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철모르는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웠다. 조금 나이가 더 들어서는 자랑스럽게 조국의 위대함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고,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별 고민없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부끄럽지만 이런 믿음을 깨뜨린 것은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눈을 뜬 것은 학교에서 군림하고 있던 "김일성주의자들"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 이 어처구니 없는 주사파들로 인해 민족주의에 대한 맹신이 깨졌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물론, 민족주의는 질병에 불과하다는 명석판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건 이성적 사유의 결과로소이다. 껄껄.

좀 지난 얘기지만, 많은 맑스주의자들이(사실 저들이 스스로 그렇게 자부했다. 그때는) 강단을 기웃거리다 사라져가고, 또한 많은 좌파들이 현장에서 스러져가고, 마찬가지로 많은 주사파들이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그가 되어 떠나갔다.


‘핏줄의 민족’ 버리고 ‘주체적 우리’ 고민할 때

김상봉 한겨레신문 2007. 12. 22

민족주의가 ‘집단적 자기’에 대한 집착이라면,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절박한 실천적 과제다. 아집이 어리석은 것은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집이란 자기동일성에 대한 집착인데,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순수한 자기동일성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동일성이란 플라스틱처럼 죽은 사물의 특징인 것이다. 하물며 개인도 아닌 집단인 민족을 두고 고정된 동일성을 몽상하는 것은 계몽된 시대에 어울리는 자기인식이라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민족의 구분기준은 너무도 야만적이다. 현행 중학교 도덕 교과서는 민족을 “씨족이나 종족, 부족 등의 단어와 마찬가지로 공통의 조상을 가진 한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정의한 뒤에 너무 자연스럽게도 민족을 “하나의 큰 가족”이라고 이르고 있다.(도덕 II, 156) 민족을 가족과 같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맞지 않은 것은 물론이지만, 민족이 핏줄로 규정되는 나라에서 민족 구성원들에게는 맹목적 충성이 강요되는 반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다른 사람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세계화된 시대에 정말 심각한 질병이다.

한편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갈지언정 군대 가서 총을 들 수 없다는 젊은이들은 핏줄이 같다 해서 군대에 끌려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살면서 이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싶어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다. 새로 결혼하는 일곱, 여덟 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나라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핏줄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린다면, 머지않아 우리 사회는 이 사회의 주류에게 까닭 없이 배제되고 차별받은 소수자들의 좌절과 증오가 집단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근절되지 않는 까닭은 민족주의 없이는 개인을 국가의 부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훈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실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에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조국은 언제나 민족을 팔아 충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홀로주체로서 군림하는 조국과 민족 아래에서 개인은 주체성을 빼앗기고 전체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런즉 민족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타자와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타파해야 할 이데올로기이다. 더러는 계급이 민족과 만나야 강해진다거나,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그나마 민족주의가 자기를 지키는 방파제가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질병을 다른 질병을 통해 고치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사회의 도를 넘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제는 노골적인 인종주의로까지 타락한 상태이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히 국가주의에 저항하고 민족주의를 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뿐 그것의 존재 근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민족은 실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주체성은 자기인식에 존립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스스로 욕구할 줄 모르면서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꿈과 동경 속에서 이상적 자기를 욕구하는데, 안정된 자기인식은 기억 속의 자기와 동경 속의 자기가 조화를 이룰 때 형성된다.

