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은 시니컬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명료하다. 그래서 나는 경향신문에서 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은 빠지지 않고 읽는다. 지난3월 나토의 리비아 공습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리비아 공습은 옳았다"(경향신문, 2011년 3월 30일)를 제외하면 나는 대체로 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에 동감하는 편이다. 이대근 논설위원의 이 글이 머리에 떠오른 건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의 통합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대근 칼럼]유시민, 떠나든가 돌아오든가(경향신문, 2011-05-05)

 

유시민은 열렬한 파병 반대파였다. 그래서 2003년 3월 “반전평화의 길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을 만들자”며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을 호소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했고 열린우리당은 갑론을박했다. 어느 날 비공식 의총. 유시민은 정부와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한 만큼 당론으로 찬성해야 한다며 김근태 원내대표를 압박, 파병 당론을 채택하게 했다. 그 때문에 파병반대 개인 성명까지 냈던 김근태였지만 2004년 2월 국회 표결에서 찬성해야 했다. 그러나 유시민은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 그가 4개월 뒤 “사람 하나(김선일씨) 죽었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파병지지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6개월 뒤 추가 파병안 표결에서는 반대했다. 그 1년 뒤 파병 연장안 때는 찬성했다. 

 

그는 열린우리당·민주당 합당론에 대해 “싫다는 상대에게 계속 결혼하자고 우기는 것은 지극히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싫다는 대연정에 대해서는 “열 번도 찍어 보지 않는 것은 나무꾼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전에 “한나라당, 조선일보가 반대하는 것이면 다 가치 있다”고 말한 그였다. 2002년 대선 때 권영길 후보 지지자에게 노무현 후보를 찍어달라고 호소했으나 노 후보가 당선되자 “민주노동당 표는 그리 영향력이 없었다”고 했다. 2004년 총선 때는 “민노당 후보 찍으면 사표 된다”고 주장, 민노당이 반발하자 “다른 당으로 가는 표를 모으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년에 “민노당이 민주당보다 성숙한 정당 같다”더니 최근에는 “동지는 (민주당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많다”고 했다. 

 

줄타기 정치로 자주 입장 바꿔 

 

유시민에게는 신념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강한 확신을 갖고 자기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남다른 능력 덕이다. 그것은 그가 무엇을 하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말과 행동의 연속선을 따라가 보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정치하면서 시종여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반드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너무 중요한 시기에 너무 중요한 문제를 너무 자주 바꾸었다. 노무현 정부 때만이 아니다. 그는 대선 직후 민주당 인기가 바닥일 때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떨어지자 “낙선하더라도 몇 십년 만에 맺은 대구지역과의 인연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약속과 달리 몰래 주민등록을 옮겨갔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 사망으로 추모 분위기가 뜨자 국민참여당을 창당, 서울시를 노렸으나 여의치 않자 경기도로 바꿨다. 

 

유시민의 과거만이 아니다. 미래의 행적도 복잡해 보인다. 그의 대선전략은 만만한 군소정당을 묶어 비민주 단일후보가 된 뒤 민주당과 단일화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줄타기를 마다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그 방법 아니면 대통령 후보가 될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줄타기는 민주당과의 끊임없는 분란을 의미한다. 민주당과의 통합론이 나오지 않게 틈나는 대로 민주당을 자극하고, 진보가 아니면서 진보 통합에 참여하고 이들을 끌고 민주당과 건곤일척의 벼랑 끝 단일화 협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대립하면서 민주당 표를 모아 대통령 되겠다는 이 역설과 모순의 전략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고 짜증나게 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건 정권교체를 바라는 시민을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현기증 나는 고위험의 묘기 대행진을 해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선·총선·지방선거·재보선의 크고 작은 모든 선거에서, 대구·경기·김해을의 모든 지역에서 졌다. 특히 단일화라는 유리한 조건에서, 다른 야당 후보는 잘도 이기는 선거에서 전패했다. 외곽 때리기의 정치적 효용성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분란의 정치 버리고 ‘통합’ 나서야

 

그래도 계속 밖으로 돌겠다면 그는 점차 잊혀져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느니 깨끗이 정계 은퇴하는 게 낫다. 그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다. 만일 은퇴를 원치 않는다면 새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분열과 갈등으로 한 줌의 지지자를 결속시켜 생존해가는 것은 한국정치를 위해서 좋지 않다. 물론 한국정치가 살기 위해 유시민이 죽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국정치와 유시민 모두 사는 길이 있을 것이다. 민주당으로 돌아가라. 기교·임기응변·감각 이런 것 믿지 말고, 혼 하나만을 붙잡고 정면 승부해 보기 바란다. 그들의 마음을 훔쳐보라. 결단을 기다리겠다. 정계를 떠나든 민주당으로 돌아가든 다 괜찮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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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5 00:33 2011/12/0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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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4 19:17 2011/12/04 19:17

