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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29
    하루에요(2)
    박하동이
  2. 2012/06/28
    sexuality와 공동체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화니짱
  3. 2012/06/26
    드디어 된다(1)
    좌인

하루에요

페이스북에 있던 글은 지웠습니다.

통보하듯이 올린 행동에 대해 제가 생각이 짧았던거 같아서요. (달린 댓글들도 감정적인 글들이 올라왔고.)

 일단은 제가 7월은 당분간 부모님 댁에 있을거 같아요 후에는 공부집으로 돌아올지 다른 집으로 갈지 아니면 계속 부모님 댁에 머물지는 확실하지가 않아요.(이 문제는 제가 집으로 돌아간 후 돌아온 다면 미리 연락드릴께요.)

 그런데 사실 제가 부모님 댁으로 가는 것에 대해 이유를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그래도 필요하다면 간단하고 일부분으로 말해, 저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요)그치만 그래도 저 나름대로는 길지도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계속 지내보고 잘 지내볼려고 노력도 했고 고민도 많이 했었요.그러니 너무 섭하다거나 책임감 없이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저의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이번주의 집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근래 집에서의 일들도 잘 하지 않아 죄송하네요.

어서 빨리 정신차리고 돌아올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그동안 잘 지내요 공산당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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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ity와 공동체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공부집웹진] 막스 베버를 통해 살펴본 에로스에 대한 여러가지 현대적 성찰.hwp (167.50 KB) 다운받기]

 

막스 베버의 에로스 개념에 대한 현대적 고찰 - 부재 : OO의 연애는 연애인가, 비연애인가?

김환희

 

 

<<1. 사랑이란 게 혼란스럽다.>>

 

A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라고 정의하는 현대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나 관행과 같이 통상 미리 규정되어 있던 것들이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되고 불확실해진 세계는 사람들을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안전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종교를 대체해서 새로운 위안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사고 방식이 만연한 이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것마저도 확신을 잃고 혼동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해 놓고는 말과는 달리 함정에 빠트리고 마는 것이다.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현대인의 이러한 사랑은 성애(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성애적 사랑이라는 의미로 축소되어,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 섹스와 사랑이 더 이상 분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울리히 벡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책에서 성해방(1960년대 성의 상품화) 이후, 초자아에 내려진 '즐겨라'는 명령이 지배하는 황폐화된 세상에 대해 분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과 성의 이율배반에 초점을 맞춘다. 섹스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섹스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들어 소멸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섹스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섹스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해진다.섹스는 "전형적인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와 같이 증식하여, 자유주의 사회가 가진 비인간적 본성을 재생산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영구히 훼손시킨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섹스가 사랑을 파멸시킨 것이다."(Slavoj Žižek. 2011.) 따라서, 데리다의 용어를 빌자면 섹스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심적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대인의 정서는 최근 대중문화 속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는 소재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작인 웹툰『발광하는 현대사』와 영화『돈의 맛』의 내용을 이 글에서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현대사회의 섹슈얼리티의 위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탈근대 시대, 종교적 윤리의 붕괴는 현대인의 에로스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는 현대인의 에로스의 정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이러한 위험사회에서‘혼란스러운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

 

B :

 

