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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6/24
    빈고 문제에 대한 공부집 입장정리
    화니짱
  2. 2012/06/17
    글줄
    아비
  3. 2012/06/12
    “오해하셨습니다.” 라는 말.
    아비
  4. 2012/06/07
    빈집과 빈고에 대한 인식의 변화
    아비

빈고 문제에 대한 공부집 입장정리

<<빈고, 빈집 문제에 대한 논의점 정리>>

- 논의에 앞서서 기본전제.

1. 빈고와 빈집에 대한 문제제기를 감정적 반응(신뢰)문제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2. 문제제기를 하면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논의를 중단하자고 말하면 안된다. 어떤 결론이나든 끝까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자. 한마디로 답을 도출하기 전까지는 토론을 중단하지 말자.

3.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신규장투들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논의에 모든 사람을 강제로 참여시키자는 말은 아니다.)

 

- 빈고와 빈집 문제에 대한 논쟁지점들.

 

1. 빈고와 빈집의 관계 변화

화니짱) 삼각형에 점하나만 찍어도, 그 도형은 전혀 다른 도형인 사각형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관계의 측면에서도 빈고에 ‘만행공간 대출’ 등 외부 ‘공동체 대출’을 시작한 이상 빈고와 빈집의 관계는 이전과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빈고와 빈집의 위상 변화에 대등해서, 그 안에 있는 시스템이라든지, 관계의 방식을 어떤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쿠) 빈고의 선물이 타공동체의 위기대응자금으로 쓰일 수 있게 됨, 예전처럼 빈고에 대한 빈집의 선물이 빈집을 위해서만 쓰이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음. 따라서 이제 빈집은 빈집 자신을 위한 별도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하는게 필요. (예전처럼 잉여금을 안심하고 빈고에 선물할 수 없음. 빈집을 위해서 쓰인다고 확실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예전에는 선물이지만, 보험 내지 저축의 의미로 선물한 거였음.)

 

2. 빈집의 정의 문제:

 

쿠) 게스트룸운영, 열린공간 (빈마을에) , 접근가능한 공간 (물리적으로), 자의성(우리집은 빈집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봤을 때 이음집과 까페 해방촌과 행간은 빈집이 아니다.

 

3. 선물로 운영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쿠) 선물받은 사람이 선물한 사람보다 많은 선물을 하나고 요구받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빈집)자신의 긴급한 필요에 대한 당당한 요구가 아닌, (빈고에) 호혜적인 선처를 바라는 수동성을 양산한다. 따라서 빈고에 대한 적립이나 선물 방식이 아닌, 빈집회계를 통한 빈집 내부의 상호부조 강화가 대안으로 요구됨.

 

4. 빈고의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화니짱) 한 사람에게 모든 일처리와 의사결정권이 집중된 조직은 비정상적이다. 일의 효율성 측면을 떠나서, 조직의 집중도를 즉각 해체 시킬 필요가 있다. 대안으로 1-2달 단위로 대표를 변경시키는 안이 있을 것이다. 대표에게 통신비 명목 등으로 매달 활동비 지급하고 빈고 관련 각종 셈나나 강의에 대표로서 나가도록 함.

 

쿠) 빈고의 운영위원제의 대의방식은, 조합원들의 목소리들을 반영할 수 있는 민주적 방식이 아니다. 더군다나 빈고의 운영위원들이 빈집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5. 현실적 대응방안

쿠) 빈집이 기존에 빈고를 통해서 상호부조하는 방식을, 빈집 회계를 통한 빈집 차원의 상호부조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또한 빈고에 기존에 선물로 적립되어 있는 빈집적립금의 일부를 빈집에 반납해줄 것을 요구한다.

 

화니짱) 빈집적립금은 빈고적립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맞음. 그리고 기존에 적립되어 있는 자금 중 일부를 빈집에 반납해주어야 함. 또한 빈고적립금의 변환과 발맞춰 빈집은 빈집 차원의 상호부조를 위한 자체 내부의 적립금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음.

빈고 운영회의에 빈집 대표들을 몇사람 참여시킨다. (빈고 내에 빈집 관련 예산이 운영되는 비중만큼 빈집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참여해야 한다.) 빈고 대표 체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반중심적, 평등한 네트워크 구축. 1인에 의해 돌아가지 않고 시스템에 의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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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줄

열린집사회의에 일때문에 참석은 못하고 또 글줄이나 쓰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 글을 통한 소통

게시판에 글을 쓰니 사람들은 만나자고 하네요. 제가 생각키로는 만나서 이야기 해보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도, 뭔가 말은 헛돌고 답답하기도 하여 글로 썼습니다. 글이 인격적이냐 말이 인격적이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하였음에도 흘려듣는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것이며, 글로 했음에도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비인격적일 것입니다. 글은 그래도 기록으로 남아, 마음 다스리고 다시 읽을 여유가 있습니다. 감정을 덜어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글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게시판 글소통에 대한 어떤 반감들이 있는 것 같아 변명해 봅니다.