이 기억과 동경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자기인식은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계기 사이에서 생성된다. 필연성은 고정성으로서 이를 통해 나의 존재는 안정성을 얻는다. 반면 자유는 유동성이지만, 이것이 없다면 나는 노예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자유로운 필연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긴장 속에서만 자기를 주체로서 인식하고 실현하게 된다. 고정되어 주어진 나의 존재로부터 자유롭게 나를 형성할 때 비로소 나는 자기를 온전한 주체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주체성은 결코 고립된 홀로주체성일 수 없다. 나의 기억과 동경은 언제나 너의 기억 및 동경과 맞물려 있다. 그런즉 나는 오직 너와 더불어 우리가 될 때, 참된 주체가 된다. 이것이 서로주체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의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성과 자유가 같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가족은 필연적 공동체일 뿐 자유의 현실태는 아니다. 반면 정당이나 기업 같은 사회적 결사체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공동체이지만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는 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가족 속에서는 자유의 결여 때문에, 그리고 계급 속에서는 필연성의 결여 때문에 참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필연성과 고정성을 가지면서도 자유의 현실태인 공동체가 바로 나라다. 나라는 내가 그 속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에서 이미 주어진 나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내가 적극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 나라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강렬하게 확인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족이란 그런 나라를 이루는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한에서 민족이란 인종처럼 생물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범주로서, 그 속에서 나는 참된 의미의 주체 곧 시민적 주체로서 나를 인식하고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계급적 연대나 다른 탈민족적인 만남 속에서 해체하자는 제안은 세계시민적 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제안이지만, 민족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제안은 온전한 나라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방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국가기구와 법률을 결국은 악한들의 손에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민족과 국가가 폭력적인 홀로주체로 군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능동적으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라를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 우리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를 같이 만들어야 할 서로주체인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수백년 동안 이 땅에 살아왔지만 분단되어 반세기 이상을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과 새로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과 이 땅에 살다가 다른 나라로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불러모을 수 있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민족의 문제는 오직 이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개방적으로 해석하는 박노자의 상상력과 고체화된 민족과 국가를 비판하는 권혁범의 이성과 온전한 나라를 형성하려는 김동춘의 열정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런즉 지금은 민족주의에 대한 서양 이론의 한 끄트머리씩을 붙잡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서로 묻고 같이 대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57 2011/11/30 15:57

이 글은 지난대선 정국에 김수행 교수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인데, 지금 읽어도 여전히 답답하다. 김수행 교수가 우려했던 일들이 죄다 현실이 되었는데 작금의 상황이 그렇게 나아지지도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경향시론] 대선후보 경제철학을 비판한다 (경향신문 2007. 11. 17)

〈김수행 / 서울대 교수·경제학〉

대통령 선거가 33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너무나 큰 일들이 터지고 또 곧 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 공약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덩달아 유권자들도 후보들의 선거 공약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누구를 지지한다”고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신경질나서인지 유권자들이 후보들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다.

-평등사회로 이끌 책임 막중-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만큼 중요한 인물은 없다. 미국의 부시가 극우보수주의자(네오콘)들을 요직에 앉혀 미국 사회와 세계를 지금처럼 ‘엉망’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통령도 한국 사회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세계의 경찰로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너무나 크게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하는가’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추가적으로 안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어떤 철학을 가져야 ‘정의롭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일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보려고 한다. 경제는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회가 ‘정의롭지’ 않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친다면 경제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빈곤화와 양극화가 지나치다면 갈등과 투쟁으로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가 ‘평화롭지’ 않고 전쟁위험에 사로잡혀 있다면 투자와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와 영국의 대처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국제적 표준(스탠더드)에 따르면 그들은 ‘깡패’이고 ‘조폭’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는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았고, 대처는 같은 당(보수당)의 국회의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당수 자리와 총리 자리를 빼앗겼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민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삶을 넉넉하게 하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서민의 입과 눈과 귀를 막고 묵묵히 노예처럼 자본가들과 기업가들, 권력자들을 위해 희생하라고 총칼로 위협함으로써 재벌 중심의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한국 사회를 확립한 것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경제가 지속적이고 순조롭게 발전할 수가 없었고, 드디어 노동자·농민·빈민·학생·종교인·지식인의 항거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 경제를 1930년대의 불황으로부터 회복시켰다는 점에 근거해 히틀러 정권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파시스트로 불려 ‘정신이상자’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몇몇 후보들은 아직도 재벌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간에 의한 독점은 국가에 의한 독점보다 훨씬 더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영국 대처의 민영화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정부는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기 때문에 국가독점체가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거나 서비스 질을 낮추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민간독점체가 가격을 올리고 서비스 질을 낮추더라도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항할 방법이 없다. 이리하여 전화·수도·가스·철도 등의 민영화 이후 영국 정부는 민간독점체의 소비자 수탈을 막기 위해 공공의 규제기구를 추가로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민간철도회사는 단기적인 수익성과 주식가격을 올리는 것에 열중함으로써 철도선로나 신호망의 보수와 대체에 투자하지 않아 큰 열차사고가 났고, 이리하여 민간철도회사는 파산하고 다시 철도는 국영화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벌은 총수가 ‘황제경영’을 하고 있지만, 재벌 전체 기업의 주식 중 총수 일가의 지분은 삼성의 경우 1%도 되지 않는다. 재벌은 사실상 총수 일가의 것이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하고 중요한 기업체들을 ‘능력’도 없는 총수가 황제경영을 하는 것은 한국 경제를 엄청난 위험에 빠뜨리고 있으며, 또한 삼성의 비자금 의혹 사건에서 보듯이 총수 자리를 자식에게 무리하게 승계하느라고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를 수가 있다. 재벌체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겠다는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 문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서민들이 가장 뼈아프게 느끼는 것은 빈곤·실업·양극화·자살 충동 등이다. 이 문제들을 “수출 증진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임으로써 해소하겠다”고 공약하는 후보들은 전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수출을 증진하려면, 임금 수준을 인하하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꾸며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 농산물 시장 등 모든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서민의 생활을 희생해야만 수출이 증가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내수시장이 점점 더 좁아져서 더욱더 수출 증진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수출의 증가와 서민의 불행이 악순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다.

