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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줄

열린집사회의에 일때문에 참석은 못하고 또 글줄이나 쓰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 글을 통한 소통

게시판에 글을 쓰니 사람들은 만나자고 하네요. 제가 생각키로는 만나서 이야기 해보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도, 뭔가 말은 헛돌고 답답하기도 하여 글로 썼습니다. 글이 인격적이냐 말이 인격적이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하였음에도 흘려듣는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것이며, 글로 했음에도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비인격적일 것입니다. 글은 그래도 기록으로 남아, 마음 다스리고 다시 읽을 여유가 있습니다. 감정을 덜어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글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게시판 글소통에 대한 어떤 반감들이 있는 것 같아 변명해 봅니다.

## 신뢰의 문제?

어떤 문제의 지적이 신뢰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의사소통을 방해합니다. 빈고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를 했는데, 그것이 '너 나 못믿냐?'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제기를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지음이 한 '빈집회계'에 대한 질문이 '응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질문의 성격은 제가 던지는 질문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음은 왜 자신을 못믿냐 묻겠지만,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번에 빈집회계를 맡게 된 들깨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음이 날치기 빼돌리기 등등의 의혹이 있냐 하는데, 그 말은 저에게도 적용될 말입니다. 제가 빈고적립금 빈집적립금으로 바꿔서 제 사적으로 유용을 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지금 제기되는 문제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신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필요한 감정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음이 저의 선의를 신뢰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 빈고와 빈집 : 수많은 공동체 중의 빈집이냐,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이냐

저는 빈고가 빈집을 바라 볼 때 어떤 곳으로 바라보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대출이 만들어져 다양한 공동체와 빈고가 관계하였을 때, 그 다양한 공동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빈집에 대한 대출이 검토되는 것과 빈집과 관계한 공동체들에 대한 대출이 되는 것은 그 중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전자의 경우 빈고와 공동체가 관계한 것이지 빈집과 관계한 것은 아니며, 후자의 경우 빈고와 관계맺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빈집과 관계맺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저는 만행공간 대출을 통해 빈집사람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빈집과 빈고의 위상문제'라고 일컬어 지는 의문들을 갖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제 빈고가 '공동체 대출'을 신설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와 소통을 시도하는 이상, 빈집 외부의 공동체와 빈집이 차별적으로 대우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여태껏 견고하게 이루어졌던 빈고의 선물이 타 공동체의 위기상황에 선물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빈고가 더욱 확장되는 것이며,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예상되는 만큼 다양한 공동체 중의 하나인 빈집은 그것 자체의 위기대처 기금을 조성할 필요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 무엇이 빈집이냐?

저는 기본적으로 빈집은 1)손님을 받을 수 있으며, 2)열려 있으며, 3)접근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행공간이 손님을 받는다고는 하나, 우리의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 경우 만행공간에서 숙박이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그 열림의 정도가 빈집들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친구를 데려다 재우는 기능은 특별히 빈집이라 이름 붙일것도 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급되는 이음집, 만행공간, cafe 해방촌은 빈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파른집이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도 빈집이라고 불리어졌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 빈집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이 되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공간이 부족해서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 한에야, 독방 쓰고 손님을 받지 않는 닫힌 공간이 어떻게 빈집개념에 들어맞는건가요?

 

지음은 빈고가 처음부터 빈집이 아닌 곳에 대출했다고 하는데, 이는 대출의 '목적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말인 듯 합니다. 해방채나 계단집의 경우 빈집을 구성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아마 언급된 대부분의 집들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빈집43 또한 빈집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으며, 그 대출에 분명한 목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 구성에 대하여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빈집 구성원들에게 의사를 묻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 빈집의 확장과 관계의 확장

저는 '빈집의 확장'이라고 말해지는 개념이 하나의 뜻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은 두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1)빈집들이 늘어나는 것과 2)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빈집이라 말할 수 있는 집들이 늘어나는 것을 '빈집의 확장'이라 규정 하고, 빈집과 관계맺는 이웃들이 늘어나는 것을 '관계의 확장'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cafe 해방촌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빈집으로부터 cafe 해방촌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cafe 해방촌이 풍성하게 이룬 것을 cafe 해방촌의 이름으로 가져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과도 cafe 해방촌의 몫이고 책임 또한 cafe 해방촌의 몫입니다. 그 풍성함이 빈집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빈집과 cafe 해방촌이 관계맺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미묘한 차이들이 너무 뭉뜽그려 대화되고 있으며, 저는 이러한 불분명한 개념규정이 오해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이 빈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에 살고 있는 쌩쌩과 잔잔이 빈집들과 관계를 가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음집과의 관계의 고민에서 이음집을 빈집이라 칭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음집이 빈집이냐의 문제와 그것과 관계맺는 문제는 분명히 구분되는 문제입니다. 쿠우가 잔잔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여 잔잔이 쿠우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 수동적으로 만드는 시혜에 대하여

지음은 수동적으로 만드는 선물의 구조에 관한 문제제기에 되돌려 더 많이 선물함으로써 주체성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교환일 뿐 주체성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물받은 사람이 보다 더 많은 선물을 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봅니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편은 선물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키로 빈고운영위원은 운영위원회의만 있을 뿐,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민주적 회의체가 비교적 약하다고 평가합니다. 또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문제도 빈집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 보입니다. 빈집이 빈고의 무수한 공동체 중의 하나일 뿐이라면, 빈고 운영위원이 빈집 구성원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번 빈집회계에서 구성하고자 하는 상호부조는 빈집 구성원들에 속한 집사가 있고, 집사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매번의 집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빈집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점 때문에 빈고의 선물식 상호부조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빈집회계의 상호부조가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사람이 줄어 부담되는 분담금들도 빈집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며, 집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용이나 책임의 문제 또한 빈집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회의체가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다 주체적일 수 있습니다.

 

 

@@ 다른 세세한 주제들은 만나서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견해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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