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박선생님과 막걸리를 마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어느새 늙음과 젊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학교 앞이라 술집에는 젊은 학생들로 가득하고 젊음을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 시기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두 사람은 마치 꽃밭 속의 바퀴벌레처럼 앉아 있구나! 이내 박선생님은 노트를 한 장 찢어 뭔가를 끼적거리시더니 내 쪽으로 내밀며 읽어 주신다. 두보의 시란다.

 

二月已破三月來 이월이파삼월래

漸老逢春能幾回 점노봉춘능기회

莫思身外無窮事 막사신외무궁사

且盡生前有限杯 차진생전유한배

 

이월이 이미 지나고 삼월이 되니

점차 늙어가니 몇 번이나 봄을 맞을 수 있을까

내 몸 외에는 부질없는 세상사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살아서 실컷 마셔보세

 

나는 박선생님에게 완전히 외우지는 못했지만 기억을 떠올려 이명한의 글을 들려주었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해는 가더라도 반드시 새해가 돌아오고, 밝은 낮은 어두워져 밤이 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을 지새는 까닭은 무엇인가? 소반에 산초(山椒)를 담고 약주와 안주를 웃어른께 올리고 꽃을 바쳐 새해를 칭송하는 풍습과,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쫓아내는 풍습은 그믐밤을 새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침향나무를 산처럼 쌓아 놓고 불을 붙이는 화산(火山)의 풍습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섣달 그믐밤에 마귀를 쫓아내는 대나(大儺)의 의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함양(咸陽)의 객사에 주사위로 놀이하던 사람은 누구인가? 여관방 쓸쓸한 등불 아래 잠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랬는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시로 탄식한 사람은 왕안석(王安石)이었고, 도소주(屠蘇酒)를 나이 순에 따라 젊은이보다 나중에 마시게 된 서러움을 노래한 사람은 소식(蘇軾)이었다. (…) 사람이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원컨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것에 대한 그대들의 말을 듣고 싶다." [이명한, 백주집 권20, 문대(問對)]

 

이 글은 몇 년 전 서울 어느 대학의 대입 논술 지문으로 나온 글인데,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왜 이다지도 가슴이 아린가. 나이를 먹는 탓일까? 이 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問。逝而必返者年。明而必晦者夜也。而於歲除之夜。必爲之守夜。何歟。椒盤頌花。爆竹走鬼者。皆有關於守歲之意歟。火山設於何時。大儺昉於何代。咸陽客舍。博塞者誰歟。旅館寒燈。不眠者何歟。歎從古得新。王介甫之詩也。悲屠蘇後飮。蘇子瞻之詠也。皆可得聞其詳歟。人於童稚之時。爭喜歲時之來。及其遲暮之年。擧有悽感之心。何歟。願聞諸生歎逝之說。 對。明從何去。暗從何來。半覺年光催。老於此中者。此非韋刺史之語乎。噫。浮主若是其易老歟。日猶老人。矧伊年乎。悲駟隙之流光。怨牛山之落暉。久矣。今承執事之問。於余心有慽慽焉。竊謂一年之將盡爲除日。一日之將盡爲除夕。蓋四時相代。光景去來。而吾生有涯。老不更少。金丹誤矣。石火忙矣。百歲之後非吾日月。則屈指人間。此日可惜也。是以終宵不寐。非爲無眠。杯酒團欒。不是乘興。戀舊歲之餘輝。而坐而達朝。愴明日之加老。而醉欲忘憂。雖絃歌聒耳。博奕分曹。而神枯意索。強歡而已。銀河欲落。則看北斗之杓。蠟燭將燒。則試東窓之色。喜鷄聲之不早。畏瓊籤之報曙者。何莫非永今夕而守舊歲也。嗚呼。三萬六千。無非可惜之日。而獨於歲除之日。始有愴感之心者。豈不以一日之間。歲換新舊。而人之稱老。計年不計日也。然則其所以惜日者。乃所以惜年。而其所以惜年者。只所以惜老也。請就明問條列焉。椒盤頌花。報一春之消息。爆竹揚聲。傾百鬼之巢穴。或出於秦漢之餘風。或出於荊楚之遺俗。則迎新送舊。穰災祈福者。若此類何限。而非今日所必道也。沈香造山。火焰數丈。則隋家陋制。言則長也。黃門侲子。皁衣驅儺。則東京故事。何待言知。至若咸陽客舍。歲云徂矣。更長燭明。博塞爲娛者。吾知杜拾遺也。靑燈逆旅。故鄕千里。鏡裏流光。霜雪滿鬢者。豈非高達夫也。才名四海。萬事黃髮。則京華旅食。暮景多感。而靑雲未附。蓬累而行。則傷老傷時。自不能寐矣。從古得新。介甫之詩也。後飮屠蘇。子瞻之詠也。夫物以終始。人以古新。則所感者新也。屠蘇之飮。必先於少。則後飮者老也。大抵人生壑蛇。百歲跳丸。而去日苦多。來日無幾。則發爲文字者。儘爲不平之鳴耳。嗚呼。人無老少。同有是心。歲無今古。同有是日。而髫年弱歲。竹馬行樂。則驅儺爆竹。最是佳節。而反畏除日之不早來也。及其年齡遲暮。志氣低垂。則長繩難繫。白駒難縶。日暮道遠。稅駕無所。事不如意者。十常八九。身逢運去者有之。有才無命者有之。羈臣易怨。志士多感。淸秋落木。尙且撩慄。則守歲之感。當倍於人矣。然則人能傷歲。歲不傷人。而古今傷歲者。皆是不幸徒耳。噫。文章憎命。白鷗身世。則拾遺之感。豈專在老也。陽春寡和。竽瑟異好。則達夫之感。何待歲盡也。金陵曲學。擅國恣睢。誤天下蒼生。則愚未知何所感於其心。而眉山學士。妙年題柱。才足駕一世。志不滿千古。而南州賜環。北來白首。則蘇氏之感。槩可想矣。嗚呼。古之人守歲之感。愚旣揣陳之矣。愚之所感。顧有所異於是者。大禹惜寸陰。所感何也。周公夜以繼日。所感何也。德不修學未達。爲吾之所當感。則未死之前。無日不感。而歲除之感。特爲感中之感耳。愚將因是而自警於心曰。逝者如斯而不吾與也。沒世不稱。聖人疾焉。生無可觀。死無可傳。則何異於草木腐也。誠能提撕罔間。力踐精詣。焚膏繼晷。兀兀窮年。則沈潛反覆。自不知老之將至。而時來順去。庶無所憾於心矣。二三子不平之感。非所論也。執事以爲如何。謹對。白洲集卷之二十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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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0:56 2012/01/08 20:56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 다르다. 여유가 없으면 글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심지어 신문 가사라도 관심이 가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바쁠 때(여유가 없을 때)는 눈으로 대강 스윽 훑고 만다. 스윽스윽 훑다 그냥 지나쳐버린다. 나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모른다. 아니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이리 바쁠까? 물론 그 이유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새벽까지 마신 술, 오후 늦은 시각에 눈을 뜬다. 늦은 만큼 도로는 붐빈다. 서둘러 유인물을 챙겨들고 서면으로 향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난 집회에서 얼굴을 본 듯한 남자 둘이 현수막을 걸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고, 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매번 집회에서 만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다.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상위에 푸른 천을 펴고 유인물과 서명 용지를 펼쳐 놓는다.

