 주사파나 NL이 아직까지 진보진영 내부에서 정리되지 않고, 역사적 진보를 하지 못한 구이데올로기파의 구시대성으로 인한 촌극이라 여기기도 하고, 혹자는 진보진영 내부에서 비민주성(의회민주주의의 기본 절차도 준수하지 못한- 운동권의 몸에 밴 하부조직적 과격성이 표면화된)이 드러난 비상식적 사태라고 말하고, 혹자는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권력만을 쥐기를 원하는 특정집단의 무서운 권력에 대한 집착이 드러난 일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종합해보자면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한 비상식적인 일이 통진당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이 이번사태를 보는 공통된 의견이다.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인가?

그러나 사태를 특정 인물이나 특정정파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근시안적인 접근이 아닌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자면, 오히려 ‘절차적 민주주의’의 비상식적 훼손이라기보다는 이미 축적되어있었던 ‘의회 민주주의의 허상’이 대중에게 드러난 일례에 불과해 보인다.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당권파가 다수로서의 물리적 힘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여(실제로 당대표들을 폭행도 하며) 처리한 점이 비민주적 만행이니 국회에서 당장 퇴출해야 된다.”라고 통진당 사태를 ‘절차적 정당성’ 차원에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사실은, 한나라당이(지금의 새누리당) 다수의 물리력을 동원해서 날치기로 여러 법안을 수차례 통과시키며 (통진당을 향한 기준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댈 때) 국회에서 퇴출되었어야 할 행위를 과거에 이미 수차례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들의 폭력과 한나라당의 폭력 중에, 왜 어떤 폭력은 의회민주주의 내부에서 허용 가능하고, 어떤 것은 존재론적으로 제거해야 할 만큼 위험한 것인가? 요컨대, 통진당 사태의 본질은 ‘민주적 절차’의 적합성 여부가 아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일개 작은 정당(통진당) 내부의 극심한 의견불일치를 볼 때, 훨씬 많은 수의 의원과 당원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거대 정당 내부에서 (파워게임이 이정도로 분출되지 않고) 통일된 형태로 의견이 분출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내부의 권력다툼이 이정도의 내홍을 불러오지 않는 것은 다른 정당은 정당내부의 위계적 권력 차이가 그 안에서 확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소대의와 과잉대의

다원주의를 따르자면 다양한 지지세력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여성, 장애인, 청년 등의 특정층을 대변하는 비례대표는 더욱 그러하다.)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일까? 통진당의 당권파가 통진당을 지지해준 국민들을 대의하지 못하고(과소대의), 일부의 당파적 당원들만을 과잉대의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과잉대의와 과소대의의 문제는 다른 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장애인, 여성,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을 대변하여 격렬하게 내부권력 싸움을 전개한 국회위원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있었던가? 이 문제를 투표과정 등에서의 ‘절차적 적합성’의 문제나 당원관리의 ‘투명성’문제로 환원시키면 안 된다. 수단의 적합성을 성취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오독된다면, 실질적 민주주의의 미성취 문제가 발생할 뿐 만 아니라 국가의 공안권력(법치주의)이 대의민주주의를 좌지우지하는 위험성만 증대시킨다.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수단’의 정당성이 아닌 ‘목적’에의 적합성을 놓고 보자면, 어느 당이든, ‘목적없는 수단’으로서의 의회민주주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진당과 다를 바 없는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다.

 

목적없는 수단

정치권의 논쟁이 사법부의 판단력에 놓여지곤 하는 최근의 사례들은 ‘수단적 민주주의’의 강화현상, 즉 대의민주주의의 과소대의화의 경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Democracy(민중의 힘이라고 번역되는)에서 ‘민중의 힘이 발현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 목적은 그 ‘수단’의 적합성만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국가권력의 힘 앞에서 논의되지도 못한채 사라지고 있다. 자유주의의 상황 하에서 국가가 약화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약화된 부분은 자본을 견제, 감시하는 힘으로서의 국가의 역량인 것이고, 국민을 규율하는 공안적 권력의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국가주권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개별 국민들의 시민권은 국가권력의 강화 앞에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통진당 사태를 통해 우리는 진보의 위기를 말하기 이전에, 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본의-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어떻게 제도권 안에 충실히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진보진영의 총체적 위기와 해법

지금은 보다 급진적으로(Radical의 어원대로 뿌리부터 따져 들어가며) 아래(운동,민중)에서부터 시작할 때이다. 특히, 진보진영은 자신이 처한 위기상황을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현재의 정치체제 안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고민함을 통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와의 차별점을 구축해나감으로써 극복해야 한다. 현실 공산주의의 실패 이후에 맑스주의를 대체해 진보진영을 이념적으로 모아줄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고,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 다양한 분파(급진민주주의, NL, PD, 신좌파, 포스트맑스주의, 신구조주의학파 등)가 서로 전략적으로 힘을 모을 구체적 적(독재권력)이 없는 상황은 진보진영의 위기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이념의 구심점, 현실정치에서의 구심점도 없는 진보진영이 이들을 대체한 구심점으로서의 하나의 기반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이는 서로 대립하는 3자구도적 관점(국가권력, 자본권력, 민중의 힘)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자본권력의 막강한 힘과 함께, 국가의 규율권력 또한 강력해졌음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민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입장으로서 진보진영이 연합해야 한다. 자본과 국가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민중의 입장에서의 해법은 최근에 세계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직접행동, 특히 운동정치의 큰 흐름에서 나타나는 반자본주의적 저항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정치’의 직접적 발현이라는 새로운 기반 위에서 민중 모두의 보편적 권리, 시민권을 어떻게 강화시킬 것인지, 위로부터의 정치와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진보진영에서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치와 복지담론

