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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6/29
    하루에요(2)
    박하동이
  2. 2012/06/28
    sexuality와 공동체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화니짱
  3. 2012/06/28
    부채에 대한 서평(영어인데 한번 읽어보세요!)
    석류
  4. 2012/06/26
    드디어 된다(1)
    좌인
  5. 2012/06/25
    부채 서론 발제 : 석류(1)
    석류
  6. 2012/06/24
    빈고 문제에 대한 공부집 입장정리
    화니짱
  7. 2012/06/21
    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화니짱
  8. 2012/06/21
    가난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석류
  9. 2012/06/17
    글줄
    아비
  10. 2012/06/14
    차이의 정치학
    석류

하루에요

페이스북에 있던 글은 지웠습니다.

통보하듯이 올린 행동에 대해 제가 생각이 짧았던거 같아서요. (달린 댓글들도 감정적인 글들이 올라왔고.)

 일단은 제가 7월은 당분간 부모님 댁에 있을거 같아요 후에는 공부집으로 돌아올지 다른 집으로 갈지 아니면 계속 부모님 댁에 머물지는 확실하지가 않아요.(이 문제는 제가 집으로 돌아간 후 돌아온 다면 미리 연락드릴께요.)

 그런데 사실 제가 부모님 댁으로 가는 것에 대해 이유를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그래도 필요하다면 간단하고 일부분으로 말해, 저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요)그치만 그래도 저 나름대로는 길지도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계속 지내보고 잘 지내볼려고 노력도 했고 고민도 많이 했었요.그러니 너무 섭하다거나 책임감 없이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저의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이번주의 집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근래 집에서의 일들도 잘 하지 않아 죄송하네요.

어서 빨리 정신차리고 돌아올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그동안 잘 지내요 공산당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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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ity와 공동체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167.50 KB) 다운받기]

 

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 부재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김환희

 

 

<<1. 사랑이란 게 혼란스럽다.>>

 

A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는 현대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나 관행과 같이 통상 미리 규정되어 있던 것들이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되고 불확실해진 세계는 사람들을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안전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종교를 대체해서 새로운 위안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사고 방식이 만연한 이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것마저도 확신을 잃고 혼동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해 놓고는 말과는 달리 함정에 빠트리고 마는 것이다.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현대인의 이러한 사랑은 성애(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성애적 사랑이라는 의미로 축소되어,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 섹스와 사랑이 더 이상 분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울리히 벡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책에서 성해방(1960년대 성의 상품화) 이후, 초자아에 내려진 '즐겨라'는 명령이 지배하는 황폐화된 세상에 대해 분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과 성의 이율배반에 초점을 맞춘다. 섹스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섹스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들어 소멸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섹스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섹스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해진다.섹스는 "전형적인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와 같이 증식하여, 자유주의 사회가 가진 비인간적 본성을 재생산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영구히 훼손시킨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섹스가 사랑을 파멸시킨 것이다."(Slavoj Žižek. 2011.) 따라서, 데리다의 용어를 빌자면 섹스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심적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대인의 정서는 최근 대중문화 속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는 소재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작인 웹툰『발광하는 현대사』와 영화『돈의 맛』의 내용을 이 글에서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현대사회의 섹슈얼리티의 위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탈근대 시대, 종교적 윤리의 붕괴는 현대인의 에로스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현대인의 에로스의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이러한 위험사회에서‘혼란스러운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

 

B :

 

C : 나의 동거인이자, 대안가족. 좋은 대화상대이자 친구인 OO는 비연애주의자라고 자신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OO는 항상 누군가와 연애중이다. 분명 특정한 상대와 같이 1:1로 데이트도 하고, 스킨쉽도 하고, 잠도 같이 자는 것 같은데 왜 자신의 연애를 비연애하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언어모순적인 상황에 흥미를 느꼈다. OO는 예전 여자친구와 대화중에 “친구 랑도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연인과도 그러고 친구 랑도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연인의 의미는 무엇일까? OO는 연인과 친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나누기가 쉽지 않듯이, 친한 사이에 느끼는 사랑, 가족 간에 느끼는 사랑, 혹은 좋은 책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고양이나 동식물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우주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그러한 사랑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은,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섹스어필하는 관계에서 만나는 에로스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논리보다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OO가 연인과 사랑하는 관계이듯이, 나는 OO에게 또 다른 사랑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모순점이 생긴다. 만약 연인이 친구와 특별히 차이가 없다면, 왜 특정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만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하기 때문이 아닌가. 결국 특별히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고, 그러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편적으로 연애라 부르는 것 아닌가. OO의 답은 이랬다. “물론,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한테 더 끌리긴 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를 연인(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규정내리고 싶진 않다. 이러한 일시적 감정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인데, 마치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착각), 혹은 그래야하는 것처럼(의무) 행동하고 싶진 않다.”OO는 구속을 싫어한다. 만나는 사람한테도 누가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맘에 들면 없다고 대답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있다고 대답하라고 알려주곤 한다. 구속하지 않는 사랑. 마음이 있을 때까지만 만나는 사랑. 사랑이 익숙해져, 처음의 경이로움이 떨어지면 습관적인 사랑만 한다, 결국 권태에 지쳐 헤어지길 반복한 나에게 OO의 사랑은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너무 이기적이고 문란한 사랑이 아닐까? 마치 플레이보이의 사랑 같아 보이고 말이다. 그러나 OO는 이러한 비연애적인 연애방식은 매우 힘들고 자신한테도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고 말한다. 사귀고 나서 관계에 질리면 헤어지는 식으로 일방적인 관계맺기가 아니라, 사귀기 전에 자신의 이러한 관계맺기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하면 사귀고, 동의하지 않으면 아예 이런 관계를 시작도 하지 않기에, 상대방을 이해시키기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왜 비연애를 고집하냐고 물어봤다. “일단, 구속되는 관계가 너무 싫고, 아무리 처음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이 변할 것을 아는데, 헛된 약속을 하고 싶지 않”다고 OO는 이야기 했다. OO의 비연애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연애일까? 아니면 (OO가 주장하듯)비연애일까?

 

 

<<2. 사랑이 변하니? 사랑아~ 도대체 우리, 왜 이렇게 된 거니? >>

A :오늘날 종교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종교는 처음부터 에로스를 엄격히 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베버에 따르자면, 종교와 성적사랑은 “원래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계(Max Weber. 2008: 245)”를 맺고 있었다.즉 “성교는 매우 주술적인 광란축제의 일부분이었고, 신성한 매음은 모든 망아경지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Max Weber. 2008: 245)” 종교적 관습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섹슈얼리티는 종교적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성생활은 그 자체, 다른 모든 기능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만의 정령과 신을 가지고 있었다(Max Weber. 2008: 246).” 즉 이시기의 섹스는 ‘단순한 자연주의적인 성’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때때로 종교적 몰입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신성시’ 혹은 최소한 성(聖)스러운 것과 대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그러나 후에 “예언종교와 사제층이 통제하는 생활체계들은 혼인제도의 보호를 위해 거의 예외없이 성행위를 규제(Max Weber. 2008: 247)”하였는데 이는 “모든 합리적인 생활규제체계가 주술적 주신제와 비합리적 도취형태 일반에 대해 가진 적대적 입장의 표현(Max Weber. 2008: 247)”이었다. 성애에 대한 종교적 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는 구원종교가 주지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문화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 주지주의와 결합된 신앙(구원종교)에 의해 성애는 금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종교의 형재애 윤리와 성애 간의 치열한 긴장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자극하며 서로를 심화 발전시키게 된다.문화의 합리화도 진행되었지만 한편으로 “성적영역에서는 성이 성애(에로틱)로 승화되고 이와 함께 성은 하나의 의식적으로 즐기는 비일상적 영역으로 승화(Max Weber. 2008: 247)”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구원윤리는 성생활은 동물적인 것이라고 에로스적 관계에 대하여 더욱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되려, 에로스를 대중들에게 자연적 속성에 속한 신비한 영역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급기야 에로스가 “창조주적 힘의 화신으로 긍정(Max Weber. 2008: 253)”되며 사람들이 “모든 순수한 동물적인 것을 미화하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에로틱한 감각체계(Max Weber. 2008: 252)”를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동한다. 즉 성애는 “현세 내적인 구원감정과 함께, 개인주의화에 신비화 경향(Max Weber. 2008: 253)”을 부여하였다. 성애의 이러한 신비화, 유사-종교적 특성은 구원종교와 계속해서 대립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이러한 극심한 갈등에도 불교하고 카톨릭교에서 결혼을 성사(聖事)로 인정함으로써, 종교는 ‘성애의 비일상적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 양보하고 만다. 하지만 욕정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규제된 혼인으로 한정함으로써 “금욕주의는 혼인관계를 에로틱으로 변질시키는 어떠한 교묘한 시도도 극히 사악한 피조물 신격화로 보고 거부”한다. (Max Weber. 2008: 256)

