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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죽는다>, 죽지마

 

죽어버린 세상아

dead world

그림자로 가득 찼네

full of shades

나 오늘 죽는다

Today I die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일 수도 있고 해석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을 경험하고 싶으신 분들은 글을 읽기 전에 게임을 해보세요.]

 

 

  한 여성이 자기 몸에 돌을 메고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녀에게 세상은 어둡고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이 세상이 죽어버렸다며 그림자를 피해 죽음을 택한다. 이제는 모든 것에 무심한 듯이 지긋이 눈을 감고 가라앉는 그녀...

 

  이 게임은 <스토리텔러>(Storyteller)와 <내가 달이었으면 좋겠어>(I wish I were the Moon)의 제작자인 다니엘 벤메르귀(Daniel Benmergui, 이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아는 분 있으면 덧글 부탁합니다)의 작품이다.

 

  우울한 도입부와 첫 화면에 계속 떠 있는 글귀(죽어버린 세상아, 그림자로 가득 찼네, 나는 오늘 죽는다)는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기 충분하다. 설상가상으로 가라앉는 그녀의 뒤로는 죽은 해파리들이 떠오른다. 죽음을 결심한 그녀가 중력에 몸을 맡기고 물 속으로 가라앉듯이, 죽은 해파리들은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오르는 것이다. 죽은 존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바다의 움직임과 중력에 의해 그 존재의 행방을 떠맡길 뿐이다.

  이 죽음이 만연한 곳에 삶을 부여하는 것은 자발적인 움직임이다. 즉, 그것은 당신이라는 삶의 존재이다. 플레이어는 가라앉는 여성과 죽어 떠오르는 해파리를 드래그해 움직일 수 있다. 이 게임을 풀어갈 힌트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즉, 삶)에서 등장한다.

 

  해파리를 드래그하면 플레이어에게서 생명력을 얻은 해파리는 희미하지만 빛을 발한다. 그러나 곧 그 빛을 집어삼키려는 검은 물고기가 해파리를 향해 달려든다. 당신이 피해주어야 한다.

 

  해파리가 완연하게 생명의 빛을 되찾으면, Shine(빛난다)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Shine이라는 단어를 화면에 뜬 Die와 바꾸면, '오늘 나는 빛난다'가 되어 가라앉던 그녀에게서 빛이 난다. 플레이어의 단순한 클릭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찾아갈 실마리가 나타난다. 이후의 플레이는 유사한 방식으로 흘러가 플레이어의 움직임(드래그)와 새로 나타나는 단어의 조합에 달렸다.

 

  조금은 말장난 같기도 한 이 퍼즐은, 긍정을 위한 자기암시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죽는다'(Today I die)는 말에서 '죽는다'(die)는 말만 '빛난다'(shine)로 바꾸면 '오늘 나는 빛난다'(Today I shine)는 것이다(즉, 우리말에서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죽어버린 세계(dead world)라고, 고통스럽고(painful) 어두운(dark) 세계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 말을 바꾸면 죽고 싶은 마음도 바꿀 수 있고, 더 나아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둡고 고통스러워 이 세상이 모두 죽어버린 것만 같지만, 작은 삶의 실마리나 한 마디 말에서 시작되는 긍정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는 중력이나 물살에 가라앉거나 이끌려 가지 않고, 직접 그것을 헤쳐 나아갈 힘이 있다.

 

 

자유로운 세상아

free world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네

full of beauty

나 오늘 헤엄쳐 간다

Today I swim

 

 

p.s. 이 게임의 엔딩은 두 가지(내가 아는 한)이다. 어떤 엔딩이냐는 플레이어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 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물론 정말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흔히 보지 못 하는 엔딩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나 오늘 죽는다

Today I Die

 

디자인 및 제작/다니엘 벤메르귀

 

2009년 5월 6일 공개

 

 

웹 상에서 플레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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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야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지난 주 PD수첩에서 보도한 공권력의 폭력을 보면서 생각 나는 게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이슨 로러(Jason Rohrer, 인디 게임 디자이너. <여정>(Passage)을 비롯해 작지만 무거운 의미를 담은 인디게임들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게임은 모두 그의 홈페이지에서 자유롭게 다운로드해 플레이할 수 있다.)의 습작게임 <경찰의 야만>(Police Brutality)이다.

 

  게임의 방법과 목표는 간단하다.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을 막아서는 것이다.

 

<경찰의 야만>의 게임화면  게임이 시작되면 강당 앞에서 한 캐릭터가 소리를 지르고 경찰에 제압당한다. 강당의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린 붉은 캐릭터가 된다. 플레이어는 도움을 줄 마음이 있는 한 명의 녹색 캐릭터로 시작하고, 도움을 주자고 주변에 소리지를 수 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망설이는 노란 캐릭터로 변하고,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면 도움을 줄 결심을 한 녹색 캐릭터로 변한다.