최근 장하준, 정태인 등이 경제민주화와 재벌 문제에 관해서 여러 지면을 통해 여러 논쟁을 벌인 일이라든지, 최태욱 등이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등의 저작을 통해 이슈가 되고 있는 현상 이면에는 ‘(진보적)자유주의 진영’과 ‘사회민주주의 진영’ 사이에서 진보정치의 주도적 헤게모니를 가져오기 위한 내부투쟁적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논쟁적 구도를 바탕으로, (앞에서 제시한 ‘아래로부터의 정치-민중’에 기반한) 새로운 진보정치의 방향성을 복지담론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좌파진영, 자유주의 진영, 보수진영

이번 선거에서, 모든 정당이 민통당과 통진당, 심지어 새누리당 마저도 복지정책의 확대를 이슈로 들고 나온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보수당이 똑같이 진보정책의 혜택을 이야기한다면 좌파진영은 보수진영, 혹은 자유주의진영(장하준)과 어떤 차별점을 둘 수 있을까? 복지문제에 대해, 빈부의 개념으로 접근하자면, 보수진영이나 자유주의 진영과의 본질적 차이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지문제는 (부자나 국가로부터) 수혜개념이 아닌 권리. 국가의 시민으로서, 국방의 의무와 교육의 의무가 당연시 되는 것만큼이나, 시민권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보편권으로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본소득’은 그런 점에서 좌파진영의 정책이 될 수가 있다. 복지의 확대가 (국가의 확대로 인한 상대적) 시민역량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강화를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국가의 축소를 (특히 재정 지출측면에서) 이야기하며, 복지정책을 확대 하면 국가가 확대된다고(특히 관료제적 체계) 경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에 불과하다. 보편적 복지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국가조직이 확대되는 측면은 국가의 주권적 힘이 강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무제한적인 시장적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권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이다.

 

소렐의 예언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회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운행을 저지할 목적으로 도덕론자들이나 교회세력 또는 민주정치와 손잡으려 한다.” 소렐은 의회사회주의의 이와 같은 도구적 시도를 우려했다. 100여년이 지난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소렐의 우려대로,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다원주의적 질서를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 기반으로서 여긴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슈 메이커’를 따르자면, 좌파와 우파 사이의 다양한 이념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극단적 분열로 이어지지 않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으려면 다원주의야 말로 최소한 합의 가능한 지점으로서의 공공 정치철학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좌파의 모든 주장들을 ‘대의 민주주의’ 정치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정치’, ‘화석화된 급진성’,‘득표를 위한 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렐이 그렇게나 비판했던 진보적 의회주의자들의 허상적 대의가 바로 다원주의 정치 안에서의 진보의 최전선인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정치

따라서 우리는 민주적인 다원적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권력을 가진 측에게 직접 도전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저항적 직접행동을 통해 정책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목표이다. 오히려 이러한 ‘직접행동’을 통해 (한국에서의 촛불집회의 경험이 좋은 예이다.) 대중이 스스로의 의식을 고양해 ‘기존체제 수용, 무관심, 허위의식’의 정신을 극복하고 주체적 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한 목표이다. 이러한 자각은 결국 통상적인 다원적 사회에서 개인들을 이탈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이러한 직접행동이 이어지면, 항거자들이 서로 간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창출해 내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식의 나의 전망이 현실 정치에의 대안으로서 실현되기에는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비판받을 여지도 있으나, 엘리트나 정치인에 의해 대의되는 ‘위로부터의 정치’를 거부하고 대중의 역량이 스스로 발현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지향함에 있어, 오히려 그 방향성을 명확히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윤리의 제시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다원적 정치로부터 결국 민중들이 이탈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원적 정치의 부도덕성(물질 만능주의, 경쟁 사회 내에서 개인의 자신감만 강조하는 풍조, 억압에 눈감는 분위기 등)에 환멸을 느끼고, 더 고귀한 도덕성을 따라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진보이념은 과학적 판단(옳고 그름)에 대한 강조가 아닌 가치판단(좋고 나쁨)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한다. 다원적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아나키즘에서의 상호부조의 정신,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심층 녹색주의가 도모하는 것처럼, 생태적 규범 등에 의해 개인들에게 강제적 상벌을 부과하는 방식의 또 다른 형태의 거버넌스는 강권적, 전체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아나키즘의 윤리적 판단이 개인의 자발성과 자의성에 온전히 의지하듯이 새로운 도덕성도 그래야 할 것이다. 자발성 안에서 자기규율(푸코)을 통해 시행될 때만 개인의 개성과 집단의 공동체성이 모두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윤리에 대한 모색에 있어서 아나키즘의 ‘차이의 존중과, 꼬뮌적 관계의 중시, 공통성(the common -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강조’ 라는 측면은 다원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공공 정치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새로운 아나키즘’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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