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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2/06/12

화목한 세미나 - 페미니즘의 도전 발제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구도 : 근절 / 허용

성매매 근절론자들 : 데모에 나온 성판매 여성들을 업주의 꼭두각시로 간주

허용론자들 : 자신들이 성판매 여성들의 노동권. 생존권.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

 

여성관련법 제정에서 모든 여성의 이해를 동일하게 가정할 수 있는가? 여성운동가와 여성학자와 여성부의 관계는? 여성 내부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여성은 전체 여성을 위해 말하는 여성에 의해 침묵당할 수 밖에 없는가? 전체 여성을 위해, 성매매 근절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을 거두는 것이 더 효과적인가? 성판매 여성만이 성매매에 대해성들에게 말할 수 있는가? 성판매 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반성매매운동운 불가능한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여성의 몸 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와 지배의 권리 체제로 정의한다. 이들은 성매매를 남성의 돈과 여성의 몸이라는 평등한 자유로운 교환이 아니라 성착취라고 보며 사랑, 성폭력, 성매매를 연속선으로 파악한다.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와 성폭력, 성매매의 억압성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성 구매자와 판매자는 압도적으로 성별화되어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매매는 성 보수주의나 윤리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이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 것을 정상화,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 시스템의 핵심이다. 성매매는 성폭력고 다르지 않다.

 

대만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조세핀 호 : 성매매 근절은 중산층 여성의 이해일 뿐. 성매매가 인권침해가 아니라 성판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권침해. 성 판매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성 전문가라고 주장.

 

성 노동자 인권옹호 페미니스트 :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성판매여성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고, 비참한 피해자로만 본다고 비판. 가부장제 시각과 다르지 않다. 성판매 여성들의 주체성을 완전히 말살한다고 비판.

 

성 노동자 페미니즘 : 성매매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낙인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기존 페니니즘이 자칫 성 보수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를 강화할 위험성을 지적.

 

보부아르 : 그리스 사회는 창녀는 세가지 계급. 고객에게 몸을 팔기전에 철저히 조사당하는 가장 낮은 계층의 여성, 예술연주자인 여성, 부와 지식으로 공적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높은 계층의 성판매 여성. 여성이 성을 파는 행위가 공적영역에 진출하고 교육의 기회에 접근하는 기회였음(아내,어머니인 여성은 교육받지 못했다.)

 

제국주의 국가 남성들의 매춘관광

마리아 미즈는 유럽백인 남성의 섹스관광 : 자본주의 노동의 소외의 결과. 레저활동

 

역사와 문화를 초월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성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거나 동

일한 방식으로 억압적인 것이 아니다. 성매매는 근절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매매를 젠더 모순으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사회에 대한 맥락화 없이는 판단 불가능하다.

 

남성들이 서로 다르듯 여성들도 모두 다르다.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에게 가족은 젠더 공장으로, 여성억압의 장소이자 젠더를 인식하는 출발이다. 그러나 장애 여성이나 레즈비언에게 가족은 종종 쟁취해야할 정치적 투쟁의 목표가 되고, 흑인 여성에게는 인종 차별에 저항할 근거지가 된다.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기존 여성주의를 해체, 재구성할 것이다.

 

군사주의와 남성성

 

폭력은 행위자와 대상자 사이에 그 어떤 공감, 소통, 연민, 관계성이 없다고 믿을 때 가능해지므로 폭력은 극단적인 형태의 이분법적인 인식론을 전제한다.

 

젠더는 군사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제다. 군사주의는 남성성, 여성성, 성별 이분법 같은 개념과 문화에 의존하는, 그 자체로 성별화된 사회현상이며 동시에 성별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제도이다.

 

체제를 초월하여 어느 사회에서나, 국가에 헌신한 남성에게 젊고 예쁜 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의 희생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다.

 

<군 가산점>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남성성의 이중성: 군 면제된 특권층 남성들의 계급적 지위에 대해 열등감 즉 면제받는 능력에 대한 부러움. 반면 여성 방위병등에 대해 여성적이라고 비난

 

군사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싸워야할 적, 지키는 주체, 보호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남성이 군대에 복무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남성다움을 검증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해야하고, 그들의 경험은 여성에 대한 지배와 보호, 여성들의 고마움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한국 평화운동의 군사주의와 남성성

 

2003년 6월 윤금이 씨 주검 게재, 사진을 전교조 교사가 수업용으로 이용. 반미의식 고양용도로 이용. 미군이 한반도 (윤금이 씨)를 강간했다.  윤금이 몸에 뿌려진 화이타이는 미군의 정액이다. 여성의 몸을 대상화 수단화하는 남성중심주의

섹스는 군대의 사기에 결정적. 섹스가 남성의 긴장을 풀어줌. 군대 내부 남성들 간의 계급갈등과 이로 인한 불만과 폭동의 가능성을 환화, 약화.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도 여성에 대해서는 지배자가 됨

 

지배세력에 의해 군대나 전쟁에 끌려간 일반 남성들은 용병 희생자일 뿐이며 진짜 문제는 체제나 구조에 있다고 보는 거시적 시각은 계급 환원의 단순한 논리이며, 많은 남성들이 피해자이자 행위자가 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명령한자는 명령한 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한 자는 실행한 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군대나 전쟁터에서 살아있는 인간을 해부하라는 식의 명령을 피하는 병사도 있고, 명령이상으로 과잉 수행하는 병사도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단호하게 명령를 거부하는 남자다운 사람이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손이 떨려서 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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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quo;오해하셨습니다.&rdquo; 라는 말.