[김종철의 수하한화] 더러운 채무, 더러운 조약(경향신문, 2011. 12. 2)

 

 

에콰도르는 전통적으로 전형적인 남미국가의 하나였다. 전형적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식민지였다가 독립 후에는 군인들 혹은 귀족들에 의한 독재정치 및 그들과 결탁한 외국계 자본가가 지배하는 수탈구조 속에서 다수 민중이 노예처럼 굴종적인 삶을 강요당해온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에콰도르가 민주적 선거에 의해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은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자유선거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에콰도르의 가난한 민중의 생활이 나아질 수는 없었다. 장기간에 걸친 억압과 수탈의 구조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 엘리트들은 기득권층과 외국 자본가-투자가들의 이익을 에콰도르 민중의 이익보다 늘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그 결과, 실제로 풍부한 자연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30% 이상이 절대빈곤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매년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을 외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회계구조 때문에 국민경제가 회생될 수 있는 전망은 거의 없었다. 

 

그런 나라에 희망이 생겨난 것은 2006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젊고 유능한 경제학자 라파엘 코레아는 에콰도르 경제를 짓누르는 외채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고,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대통령직에 취임한 뒤에 그는 자신의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서 ‘공공채무심사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1976년부터 2006년까지 30년간 에콰도르가 빚진 대외채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성격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객관적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국내의 관련 전문가들 이외에 몇몇 외국인 학자들도 위원회에 참여했다. 2008년 11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채무심사위원회’는 에콰도르가 빚진 외채 중 많은 부분이 ‘정당성’을 결여한 채무임을 확인했다.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것은 그것들이 “이전 정부들의 부적절한 통치에 의해서 발생한 부채”일 뿐만 아니라, “과도한 이자율, 커미션, 뇌물이 연루되어” 있는 부채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보고서의 결론에 근거하여 코레아 대통령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부채 상환을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당연하게도 국내외의 채권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국제 채권시장에서 에콰도르 국채는 하루아침에 거의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코레아 대통령은 이듬해 4월, 액면가의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에콰도르 채권을 은밀히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 결과, 에콰도르는 오랫동안 국민경제를 짓누르던 무거운 채무압력으로부터 거의 벗어났고, 그때까지 외채상환에 허비하던 예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정당성 없는 채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파리대학 교수를 역임한 러시아 경제학자 알렉산더 사크가 1927년에 정립한 개념이다. 사크는 <정부의 공공부채 승계문제>라는 저서를 통해서 혁명, 전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군사통치의 종식에 이은 민간정부의 성립 등등, 국가체제나 정부형태가 변할 때 그러한 국가변혁에 의해 그 이전의 국가 혹은 정부가 갖고 있던 대외채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실제문제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더러운 채무(odious debt)’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더러운 채무’란 요컨대 독재정권이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과 측근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빌려 쓴 돈을 말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채권자는 그 돈의 용도를 알고 있거나 혹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권력일지라도 국민의 이익보다 사익을 추구하고, 기본적 인권을 유린하며, 국제법의 근본원칙을 어기는 범죄적 정권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러한 정권이 진 빚도 ‘더러운 채무’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이 방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사실, ‘더러운 채무’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부채 탕감을 요구하거나 부채 상환을 거부해온 실제 사례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체제와 싸워 흑인해방을 쟁취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포함한 제3세계 국가 지도자들이 옛 상전이었던 서구 ‘선진국’들에게 채무 말소를 요구했을 때, 그들이 지적한 것은 바로 식민주의 혹은 신식민주의적 지배관계에서 비롯된 부채의 ‘더러운’ 성격이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더러운 채무’는 그대로 ‘더러운 조약’의 논리로 연결될 수 있다. ‘더러운 채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면, 그 실질적인 내용이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외국과의 조약이나 협정은 ‘더러운 조약’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적 차원에서 그 파기를 요구하는 것은 극히 정당한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나는 한·미 FTA가 발효된다면 조만간 그 ‘더러운 조약’의 실체가 확연히 판명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따져보더라도, 이 통상협정에 한·미 양국 다수 민중의 이익을 위한 진실한 배려가 털끝만큼이라도 들어가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1%를 위하여 99%를 희생시켜온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의 심화·확대판에 불과한 협정일 뿐이다. 게다가 인류사회는 지금 자원·에너지·환경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복합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 시점에서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미국식 생활양식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이 분명하다. 

 

원래 무역은 호혜적 교환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이란 세계를 황폐화하고, 공공성을 파괴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치명적인 메커니즘이다. 만약 한·미 FTA가 발효되어 지속된다면 그것은 다수 민중의 삶에 견디기 어려운 질곡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한·미 FTA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더러운 조약’의 파기를 선언할 수 있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데 우리가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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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2 16:30 2011/12/02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