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시는 위안이 된다.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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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0:39 2012/01/08 20:39

한겨레신문을 잘 읽지 않는다.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어떤 정서적 거리감이 느껴진다. 한겨레신문에 대한 나의 인상은 구태의연하다는 느낌. 오랜만에 한겨레신문을 뒤적여 보았다. 아침햇발, 반체제와 반정부, 장석구 논설위원실장. 그 아래 기고, 공선옥 소설가, 누가 우리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공선옥 소설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에 실린 공선옥의 글을 선뜻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독한 편견인가.

정석구씨의 "반체제와 반정부"를 읽다 신문을 내려놓았다. 정석구씨는 반체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체제란 말 그대로 기존의 정치, 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국가 체제에 반대하거나 그 체제를 뒤엎기 위한 활동 등을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반체제 활동이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국가 체제에 반대"한다는 그의 말에서 어떤 징후를 느꼈다. 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체념하고 있구나. 힘들어 하는구나. 단어 하나하나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구나. 이건 자기검열이다. 아니다. 이건 부르주아들의 무의식적인 정신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만약, 이 사람의 표현대로 특정한 국가 체제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국가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가? 프랑스의 인민들은 어떻게 그들이 합의한 국가 체제를 전복했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의 어둠을 걷어버리기 위해 죽창을 들고 일어섰던 동학 농민들은 왜 그들이 합의한 국가 체제를 전복하려고 했는가? 아마 정석구 씨는 인민들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국가 체제에 합의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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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0:37 2012/01/08 20:37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볼 때는 꼭 이런 때다. 학생들에게는 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반성하지 못하는 경우. 반성은 말 그대로 자신을 외적인 객체로서 대상화시켜보는 것인데, 신체와 의식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이게 어디 쉬운가.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주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많아진다. 어, 나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아, 나도 이럴 때가 있구나, 하는 건데, 이건 사태가 부정적이지 않을 경우에나 그렇다. 아주 골치 아픈 건 이런 경우다. 지난 주 금요일 그동안 사용하던 usb메모리 카드를 또 잃어버렸는데,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거다. 아주 잠깐 사이, 30분이 채 안 되는 그 순간이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9월에는 겨우 1년 정도 사용한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난생 처음으로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신형 폰이었는데 그만 내 주머니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처럼 전화를 걸고 주머니에 넣고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주머니에 폰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마술사였던가? 아니, 폰을 주머니에 넣긴 넣었나? 옆 사람의 폰을 빌려 아무리 눌러도 어디에서도 윙윙 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 15분, 그 짧은 순간 누가 나의 기억을 훔쳐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폰뿐만 아니라 그 15분 동안 무얼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안을 다 뒤지고 가방을 까뒤집고, 주머니를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폰을 발견할 수 없다.

내 머릿속에 "X-files" 시리즈에서 멀더가 숲이 우거진 지방 도로를 달리다 갑자기 차를 세우고 스컬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우린 방금 15분을 도둑맞았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멀더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번 쓱 보더니 트렁크에서 흰색 락카(lacquer)를 꺼내 도로에 X 표시를 한다. 그런데, 나는 어느 지점에 X 표를 그어 놓아야 하나? 내 곁에도 스컬리가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봐요, 스컬리. 전 방금 15분을 도둑맞았어요. 그리고 지난달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군요." 그러면 스컬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는 눈을 위로 올려 뜨고 하늘을 쳐다보는 시늉을 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꼭 생각할 거리가 생겨야 겨우 생각이라는 걸 해 보는 거다. "생각 좀 하고 살자"고 하면서도 생각 없이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다. "음, 그렇지 직감이 얼마나 중요한데." 아, 하지만 내 곁에는 스컬리가 없고 나는 멀더가 아니다. 앞으로도 나는 멀더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는 못하리라.

어디 이런 경우가 한두번인가?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내기 위해 웹브라우저를 열어놓고는 엉뚱한 곳을 검색하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 웹을 열었다는 걸 깨닫고는 그게 뭐였을까 생각해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신체 세포는 마흔이 되면 더 이상 재생되지 않지만, 뇌 세포는 계속 사용하면 죽지 않고 재생된다고 한다. 나는, "사실 나만큼 뇌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렇게 항변했다. 그러자 모씨 왈, "니는 뇌를 혹사시키고 있는 거야." 뭐 공부를 열심히 해서 혹사시키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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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0:33 2012/01/08 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