## 신뢰의 문제?

어떤 문제의 지적이 신뢰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의사소통을 방해합니다. 빈고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를 했는데, 그것이 '너 나 못믿냐?'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제기를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지음이 한 '빈집회계'에 대한 질문이 '응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질문의 성격은 제가 던지는 질문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음은 왜 자신을 못믿냐 묻겠지만,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번에 빈집회계를 맡게 된 들깨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음이 날치기 빼돌리기 등등의 의혹이 있냐 하는데, 그 말은 저에게도 적용될 말입니다. 제가 빈고적립금 빈집적립금으로 바꿔서 제 사적으로 유용을 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지금 제기되는 문제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신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필요한 감정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음이 저의 선의를 신뢰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 빈고와 빈집 : 수많은 공동체 중의 빈집이냐,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이냐

저는 빈고가 빈집을 바라 볼 때 어떤 곳으로 바라보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대출이 만들어져 다양한 공동체와 빈고가 관계하였을 때, 그 다양한 공동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빈집에 대한 대출이 검토되는 것과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에 대한 대출이 되는 것은 그 중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전자의 경우 빈고와 공동체가 관계한 것이지 빈집과 관계한 것은 아니며, 후자의 경우 빈고와 관계맺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빈집과 관계맺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저는 만행공간 대출을 통해 빈집사람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빈집과 빈고의 위상문제'라고 일컬어 지는 의문들을 갖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제 빈고가 '공동체 대출'을 신설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와 소통을 시도하는 이상, 빈집 외부의 공동체와 빈집이 차별적으로 대우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여태껏 견고하게 이루어졌던 빈고의 선물이 타 공동체의 위기상황에 선물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가 더욱 확장되는 것이며,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예상되는 만큼 다양한 공동체 중의 하나인 빈집은 그것 자체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할 필요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 무엇이 빈집이냐?

저는 기본적으로 빈집은 1)손님을 받을 수 있으며, 2)열려 있으며, 3)접근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행공간이 손님을 받는다고는 하나, 우리의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 경우 만행공간에서 숙박이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그 열림의 정도가 빈집들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친구를 데려다 재우는 기능은 특별히 빈집이라 이름 붙일것도 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급되는 이음집, 만행공간, cafe 해방촌은 빈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파른집이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도 빈집이라고 불리어졌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 빈집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이 되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공간이 부족해서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 한에야,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는 닫힌 공간이 어떻게 빈집개념에 들어맞는건가요?

 

지음은 빈고가 처음부터 빈집이 아닌 곳에 대출했다고 하는데, 이는 대출의 '목적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말인 듯 합니다. 해방채나 계단집의 경우 빈집을 구성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아마 언급된 대부분의 집들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빈집43 또한 빈집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으며, 그 대출에 분명한 목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 구성에 대하여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빈집 구성원들에게 의사를 묻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 빈집의 확장과 관계의 확장

저는 '빈집의 확장'이라고 말해지는 개념이 하나의 뜻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은 두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1)빈집들이 늘어나는 것과 2)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빈집이라 말할 수 있는 집들이 늘어나는 것을 '빈집의 확장'이라 규정 하고, 빈집과 관계맺는 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을 '관계의 확장'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cafe 해방촌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빈집으로부터 cafe 해방촌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cafe 해방촌이 풍성하게 이룬 것을 cafe 해방촌의 이름으로 가져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과도 cafe 해방촌의 몫이고 책임 또한 cafe 해방촌의 몫입니다. 그 풍성함이 빈집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빈집과 cafe 해방촌이 관계맺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미묘한 차이들이 너무 뭉뜽그려 대화되고 있으며, 저는 이러한 불분명한 개념규정이 오해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에 살고 있는 쌩쌩과 잔잔이 빈집들과 관계를 가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과의 관계의 고민에서 이음집을 빈집이라 칭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이 빈집이냐의 문제와 그것과 관계맺는 문제는 분명히 구분되는 문제입니다. 쿠우가 잔잔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여 잔잔이 쿠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수동적으로 만드는 시혜에 대하여