C : 나의 동거인이자, 대안가족. 좋은 대화상대이자 친구인 OO는 비연애주의자라고 자신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OO는 항상 누군가와 연애중이다. 분명 특정한 상대와 같이 1:1로 데이트도 하고, 스킨쉽도 하고, 잠도 같이 자는 것 같은데 왜 자신의 연애를 비연애하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언어모순적인 상황에 흥미를 느꼈다. OO는 예전 여자친구와 대화중에 “친구 랑도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연인과도 그러고 친구 랑도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연인의 의미는 무엇일까? OO는 연인과 친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나누기가 쉽지 않듯이, 친한 사이에 느끼는 사랑, 가족 간에 느끼는 사랑, 혹은 좋은 책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고양이나 동식물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우주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 그러한 사랑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은,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섹스어필하는 관계에서 만나는 에로스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논리보다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OO가 연인과 사랑하는 관계이듯이, 나는 OO에게 또 다른 사랑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모순점이 생긴다. 만약 연인이 친구와 특별히 차이가 없다면, 왜 특정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만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하기 때문이 아닌가. 결국 특별히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고, 그러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보편적으로 연애라 부르는 것 아닌가. OO의 답은 이랬다. “물론,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한테 더 끌리긴 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를 연인(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규정내리고 싶진 않다. 이러한 일시적 감정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인데, 마치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착각), 혹은 그래야하는 것처럼(의무) 행동하고 싶진 않다.”OO는 구속을 싫어한다. 만나는 사람한테도 누가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맘에 들면 없다고 대답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있다고 대답하라고 알려주곤 한다. 구속하지 않는 사랑. 마음이 있을 때까지만 만나는 사랑. 사랑이 익숙해져, 처음의 경이로움이 떨어지면 습관적인 사랑만 한다, 결국 권태에 지쳐 헤어지길 반복한 나에게 OO의 사랑은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너무 이기적이고 문란한 사랑이 아닐까? 마치 플레이보이의 사랑 같아 보이고 말이다. 그러나 OO는 이러한 비연애적인 연애방식은 매우 힘들고 자신한테도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고 말한다. 사귀고 나서 관계에 질리면 헤어지는 식으로 일방적인 관계맺기가 아니라, 사귀기 전에 자신의 이러한 관계맺기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하면 사귀고, 동의하지 않으면 아예 이런 관계를 시작도 하지 않기에, 상대방을 이해시키기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왜 비연애를 고집하냐고 물어봤다. “일단, 구속되는 관계가 너무 싫고, 아무리 처음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이 변할 것을 아는데, 헛된 약속을 하고 싶지 않”다고 OO는 이야기 했다. OO의 비연애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연애일까? 아니면 (OO가 주장하듯)비연애일까?

 

 

<<2. 사랑이 변하니? 사랑아~ 도대체 우리, 왜 이렇게 된 거니? >>

A :오늘날 종교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종교는 처음부터 에로스를 엄격히 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베버에 따르자면, 종교와 성적사랑은 “원래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계(Max Weber. 2008: 245)”를 맺고 있었다.즉 “성교는 매우 주술적인 광란축제의 일부분이었고, 신성한 매음은 모든 망아경지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Max Weber. 2008: 245)” 종교적 관습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섹슈얼리티는 종교적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성생활은 그 자체, 다른 모든 기능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만의 정령과 신을 가지고 있었다(Max Weber. 2008: 246).” 즉 이시기의 섹스는 ‘단순한 자연주의적인 성’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때때로 종교적 몰입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신성시’ 혹은 최소한 성(聖)스러운 것과 대치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그러나 후에 “예언종교와 사제층이 통제하는 생활체계들은 혼인제도의 보호를 위해 거의 예외없이 성행위를 규제(Max Weber. 2008: 247)”하였는데 이는 “모든 합리적인 생활규제체계가 주술적 주신제와 비합리적 도취형태 일반에 대해 가진 적대적 입장의 표현(Max Weber. 2008: 247)”이었다. 성애에 대한 종교적 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는 구원종교가 주지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문화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 주지주의와 결합된 신앙(구원종교)에 의해 성애는 금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종교의 형재애 윤리와 성애 간의 치열한 긴장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자극하며 서로를 심화 발전시키게 된다.문화의 합리화도 진행되었지만 한편으로 “성적영역에서는 성이 성애(에로틱)로 승화되고 이와 함께 성은 하나의 의식적으로 즐기는 비일상적 영역으로 승화(Max Weber. 2008: 247)”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구원윤리는 성생활은 동물적인 것이라고 에로스적 관계에 대하여 더욱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되려, 에로스를 대중들에게 자연적 속성에 속한 신비한 영역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급기야 에로스가 “창조주적 힘의 화신으로 긍정(Max Weber. 2008: 253)”되며 사람들이 “모든 순수한 동물적인 것을 미화하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에로틱한 감각체계(Max Weber. 2008: 252)”를 만들어 내는 계기로 작동한다. 즉 성애는 “현세 내적인 구원감정과 함께, 개인주의화에 신비화 경향(Max Weber. 2008: 253)”을 부여하였다. 성애의 이러한 신비화, 유사-종교적 특성은 구원종교와 계속해서 대립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이러한 극심한 갈등에도 불교하고 카톨릭교에서 결혼을 성사(聖事)로 인정함으로써, 종교는 ‘성애의 비일상적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 양보하고 만다. 하지만 욕정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규제된 혼인으로 한정함으로써 “금욕주의는 혼인관계를 에로틱으로 변질시키는 어떠한 교묘한 시도도 극히 사악한 피조물 신격화로 보고 거부”한다. (Max Weber. 2008: 256)

