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TV에서 일요일 오전 8시에 <은하철도 999>를 방영했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25분짜리 두 편을 연속으로 방영했는데, 전 집에 TV가 없어 몇 편 못보고 스무 살 나이가 되어서 어떤 일로 처음부터 다시 쭉 본 적이 있습니다.


신체의 기계화(기계인간)가 일반화되어 부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기계별로 가서 신체를 기계로 바꿉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계별로 가는 표를 사기 위해 은하철도역 주변에 슬럼가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철이(일본명 데츠로) 역시 기계몸을 얻기 위해 은하철도역에 형성된 슬럼가로 가던 도중 기계백작의 인간사냥에 어머니를 잃고 도망가다 메텔에 의해 구조됩니다.

 

메텔은 철이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는데, 자신과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기계별로 가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철이는 공짜로 메텔과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어머니 몫까지 살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기계별로 향합니다. 이게 첫 회의 이야깁니다. 그런데 끝가지 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철이는 메텔에게 납치되어(꼬임에 빠져) 기계별로 가게 되는데, 메텔 자매(메텔은 쌍둥이 자매가 있습니다)는 이런 식으로 유소년 납치극을 벌여왔다는 게 마지막 회에 드러납니다.

 

철이와 메텔은 기계별로 가는 여정에서 많은 기착지를 거치게 됩니다. 이들이 들르는 기착지에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출현합니다. 그들이 이 둘을 맞이합니다. 철이는 이들과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과정의 주요한 대립은 기계인간과 인간의 대립인데, 기계인간은 무한한 생명을 얻었지만 오히려 붉은 피가 나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기계인간은 쓸쓸하게 죽습니다. 기계 또한 인간처럼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영원성을 누리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이렇게 기착지를 거쳐 갈 때마다 철이는 정신적으로 성숙해갑니다. 작가인 마쓰모토 레이지의 말대로 우리들이 이미 겪었으며 누구나 겪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우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은하철도 999>를 이대로 보면 애틋한 사연을 가진 여러 기계인간과 인간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어떤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 때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노동하면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이와 메텔이 거쳐 가는 행성에는 인간과 기계인간이 등장하지만 아직 기계몸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이고 슬럼가에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이들은 대부분 지구인이지만 행성을 개척할 당시 이주했지만 다시는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이 고향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지구로 가는 표를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계인간들은 기계몸임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잔치를 벌이며 이들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을 종처럼 부리고 괴롭힙니다. 타락한 자본가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는 거지요.(2016년 8월 29일 오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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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18:09 2016/09/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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