결국 베버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구원종교는 (자연주의적인)섹스 자체에 대해서 반대 했다기보다는, 성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삶의 전반에 걸친 금욕주의적인 규제는 오히려 비합리성의 분출구로서 성애의 신비화 내지 관심의 증대를 부추겼다. 구원종교는 최후의 수단으로 섹스의 허용을 결혼제도 안에 봉인 한 채, 에로스적 관계화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종교의 도덕적 규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에로스의 힘에 대한 봉인이 깨지고 말았다.도덕률의 준수에 대한‘개인화’의 경향이 나타났고, 최후의 보루인 결혼마저도 에로스의 직접적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붕괴된 데에는 주지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에 의한 세속화의 여파는 마지막 남은 신비화의 영역인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이와 같은 모든 부문의 화폐적 세속화(혹은 교환적 관계화)는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하였다. 결혼에 있어서도 조건과 스펙이 맞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됨으로써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결혼 외부에서 찾는 모순이 생겨나 버렸다. 돈의 맛에서 필리핀가정부와 볼륜의 관계를 맺는 윤회장(백윤식)의 애정도피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관계 (윤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결혼관계를 포함하여) 중 제일 순수하다고도 느껴질 정도로 자본주의는 결혼마저도 물질화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가족이라든지, 결혼이 자신의 사랑(행복, 가치)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위험사회에 각 개인들이 홀로 놓이게 되었다.개인주의화의 강화(이로 인한 구원종교의 규제력 약화)와 성애적 신비주의의 유지는 각 개인들의 사랑을 각개전투로 만들었다.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사랑에 있어서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하게 됨.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왜곡현상에 자본주의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변화를 초래했을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남녀 간의 독점적 사랑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성향은 화폐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화폐는 자신이 모든 사물에서 일자로 위치하는 독점적 교환질서 안에서만 기능한다. 호혜적 관계가 각 개인의 모든 인간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호혜적 증여(선물)만이 이루어진다면, 교환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소유권을 명확히 한 개인에게 한정하고, 그 가치를 하나의 화폐로 단일화하여 시장내에서 거래되게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 질서는 꼬뮌적이고 코스모폴리탄 식의 사랑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심화의 과정은 사랑의 관계를 계속 축소시키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사랑의 소유화. 호혜적 관계에 의한 선물의 관계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인 화폐교환 질서만 남게 되는 선형적 과정인 것이다.

 

B :

 

<<결론 : 3. 사랑, 어떻게 해야 할까? >>

A:자본주의의 이와 같은 부작용(섹스와 사랑의 동일화-관계의 해체)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보수적인‘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막스베버의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성의 신비화(비합리적 요소의 강화)를 막는 것은 다른 비합리성(과거에는 종교)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비합리성의 영역에 있어서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요구된다. 새로운 윤리가 위험상황에 빠져있는 혼동하는 개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는 보수주의의 윤리로 가서는 안 되고, 또 불가능할 것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와 결탁했던 비합리성, 혹은 가부장제 윤리와 결합했던 비합리성은 부적합한 비합리성이라는 것이 합리주의화의 경향(인류의 진보, 혹은 약자의 투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합리주의의 (건강한) 진전을 위해 (기존의 비합리성을 대체할) 새로운 비합리성이 요구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다.

나는 새로운 윤리가 평등한 관계(수평적 네트워크)를 보장해야 하며, 이는 각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합리성 중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차이의 정치’ 및 이웃간에 공존을 도모하게 만드는 사상은 결국 사랑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사랑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예상할 때, 그 사랑은‘비독점적 사랑’이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으로‘공동성’을 어떻게 창출하고 더 늘려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관계를 해체한다. 개인 단위의 것들만 남기고 모두 해체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꼬뮌적 방식은 개인/핵가족 단위에서 더 큰 단위로 상호부조, 호혜의 관계망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대융합에의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개인의‘사랑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느냐? 그것은 가족로맨스(가족단위)라든지, 운명적 사랑(연인단위)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창출해야 가능한 것이다. 연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1:1 사랑의 독점적 소유관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욕망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공동성의 장’(꼬뮈니즘)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꼬뮈니즘 안에서의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편협한 관계성은 ‘새로이 확장된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고, 성애는 비신비화되어 자연주의적 성으로 지상추락할 것이다.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꼬뮈니즘 안에서의‘새로이 확장된 사랑’이 막스 베버가 구원종교에서 에로스의 대쌍 개념으로 이야기했던‘형재애’와 매우 유사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말하는 형재애적 사랑은 에로스와 대결하며 금욕주의를 강조하는‘형재애’가 아니라 에로스와 대치되기 이전에, 즉 성애 자체가 자연주의적 성으로 머물며 비합리적인 신비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존재했던 원래의 ‘형제애’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재애’는 분명 ‘에로스’와 구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형재애, 코스모폴리탄적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가족 등 기존의 위계적 관계망을 해체해야만 한다.

자기 지역 내에 대안가족을 구축하고 꼬뮌의 범위를 넓히라. 그리고 전국적으로 또한 전세계 꼬뮌에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하라.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넓혀가라. 다시 꼬뮌적인 방식의 사랑을 획득하라.

- The End -

 

참 고 문 헌

1. 외국문헌

Erich Fromm. 2000.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Slavoj Žižek.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3인역. 난장이.

Max Weber. 2008. ≪종교 사회학 선집≫. 전성우 역. 나남.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3인역. 새물결.

Wilhelm Reich. 2006.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역. 그린비

 

 

<부록1. 주간한국 기사 >유부녀들의 금지된 사랑의 은밀한 유혹

‘유부녀 쉽게 유혹하는 방법’ ‘유부남에게 통하는 애교 베스트 10’….

인터넷을 하다 보면 이런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부남. 유부녀들의 ‘애인 만들기’ ‘애인 되기’ 퇴폐적 열풍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음을 적나라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녀와 탈선하는 불륜행각은 동서고금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이들은 이른바 세컨드 라이프를 위해 ‘유부클럽’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고민을 함께 나누는 등 상담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A 카페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혼녀’들을 위해 개설된 곳이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꾸 보다 보니 정이 들었죠. 그 사람도 저랑 같이 있으면 좋고, 와이프보다 더 편하대요. 빨리 끝내야 하는 걸 알지만 쉽지 않아요. 주변에서 눈치챌까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끝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얼마 전 이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유부녀이면서도 이 카페에 흥미 삼아 가입한 회원들은 “어떻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를 치냐” “가정 파괴범이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등 비난하는 글을 대거 올렸다. 반면 미혼 여성 회원들은 “오죽하면 결혼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한 눈을 팔겠느냐” “남편 바람나게 한 와이프가 문제다” 등 양측이 팽팽하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

사태가 너무 소란스러워지자 결국 카페 주인은 이후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등급제를 적용해 일정 등급 이상만 게시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바꿔버렸다.

이 카페 또 다른 회원 박모(25세)씨는 여대생이다. 얼마 전 30대 중반의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박 씨는 앞서 동갑인 남자와 2살 연상인 미혼 남자를 각각 사귄 적이 있었는데 만날 때 마다 데이트 비용 걱정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남친이 영화를 보여주면 나는 밥이나 커피를 사야 했고, 항상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 애인은 유부남이기는 하지만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해준다.” 나이 차이가 크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고 있어서 자신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준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A카페 개설자 김모씨는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카페와 이웃을 맺은 카페도 3곳이나 된다”며 유사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후죽순 생겨난 유부클럽이 유명 사이트마다 수백 개씩이나 되고, 회원 수도 각각 수십~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의 유부클럽은 유부남. 유부녀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중시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불륜이 유행하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본래 클럽의 취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마음 놓고 외도할 수 있는 장소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대한민국 유부남, 유부녀를 위한 커뮤니티로 육아. 건강 정보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시간이 지나 회원들간의 편안한 만남을 주선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유부 탈선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현재 회원수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지난 9월에는 ‘정모(정기적인 모임)’를 가졌고, 일주일에 2~3번은 ‘번개(갑작스러운 모임)’를 한다. 참여율도 높고, 참석한 사람들은 하루 정도 짧은 만남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만남을 이어간다.