서민의 불행을 조금이나마 들어주기 위해서는 정부가 부자와 대기업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모든 서민에게 ‘기본소득’을 줌으로써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도대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그렇게도 정의감과 동정심이 없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갓난아기를 포함해 한 사람의 평균소득이 2만달러(약 2000만원)라고 떠들어대는데, 가족이 네 명인 가정 중 연간 소득이 세금 빼고 8000만원 되는 집이 얼마나 될까?

소득불평등이 심각하다는 이야기인데 부자가 세금을 내어 서민의 고통을 어루만져 준다면 매우 아름다운 사회가 탄생할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마음이 너그럽고 성질이 인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고의 산업재해를 견디지 못해 노동운동을 한다고 모두를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넣은 박정희나, 광부노조의 ‘버릇’을 고친다고 362일 동안 파업하게 내버려 두어 광산업과 광부들의 가정을 파괴한 영국의 대처 같은 ‘깡패’는 이제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눔·평화 실천하는 후보라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다. 빨리 평화적으로 교류하고 통일하는 것이 분단의 상처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전쟁 위험을 없애는 수단이다. 세계의 최대 강국인 미국이 북한과 화해하려는 이 기회를 틈타서 우리는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고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어렵게 벌어들인 달러를 왜 터무니없이 비싼 살상무기의 구매에 사용해야 하는가, 한창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청년을 왜 군대에 보내야 하는가 등을 깊이 생각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차기 대통령은 북한과 더불어 세계를 향해 ‘영구적인 평화국가’를 선언하고, 전쟁 준비에 지출하는 모든 비용을 남한과 북한의 서민을 위해 사용하자고 합의하면 어떨까?

“나는 서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선거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하기 때문이며 서민이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벌과 부자를 더 잘 살게 하겠다는 후보들이 ‘여론조사’에서는 더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서민들이여!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과 설움을 받았는가를 상기하면서 이번 선거에서는 진짜 서민을 위한 대통령을 뽑아야 되지 않겠는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봅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52 2011/11/30 15:52

"요즘 젊은 분들은 누구지지합니까?" 속으로, 저요? 택시기사의 외모를 보니 그렇게 큰 차이를 못느끼겠는데, 아마 내 얼굴이 동안이기 때문이리라. "아저씨는 누구 지지하십니까?" "저야 이회창 지지하죠. 지금 한나라당 후보가 어디 대통령감인가요. 돈으로 치면 재벌 아닙니까?" 음, 골치아프게 됐군. "아저씨는 전세 사세요, 아니면 ....?"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는데, 영 떫은 표정이다. 잘됐다. 그냥 갈 수 있겠구나. 내릴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미터기를 보고 돈을 지불했는데, 택시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잔돈을 건네 주었다. 인사도 없었다. 문을 닫으니 휑하니 사라졌다.