지음은 수동적으로 만드는 선물의 구조에 관한 문제제기에 되돌려 더 많이 선물함으로써 주체성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교환일 뿐 주체성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물받은 사람이 보다 더 많은 선물을 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봅니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편은 선물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키로 빈고운영위원은 운영위원회의만 있을 뿐,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민주적 회의체가 비교적 약하다고 평가합니다. 또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문제도 빈집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 보입니다. 빈집이 빈고의 무수한 공동체 중의 하나일 뿐이라면, 빈고 운영위원이 빈집 구성원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번 빈집회계에서 구성하고자 하는 상호부조는 빈집 구성원들에 속한 집사가 있고, 집사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매번의 집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빈집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점 때문에 빈고의 선물식 상호부조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빈집회계의 상호부조가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사람이 줄어 부담되는 분담금들도 빈집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며, 집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용이나 책임의 문제 또한 빈집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회의체가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다 주체적일 수 있습니다.

 

 

@@ 다른 세세한 주제들은 만나서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견해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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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quo;오해하셨습니다.&rdquo; 라는 말.

여러분들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빈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듯 싶습니다. 하지만, 오해도 일종의 이해인 한에야, 그러한 인식이 형성되기 위한 인식의 재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오해가 단지 제가 빈고를 이해하는 능력이나 노력이 떨어져서 그러한 점도 있겠지만, 그러한 오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네가 오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대방에게로 돌리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 분들께서 저더러 ‘네가 오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러한 논란의 원인이 ‘저의 오해’이며, 저만 제대로 이해하면 이러한 논란이 불필요하다는 뜻처럼 읽혀져 불쾌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빈고나 빈마을에 대해 말하는 추상적 단어들에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단어들에는 냉소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러한 단어들이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가치를 내세워 활동들을 합니다. 종종 같은 가치를 내세워 활동을 하지만 그들이 현실화하는 활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관찰할 때 본질은 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활동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빈집이나 빈고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는 것은, 빈집 홈페이지나 위키에 적혀 있는 이미 오래되어 버린 글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다른 공동체에 빈고나 빈마을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 자료화 된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다니고 있는 수유너머R 에서는 매주 화요일 발표회를 합니다. 그 ‘화토회’에 지음을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표회 이후 수유너머R 에서는 빈고에 출자를 했습니다.

 

죠스, “3월 12일 월 저녁 7시 빈마을의 대안금융 ‘빈고’ 설명회합니다!”, 수유너머R, 2012.03.09.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495000

 

지음, “수유+빈고 수다회 자료”, 수유너머R, 2012.03.13.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504705

 

빈고 수다회인데 빈마을 이야기가 잔뜩 있습니다. 빈고의 돈 움직이기 부분이 빈고에 관한 적극적인 부분인 듯한데, 그 부분도 주거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잔뜩 채워집니다.

 

무엇보다 빈고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말들을 봅시다.

 

11. 지금 빈고는

  • 빈집을 위한 빈고. 빈집이란 무엇인가? 빈집을 넘어서기.
  • 공동체 공간 대출의 확장
  • 전세에서 월세로
  • 빈집에서 해방촌으로
  • 공동체 주거공간과 모임공간 보증금을 공유하는 주거협동조합으로
  • 공동체들의 연대와 상호부조를 위한 공동체은행으로
  • 신뢰할 수 있고 안정적인 조직으로 체계화하기.
  • 교육 프로그램 만들기.
  • 홍보 방안 만들기.
  • 출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인센티브 제공하기.
  • 정관 규약 등 정비하기.
  • 조합원 활동을 활성화하기.
  • 일꾼 키우기.
  • 빈고에서 확장된 형태로 개편 / 개명

 

지음이 만든 자료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빈고의 성격이 어떻게든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 공간 대출의 확장을 기획하고 있으며, ‘빈집’에서 해방촌으로 중점이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기존의 빈고가 ‘빈집’에 중점이 있었으며 이제 그것을 해방촌으로 넓게 확장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더해서 빈고에서 확장된 형태로 개편 / 개명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빈고’는 켄짱이나 잔잔이 말하는 것처럼 확장된 ‘빈고’개념인가요? 그런 개념이라면 새로이 확장할 필요가 무엇에 있는가요? 정말로 여러분들이 말하는 빈고의 애초 취지와 정신처럼 빈고는 고정불변의 무엇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인가요? 그것의 추상적 단어들과는 별도로 실재로 작동하는 것들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닥쳐진 사건에 우리가 새로이 반응한 것이지, 애초부터 상상력이 현재 그리는 그것만큼 뻗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빈고 취지문의 첫 주어가 왜 집인지 의아합니다. 빈고와 빈집의 관계가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라면, 채권자가 자신의 활동을 홍보함에 있어서 채무자의 활동을 가져다 들어 쓰는 것은 일종의 착취일 뿐입니다. 지음이 발표한 수다회 자료를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습니다. 구체적 내용들은 전부 빈집에 관한 이야기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빈집이 빈고가 없으면 만들어 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건 일면 맞기도 하고 일면 틀리기도 합니다. 빈집이 지불하는 이자가 사실상 빈고의 주 수입원이고, 빈집이 빈고에게 대출받지 않았다면 빈고의 성격은 단순한 저리의 금융기관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됩니다. 빈고는 빈고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반자본적 성격 또한 사라져 버립니다. 고리대금업자나 저리대금업자나 돈이 돈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로도 맞지 않습니다. 빈고는 빈집에 의해 배태되었고, 빈고와 빈집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또 만약에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였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출자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받아내는 그것 이상으로 받아낼 이유 없습니다.