“오늘 영화 번개 좋았어요. 특히 ‘sdy20’님 게시판에서 얘기만 주고 받다가 직접 만나니까 더 반가웠어요. 답답한 일상에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조만간 또 만나요.” 이 커뮤니티의 한 회원이 남긴 번개 후기다.

또 다른 회원 김모씨는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하면서 만난 이모씨와 함께 얼마 전 여행을 갔다 왔다. 김씨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워크숍을 간다고 둘러댔고, 상대방 역시 남편에게는 동창생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꾸며 둘만의 밀월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김씨는 자신 뿐만 아니라 회사 동기들도 ‘애인 만들기’를 꿈꾼다며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외도를 알고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커뮤니티 가입 방법을 묻는 친구도 있다.

현택수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이 같은 세태를 두고 연애지상주의와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쾌락추구 성향이 강한 대중문화가 개인을 자극하기 시작하면서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줄고 있다”며 “쾌락권 추구가 곧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사랑이라면 사회 도덕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남의 사람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결혼생활에 대한 후회와 절대시됐던 일부일처제에 대한 도전이 늘면서 불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불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인 부부가 갖고 있다”며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부부 사이의 진짜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할 것을 권고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됐다고 해서 둘 사이가 언제나 굳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항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긴장된 애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현 교수는 말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심리학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들어 불륜을 설명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장애가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불륜 커플이 늘고, 그들의 사랑이 더 열정적으로 달아오르게 되는 이유이다.

 

 

C: OO의 연애는 비연애가 맞았다. 동시에 OO의 비연애는 연애인 것이 맞다. 자본주의 내의 정형화된 관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OO의 연애는 비연애일 것이고, 꼬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에서의 OO의 비연애는 우리가 모두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연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 모두 OO를 본받아 비연애를 실천해야 할까? 개인적인 실천만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비연애는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뒷밤침해 줄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공동체는 공존할 수 있을까? 진지한 공동체든, 노는 공동체든, 사실상 많은 공동체들이 연애문제로 깨지고 만다. 공동체와 사랑이 지금까지 공존하지 못했던 것은 둘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로 영원히 독점하고자 했던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따라서 공동체적 실천(마르크스)과 개인적 실천(프로이트)은 만나야 한다. 사회적 대타자, 심리적 대타자를 모두 깨부셔야 한다. 라깡의 말마따나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대타자’따위는 없으니까. 경계를 넘어서 모두와 사랑의 네트워크로 접속하라. 소유가 없을 때, 질투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섹스는 신과 같은 신비적 지위를 잃어버린채 대소변과 같은 생리작용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다. 결국 사랑만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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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에 대한 서평(영어인데 한번 읽어보세요!)

Debt and Punishment

 

David Graeber’s book Debt: The First 5,000 Years is missing an analysis of capitalism

 

by Ingo Stützle

 

(article originally published in the May 18th, 2012 issue of the newspaper analyse & kritik)

 

The last few years of crisis politics were a prime example of how on the one hand profits are privatized, while on the other hand losses are socialized. The deep crisis of capitalism has left in its wake a sovereign debt crisis. The answer of the political class has been fiscal consolidation. Finance capital’s claims on returns are guaranteed and collected by the state. The invisible hand of the market is joined by the visible fist of the state. Struggles over state finances will be central battlefields in the next few years.

 

That is no doubt the reason why the publication of David Graeber’s book Debt: The First 5,000 Years was greeted with euphoria, even by the bourgeois press. In the Frankfurter Allgemeine Sonntagszeitung, Frank Schirrmacher wrote that Graeber “opens the reader’s eyes to what’s going on right now,” and furthermore, “Graeber’s text is a revelation, since one is no longer forced to react to the system itself within the system of apparent economic rationality.” Der Spiegel opines: “his book on the nature of debt and its economic and moral basis is already regarded as an anti-capitalist standard work of the new social movements which have emerged during the world economic crisis.” This is in reference to the Occupy protests. Even the chief economist of the Deutsche Bank group reviewed Graber’s book positively in the monthly economic policy journal Wirtschaftsdienst (4/2012) with regard to the question of the future of central banking. Since May 2012, the book has been available in a German edition.

 

Promises Become Debts

 

David Graeber, anthropologist and anarchist, is a Professor at Goldsmiths College of the University of London. Until 2007, he taught Ethnology at the ivy league university Yale. For political reasons, his contract was not renewed – Graeber is a political activist. Since the protests against the World Economic Forum in New York City in 2002, he has been an important figure. The role that he has played in the Occupy movement underscores this: not only has he participated, but he has published books on the movement.

 

Graeber’s point of departure is the question as to why in capitalism the human appreciation of morality and justice is reduced to an economic quantity and the language of a business transaction – debt. The moral-economic double meaning of the word “debt” in many languages is striking. How have moral obligations and promises between people become an economic debt, and what does that mean for society?

 

For Graeber, debts constitute a promise – which is to say, a moral obligation – which also existed before capitalism and independent of money. Money makes the mutual promise between people into something impersonal and transferable: debt. Human cooperation, community, and possible forms of renegotiating promises are thus disturbed, existing relations of power and domination become cemented.

 

In this way, money makes it possible to “turn morality into a matter of impersonal arithmetic” with which promises can be balanced against each other. A settlement by means of debt cancellation, renegotiation, or non-commodified exchange relationships (gift giving or donation), as was still prevalent in pre-capitalist societies, is thus no longer possible.

 

Graeber thus concentrates upon a classical question of political economy, with which the book also begins: what is money? In the first part, Graeber correctly criticizes the theoretical mainstream of economics. Economics textbooks always begin with barter, an exchange of products without the mediation of money. Economists usually proceed from unhistorical models in which people pursue their “natural dispositions”, among others their drive to barter and exchange.

 

The State Invents Money

 

Graeber opposes all this with a historical argument. He proceeds from the assumption that credit and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creditor and debtor historically precedes money. “The standard account of monetary history is precisely backwards”, namely the sequence from exchange to the discovery of money to the developed credit system. Graeber further hones his argument: money is not only a thing, but a means of making things commensurable. But exactly what is measured or compared? Graeber’s simple answer is: debt. Money and credit (that is to say, promises to pay) are for him de facto the same.

 

Graeber reconstructs the genesis of money from promises through various historical phases. From the time of early urban civilizations (Egypt, Mesopotamia, China) around 3000 to 800 B.C., through the Middle Ages (600-1450 A.D.) to the “Age of Great Capitalist Empires” from 1450 (to 1971).

 

In Graeber’s account, the state is responsible for the emergence of money, which was introduced in order to pay soldiers. The state thus at the same time also establishes the “currency” in which it collects taxes and generalizes the use of money. Simultaneously, markets arise alongside barracks and mass war production, and in turn money plays an increasingly important role in these markets. According to Graeber, state force, money/credit, and the dominance of markets are tightly interwoven.

 

Graeber’s account exhibits a rather vague understanding of capitalism, and in accordance with the anarchist tradition assigns a dominant role to the state. At the same time, this role is subordinated to the economy of obligation. The same is the case for other characteristics of capitalism. Monetary phenomena have existed long before factories and wage labor. However, one searches in vain in Graeber’s work for an exact determination of what capitalism is. One characteristic he offers is endless growth and the production of “an endlessly expanding volume of material goods”. Also central is the state’s promotion of an “economy of interest”; the history of capitalism is the history of “the gradual transformation of moral networks by the intrusion of the impersonal – and often vindictive – power of the state.” Against this background, it’s no wonder that Graeber concludes that markets and money will continue to exist after capitalism.

 

It’s not difficult to recognize that Graeber’s understanding of capitalism is not oriented toward Marx’s. However, whoever struggles against capitalist relations should nonetheless have an idea of what it is he or she is against. In the future, this must be a concern within the radical left. It is at this point that a critique of Graeber’s book should be applied.

 

Relations Without Classes

 

In principle, Graeber proceeds from the starting point of a socioeconomic relationship that generates interest – the relationship between creditor and debtor; but class relations, the relation between wage labor and capital, and the form of production are not at the center of his focus. Thus, numerous relationships that characterize capitalism become indistinct in Graeber’s account.

