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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과 빈고에 대한 인식의 변화

빈고와 빈집의 재정분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빈고 조합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빈고 운영회의에서는 빈집적립금이 빈고적립금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약간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글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 8월 말부터 빈집에서 장기투숙 하고 있으며, 그간의 기간 동안 나태하게 파악한 것을 바탕으로 쓰겠습니다.
 
빈집과 빈고의 관계에 관한 인식변화의 진행과정
 
빈집이 먼저 있었고 빈고가 생겼습니다. 빈고의 성격은 빈집의 마을금고였고, 빈집의 공공기금을 처리하는 목적으로 빈고가 생겼습니다. 빈고는 우주협동조합으로 주거문제를 고민하는 조합형태로 운영되었고, 그 주거문제의 구체적 해법 모델로 빈집이 제시되었습니다. 빈집에 거주하지 않는 많은 외부 사람들도 빈집의 정신에 동의하여 출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빈고는 몇몇 운영위원들이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계속해서 이러한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빈고와 빈집의 분리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만행공간과 빈가게가 빈고로부터 대출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시기가 빈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빈집 사람들은 빈집에 살면서 주인의식을 갖는 일종의 마음의 표시로 출자할 것이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말해지는 것처럼, 빈집의 확장과 유지에 필요한 자금에 자신 또한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만행공간과 빈가게 대출은 빈고가 주거나 공간의 측면에 있어서 빈집만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빈고에 어떤 자금적 지원을 한다는 것은 곧바로 빈집에 쓰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공동체에 쓰일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만행은 빈집과는 구분된 집단이고, 빈가게(cafe 해방촌) 또한 이번에 해방촌 오거리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빈집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이라는 공적 성격을 벗어버렸습니다. 만약 기존의 빈가게가 진정 빈집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회관의 성격이 있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빈집 사람들의 의사 또한 물어져야 했을 것이며, cafe 해방촌이 생겨나는 과정에서도 빈집 사람들의 의사가 물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이 빈집사람들 모두가 함께 공간을 책임질 수 없었거나, 혹은 의지가 없는 것이 원인이 되었거나, 몇몇 사람들만의 생각으로 추진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cafe 해방촌이 새로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빈집 사람들과 묶여서 뭔가를 하기보다는, 그들의 멤버쉽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더불어 많은 집들은 지난 겨울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간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남아버린 공간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고 이는 보다 부담되는 분담금으로 사람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부담은 빈고에서 선물로 어느 정도 매꿔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빈고에 의존하여 ‘선물’로 행해지는 상호부조에도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빈집의 특성상 인구의 유입-유출이 자유롭고, 그 누구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혹자는 떠나는 사람들이 책임의식이 없으며 자신은 떠날 때도 분담금을 일부 부담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떠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강제할 현실적 장치 또한 없습니다. 남은 공간에 대한 부담은 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선물’이라는 불확실한 것 보다, 보다 안정적으로 주체적으로 그러한 불안을 상호부조로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빈고 운영위원들은 각 집의 의사를 대표 혹은 대의하지 못한다는 의사소통 구조상의 문제도 있었고, 빈고는 빈집에 살지 않는 사람들 또한 조합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회의체이기에, 빈집의 문제를 주체가 되어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빈집 사람들은 수도관 파손, 보일러 동파 등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능동적 주체로 상호부조의 방식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라는 회의체가 선물이라는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수동적으로 반응해야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빈집 자체의 상호부조를 조직해보고자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존의 빈고와 빈집의 관계는 빈집의 유지를 위한 상호부조라는 측면에서, 빈집을 주체가 아닌 선물을 받는 수동적 객체에 머물게 하며, 무력한 집단으로 만듦니다. 빈고와 빈집의 회계가 분리될 경우, 빈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대사소한 사고들의 경우 빈집의 적립금으로 우선적으로 보다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빈고는 빈집문제에 대한 안건비중을 낮출 수 있으며, 빈집에서 별도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만 안건화 시켜 논의하므로 보다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조합원들을 관리 교육하는 빈고의 다른 업무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빈집적립금 그리고 빈고적립금
 
저는 빈집적립금이 빈고적립금으로 바뀐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도 빈집과 빈고의 회계가 분리되는 시점에서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것이 더욱 더 의아스럽습니다.
 
빈고는 빈집의 금고였고, 사람들은 빈고에 출자 할 때, 빈집의 정신에 동의하여 출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빈집자체의 금고가 빈고였던 상황에서 빈고에 선물한다는 것은 곧 빈집에 선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집의 잉여금을 미래의 빈집사람들에게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빈고에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음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선물한다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빈집사람A 가 빈집에 선물하는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빈고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타 공동체 대출에 대한 의사결정은 집사회의의 대의제화에 민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빈고 운영위원 몇 사람의 주도에 의해 결정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빈집적립금이라고 이름 붙여져 모여오던 돈이, 빈고적립금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위원 몇몇의 결정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음은 그 돈이 주인이 없고 모든 사람의 것이며 지금 현재 사는 사람이 그 돈의 용도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빈고 운영위원들이 돈의 용처를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진정 그 돈이 주인이 없는 돈이라면, 빈고 운영위원들 또한 돈의 용처를 결정할 수 없어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아니, 정말 주인 없는 돈이라면, 우리 모두가 모여 용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비록 지음의 말처럼 실질은 그대로이고 명목상 변화라 할지라도, 그 명목상 변화가 사람의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나 구성원들이 쉽게 바뀌는 빈집의 특성상 그 영향은 더욱 크다 할 것입니다. 분명 논쟁 여지가 있는 중대 사안인 것 같은데, 운영위원 몇몇의 논의로 이런 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들과 그것을 유지시키는 자들
 
빈집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초기의 여러 가치를 지향하던 운동적 성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렇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며 추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런 맥락에서 빈집 5주년 수기 같은 것들이 진행되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고 바깥으로 보일 어떤 환상이지, 정작 중요하다 할 수 있을 우리가 살면서 부닥치는 크고 작은 윤리적 문제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은 미래의 천국을 기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현실도피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이렇게 변화하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러 다른 많은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사건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공간을 지키고 이곳에서 살 수밖에 혹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만들어진 사건 또한 중요하겠지만, 그 사건들이 빈집의 이름으로 사건화 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때로는 비록 귀찮고 폐가 될 수 있을지언정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또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나의 삶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입 다물고 빈집에서 살면, 그저 지낼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빈집이라고 하는 곳은 여유 있는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놀이나 실험 따위가 아니라, 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고 현실적 생존 전략입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은 이곳 자체가 유지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지내는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서로를 질시하고 미워하면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다. 어떤 이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그친 다기 보다는 대게는 감정이 상하고 싸움으로 변질 되기도 합니다.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 할 때면, 빈집을 위해 사고하고 어떤 의견을 내세우는 것 보다는,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 유들유들하게 시시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빈집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에는 깊게는 관심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 사는 것은 빈집에서 그저 머무는 것이지 진정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2년 6월 6일의 새벽, 어떤 마음이 동하여 글을 썼습니다. 읽어주신 분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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