 

  녹색으로 변한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그 캐릭터들을 이용하여 제압당한 보라색 캐릭터를 강당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경찰을 막아서야 한다. 캐릭터를 클릭하고 이동할 위치를 클릭하면 캐릭터들을 이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녹색 캐릭터도 경찰이 곁으로 다가오면 다시 겁에 질린 붉은 캐릭터로 변해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게 된다. 경찰이 멀어지면 녹색 캐릭터가 그 붉은 캐릭터에게 소리를 질러 도움을 주도록 촉구해야 한다. 하지만 소리 지르는 것이 경찰에게 들리면 경찰은 소리를 지른 사람도 찾아서 제압하고 만다. 제압된 캐릭터는 보라색 캐릭터로 변해 다시는 움직이지 못 하고 경찰에게 끌려간다.

 

  나는 플레이할 때마다 실패했다. 몇 번을 플레이해도 경찰이 그들을 끌고 나갔다. 플레이어가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들이 수적으로 훨씬 많음에도 경찰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길 수 있는 전략이 과연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이슨 로러가 이 게임을 디자인하게 된 계기는 2007년 플로리다주립대학 강당에서 일어난 진압사건의 동영상이라고 한다. 당시 강당에서는 존 케리 상원의원이 강연 중이었고, 대학의 한 학생이 질문시간에 존 케리 의원을 강하게 비난했다. 강당을 지키던 경찰이 학생을 둘러쌌고, "내가 뭘 했길래 이러느냐"며 저항하던 학생을 체포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학생을 전기충격기로 제압하는 장면이다.

 

 

  로러가 동영상을 보고 의아했던 것은, 왜 다른 학생들이 체포 당하고 전기충격기로 제압 당하는 학생을 도와주거나 적어도 그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체포 당하는 학생의 "도와달라"는 소리에도 다른 학생들은 모두 쳐다보기만 했다. 로러는 자신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해봤던 그의 아내는 직접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반문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모두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PD수첩> 방송장면  만약 내가 현장에 있었다면 당당하게 나서서 항의할 수 있었을까? 이 게임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있다. 플레이어는 이미 도와줄 준비가 된 캐릭터로 시작한다. 이 게임은 '항의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항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답해주지 않는다. 로러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그건 '직접'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게임은 오히려 항의의 결과가 비참한 제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이 쉽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로러 역시, 게임을 디자인하면서 스스로 많은 전략을 구상해보았지만, 그 어떤 전략보다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동에 옮길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고 고백한다.

 

 

경찰의 야만

Police Brutality

 

디자인 및 제작/제이슨 로러

 

2008년 5월 10일 공개

 

 

자유롭게 다운로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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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스톤>, 진심과 성의 없는 대인관계 능력증진게임

<스타스톤>은 한국게임산업진흥원과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서 기획하고, 베토인터랙티브가 제작한 시리어스 게임(기능성 게임)이다.

게임의 배경이야기는 이렇다. 태어나면서 누구나 하나씩 갖게되는 별자리의 황도 12궁좌는 사람의 심성을 곱게 만들어주는데, 악의 신이 야욕을 위해 그 힘을 빼앗아가고, 별의 힘에 민감한 아이들에게 나쁜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12궁좌의 성인들은 각 별자리의 특성을 타고난 12명의 용사를 이용해 별자리를 다시 빛낼 '스타스톤'이라는 보석을 찾게 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6명의 캐릭터(어라, 6명?)중 자신의 플레이어 캐릭터와 함께 할 동료 캐릭터를 선택해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이 게임 <스타스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은 동료와 함께 모험하는 과정이다. '게임의 목표'인 보석을 모아 별자리를 다시 빛내는 엔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대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게임의 목적'이 중요하다는 숭고한 선언을 매뉴얼에서 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의 실체는 매뉴얼에서 선언한 숭고한 이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 문제는 그 선언에 대한 진심과 성의의 부족이다.

아이들의 대인관계 개선을 위해 나왔다는 게임에 진심과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작사인 베토인터랙티브의 상업용 작품인 <피싱온>과 비교해봐도, 회사가 이 게임에 얼마나 무성의했는지 알 수 있다.

불편한 인터페이스와 조작감, 게임 진행에 대한 안내의 부족, 공간활용 전혀 못 하는 맵 디자인은 그렇다고 치자. 매뉴얼에서 이 게임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대인관계 증진은 동료와의 회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 회화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플레이어에게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회화에 게임과의 개연성은 없다. 모험과 회화라는 게임플레이가 거의 따로 분리된 것처럼, 회화는 모험 도중에 갑작스럽다고 생각할만큼 아주 단순한 조건에 의해 등장한다. 회화의 결과 역시 모험에 주는 영향은 거의 없다. 모험과 전투에 대한 전략적인 회화도 있지만 그것이 정말로 모험과 전투의 전략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고, 이 게임의 시스템에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회화마저도 있다.