 

Various actors engage in credit relationships. Debtors can be states, wage laborers, or businesses – for different reasons. The state, because it does not collect enough revenue from taxes or because it nationalizes bank losses; wage laborers, because they don’t earn enough; businesses, in order to make as much profit as possible. The perspective of credit, however, causes them to all look the same; the reason for the credit relationship that arises appears irrelevant.

 

This blurring of social relations is also apparent in the categories of money, credit, and capital, which in Graeber’s conception are indistinguishable from one another. According to Marx, on the other hand, they are forms that mediate quite distinct relations. Money completes a promise to pay, it is therefore itself the “general equivalent.” Money is accepted and used by all, whether wage laborer or capitalist. It mediates commodity exchange. Labor-power is also compensated in the form of money.

 

If money is supposed to be credit, as Graeber thinks, that raises the question as to what “real” act of monetary payment it supposedly refers. Capital is valorized value. When money is spent as capital, it always presupposes a class relation. Money is spent with the goal of making a profit. At the same time, this relation presupposes the existence of people who, free of both means of production and of personal ties of dependency, have nothing to sell but their labor-power. When capital takes the form of a property claim such as a stock, bond, or another security, Marx refers to it as “fictitious capital”. For Graeber, it’s again merely credit. Since he ascribes no relevance to these distinctions, all cats are grey to him.

 

Cancel All Debt

 

The same is true for his historical observations. Graeber does not recognize what money and credit mean in pre-capitalist societies, what distinguishes them from each other. He works with trans-historical phenomena, without raising questions as to their historical-social form. This is a trait he shares with the economic mainstream that he otherwise criticizes. Graeber writes that systems of credit and accounting are as old as civilization itself. He admits that he finds it difficult to distinguish between gift-giving and credit; but this is only a problem if one discusses these forms of social intercourse independent of their respective dominant forms of production, when one does not clarify exactly what is characteristic of capitalism, what makes it capitalistic and thus what distinguishes it from other social formations.

 

Historically speaking, a social obligation is not the same thing as credit, and even credit is not the same thing as credit. This observation can be found in Marx’s work: “There was borrowing and lending in earlier situations as well, and usury is even the oldest of the antediluvian forms of capital. But borrowing and lending no more constitute credit than working constitutes industrial labour or free wage labour.” (Grundrisse,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7/grundrisse/ch10.htm)

 

What does Marx mean by that? Under pre-capitalist relations, in which production was conducted to meet needs, credit was a means of impoverishment. In contrast, under capitalism, credit is a means of augmenting money – of profit maximization. Similarly, industrial labor (or factories in the case of Graeber's book) cannot be simply identified with capitalist profit logic.

 

Although it is often asserted that a historical approach is able to show that something existed before capitalism, and that one can learn from history, the differences between capitalist and pre-capitalist societies are often obliterated (and not just in Graeber's book) if one does not first clarify what is specific about capitalism, in order to use that as the starting point for delving into history –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1

 

According to Graeber, every revolution begins with debt that society can no longer repay. “Cancel the debts and redistribute the land.” This sentence by the historian of antiquity Moses Finley is the only revolutionary program, recurring throughout the centuries. And most revolutions were preceded by (excessive) debt. However, before we can think about revolution, we should agree first on what exactly is supposed to be revolutionized. Debt cancellation is indeed a correct demand, but only when the social relations that constantly bring about indebtedness are abolished as well. It seems difficult to reach an agreement with Graeber on exactly what those social relations are.

 

1.For that reason, historical research influenced by Marx controverts Graeber's accounts of the market, credit, and money. On the imposition of the market as an imperative, see Ellen Meiksins Wood's The Origin of Capitalism. On money, see Jacques LeGoff ‘s Your Money or Your Life: Economy and Religion in the Middle Ages. On credit, see Karl Polanyi’s Primitive, Archaic, and Modern Economies: Essays. [↩]

6 Kommentare zu “Debt and Punishment: A Critical Review of David Graeber’s De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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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p

am 13. Juni 2012 um 03:28

Graeber has responded to this review, but sadly he did it in the form of a world-historical Twitter flipout that culminated in him blocking Alex Callinicos (?). Here are the tweets from Graeber that actually engage with the review’s content:

 

* it does not in fact say money and markets will exist after capitalism, but only that they have and could. Not that they should

 

* the book does in fact talk of class and even has a class analysis of many key historical changes if read w/out hostile bias

 

* to say I ignore class is especially odd since central argument is debt between classes treated as diff than debts within

 

* I believe free wage labor is the dominant ideological form but rarely exists in reality

 

* class consists of REAL social rels not ideologicl fantasies-no matter how important those are on social reproduction

 

* in short what you call “forms” I think largely = ideological illusion, obscuring the empirical reality of class

 

* meanwhile the argument I don’t clearly distinguish credits and gifts is crazy – I spend a whole chapter doing so!

 

* I say social currencies (credits) and commercial ones are so dif its hard to conceive one turning into another

 

* Honestly I’m v sad. I really wanted to engage with Marxist thought & threw out ideas to do so. Reviewers ignore them & just repeat orthodo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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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된다

 

 

드디어 저도 글쓰기가 되는 군요 히힛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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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서론 발제 : 석류

부채 서론 발제 : 석류

 

IMF : 부채회수기관. 구조조정 강요. IMF는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주장. 특히 가난한 국가에 대해. 빈국들은 식료품 가격안정 정책, 무상 교육, 무료 건강 보험 정책등을 포기.

마다카스카르 : 말라리아모기 퇴치 프로그램 시행 못함. 1만명 사망.

 

“빚은 반드시 갚아야한다”는 전제를 엄격히 따지고 들면 정통 경제 이론을 따른다 하더라고 그 말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게 되어있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대출이라 할지라도 대출이 언제나 상환 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헷갈리게 만드는 경험>

 

프랑스 1895년 마다카스카르 침공. 주민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 침공당한 비용을 물리기 위해. 철도 고속도로 플랜테이션 교량 건설. 반대한 주민들을 상당수 학살.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은 아직도 프랑스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 국제 공동체도 마스가스카르가 빚을 지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냄.

 

아이티 옛 플랜테이션 노예들이 세운 나라. 프랑스 실패한 군사원정비용과 몰수된 플랜테이션에 대한 배상으로 1억 5천만 프랑의 부채를 짊어져야 한다고 주장. 국제사회 아이티와 통상 중단 결정. 아이티는 부채와 빈곤 인간의 불행과 동의어가 됨

 

미국 제3세계 부채상환에 엄격한 조건을 내걸음. 제3세계 부채 총합보다 더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음. 갚을 생각 없고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독일, 일본, 대만, 태국, 걸프만 국가들)의 기관투자자들이 미국 재무부 채권의 형식으로 보호. 일종의 공물.

 

미국의 경우는 ‘캐딜락’ 채무자. 마다가스카르는 그 옆 감방에 굶주리고 있는 극빈자 채무자.

 

 

미국 코미디언 스티븐 라이트(steven wright)의 개그

 

일전에 친구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좁은 길에서 권총을 든 녀석이 튀어나오더니 "손들어" 라고 외치더군. 그래서 지갑을 끄집어내는데 불쑥 "몽땅 빼앗길 수는 없지"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내가 돈 일부를 빼낸 친구에게 주면서 "프레드, 너에게 꾼 50달러야"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강도가 화를 버럭 내며 자기 지갑에게 1천 달러를 뽑아 프레드에게 주면서 강제로 나에게 빌려주게 하더군. 그래 놓고 강도는 그 돈을 빼앗아 가던데.

 

부채의 역사를 돌아볼 경우, 심각한 도덕적 혼동이 발생. 돈을 갚는 것은 도덕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돈을 빌려주는 것도 사악하다고 생각.

 

가톨릭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언제나 금지. 탁발승들이 고리대금업자들 심판하는 설교들을 하고 다님.

 

중세 힌드교 법전, 대출이 용납 가능한 것,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 노예나 소로 다시 태어난다고 설교.

