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미지의 패턴’

노승영 | 번역가 /경향신문 2015-02-06 

 

요즘 둘째 따라 바이올린을 배우는데, 학원에 가자마자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건네면 튜너로 줄 하나를 조율한 뒤에 이 줄 소리를 들으면서 나머지 줄을 하나씩 맞추는 것이 늘 신기했다. 선생님 말로는 음이 맞으면 소리가 울린다는데 나는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도 그냥 두 개의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음을 울리면 진동수가 정수배인 소리(배음)가 동시에 울린다는 사실은 배워서 알고 있다. 바이올린 현의 한가운데를 누르고 활을 켜면 원래 음보다 한 옥타브 높은음이 나고 3분의 1 지점을 누르면 그보다 5도 높은음이 난다. 이렇게 진동수가 맞아떨어지는 음들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이것이 화성의 기본이다.

 

이에 반해 진동수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불협화음은 귀에 거슬린다. C와 F#의 3온음은 ‘음악의 악마’라 불렸으며, 교회 음악에서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학에서는 유리수의 합리적인 세계에 불가사의한 무리수가 끼어들었다. 음악과 수학 둘 다 질서와 무질서의 개념이 존재한다.

이렇듯 음악은 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에드워드 로스스타인의 <수학과 음악>(경문사, 2002)에서는 이것이 하찮은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학과 음악은 둘 다 세상을 추상화하는데, 수학이 공리를 가지고 증명을 도출한다면 음악은 음정을 가지고 곡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음악의 주요 기능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서양 고전음악은 감정과 별개의 내적 형식이 있다. 개별 곡의 전개는 이러한 양식을 따름으로써 정당화된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다음 음을 예측하지 못하지만, 그 음을 듣고 나면 필연적으로 이 음이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알지 못하는 패턴이 음의 배열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

패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페이즐리 무늬처럼 자신을 그대로 복제하는 패턴이 있는가 하면 망델브로 도형처럼 부분 안에 전체가 들어 있는 패턴이 있다. 첫 번째 패턴은 어디를 보아도 똑같아서 누구나 한 번 보면 파악할 수 있지만, 두 번째 패턴은 시야를 넓혀야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숨겨진 패턴을 찾아내는 사람은 권력을 손에 넣는다. 패턴은 인과관계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제가 이러한 숨겨진 패턴을 무기로 사람들을 지배했다. 우리는 무질서한 자연이 이 같은 단순한 규칙으로 환원되는 것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고전 음악의 조화와 균형, 즉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패턴을 배신하는 곡, 이를테면 쇼팽의 전주곡 A단조에서 우리가 ‘숭고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대상이 우리의 합리적 이성에 적응된 것처럼 느끼게 만들지만, 숭고함은 우리의 판단을 뒤엎으며,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상력에 대한 난폭함’인 것 같다.”(207~208쪽) 무한의 개념 앞에서도 우리는 수학적 숭고함을 느낀다. 직관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을 수학자가 증명해 냈을 때 우리는 거대한 자연 앞에 선 듯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다.

 

곡의 첫 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는 음정, 즉 음과 음의 관계에서 생긴다. 곡이 진행되면서 음이 쌓일수록 의미가 풍부해진다. 마치 조물주가 자신의 신비를 조금씩 보여주듯, 음악은 그렇게 전개된다. 미지의 패턴이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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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8 16:08 2015/02/0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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