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 999>에는 네 부류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크게는 인간과 기계인간의 대립이지만, 여기에는 철이처럼 기계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과 따듯한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기계인간이지만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기계인간, 인간성을 상실한 무자비한 기계인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계몸을 갖길 원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한 기계인간에게 지배당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기계인간이 되고 싶어 합니다. 기계인간은 최상층 지배계급이니 기계몸을 갖는 건 어쩌면 신분상승인 셈입니다. 기계인간이지만 인간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부류는 대부분 여성기계인간이고 이들은 인간을 동정하고 인간을 돕다 파괴되기도 합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남길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든 노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인 지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요.

 

전 개인적으로 <은하철도 999>는 성장하는 아이들의 정서에 해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용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정서는 상당히 멜랑콜리하고 거의 죽음의 정서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회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네 부류 중에 꼭 누군가가 죽습니다. 이런 암울하고 부정적인 정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무기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메텔과 함께 기계별에 온 철이는 메텔이 기계별의 지배자인 기계여왕의 딸이라는 것과 자신이 기계별을 유지하기 위한 부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계별은 진짜 모든 것이 기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텔과 쌍둥이 자매는 여왕의 명령으로 철이와 같은 용감한 아이들을 유인 납치하여 기계별로 데리고 오는데, 이 아이들은 기계별을 유지하기 위한 훌륭한 부품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오늘과 같은 삶을 되풀이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고 그래서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을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상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새로움은 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로 위안하려고 하지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런 상투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무기력인데, 이런 무기력을 깨는 유일한 길은 변화와 운동을 긍정하는 거지요. 운동은 매 순간 새로움의 출현이고 세계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은하철도 999>는 매회마다 은하계를 지배하고 있는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그냥 체념하고 살아가라는 거지요. 물론 철이는 기계별을 탈출합니다만 철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은하철도 777을 타는 것밖에 없습니다. 철이가 기계별을 탈출하면서 막 역에 들어온 은하철도 777을 타려는데 메텔과 닮은 메텔의 쌍둥이 자매가 철이와 같은 소년을 데리고 내립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란은 듯 말입니다. (2016년 8월 29일 오후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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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18:11 2016/09/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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