 

불교 경전 : 채무자는 꿩이고 채권자는 매, 채무자는 노예이고 채권자는 주인

 

모든 종교들은 부채와 관련해서 도덕적으로 타협적인 태도(채무자는 빚을 갚아야 하고 채권자는 너무 가혹하게 채무자에게 독촉하지 않아야 한다)를 취함.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나?>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핵심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도덕관념과 정의감이 상거래 언어로 압축된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도덕적 의무를 부채로 환원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언어가 시장에 의해 다듬어질 때, 우리는 도덕적 의무와 부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게 되는가? 어떻게 보면, 의무와 채무의 차이는 간단하고 명백하다. 채무는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할 의무이다. 그 결과 채무는 다른 형태의 의무들과 달리 정확히 양이 정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채무는 단순하고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성격이 부채를 이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양 당사자가 상대방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그렇지 않고 만약 빚진 것이 호의나 존경, 감사라면 양 당사자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양 당사자는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오로지 원금과 이자율, 벌금과 차감잔액만 따지면 된다. 만일 당신이 가정을 포기하고 다른 지방을 떠돌아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채권자에게는 지엽적인 일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돈은 돈이고, 거래는 거래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며 또한 이 책에서 길게 탐험할 주제는 도덕성을 객관적인 산수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도한 것으로 보였을 것들을 정당화하는 돈의 능력이다. 폭력과 양적 계산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이 책에서 계속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곳곳에서 폭력이 인간관계를 수학으로 바꿔놓는 방법이 거듭 소개될 것이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자유와 도덕성과 사회성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전쟁과 정복, 노예제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그런 전쟁과 정복, 노예제도 등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대의 제도들을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부채의 역사다>

 

2008년 9월 금융위기, 첨단 금융상품들이 거대한 거짓말에 불과함이 드러남. 채무 불이행이 불가피한 모기지론을 가난한 가족들에게 팔고, 기관 투자자들에게 팔고, 그 위험을 거대 보험회사에 떠넘김. 부채에 눌러 침몰, 공적자금 투입.

 

미국의 도덕성 = 부채를 상환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옴. 파산법 가장 늦게 제정. 미국시민들 이제는 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됨. IMF는 다음에는 어떠한 구제 금융도 불가능 할 수 있다고 경고.

 

이 시대는 먼저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IMF 같은 글로벌 기관들의 창설로 시작 되었다.

 

<인간관계의 본질을 다시 생각 한다.>

 

이 책은 먼저 일련의 신화들을 깨뜨리는 시도로부터 시작.

물물교환의 신화, 원초적 부채에 대한 신화. 이 신화들이 경제와 사회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가설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것을 해체하고 싶다.

 

상식적인 관점에선 국가와 시장은 서로 정반대의 원칙을 추구하는 듯 보임. 국가=규제, 시장=자율. 역사적 사실을 들춰보면 국가와 시장은 함께 태어났으며 밀접하게 얽혀있다. 국가와 시장은 모든 인간관계를 교환으로 압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만일 인간관계가 교환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제 4장에서는 인류학 분야의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경제생활의 도덕적 근거를 설명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추구.

 

그런 다음 화폐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교환의 원칙이 폭력의 결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제시될 것이다. 돈의 기원이 범죄와 배상, 전쟁과 노예제도, 명예와 부채, 상환 등에서 발견된다는 말이다.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은 자본주의 제국들이 지배한 지난 5백년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무대를 세워주며 또 오늘날 아주 중요한 질문들을 던질 기회를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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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고 문제에 대한 공부집 입장정리

<<빈고, 빈집 문제에 대한 논의점 정리>>

- 논의에 앞서서 기본전제.

1. 빈고와 빈집에 대한 문제제기를 감정적 반응(신뢰)문제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2. 문제제기를 하면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논의를 중단하자고 말하면 안된다. 어떤 결론이나든 끝까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자. 한마디로 답을 도출하기 전까지는 토론을 중단하지 말자.

3.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신규장투들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논의에 모든 사람을 강제로 참여시키자는 말은 아니다.)

 

- 빈고와 빈집 문제에 대한 논쟁지점들.

 

1. 빈고와 빈집의 관계 변화

화니짱) 삼각형에 점하나만 찍어도, 그 도형은 전혀 다른 도형인 사각형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관계의 측면에서도 빈고에 ‘만행공간 대출’ 등 외부 ‘공동체 대출’을 시작한 이상 빈고와 빈집의 관계는 이전과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빈고와 빈집의 위상 변화에 대등해서, 그 안에 있는 시스템이라든지, 관계의 방식을 어떤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쿠) 빈고의 선물이 타공동체의 위기대응자금으로 쓰일 수 있게 됨, 예전처럼 빈고에 대한 빈집의 선물이 빈집을 위해서만 쓰이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음. 따라서 이제 빈집은 빈집 자신을 위한 별도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하는게 필요. (예전처럼 잉여금을 안심하고 빈고에 선물할 수 없음. 빈집을 위해서 쓰인다고 확실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예전에는 선물이지만, 보험 내지 저축의 의미로 선물한 거였음.)

 

2. 빈집의 정의 문제:

 

쿠) 게스트룸운영, 열린공간 (빈마을에) , 접근가능한 공간 (물리적으로), 자의성(우리집은 빈집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봤을 때 이음집과 까페 해방촌과 행간은 빈집이 아니다.

 

3. 선물로 운영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쿠) 선물받은 사람이 선물한 사람보다 많은 선물을 하나고 요구받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빈집)자신의 긴급한 필요에 대한 당당한 요구가 아닌, (빈고에) 호혜적인 선처를 바라는 수동성을 양산한다. 따라서 빈고에 대한 적립이나 선물 방식이 아닌, 빈집회계를 통한 빈집 내부의 상호부조 강화가 대안으로 요구됨.

 

4. 빈고의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화니짱) 한 사람에게 모든 일처리와 의사결정권이 집중된 조직은 비정상적이다. 일의 효율성 측면을 떠나서, 조직의 집중도를 즉각 해체 시킬 필요가 있다. 대안으로 1-2달 단위로 대표를 변경시키는 안이 있을 것이다. 대표에게 통신비 명목 등으로 매달 활동비 지급하고 빈고 관련 각종 셈나나 강의에 대표로서 나가도록 함.

 

쿠) 빈고의 운영위원제의 대의방식은, 조합원들의 목소리들을 반영할 수 있는 민주적 방식이 아니다. 더군다나 빈고의 운영위원들이 빈집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5. 현실적 대응방안

쿠) 빈집이 기존에 빈고를 통해서 상호부조하는 방식을, 빈집 회계를 통한 빈집 차원의 상호부조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또한 빈고에 기존에 선물로 적립되어 있는 빈집적립금의 일부를 빈집에 반납해줄 것을 요구한다.

 

화니짱) 빈집적립금은 빈고적립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맞음. 그리고 기존에 적립되어 있는 자금 중 일부를 빈집에 반납해주어야 함. 또한 빈고적립금의 변환과 발맞춰 빈집은 빈집 차원의 상호부조를 위한 자체 내부의 적립금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음.

빈고 운영회의에 빈집 대표들을 몇사람 참여시킨다. (빈고 내에 빈집 관련 예산이 운영되는 비중만큼 빈집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참여해야 한다.) 빈고 대표 체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반중심적, 평등한 네트워크 구축. 1인에 의해 돌아가지 않고 시스템에 의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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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주석 내용을 보려면 다운 받아서 한글파일로 보시오.>[[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27.50 KB) 다운받기]

 

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김환희

 

서론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는 현대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나 관행과 같이 통상 미리 규정되어 있던 것들이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되고 불확실해진 세계는 사람들을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안전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종교를 대체해서 새로운 위안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사고 방식이 만연한 이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것마저도 확신을 잃고 혼동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해 놓고는 말과는 달리 함정에 빠트리고 마는 것이다.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현대인의 이러한 사랑은 성애(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성애적 사랑이라는 의미로 축소되어,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 섹스와 사랑이 더 이상 분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울리히 벡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책에서 성해방(1960년대 성의 상품화) 이후, 초자아에 내려진 '즐겨라'는 명령이 지배하는 황폐화된 세상에 대해 분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과 성의 이율배반에 초점을 맞춘다. 섹스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섹스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들어 소멸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섹스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섹스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해진다. 섹스는 "전형적인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와 같이 증식하여, 자유주의 사회가 가진 비인간적 본성을 재생산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영구히 훼손시킨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섹스가 사랑을 파멸시킨 것이다."(Slavoj Žižek. 2011.) 따라서, 데리다의 용어를 빌자면 섹스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심적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대인의 정서는 최근 대중문화 속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는 소재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작인 웹툰『발광하는 현대사』와 영화『돈의 맛』의 내용을 이 글에서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현대사회의 섹슈얼리티의 위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탈근대 시대, 종교적 윤리의 붕괴는 현대인의 에로스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현대인의 에로스의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이러한 위험사회에서‘혼란스러운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