여러분들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빈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듯 싶습니다. 하지만, 오해도 일종의 이해인 한에야, 그러한 인식이 형성되기 위한 인식의 재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오해가 단지 제가 빈고를 이해하는 능력이나 노력이 떨어져서 그러한 점도 있겠지만, 그러한 오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네가 오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대방에게로 돌리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 분들께서 저더러 ‘네가 오해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러한 논란의 원인이 ‘저의 오해’이며, 저만 제대로 이해하면 이러한 논란이 불필요하다는 뜻처럼 읽혀져 불쾌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빈고나 빈마을에 대해 말하는 추상적 단어들에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단어들에는 냉소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러한 단어들이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가치를 내세워 활동들을 합니다. 종종 같은 가치를 내세워 활동을 하지만 그들이 현실화하는 활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관찰할 때 본질은 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활동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빈집이나 빈고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는 것은, 빈집 홈페이지나 위키에 적혀 있는 이미 오래되어 버린 글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다른 공동체에 빈고나 빈마을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 자료화 된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다니고 있는 수유너머R 에서는 매주 화요일 발표회를 합니다. 그 ‘화토회’에 지음을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표회 이후 수유너머R 에서는 빈고에 출자를 했습니다.

 

죠스, “3월 12일 월 저녁 7시 빈마을의 대안금융 ‘빈고’ 설명회합니다!”, 수유너머R, 2012.03.09.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495000

 

지음, “수유+빈고 수다회 자료”, 수유너머R, 2012.03.13.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504705

 

빈고 수다회인데 빈마을 이야기가 잔뜩 있습니다. 빈고의 돈 움직이기 부분이 빈고에 관한 적극적인 부분인 듯한데, 그 부분도 주거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잔뜩 채워집니다.

 

무엇보다 빈고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말들을 봅시다.

 

11. 지금 빈고는

  • 빈집을 위한 빈고. 빈집이란 무엇인가? 빈집을 넘어서기.
  • 공동체 공간 대출의 확장
  • 전세에서 월세로
  • 빈집에서 해방촌으로
  • 공동체 주거공간과 모임공간 보증금을 공유하는 주거협동조합으로
  • 공동체들의 연대와 상호부조를 위한 공동체은행으로
  • 신뢰할 수 있고 안정적인 조직으로 체계화하기.
  • 교육 프로그램 만들기.
  • 홍보 방안 만들기.
  • 출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인센티브 제공하기.
  • 정관 규약 등 정비하기.
  • 조합원 활동을 활성화하기.
  • 일꾼 키우기.
  • 빈고에서 확장된 형태로 개편 / 개명

 

지음이 만든 자료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빈고의 성격이 어떻게든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 공간 대출의 확장을 기획하고 있으며, ‘빈집’에서 해방촌으로 중점이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기존의 빈고가 ‘빈집’에 중점이 있었으며 이제 그것을 해방촌으로 넓게 확장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더해서 빈고에서 확장된 형태로 개편 / 개명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빈고’는 켄짱이나 잔잔이 말하는 것처럼 확장된 ‘빈고’개념인가요? 그런 개념이라면 새로이 확장할 필요가 무엇에 있는가요? 정말로 여러분들이 말하는 빈고의 애초 취지와 정신처럼 빈고는 고정불변의 무엇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인가요? 그것의 추상적 단어들과는 별도로 실재로 작동하는 것들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닥쳐진 사건에 우리가 새로이 반응한 것이지, 애초부터 상상력이 현재 그리는 그것만큼 뻗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빈고 취지문의 첫 주어가 왜 집인지 의아합니다. 빈고와 빈집의 관계가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라면, 채권자가 자신의 활동을 홍보함에 있어서 채무자의 활동을 가져다 들어 쓰는 것은 일종의 착취일 뿐입니다. 지음이 발표한 수다회 자료를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습니다. 구체적 내용들은 전부 빈집에 관한 이야기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빈집이 빈고가 없으면 만들어 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건 일면 맞기도 하고 일면 틀리기도 합니다. 빈집이 지불하는 이자가 사실상 빈고의 주 수입원이고, 빈집이 빈고에게 대출받지 않았다면 빈고의 성격은 단순한 저리의 금융기관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됩니다. 빈고는 빈고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반자본적 성격 또한 사라져 버립니다. 고리대금업자나 저리대금업자나 돈이 돈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로도 맞지 않습니다. 빈고는 빈집에 의해 배태되었고, 빈고와 빈집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또 만약에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였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출자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받아내는 그것 이상으로 받아낼 이유 없습니다.

 

사람들은 빈집이 유지되기 위한 물적 토대를 빈고에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의 집 보증금으로 쓸 바에야, 자신의 거주지를 빈집으로 옮겨오고, 빈고에 출자를 합니다. 애초부터 빈집과 빈고가 분리되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빈고에 출자하면 빈집이 유지 확장되리라 믿었습니다. 신규 조합원이 유입되는 경로 또한, 빈고 자체의 활동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빈집을 거쳐 조합원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빈고의 성장은 빈고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주된 기여는 빈집에서 한 것입니다. 빈고를 외부에 소개할 때 빈집의 고민이야기를 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도 오해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해에 기반한 믿음 또한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원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과정에서 빈집과 얽어 홍보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를 적극 조장한 이상 빈고에서는 그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빈집적립금’이라는 것에 ‘빈집의 유지와 확장’을 목적으로 선물된 돈들이 들어가 있는 이상, 빈고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성질의 자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빈집적립금’의 내용들이 대부분은 ‘빈집의 유지와 확장’의 이름으로 조성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조합원들의 이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오해하신 분들의 오해에 기반한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일부라도 빈집회계로 넘어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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