결국 베버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구원종교는 (자연주의적인)섹스 자체에 대해서 반대 했다기보다는, 성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데 삶의 전반에 걸친 금욕주의적인 규제는 오히려 비합리성의 분출구로서 성애의 신비화 내지 관심의 증대를 부추겼다. 구원종교는 최후의 수단으로 섹스의 허용을 결혼제도 안에 봉인 한 채, 에로스적 관계화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종교의 도덕적 규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에로스의 힘에 대한 봉인이 깨지고 말았다.도덕률의 준수에 대한‘개인화’의 경향이 나타났고, 최후의 보루인 결혼마저도 에로스의 직접적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붕괴된 데에는 주지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에 의한 세속화의 여파는 마지막 남은 신비화의 영역인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이와 같은 모든 부문의 화폐적 세속화(혹은 교환적 관계화)는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하였다. 결혼에 있어서도 조건과 스펙이 맞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화됨으로써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결혼 외부에서 찾는 모순이 생겨나 버렸다. 돈의 맛에서 필리핀가정부와 볼륜의 관계를 맺는 윤회장(백윤식)의 애정도피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관계 (윤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결혼관계를 포함하여) 중 제일 순수하다고도 느껴질 정도로 자본주의는 결혼마저도 물질화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가족이라든지, 결혼이 자신의 사랑(행복, 가치)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위험사회에 각 개인들이 홀로 놓이게 되었다.개인주의화의 강화(이로 인한 구원종교의 규제력 약화)와 성애적 신비주의의 유지는 각 개인들의 사랑을 각개전투로 만들었다.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사랑에 있어서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하게 됨.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왜곡현상에 자본주의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변화를 초래했을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남녀 간의 독점적 사랑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성향은 화폐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화폐는 자신이 모든 사물에서 일자로 위치하는 독점적 교환질서 안에서만 기능한다. 호혜적 관계가 각 개인의 모든 인간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호혜적 증여(선물)만이 이루어진다면, 교환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소유권을 명확히 한 개인에게 한정하고, 그 가치를 하나의 화폐로 단일화하여 시장내에서 거래되게 하여 운영되는 자본주의 질서는 꼬뮌적이고 코스모폴리탄 식의 사랑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심화의 과정은 사랑의 관계를 계속 축소시키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사랑의 소유화. 호혜적 관계에 의한 선물의 관계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인 화폐교환 질서만 남게 되는 선형적 과정인 것이다.

 

B :

 

<<결론 : 3. 사랑, 어떻게 해야 할까? >>

A:자본주의의 이와 같은 부작용(섹스와 사랑의 동일화-관계의 해체)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보수적인‘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막스베버의 앞선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성의 신비화(비합리적 요소의 강화)를 막는 것은 다른 비합리성(과거에는 종교)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비합리성의 영역에 있어서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요구된다. 새로운 윤리가 위험상황에 빠져있는 혼동하는 개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는 보수주의의 윤리로 가서는 안 되고, 또 불가능할 것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와 결탁했던 비합리성, 혹은 가부장제 윤리와 결합했던 비합리성은 부적합한 비합리성이라는 것이 합리주의화의 경향(인류의 진보, 혹은 약자의 투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합리주의의 (건강한) 진전을 위해 (기존의 비합리성을 대체할) 새로운 비합리성이 요구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다.