 

본론

오늘날 종교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종교는 처음부터 에로스를 엄격히 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베버에 따르자면, 종교와성적사랑은 “원래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계(Max Weber. 2008: 245)”를 맺고 있었다. 즉 “성교는 매우 주술적인 광란축제의 일부분이었고, 신성한 매음은 모든 망아경지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Max Weber. 2008: 245)” 종교적 관습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섹슈얼리티는 종교적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성생활은 그 자체, 다른 모든 기능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만의 정령과 신을 가지고 있었다(Max Weber. 2008: 246).” 즉 이 시기의 섹스는 ‘단순한 자연주의적인 성’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때때로 종교적 몰입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신성시’ 혹은 최소한 성(聖)스러운 것과 대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후에 “예언종교와 사제층이 통제하는 생활체계들은 혼인제도의 보호를 위해 거의 예외없이 성행위를 규제(Max Weber. 2008: 247)”하였는데 이는 “모든 합리적인 생활규제체계가 주술적 주신제와 비합리적 도취형태 일반에 대해 가진 적대적 입장의 표현(Max Weber. 2008: 247)”이었다. 성애에 대한 종교적 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는 구원종교가 주지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문화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 주지주의와 결합된 신앙(구원종교)에 의해 성애는 금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종교의 형재애 윤리와 성애 간의 치열한 긴장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자극하며 서로를 심화 발전시키게 된다. 문화의 합리화도 진행되었지만 한편으로 “성적영역에서는 성이 성애(에로틱)로 승화되고 이와 함께성은 하나의 의식적으로 즐기는 비일상적 영역으로 승화(Max Weber. 2008: 247)”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구원윤리는 성생활은 동물적인 것이라고 에로스적 관계에 대하여 더욱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되려, 에로스를 대중들에게 자연적 속성에 속한 신비한 영역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급기야 에로스가 “창조주적 힘의 화신으로 긍정(Max Weber. 2008: 253)”되며 사람들이 “모든 순수한 동물적인 것을 미화하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에로틱한 감각체계(Max Weber. 2008: 252)”를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동한다. 즉 성애는 “현세 내적인 구원감정과 함께, 개인주의화에 신비화 경향(Max Weber. 2008: 253)”을 부여하였다. 성애의 이러한 신비화, 유사-종교적 특성은 구원종교와 계속해서 대립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극심한 갈등에도 불교하고 카톨릭교에서 결혼을 성사(聖事)로 인정함으로써, 종교는 ‘성애의 비일상적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 양보하고 만다. 하지만 욕정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규제된 혼인으로 한정함으로써 “금욕주의는 혼인관계를 에로틱으로 변질시키는 어떠한 교묘한 시도도 극히 사악한 피조물 신격화로 보고 거부”한다. (Max Weber. 2008: 256)

결국 베버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구원종교는 (자연주의적인)섹스 자체에 대해서 반대 했다기보다는, 성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삶의 전반에 걸친 금욕주의적인 규제는 오히려 비합리성의 분출구로서 성애의 신비화 내지 관심의 증대를 부추겼다. 구원종교는 최후의 수단으로 섹스의 허용을 결혼제도 안에 봉인 한 채, 에로스적 관계화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종교의 도덕적 규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에로스의 힘에 대한 봉인이 깨지고 말았다. 도덕률의 준수에 대한‘개인화’의 경향이 나타났고, 최후의 보루인 결혼마저도 에로스의 직접적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 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붕괴된 데에는 주지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에 의한 세속화의 여파는 마지막 남은 신비화의 영역인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이와 같은 모든 부문의 화폐적 세속화(혹은 교환적 관계화)는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하였다. 결혼에 있어서도 조건과 스펙이 맞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됨으로써 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결혼 외부에서 찾는 모순이 생겨나 버렸다. 돈의 맛에서 필리핀가정부와 볼륜의 관계를 맺는 윤회장(백윤식)의 애정도피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관계 (윤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결혼관계를 포함하여) 중 제일 순수하다고도 느껴질 정도로 자본주의는 결혼마저도 물질화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가족이라든지, 결혼이 자신의 사랑(행복, 가치)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위험사회에 각 개인들이 홀로 놓이게 되었다. 개인주의화의 강화(이로 인한 구원종교의 규제력 약화)와 성애적 신비주의의 유지는 각 개인들의 사랑을 각개전투로 만들었다.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사랑에 있어서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하게 됨.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왜곡현상에 자본주의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변화를 초래했을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남녀 간의 독점적 사랑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성향은 화폐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화폐는 자신이 모든 사물에서 일자로 위치하는 독점적 교환질서 안에서만 기능한다. 호혜적 관계가 각 개인의 모든 인간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호혜적 증여(선물)만이 이루어진다면, 교환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소유권을 명확히 한 개인에게 한정하고, 그 가치를 하나의 화폐로 단일화하여 시장내에서 거래되게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 질서는 꼬뮌적이고 코스모폴리탄 식의 사랑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심화의 과정은 사랑의 관계를 계속 축소시키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사랑의 소유화. 호혜적 관계에 의한 선물의 관계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인 화폐교환 질서만 남게 되는 선형적 과정인 것이다.

 

결론

자본주의의 이와 같은 부작용(섹스와 사랑의 동일화-관계의 해체)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보수적인‘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막스베버의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성의 신비화(비합리적 요소의 강화)를 막는 것은 다른 비합리성(과거에는 종교)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비합리성의 영역에 있어서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요구된다. 새로운 윤리가 위험상황에 빠져있는 혼동하는 개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는 보수주의의 윤리로 가서는 안되고, 또 불가능할 것이다. 종교와 결탁했던 비합리성의 허상이 합리주의화의 경향(인류의 진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윤리는‘비독점적 사랑’이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으로‘공동성’을 어떻게 창출하고 더 늘려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관계를 해체한다. 개인 단위의 것들만 남기고 모두 해체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꼬뮌적 방식은 개인/핵가족 단위에서 더 큰 단위로 상호부조, 호혜의 관계망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대융합에의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개인의‘사랑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느냐? 그것은 가족로맨스(가족단위)라든지, 운명적 사랑(연인단위)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창출해야 가능한 것이다. 연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1:1 사랑의 독점적 소유관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욕망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공동성의 장’(꼬뮈니즘)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꼬뮈니즘 안에서의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편협한 관계성은 ‘새로이 확장된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고, 성애는 비신비화되어 자연주의적 성으로 지상추락할 것이다.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꼬뮈니즘 안에서의‘새로이 확장된 사랑’이 막스 베버가 구원종교에서 에로스와 대치되는 사랑으로서 이야기했던‘형재애’와 매우 유사한다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1. 외국문헌

Erich Fromm. 2000.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Slavoj Žižek.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3인역. 난장이.

Max Weber. 2008. ≪종교 사회학 선집≫. 전성우 역. 나남.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3인역. 새물결.

Wilhelm Reich. 2006.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역. 그린비

 

 

 

<부록1. 주간한국 기사 >유부녀들의 금지된 사랑의 은밀한 유혹

 

‘유부녀 쉽게 유혹하는 방법’ ‘유부남에게 통하는 애교 베스트 10’….

인터넷을 하다 보면 이런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부남. 유부녀들의 ‘애인 만들기’ ‘애인 되기’ 퇴폐적 열풍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음을 적나라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녀와 탈선하는 불륜행각은 동서고금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이들은 이른바 세컨드 라이프를 위해 ‘유부클럽’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고민을 함께 나누는 등 상담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A 카페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혼녀’들을 위해 개설된 곳이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꾸 보다 보니 정이 들었죠. 그 사람도 저랑 같이 있으면 좋고, 와이프보다 더 편하대요. 빨리 끝내야 하는 걸 알지만 쉽지 않아요. 주변에서 눈치챌까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끝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얼마 전 이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유부녀이면서도 이 카페에 흥미 삼아 가입한 회원들은 “어떻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를 치냐” “가정 파괴범이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등 비난하는 글을 대거 올렸다. 반면 미혼 여성 회원들은 “오죽하면 결혼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한 눈을 팔겠느냐” “남편 바람나게 한 와이프가 문제다” 등 양측이 팽팽하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

사태가 너무 소란스러워지자 결국 카페 주인은 이후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등급제를 적용해 일정 등급 이상만 게시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바꿔버렸다.

