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걷는 것은 내 몸의 감각기관들이 세계를 지각하는 행위이다. 말 그대로 나는 온몸으로 세계를 수용한다. 나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나의 발은 견고한 시멘트 바닥을 딛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과 몸을 휘감는다. 나는 나의 발이 거친 시멘트 바닥을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발소리와 낙엽들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고개를 들어 간간이 불이 켜진 건물들의 유리창과 그 사이로 어두운 하늘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먼 별들을 본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주황색 가로등에 길게 비치는 내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는 사실 가까운 거리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매번 차를 이용해서 이동한다. 추울 때는 추워서, 더울 때는 더우니까. 그러다 보니 매번 지나치는 거리의 곳곳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학교의 교정도 마찬가지다. 책을 끼고 총총히 걸어가는 학생들을 본다.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그들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나를 돌아본다. 나는 이제 젊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이가 들었다. 애써 늙어간다는 표현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저들 중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꿈에 잠겨 늙어가네, 시냇물에 잠겨 비바람에 시달려온 대리석 트리톤처럼". 예이츠의 시를 중얼거리며 나는 걷는다.

찬바람이 불면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피해야 한다. 몸이 움츠러들고 움직임이 둔해진다.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괜히 걸었다고 후회한다. 지나온 거리와 가야 할 거리를 재며 다시 돌아가서 차를 탈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도 걷는 것은 좋다. 어둠 속에 웅클고 있는 고양이와 잔뜩 깔린 낙엽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세워둔 자동차 바퀴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비죽 내민 고양이를 본다. 무릎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 손을 내밀어 고양이를 불러 본다. 조금 더 다가가자 고양이는 이내 사라져 버린다. 동정심이 인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인도를 덮고 있는 낙엽은 내일 아침이면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낙엽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낙엽은 땅에 묻혀 썩지 못할 것이다. 찬바람에 구르다 지친 낙엽들은 내일 아침 시멘트 바닥을 덮고 있는 먼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아니 걷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나에게 들어온다. 나는 단지 세상을 그대로 지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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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1:04 2012/01/0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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