나는 새로운 윤리가 평등한 관계(수평적 네트워크)를 보장해야 하며, 이는 각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합리성 중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차이의 정치’ 및 이웃간에 공존을 도모하게 만드는 사상은 결국 사랑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사랑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예상할 때, 그 사랑은‘비독점적 사랑’이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구조적으로‘공동성’을 어떻게 창출하고 더 늘려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관계를 해체한다. 개인 단위의 것들만 남기고 모두 해체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꼬뮌적 방식은 개인/핵가족 단위에서 더 큰 단위로 상호부조, 호혜의 관계망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확대융합에의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개인의‘사랑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에 달려있다. 타인을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느냐? 그것은 가족로맨스(가족단위)라든지, 운명적 사랑(연인단위)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창출해야 가능한 것이다. 연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1:1 사랑의 독점적 소유관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욕망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공동성의 장’(꼬뮈니즘)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꼬뮈니즘 안에서의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편협한 관계성은 ‘새로이 확장된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고, 성애는 비신비화되어 자연주의적 성으로 지상추락할 것이다.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꼬뮈니즘 안에서의‘새로이 확장된 사랑’이 막스 베버가 구원종교에서 에로스의 대쌍 개념으로 이야기했던‘형재애’와 매우 유사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말하는 형재애적 사랑은 에로스와 대결하며 금욕주의를 강조하는‘형재애’가 아니라 에로스와 대치되기 이전에, 즉 성애 자체가 자연주의적 성으로 머물며 비합리적인 신비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존재했던 원래의 ‘형제애’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재애’는 분명 ‘에로스’와 구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형재애, 코스모폴리탄적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가족 등 기존의 위계적 관계망을 해체해야만 한다.

자기 지역 내에 대안가족을 구축하고 꼬뮌의 범위를 넓히라. 그리고 전국적으로 또한 전세계 꼬뮌에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하라.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넓혀가라. 다시 꼬뮌적인 방식의 사랑을 획득하라.

- The End -

 

참 고 문 헌

1. 외국문헌

Erich Fromm. 2000.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Slavoj Žižek.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3인역. 난장이.

Max Weber. 2008. ≪종교 사회학 선집≫. 전성우 역. 나남.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199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 외 3인역. 새물결.

Wilhelm Reich. 2006.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역. 그린비

 

 

<부록1. 주간한국 기사 >유부녀들의 금지된 사랑의 은밀한 유혹

‘유부녀 쉽게 유혹하는 방법’ ‘유부남에게 통하는 애교 베스트 10’….

인터넷을 하다 보면 이런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부남. 유부녀들의 ‘애인 만들기’ ‘애인 되기’ 퇴폐적 열풍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음을 적나라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녀와 탈선하는 불륜행각은 동서고금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외도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이들은 이른바 세컨드 라이프를 위해 ‘유부클럽’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고민을 함께 나누는 등 상담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A 카페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미혼녀’들을 위해 개설된 곳이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꾸 보다 보니 정이 들었죠. 그 사람도 저랑 같이 있으면 좋고, 와이프보다 더 편하대요. 빨리 끝내야 하는 걸 알지만 쉽지 않아요. 주변에서 눈치챌까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끝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얼마 전 이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유부녀이면서도 이 카페에 흥미 삼아 가입한 회원들은 “어떻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를 치냐” “가정 파괴범이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등 비난하는 글을 대거 올렸다. 반면 미혼 여성 회원들은 “오죽하면 결혼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한 눈을 팔겠느냐” “남편 바람나게 한 와이프가 문제다” 등 양측이 팽팽하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

사태가 너무 소란스러워지자 결국 카페 주인은 이후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등급제를 적용해 일정 등급 이상만 게시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바꿔버렸다.