이 카페 또 다른 회원 박모(25세)씨는 여대생이다. 얼마 전 30대 중반의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박 씨는 앞서 동갑인 남자와 2살 연상인 미혼 남자를 각각 사귄 적이 있었는데 만날 때 마다 데이트 비용 걱정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남친이 영화를 보여주면 나는 밥이나 커피를 사야 했고, 항상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 애인은 유부남이기는 하지만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해준다.” 나이 차이가 크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고 있어서 자신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준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A카페 개설자 김모씨는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카페와 이웃을 맺은 카페도 3곳이나 된다”며 유사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후죽순 생겨난 유부클럽이 유명 사이트마다 수백 개씩이나 되고, 회원 수도 각각 수십~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의 유부클럽은 유부남. 유부녀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중시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불륜이 유행하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본래 클럽의 취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마음 놓고 외도할 수 있는 장소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대한민국 유부남, 유부녀를 위한 커뮤니티로 육아. 건강 정보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시간이 지나 회원들간의 편안한 만남을 주선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유부 탈선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현재 회원수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지난 9월에는 ‘정모(정기적인 모임)’를 가졌고, 일주일에 2~3번은 ‘번개(갑작스러운 모임)’를 한다. 참여율도 높고, 참석한 사람들은 하루 정도 짧은 만남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만남을 이어간다.

“오늘 영화 번개 좋았어요. 특히 ‘sdy20’님 게시판에서 얘기만 주고 받다가 직접 만나니까 더 반가웠어요. 답답한 일상에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조만간 또 만나요.” 이 커뮤니티의 한 회원이 남긴 번개 후기다.

또 다른 회원 김모씨는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하면서 만난 이모씨와 함께 얼마 전 여행을 갔다 왔다. 김씨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워크숍을 간다고 둘러댔고, 상대방 역시 남편에게는 동창생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꾸며 둘만의 밀월여행을 다녀온 셈이다.[[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27.50 KB) 다운받기]

김씨는 자신 뿐만 아니라 회사 동기들도 ‘애인 만들기’를 꿈꾼다며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외도를 알고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커뮤니티 가입 방법을 묻는 친구도 있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이 같은 세태를 두고 연애지상주의와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쾌락추구 성향이 강한 대중문화가 개인을 자극하기 시작하면서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줄고 있다”며 “쾌락권 추구가 곧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사랑이라면 사회 도덕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남의 사람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결혼생활에 대한 후회와 절대시됐던 일부일처제에 대한 도전이 늘면서 불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불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인 부부가 갖고 있다”며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부부 사이의 진짜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할 것을 권고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됐다고 해서 둘 사이가 언제나 굳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항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긴장된 애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현 교수는 말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심리학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들어 불륜을 설명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장애가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불륜 커플이 늘고, 그들의 사랑이 더 열정적으로 달아오르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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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가난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 빈고의 발생에 대한 이야기(석류에 의한) -

 

빈집 초창기는 전셋집의 형태로 주로 있었던 듯합니다. 아랫집과 옆집(낭만집)이 대표적인 경우였죠. 아랫집은 특정 개인이 거의 전세자금을 모두 혼자 부담한 형태였던 것 같고 옆집은 구성원들이 조금씩 전세자금 마련에 동참은 했지만 실질적으론 몇몇 개인이 주로 부담한듯합니다.

 

전세자금으로 운영되었으니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담금 부담이 별로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세자금을 부담한 몇몇 개인이 호혜적(선물?)이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 당시 분담금은 어떤 방식으로 책정되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동안 빈집의 변천사속에 분담금은 어떤 방식으로 책정되었을까요?

초기 전셋집에선 생활비 분담과 전세자금을 부담한 사람에 지급하는 이자(아마 저리)로 분담금이 책정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개인이 전세자금을 주로 부담하는 형태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듯 합니다. 그가 돈이 필요한 경우 혹은 빈집과 같은 공동 주거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에 그 개인의 판단여부에 따라 집이 사라질 수 있는 사태도 발생했겠죠. 특히나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삶에서 항상 불화의 긴장은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소한 일이 큰 감정싸움이 되고 이것이 집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특히 전세자금을 많이 부담한 사람과 관련될 때)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을 거라 추측해봅니다.

 

초기 빈집의 모습은 몇몇이 전세자금을 거의 모두 부담하는 형태였던 듯 하고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때는 집이 사실상 붕괴할 수도 있었겠죠. 공동 주거하는 방식에 있어서 수많은 다른 의견이 제출될 수 있었을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의견 제출이 감정 충돌로 이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 지점이 안정된 자금이 필요하다를 느끼는 순간이었을 듯 합니다.

 

이때 안정된 자금은 대형 전세자금 부담자가 이탈했을 때도 공동 주거를 계속하기 위한 것일겁니다. 안정된 자금을 모아서 공동 주거를 지속가능하게 하자. 특정 개인의 이탈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동 주거를 실현하자. 뭐 이정도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이런 주장도 공동체 내부의 어떤 합의의 형태로 출현했는지는 의심이 됩니다. 안정된 자금을 모으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을 하고 돈을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형태로 진행될 만큼 빈집의 내부 역량은 없었던 듯합니다. 사실 현재도 그 정도의 빈집 내부 역량은 존재하지 않죠??

 

공동 주거 방식에 대한 여러 주장들 중 하나의 주장이 빈고라는 형식을 제안한 듯 합니다.

처음부터 협동조합 형식을 구상했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안정된 전세자금을 모으자는 형태로 진행되었는지? 어느 정도 규모의 돈을 모으겠다는 목표액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구상한 게 아닌가? 라는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협동조합(빈고)의 출자금 대부분이 사실상 아랫집의 전세자금의 형식이었던 듯합니다.

 

빈집 초창기 주거형태는 주로 전셋집이었습니다. 전셋집의 형태로 계속 빈집을 구상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꽤 큰 목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근데 빈집이 생기고 좀 지나면서 사실상 전셋집이 사라지고 있죠. 대부분 월세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월세의 비중이 보증금 혹은 전세자금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애초 시작이 안정된 공동 주거의 확보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면 월세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굳이 협동조합이라는 형식을 띨 필요가 있을까? 협동조합 형식을 띨 경우 목적도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출자를 받고 출자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고 조합원 교육도 실시해야하고 복잡한 회계처리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지 않나?

 

- 빈고라는 협동조합에서 빈가게라는 수익사업으로 또 한 번의 도약 혹은 퇴보

 

빈가게 발생은 좀 더 복잡한 듯합니다. 빈가게를 시도한 이들의 최초 주장은 “일 놀이터”였습니다. 옆집 주도로 빈가게가 시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랫집은 소극적으로 응해주는 정도 였던 듯합니다. 빈가게는 빈고와 달리 따로 조합원을 모집하기도 했죠.

 

빈가게 주장자들이 어떤 고민속에 가게를 만들려고 했을까요?. 고민의 깊이는 어떠했을까요? 다만 빈마을이 많아지면 즉 빈집이 다섯 채 이상정도 되면 가게를 하나 운영해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지나가는 말을 통해 들었던 듯 합니다.

 

빈마을이 많아지면 풍부해진 역량을 가지고 일자리도 창출 가능 하지 않을까? 라고 고민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빈마을이 풍부했는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랫집이 빈고라는 협동조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강하지 않았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빈가게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두물머리로 떠났고 그 자리를 지음과 살구가 메꾸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좀 아이러니하게도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들은 가게운영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듯 합니다.

 

빈가게가 해방촌으로 옮겨갑니다.

옮겨가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나요?

예전 가게에서 역세권을 찾아 옮겨간 것이죠.

 

덧붙이며...

 

빈집에서 빈고로 그리고 빈가게로 그 발생의 역사를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빈집의 발생에 대해선 거의 다뤄지진 않았습니다. 제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개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전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공동 주거 운동에서 당연하게 느껴지는 게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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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줄

열린집사회의에 일때문에 참석은 못하고 또 글줄이나 쓰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 글을 통한 소통

게시판에 글을 쓰니 사람들은 만나자고 하네요. 제가 생각키로는 만나서 이야기 해보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도, 뭔가 말은 헛돌고 답답하기도 하여 글로 썼습니다. 글이 인격적이냐 말이 인격적이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하였음에도 흘려듣는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것이며, 글로 했음에도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비인격적일 것입니다. 글은 그래도 기록으로 남아, 마음 다스리고 다시 읽을 여유가 있습니다. 감정을 덜어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글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게시판 글소통에 대한 어떤 반감들이 있는 것 같아 변명해 봅니다.