 

사람들은 빈집이 유지되기 위한 물적 토대를 빈고에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의 집 보증금으로 쓸 바에야, 자신의 거주지를 빈집으로 옮겨오고, 빈고에 출자를 합니다. 애초부터 빈집과 빈고가 분리되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빈고에 출자하면 빈집이 유지 확장되리라 믿었습니다. 신규 조합원이 유입되는 경로 또한, 빈고 자체의 활동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빈집을 거쳐 조합원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빈고의 성장은 빈고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주된 기여는 빈집에서 한 것입니다. 빈고를 외부에 소개할 때 빈집의 고민이야기를 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도 오해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해에 기반한 믿음 또한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원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과정에서 빈집과 얽어 홍보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를 적극 조장한 이상 빈고에서는 그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빈집적립금’이라는 것에 ‘빈집의 유지와 확장’을 목적으로 선물된 돈들이 들어가 있는 이상, 빈고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성질의 자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빈집적립금’의 내용들이 대부분은 ‘빈집의 유지와 확장’의 이름으로 조성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조합원들의 이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오해하신 분들의 오해에 기반한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일부라도 빈집회계로 넘어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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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과 빈고에 대한 인식의 변화

빈고와 빈집의 재정분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빈고 조합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빈고 운영회의에서는 빈집적립금이 빈고적립금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약간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글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 8월 말부터 빈집에서 장기투숙 하고 있으며, 그간의 기간 동안 나태하게 파악한 것을 바탕으로 쓰겠습니다.
 
빈집과 빈고의 관계에 관한 인식변화의 진행과정
 
빈집이 먼저 있었고 빈고가 생겼습니다. 빈고의 성격은 빈집의 마을금고였고, 빈집의 공공기금을 처리하는 목적으로 빈고가 생겼습니다. 빈고는 우주협동조합으로 주거문제를 고민하는 조합형태로 운영되었고, 그 주거문제의 구체적 해법 모델로 빈집이 제시되었습니다. 빈집에 거주하지 않는 많은 외부 사람들도 빈집의 정신에 동의하여 출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빈고는 몇몇 운영위원들이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계속해서 이러한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빈고와 빈집의 분리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만행공간과 빈가게가 빈고로부터 대출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시기가 빈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빈집 사람들은 빈집에 살면서 주인의식을 갖는 일종의 마음의 표시로 출자할 것이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말해지는 것처럼, 빈집의 확장과 유지에 필요한 자금에 자신 또한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만행공간과 빈가게 대출은 빈고가 주거나 공간의 측면에 있어서 빈집만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빈고에 어떤 자금적 지원을 한다는 것은 곧바로 빈집에 쓰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공동체에 쓰일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만행은 빈집과는 구분된 집단이고, 빈가게(cafe 해방촌) 또한 이번에 해방촌 오거리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빈집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이라는 공적 성격을 벗어버렸습니다. 만약 기존의 빈가게가 진정 빈집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회관의 성격이 있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빈집 사람들의 의사 또한 물어져야 했을 것이며, cafe 해방촌이 생겨나는 과정에서도 빈집 사람들의 의사가 물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이 빈집사람들 모두가 함께 공간을 책임질 수 없었거나, 혹은 의지가 없는 것이 원인이 되었거나, 몇몇 사람들만의 생각으로 추진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cafe 해방촌이 새로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빈집 사람들과 묶여서 뭔가를 하기보다는, 그들의 멤버쉽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더불어 많은 집들은 지난 겨울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간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남아버린 공간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고 이는 보다 부담되는 분담금으로 사람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부담은 빈고에서 선물로 어느 정도 매꿔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빈고에 의존하여 ‘선물’로 행해지는 상호부조에도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빈집의 특성상 인구의 유입-유출이 자유롭고, 그 누구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혹자는 떠나는 사람들이 책임의식이 없으며 자신은 떠날 때도 분담금을 일부 부담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떠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강제할 현실적 장치 또한 없습니다. 남은 공간에 대한 부담은 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선물’이라는 불확실한 것 보다, 보다 안정적으로 주체적으로 그러한 불안을 상호부조로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빈고 운영위원들은 각 집의 의사를 대표 혹은 대의하지 못한다는 의사소통 구조상의 문제도 있었고, 빈고는 빈집에 살지 않는 사람들 또한 조합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회의체이기에, 빈집의 문제를 주체가 되어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빈집 사람들은 수도관 파손, 보일러 동파 등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능동적 주체로 상호부조의 방식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라는 회의체가 선물이라는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수동적으로 반응해야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빈집 자체의 상호부조를 조직해보고자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존의 빈고와 빈집의 관계는 빈집의 유지를 위한 상호부조라는 측면에서, 빈집을 주체가 아닌 선물을 받는 수동적 객체에 머물게 하며, 무력한 집단으로 만듦니다. 빈고와 빈집의 회계가 분리될 경우, 빈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대사소한 사고들의 경우 빈집의 적립금으로 우선적으로 보다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빈고는 빈집문제에 대한 안건비중을 낮출 수 있으며, 빈집에서 별도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만 안건화 시켜 논의하므로 보다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조합원들을 관리 교육하는 빈고의 다른 업무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빈집적립금 그리고 빈고적립금
 