이 게임의 모험과 전투는 이상한 던전 시리즈 같은 형태를 띄고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움직이면 적도 움직이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목표는 보석을 모으는 것이기에 굳이 몬스터와 싸울 필요는 없다. 이런 면에서 <스타스톤>의 턴제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피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제압하기 위한 전략적인 플레이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몬스터를 직접공격으로 없애려 하면 폭력성 게이지가 올라가는데 그 게이지가 가득 차면 게임오버가 된다. (아마 배경설정상 스스로 악의 화신이 되어버린다는 거겠지만, 그런 것에 대한 캐릭터의 고민은 게임 상에 전혀 표현되지 않는다. 폭력성 게이지가 가득 차면 그저 게임 오버 화면을 띄워줄 뿐인데, 어떠겠나?) 때문에 가능한 몬스터와의 접촉은 피한 채 보석을 수집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적 고민에서 동료는 철저히 배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투와 모험에 있어 동료는 플레이어 뒤를 따라오며 간혹 말을 걸어올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전략적 회화를 내놓아도 그것은 말일 뿐, 실제 전략에 있어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말 뿐인 동료는 대인관계에 어떤 적극적인 기여도 하지 않는다. 회화도 일방적으로 말을 걸어올 뿐, 직접 말을 걸어 대답을 바랄 수는 없다. 회화부터 전투와 모험까지 모든 것을 플레이어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이 대인관계일까?

과연 형식뿐인, 이름뿐인, 허울뿐인 선언만으로 대단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말은 대단하다! 매뉴얼도, 보도자료도, 서울대 교수의 효과검증도, 교사들을 위한 지침서의 발간까지. 그런데 그런 대단한 게임에서 아이들의 대인관계 개선을 바라는 진심은 커녕 성의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나 뿐일까?



p.s. <스타스톤>의 제작을 기획한 한국게임산업진흥원은 제작사인 베토인터랙티브의 <피싱온>을 2006년 9월의 우수게임으로 선정했었다.


스타스톤
기획/한국게임산업진흥원
제작/베토인터랙티브

2006년 12월 출시.
2008년 3월 일반에 공개.

http://www.kogia.or.kr/culture/gc2_502.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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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하는 게이밍

고찰하는 게이밍. 이것은 탐구적인 게이밍, 질문하는 게이밍, 알고자 하는 게이밍으로 불러도 좋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에서 의도하는 플레이 방식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핵심은 게임을 통해 어떠한 것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로서 고찰하는 게이밍을 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인내심이 있다면, 아무 게임이나 실행하고 10분간의 화면 상의 픽셀 정보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것은 그 게임의 디자이너가 의도하는 게이밍의 방식이 아닐 뿐더러, 99%의 플레이어에게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때문에 애초에 게임의 플레이에 고찰하는 게이밍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거나, 고찰하는 게이밍을 의도한 게임이어야 한다.

 

픽셀 정보의 변화 말고도 우리 삶에는 고찰할 것이 많다. 왜 하늘은 파란 것인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정치인들은 왜 말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주제의 가치를 다루는 게 아니니,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따윈 쓸모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일단 거두어주길 바란다.

 

고찰하는 게이밍은 우리가 고찰할 것들에 대한 고찰을 도와주는 게이밍이다. 고찰하는 게이밍은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지만, 알고 싶은 것을 아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처럼 결론이 없는 (최소한 아직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주제도 고찰하는 게이밍에서 허용된다. 결과가 아니라 고찰의 과정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찰하는 게이밍의 한 예를 써보았다. 바로 '세계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는 게임이다.

 

"어떠한 일련의 법칙으로 생성되고 유지되며 소멸하는 세계가 있다. 플레이어는 그 속을 탐험하면서, 그 세계의 본질에 대해 하나씩 알아나간다. 마치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밝혀내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수립했으며, 철학자들이 존재를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 플레이어는 본질을 알아낼 때마다 그 본질을 이용해 세계에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 마치 핵폭탄을 만들고, 순간 이동 장치를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최종적으로 플레이어가 세계의 모든 본질을 꿰뚫으면, 그는 세계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

 이과대학 입학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예에서, 플레이어는 세계를 탐구한다. 그 탐구의 목적은 세계를 구하는 것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도 아닌 세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다. 그런데, 이 예에는 앞서 말한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달리 '세계의 모든 본질과 세계의 조작'이라는 결론이 있다. 이것은 플레이어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위한 게임 내의 장치로 이 게이밍의 핵심은 아니다. 마치 영화 <올드보이>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의 딸이란 것이 아니라, 그에 투영된 복수의 잔인함인 것처럼 말이다. 플레이어도 우리도 아직 실제 세계의 본질에 대한 결론이 없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론을 이끌어낸 추론의 과정, 즉 '고찰'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찰하는 게이밍은 고찰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이밍이다.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은 우리 일생에 있어 중요한 일이고, 즉시 결론을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다. (설사 그 결론이 틀리거나 잘 알려진 것과 다르다 해도) 바꿔 말하면, 고찰하는 게이밍은 실제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고찰의 훈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고찰하는 게이밍은 손가락의 빠른 움직임이나 반응 속도같은 신체적인 능력보다는, 깊고 넓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게이밍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특정한 장르를 개척하거나 게임의 본질을 꿰뚫을 수는 없다. 이것은 단지 장르나 소재에 관계없이 많게 혹은 적게 들어갈 수 있는 게이밍의 정신이다. 본능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 작은 비율로 들어갈 수도 있고, 바둑처럼 게임 자체를 점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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