나는 내가 들고 온 유인물을 제쳐두고 4대강 반대 유인물을 한 움큼 집어 들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우어 준다. 사람들은 유인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멍하게 서 있는 사람이나 바쁘게 오가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오고가는 사람들이나, 서 있는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얼핏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치 극장에서 스크린 위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렇게 그들과 나는 분리된다.

모두 바쁜 사람들이다. 너무 바빠서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없다. 세상 이야기는 나와 무관하다. 강을 파건, 보를 세우건 나와 무관한 일이다. 나에겐,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고 할 말이 없어도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러보면 모든 사람이 웃거나 찡그리거나 혹은 소리 지르며 전화기를 얼굴에 붙이고 말을 쏟아내고 있다. 가만 보면 듣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두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유가 더 없다.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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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0:53 2012/01/08 20:53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가? 아마 이제 막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학생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나는 실제로, 조카에게 “대학을 꼭 들어가야 되니?” 이렇게 물어보았다. 조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렇게 대꾸한다. “삼촌 바보가?” 그런데, 이 대답에는 사실 굉장히 함축적인 의미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삼촌이 바보냐는 역질문에 숨어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말들이 갯벌의 뻘구디기에서 스륵스륵 기어 나오는 게의 집게 발가락처럼 꼼지락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대학을 가고 말고는 자신의 의지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많은 경우 대학에 가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닌 듯하다. 그런데도 반드시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또 대학이 아닌가? 고등학생에게 대학은 인생의 목적이 아닌데도 한국에서 대학에, 그것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인생의 최종 종착지처럼 간절한 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간절해서 죽을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어린 학생들이 4월 봄비에 흩어지는 벚꽃처럼 스스로를 허공에 내던지는 것일까?

김예슬에게 대학은 어떤 곳이었을까?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3년이 인생을 좌우한다는데 아마도 김예슬은 대학에서 얼결에라도 인생의 꽃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모진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처럼 김예슬은 경쟁과 억압 속에서 대학이 젊음의 상징도 아니오, 학문의 전당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 스스로 족쇄를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연결고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 아니 너무나 자주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선택은 나의 의지라는 거짓 내면화의 결과다. 러시아어에서 자유와 의지가 동일한 단어라는 걸 생각하면 나의 자유조차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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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20:51 2012/01/08 20:51