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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학

차이의 정치학

 

한때 여성주의라는 말 속에 여성은 남성에 대립한다는 의미를 가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에 대해 강조. 여성은 가부장제하에서 만들어진다는 중요한 지적등이 나옴

 

마르크스 주의 여성학은 여성이라는 단일한 개념안에 다양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줌.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이 인권에 반대된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함. 그리고 성매매 금지를 주장하는 여성주의 그룹을 중산층 여성운동이라고 공격. 기존에 여성이라는 동일한 관념에 차이가 존재함을 잘 드러냄.

 

성노동자 인권 옹호그룹은 성 판매자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 판매자에게 붙여지는

주홍글씨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주장을

 

* 운동이란 처음에는 단일해 보였던 것이 그 내부에 차이가 존재함을 드러내고, 차이를 생성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동주거운동 내부에도 사실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그 차이들을 증폭시키고 생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제는 잘 알고 있듯 화폐는 전제 군주적 기표. 화폐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돈 되는 방식으로 집중화 하는 메커니즘이지 않은가?

 

우리가 차이의 정치를 말할 때 그것은 이런 화페의 전제군주적 기표에 대한 저항이고 또한 집중화 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의 정치는 욕망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주의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생산했듯 차이의 정치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차이의 발생과 생성을 긍정해야 하지 않을까?

 

공동 주거 운동의 반 자본주의 성격

 

함께 살아가면서 돈을 아낄 수 있다. 그 아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더 많은 돈을 지향한다면 공동주거운동은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사회의 새로운 가족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공동 주거 운동이 일종의 파트너 쉽을 생산해내는 신자유주의하에서 새로운 투자양식으로도 변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 거주를 통해 발생한 인맥과 에너지를 새로운 돈 벌이 수단으로 얼마든지 확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신자유주의 하에서 수많은 실업자와 자발적 노동거부자, 비정규직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 주거를 선택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공동 주거는 최소의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건 돈으로부터 탈주할 수도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최소의 돈으로 살아가며서 돈버는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 돈 버는 행위(노동)보다 훨씬 재미있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정말로 화폐로 대변되는 욕망과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생산하고 즐기지 않을까?

 

그리고 공동 주거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희석화 시킬 가능성도 매우 크다. 물론 공동 주거를 통한 관계들을 파트너 쉽 이라는 투자개념의 가족으로 변질 될 우려도 있는 듯 하지만.

 

공동 주거는 또한 사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함께 사용함으로써 희미해지는 소유 관념. 함께 사용하다 보면 어떤 공통적인 것이 발생하지 않나? 어떤 사물에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가 닿을 때 정말 그 사물이 어느 한명의 소유라는 사실이 어색해진다.

 

아마 공동 사용의 절정은 함께 돈을 사용할 때 일 것이다. 아마 그것은 정말이지 자본의 절망이지 않을까? 이자를 낳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공동사용. 그건 아마 서로의 신뢰와 우정이 깊어질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정말로 우리는 화폐와 자본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라”라는 저 절대적 명령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 삶에 박아놓은

저주로부터 탈주하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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