## 신뢰의 문제?

어떤 문제의 지적이 신뢰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의사소통을 방해합니다. 빈고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를 했는데, 그것이 '너 나 못믿냐?'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제기를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지음이 한 '빈집회계'에 대한 질문이 '응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질문의 성격은 제가 던지는 질문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음은 왜 자신을 못믿냐 묻겠지만,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번에 빈집회계를 맡게 된 들깨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음이 날치기 빼돌리기 등등의 의혹이 있냐 하는데, 그 말은 저에게도 적용될 말입니다. 제가 빈고적립금 빈집적립금으로 바꿔서 제 사적으로 유용을 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지금 제기되는 문제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신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필요한 감정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음이 저의 선의를 신뢰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 빈고와 빈집 : 수많은 공동체 중의 빈집이냐,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이냐

저는 빈고가 빈집을 바라 볼 때 어떤 곳으로 바라보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대출이 만들어져 다양한 공동체와 빈고가 관계하였을 때, 그 다양한 공동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빈집에 대한 대출이 검토되는 것과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에 대한 대출이 되는 것은 그 중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전자의 경우 빈고와 공동체가 관계한 것이지 빈집과 관계한 것은 아니며, 후자의 경우 빈고와 관계맺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빈집과 관계맺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저는 만행공간 대출을 통해 빈집사람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빈집과 빈고의 위상문제'라고 일컬어 지는 의문들을 갖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제 빈고가 '공동체 대출'을 신설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와 소통을 시도하는 이상, 빈집 외부의 공동체와 빈집이 차별적으로 대우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여태껏 견고하게 이루어졌던 빈고의 선물이 타 공동체의 위기상황에 선물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가 더욱 확장되는 것이며,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예상되는 만큼 다양한 공동체 중의 하나인 빈집은 그것 자체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할 필요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 무엇이 빈집이냐?

저는 기본적으로 빈집은 1)손님을 받을 수 있으며, 2)열려 있으며, 3)접근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행공간이 손님을 받는다고는 하나, 우리의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 경우 만행공간에서 숙박이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그 열림의 정도가 빈집들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친구를 데려다 재우는 기능은 특별히 빈집이라 이름 붙일것도 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급되는 이음집, 만행공간, cafe 해방촌은 빈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파른집이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도 빈집이라고 불리어졌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 빈집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이 되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공간이 부족해서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 한에야,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는 닫힌 공간이 어떻게 빈집개념에 들어맞는건가요?

 

지음은 빈고가 처음부터 빈집이 아닌 곳에 대출했다고 하는데, 이는 대출의 '목적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말인 듯 합니다. 해방채나 계단집의 경우 빈집을 구성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아마 언급된 대부분의 집들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빈집43 또한 빈집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으며, 그 대출에 분명한 목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 구성에 대하여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빈집 구성원들에게 의사를 묻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 빈집의 확장과 관계의 확장

저는 '빈집의 확장'이라고 말해지는 개념이 하나의 뜻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은 두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1)빈집들이 늘어나는 것과 2)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빈집이라 말할 수 있는 집들이 늘어나는 것을 '빈집의 확장'이라 규정 하고, 빈집과 관계맺는 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을 '관계의 확장'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cafe 해방촌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빈집으로부터 cafe 해방촌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cafe 해방촌이 풍성하게 이룬 것을 cafe 해방촌의 이름으로 가져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과도 cafe 해방촌의 몫이고 책임 또한 cafe 해방촌의 몫입니다. 그 풍성함이 빈집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빈집과 cafe 해방촌이 관계맺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미묘한 차이들이 너무 뭉뜽그려 대화되고 있으며, 저는 이러한 불분명한 개념규정이 오해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에 살고 있는 쌩쌩과 잔잔이 빈집들과 관계를 가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과의 관계의 고민에서 이음집을 빈집이라 칭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이 빈집이냐의 문제와 그것과 관계맺는 문제는 분명히 구분되는 문제입니다. 쿠우가 잔잔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여 잔잔이 쿠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수동적으로 만드는 시혜에 대하여

지음은 수동적으로 만드는 선물의 구조에 관한 문제제기에 되돌려 더 많이 선물함으로써 주체성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교환일 뿐 주체성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물받은 사람이 보다 더 많은 선물을 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봅니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편은 선물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키로 빈고운영위원은 운영위원회의만 있을 뿐,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민주적 회의체가 비교적 약하다고 평가합니다. 또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문제도 빈집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 보입니다. 빈집이 빈고의 무수한 공동체 중의 하나일 뿐이라면, 빈고 운영위원이 빈집 구성원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번 빈집회계에서 구성하고자 하는 상호부조는 빈집 구성원들에 속한 집사가 있고, 집사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매번의 집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빈집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점 때문에 빈고의 선물식 상호부조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빈집회계의 상호부조가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사람이 줄어 부담되는 분담금들도 빈집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며, 집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용이나 책임의 문제 또한 빈집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회의체가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다 주체적일 수 있습니다.

 

 

@@ 다른 세세한 주제들은 만나서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견해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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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학

차이의 정치학

 

한때 여성주의라는 말 속에 여성은 남성에 대립한다는 의미를 가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에 대해 강조. 여성은 가부장제하에서 만들어진다는 중요한 지적등이 나옴

 

마르크스 주의 여성학은 여성이라는 단일한 개념안에 다양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줌.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이 인권에 반대된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함. 그리고 성매매 금지를 주장하는 여성주의 그룹을 중산층 여성운동이라고 공격. 기존에 여성이라는 동일한 관념에 차이가 존재함을 잘 드러냄.

 

성노동자 인권 옹호그룹은 성 판매자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 판매자에게 붙여지는

주홍글씨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주장을

 

* 운동이란 처음에는 단일해 보였던 것이 그 내부에 차이가 존재함을 드러내고, 차이를 생성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동주거운동 내부에도 사실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그 차이들을 증폭시키고 생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제는 잘 알고 있듯 화폐는 전제 군주적 기표. 화폐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돈 되는 방식으로 집중화 하는 메커니즘이지 않은가?

 

우리가 차이의 정치를 말할 때 그것은 이런 화페의 전제군주적 기표에 대한 저항이고 또한 집중화 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의 정치는 욕망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주의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생산했듯 차이의 정치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차이의 발생과 생성을 긍정해야 하지 않을까?

 

공동 주거 운동의 반 자본주의 성격

 

함께 살아가면서 돈을 아낄 수 있다. 그 아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더 많은 돈을 지향한다면 공동주거운동은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사회의 새로운 가족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공동 주거 운동이 일종의 파트너 쉽을 생산해내는 신자유주의하에서 새로운 투자양식으로도 변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 거주를 통해 발생한 인맥과 에너지를 새로운 돈 벌이 수단으로 얼마든지 확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신자유주의 하에서 수많은 실업자와 자발적 노동거부자, 비정규직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 주거를 선택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공동 주거는 최소의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건 돈으로부터 탈주할 수도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최소의 돈으로 살아가며서 돈버는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 돈 버는 행위(노동)보다 훨씬 재미있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정말로 화폐로 대변되는 욕망과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생산하고 즐기지 않을까?

 

그리고 공동 주거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희석화 시킬 가능성도 매우 크다. 물론 공동 주거를 통한 관계들을 파트너 쉽 이라는 투자개념의 가족으로 변질 될 우려도 있는 듯 하지만.

 

공동 주거는 또한 사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함께 사용함으로써 희미해지는 소유 관념. 함께 사용하다 보면 어떤 공통적인 것이 발생하지 않나? 어떤 사물에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가 닿을 때 정말 그 사물이 어느 한명의 소유라는 사실이 어색해진다.

 

아마 공동 사용의 절정은 함께 돈을 사용할 때 일 것이다. 아마 그것은 정말이지 자본의 절망이지 않을까? 이자를 낳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공동사용. 그건 아마 서로의 신뢰와 우정이 깊어질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정말로 우리는 화폐와 자본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라”라는 저 절대적 명령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 삶에 박아놓은

저주로부터 탈주하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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