택시를 타면 그냥 조용하게 있고 싶은데, 꼭 말을 걸어야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분들이 간혹 있다.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이겠나, 그래 10여분 말동무 정도야 뭐. 하고 응수하다가 낭패당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정치 이야기면 입닫고 대꾸를 삼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자신은 가난하면서도 보수 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지지하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요즘은 자신을 우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아마 무식한 인간들이라 어떤 기준으로 좌파나 우파를 나누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신을 우파라고 지껄이는 인간들과 네이버에 무식한 댓글 다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차이가 너무 궁금하다.

[경향포럼]당신들만의 ‘법치’(경향신문, 2007. 11. 12)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길거리를 덮은 광경이 아니더라도 두꺼워진 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다. 이때쯤이면 따뜻한 온기가 소중해지기 마련인데, ‘법치와 공권력이 무너져 불법집회와 파업이 만연하다’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체감기온이 더 뚝 떨어진다.

2007년 11월 9일 현재 파업 발생건수는 전년대비 20.6% 줄어들었고 근로손실일수는 무려 59.8% 감소하였다. 파업발생 건수가 덜 줄어든 것은 대기업 정규직의 파업은 대폭 감소하였지만,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올 한해만 해도 이랜드를 비롯하여 코스콤, 울산건설플랜트,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울산과학대·안동대·창원대·청주대·광주시청 등의 청소용역 등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의 쟁의가 지속되었고, KTX, 기륭전자, 르네상스호텔 등은 최소한 1년 이상 미해결 상태이다. 개인적인 분신·자살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적 취약계층의 저항이나 연대집회가 ‘법치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낳는 요인 중 하나이겠지만 진짜 법치실종은 다른 곳에 있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 보장된 조항이며 그런 점에서 한국은 법치주의 국가이다. 문제는 국민의 특정 집단이 ‘자유와 권리’에서는 배제되고 ‘책임과 의무의 완수’만 요구받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에게는 ‘차별없이 일할 권리’가 거의 없다. 분명히 취업하였는데 이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은 40% 수준이고 시간외수당, 퇴직연금 등 각종 기업복지로부터도 차별받는다. “생리휴가 내겠다고 했다가는 다음번에 재계약이 안되”고 “산전산후 휴가 받는 사람 못보았는데요”가 현실이다. 또한 비정규직에게는 ‘차별없이 요구할 자유’가 없다. 노조를 만들었다가는 해고되기 일쑤고 법원 문턱은 유달리 높다. 게다가 ‘차별없이 투표할 권리’도 없는데 대통령선거일이 법정유급휴일이 아닌지라 선거일에 투표하자면 하루 일당을 포기해야 하는 노동자가 최대 800만명이다.

각종 정부통계에서도 비정규직은 잘 잡히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한 인구조사가 시작된 것이 2000년 8월부터이지만 그나마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은 현 통계조사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정규 근로가 애시당초 정규근로가 ‘아닌’ 집단범주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일 리가 없다. 결국 누구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함께 하는 것’이라면 비정규직에게 존재의 이유는 ‘인정받는 것’이다. 자유와 권리를 가진 자로서 그리하여 책임과 의무를 완수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서.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헤겔을 원용하면서 사회의 윤리적인 발전이 기존 사회에서는 범죄로 낙인된 ‘인정투쟁’, 명예회복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즉 비정규직의 저항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가진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노동 및 개인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거부가 반복되는 것에 대한 굴욕감과 분노의 표현이며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사회가 한 단계 높은 도덕적인 수준으로, 선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이다. 따라서 법치주의 국가는 개인에게 책임과 의무의 완수를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명시하고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전자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집단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종의 폭력이 된다.

1970년 11월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분신하였을 때 ‘법치’는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7년 뒤인 2007년 11월의 ‘법치’도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한다. 인정투쟁이 아무리 사회의 도덕적 발전의 계기라 하더라도 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사람들의 아픔은 찬바람보다 더 살을 에인다. 당신들만의 법치가 아닌 모두의 법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법치를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42 2011/11/30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