저는 빈집적립금이 빈고적립금으로 바뀐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도 빈집과 빈고의 회계가 분리되는 시점에서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것이 더욱 더 의아스럽습니다.
 
빈고는 빈집의 금고였고, 사람들은 빈고에 출자 할 때, 빈집의 정신에 동의하여 출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빈집자체의 금고가 빈고였던 상황에서 빈고에 선물한다는 것은 곧 빈집에 선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집의 잉여금을 미래의 빈집사람들에게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빈고에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음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선물한다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빈집사람A 가 빈집에 선물하는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빈고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타 공동체 대출에 대한 의사결정은 집사회의의 대의제화에 민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빈고 운영위원 몇 사람의 주도에 의해 결정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빈집적립금이라고 이름 붙여져 모여오던 돈이, 빈고적립금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위원 몇몇의 결정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음은 그 돈이 주인이 없고 모든 사람의 것이며 지금 현재 사는 사람이 그 돈의 용도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빈고 운영위원들이 돈의 용처를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진정 그 돈이 주인이 없는 돈이라면, 빈고 운영위원들 또한 돈의 용처를 결정할 수 없어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아니, 정말 주인 없는 돈이라면, 우리 모두가 모여 용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비록 지음의 말처럼 실질은 그대로이고 명목상 변화라 할지라도, 그 명목상 변화가 사람의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나 구성원들이 쉽게 바뀌는 빈집의 특성상 그 영향은 더욱 크다 할 것입니다. 분명 논쟁 여지가 있는 중대 사안인 것 같은데, 운영위원 몇몇의 논의로 이런 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들과 그것을 유지시키는 자들
 
빈집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초기의 여러 가치를 지향하던 운동적 성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렇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며 추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런 맥락에서 빈집 5주년 수기 같은 것들이 진행되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고 바깥으로 보일 어떤 환상이지, 정작 중요하다 할 수 있을 우리가 살면서 부닥치는 크고 작은 윤리적 문제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은 미래의 천국을 기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현실도피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이렇게 변화하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러 다른 많은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사건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공간을 지키고 이곳에서 살 수밖에 혹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만들어진 사건 또한 중요하겠지만, 그 사건들이 빈집의 이름으로 사건화 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때로는 비록 귀찮고 폐가 될 수 있을지언정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또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나의 삶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입 다물고 빈집에서 살면, 그저 지낼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빈집이라고 하는 곳은 여유 있는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놀이나 실험 따위가 아니라, 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고 현실적 생존 전략입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은 이곳 자체가 유지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지내는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서로를 질시하고 미워하면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다. 어떤 이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그친 다기 보다는 대게는 감정이 상하고 싸움으로 변질 되기도 합니다.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 할 때면, 빈집을 위해 사고하고 어떤 의견을 내세우는 것 보다는,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 유들유들하게 시시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빈집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에는 깊게는 관심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 사는 것은 빈집에서 그저 머무는 것이지 진정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2년 6월 6일의 새벽, 어떤 마음이 동하여 글을 썼습니다. 읽어주신 분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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