이 카페 또 다른 회원 박모(25세)씨는 여대생이다. 얼마 전 30대 중반의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박 씨는 앞서 동갑인 남자와 2살 연상인 미혼 남자를 각각 사귄 적이 있었는데 만날 때 마다 데이트 비용 걱정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남친이 영화를 보여주면 나는 밥이나 커피를 사야 했고, 항상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 애인은 유부남이기는 하지만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해준다.” 나이 차이가 크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고 있어서 자신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준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A카페 개설자 김모씨는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카페와 이웃을 맺은 카페도 3곳이나 된다”며 유사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후죽순 생겨난 유부클럽이 유명 사이트마다 수백 개씩이나 되고, 회원 수도 각각 수십~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의 유부클럽은 유부남. 유부녀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중시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불륜이 유행하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본래 클럽의 취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마음 놓고 외도할 수 있는 장소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대한민국 유부남, 유부녀를 위한 커뮤니티로 육아. 건강 정보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곳은 시간이 지나 회원들간의 편안한 만남을 주선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유부 탈선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현재 회원수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지난 9월에는 ‘정모(정기적인 모임)’를 가졌고, 일주일에 2~3번은 ‘번개(갑작스러운 모임)’를 한다. 참여율도 높고, 참석한 사람들은 하루 정도 짧은 만남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만남을 이어간다.

“오늘 영화 번개 좋았어요. 특히 ‘sdy20’님 게시판에서 얘기만 주고 받다가 직접 만나니까 더 반가웠어요. 답답한 일상에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조만간 또 만나요.” 이 커뮤니티의 한 회원이 남긴 번개 후기다.

또 다른 회원 김모씨는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하면서 만난 이모씨와 함께 얼마 전 여행을 갔다 왔다. 김씨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워크숍을 간다고 둘러댔고, 상대방 역시 남편에게는 동창생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꾸며 둘만의 밀월여행을 다녀온 셈이다.

김씨는 자신 뿐만 아니라 회사 동기들도 ‘애인 만들기’를 꿈꾼다며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외도를 알고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커뮤니티 가입 방법을 묻는 친구도 있다.

현택수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이 같은 세태를 두고 연애지상주의와 쾌락주의, 개인주의가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쾌락추구 성향이 강한 대중문화가 개인을 자극하기 시작하면서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줄고 있다”며 “쾌락권 추구가 곧 개인적 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사랑이라면 사회 도덕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남의 사람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결혼생활에 대한 후회와 절대시됐던 일부일처제에 대한 도전이 늘면서 불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 교수는 “불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인 부부가 갖고 있다”며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말고 부부 사이의 진짜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할 것을 권고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됐다고 해서 둘 사이가 언제나 굳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며, 항상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긴장된 애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현 교수는 말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심리학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들어 불륜을 설명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장애가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불륜 커플이 늘고, 그들의 사랑이 더 열정적으로 달아오르게 되는 이유이다.

 

 

C: OO의 연애는 비연애가 맞았다. 동시에 OO의 비연애는 연애인 것이 맞다. 자본주의 내의 정형화된 관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OO의 연애는 비연애일 것이고, 꼬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에서의 OO의 비연애는 우리가 모두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연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 모두 OO를 본받아 비연애를 실천해야 할까? 개인적인 실천만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비연애는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뒷밤침해 줄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공동체는 공존할 수 있을까? 진지한 공동체든, 노는 공동체든, 사실상 많은 공동체들이 연애문제로 깨지고 만다. 공동체와 사랑이 지금까지 공존하지 못했던 것은 둘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로 영원히 독점하고자 했던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따라서 공동체적 실천(마르크스)과 개인적 실천(프로이트)은 만나야 한다. 사회적 대타자, 심리적 대타자를 모두 깨부셔야 한다. 라깡의 말마따나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대타자’따위는 없으니까. 경계를 넘어서 모두와 사랑의 네트워크로 접속하라. 소유가 없을 때, 질투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섹스는 신과 같은 신비적 지위를 잃어버린채 대소변과 같은 생리작용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다. 결국 사랑만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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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된다

 

 

드디어 저도 글쓰기가 되는 군요 히힛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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